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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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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은 1622년에 제작된 목조석가여래좌상과 다양한 복장유물을 포함하는 문화재이다. 이 불상은 높이 42cm의 소형으로, 결가부좌 자세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 경북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 현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복장유물로는 장렬왕후가 광해군 등의 극락왕생을 위해 조성한 불상과 관련된 조성발원문, 저고리, 다라니 등이 있으며, 특히 저고리에는 장렬왕후의 묵서가 있어 17세기 조선 왕실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왕실 발원 불사라는 역사적 가치와 조각사적 의의, 복식사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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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한자 이름安東 仙刹寺 木造釋迦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一括
국가대한민국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웃장터길 91-71
지정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497
지정일2016년 10월 6일

2. 지정 사유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은 광해군 대 왕실에서 발원한 불사(佛事)라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조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복장유물 중 인열왕후가 직접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저고리에 묵서가 있어,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불상 1구와 복장유물 83점을 일괄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1]

2. 1. 불상의 조형적 특징

안동 선찰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높이 42cm로,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17세기 전반 경북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조각승 현진의 작품이다.[1]

불상 안에서는 청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을 비롯하여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광해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인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총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들은 전국에서 활동하던 유명 조각승들이 대거 참여한 공동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찰사 불상은 이 가운데 하나로 현재까지 확인된 세 번째 불상이다.[1]

2. 2. 복장유물의 중요성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복장 안에서는 조성발원문,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중 조성발원문은 청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쓰여 있는데, 광해군의 정비 장열왕비(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 인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총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조성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1]

이 불상들은 전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조각승들이 대거 참여한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찰사 불상은 그중 하나로 확인된 세 번째 불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1]

복장유물 중 저고리에는 장열왕비가 직접 입었음을 보여주는 글이 있어,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불상 1구와 복장유물 83점은 일괄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3. 지정 내역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97호이다.[1]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지정 내역[1]
명칭재료구조·형식·형태규격수량기타 특징
목조석가여래좌상나무좌상높이 42.0cm, 슬폭 27cm1구1622년(광해군 14년, 천계 2년) 제작
저고리깁(비단의 종류)화장 143.0cm, 길이 59.5cm1점‘병자생왕비유씨명의(丙子生王妃柳氏命衣)’ 묵서
후령통 및 황초복자-미개봉1점
조성발원문청초홍서(靑綃紅書)33.5×70.0cm1매
박상궁원불묵서지편종이(먹)32.5×5.5cm1매
각천비구신결비구주서지편종이(주서)16.0×5.5cm1매
다라니종이(먹)24.2×20.5cm15매
다라니종이(먹)24.2×20.5cm3매
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2매
다라니종이(주서)22.6×18.6cm1매
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7매
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2매
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1매
다라니(방형)종이(먹)22.6×18.6cm6매
다라니종이(먹)22.6×18.6cm3매
다라니종이(먹)24.2×20.5cm1매
다라니종이(먹)22.6×18.6cm2매
다라니(원형)종이(주서)(외경)13.7cm5매
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4매
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4매
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2매
다라니(방형)종이(먹)24.2×20.5cm2매
다라니종이(주서)24.2×20.5cm2매
다라니종이(먹)24.2×20.5cm3매
다라니종이(주서)24.2×20.5cm1매
다라니(방형)종이(주서)22.6×18.6cm6매
원형다라니(후령통개부마감)종이(주서)(외경)13.7cm2매
다라니(후령통외곽마감)종이(먹)24.2×20.5cm4매


3. 1. 목조석가여래좌상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든 좌상 불상으로, 높이는 42.0cm, 무릎 폭은 27cm이다. 1622년( 광해군 14년, 천계 2년)에 제작되었다.[1]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세부 정보
재료형태규격제작 연대
나무좌상높이 42.0cm, 슬폭 27cm1622년 (광해군 14년, 천계 2년)


3. 2. 복장유물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불상 1구와 복장유물 8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장유물은 다음과 같다.

번호명칭재료규격수량기타 특징
1저고리화장 143.0cm, 길이 59.5cm1점‘병자생왕비유씨명의(丙子生王妃柳氏命衣)’ 묵서
2후령통 및 황초복자-미개봉1점
3조성발원문청초홍서(靑綃紅書)33.5×70.0cm1매
4박상궁원불묵서지편종이(먹)32.5×5.5cm1매
5각천비구신결비구주서지편종이(주서)16.0×5.5cm1매
6다라니종이(먹)24.2×20.5cm15매
7다라니종이(먹)24.2×20.5cm3매
8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2매
9다라니종이(주서)22.6×18.6cm1매
10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7매
11다라니(원형)종이(주서)22.6×18.6cm2매
12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1매
13다라니(방형)종이(먹)22.6×18.6cm6매
14다라니종이(먹)22.6×18.6cm3매
15다라니종이(먹)24.2×20.5cm1매
16다라니종이(먹)22.6×18.6cm2매
17다라니(원형)종이(주서)외경 13.7cm5매
18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4매
19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4매
20다라니(방형)종이(주서)24.2×20.5cm2매
21다라니(방형)종이(먹)24.2×20.5cm2매
22다라니종이(주서)24.2×20.5cm2매
23다라니종이(먹)24.2×20.5cm3매
24다라니종이(주서)24.2×20.5cm1매
25다라니(방형)종이(주서)22.6×18.6cm6매
26원형다라니(후령통개부마감)종이(주서)외경 13.7cm2매
27다라니(후령통외곽마감)종이(먹)24.2×20.5cm4매


  • 저고리: 1622년(광해군 1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장유물 중 하나이다. '병자생왕비유씨명의(丙子生王妃柳氏命衣)'라는 묵서가 남아있다.
  • 후령통 및 황초복자: 후령통은 복장유물을 넣는 통이며, 황초복자는 후령통을 감싸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조성발원문: 불상을 만든 경위와 발원 내용을 담은 글이다.
  • 다라니: 불교 경전의 일종으로, 특정한 공덕을 얻거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다. 다양한 종류와 형태(원형, 방형)의 다라니가 발견되었다.

4. 역사적 배경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은 광해군의 정비 장열왕비(1576∼1623)가 발원하여 조성된 불상으로, 17세기 불교 조각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높이 42cm의 소형 불상으로,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1]

불상 내부에서는 장열왕비가 광해군과 세자 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작성한 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다양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저고리에는 장열왕비가 직접 입었음을 보여주는 글이 있어, 17세기 왕실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1]

4. 1. 광해군 시대의 불교

광해군 대의 불교 정책은 왕실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왕비 장열왕비(1576∼1623)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왕실 불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1]

장열왕비는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 인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1620년대 초반 대규모 불사를 추진했다. 이 불사에는 현진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전국 각지에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였다.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이 중 하나로, 왕실 발원 불사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17세기 불교 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1]

특히, 선찰사 불상 복장에서는 장열왕비의 친필 발원문과 저고리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왕실의 불교 신앙과 복식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1]

4. 2. 17세기 조각승 현진

이 불상은 17세기 전반 경북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조각승 현진의 작품이다.[1]

불상 복장공 속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광해군의 정비 장열왕비(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인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총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 조성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던 가장 유명한 조각승들이 대거 참여하여 공동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찰사 불상은 이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세 번째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

5. 의의와 평가

안동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은 왕실에서 발원한 불사(佛事)라는 역사적 가치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특히, 복장유물 중 장열왕비가 직접 입었던 저고리가 포함되어 있어 조선 왕실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5. 1. 불교 미술사적 의의

이 불상은 높이 42cm의 소형 불상으로, 결가부좌 자세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양식적 특징은 17세기 전반 경북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조각승 현진의 작품이다.[1]

불상의 복장공 속에서는 청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을 비롯하여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비(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 인물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총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 조성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던 가장 유명한 조각승들이 대거 참여하여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찰사 불상은 이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세 번째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

선찰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왕실에서 발원한 불사라는 역사적 가치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아울러 복장유물에 포함된 저고리에는 장열왕비가 직접 입었음을 보여주는 묵서가 있어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의 복식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1]

5. 2. 복식사 연구의 중요 자료

이 불상의 복장공 속에서는 청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을 비롯하여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1] 이 중 복장유물에 포함된 저고리에는 장열왕비(章烈王妃)가 직접 입었음을 보여주는 묵서가 있어,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의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1]

5. 3. 조선 왕실 문화 연구의 단서

이 불상의 복장공(腹藏孔) 안에서는 청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을 비롯하여 후령통, 다라니, 저고리 등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광해군의 정비(正妃)인 장열왕비(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등 주변 인물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총 11구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한다.[1]

불상 조성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던 가장 유명한 조각승들이 대거 참여하여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찰사 불상은 이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세 번째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

특히 복장유물에 포함된 저고리에는 장열왕비가 직접 입었음을 보여주는 묵서(墨書)가 있어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불상(1구) 및 복장유물(83점)을 일괄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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