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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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해군은 조선 선조의 서자로, 임진왜란 중 왕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며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즉위 후에는 대북파를 등용하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으나, 친족 숙청, 궁궐 복원 등 무리한 정책으로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1623년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1641년 제주도에서 사망했다. 사후에는 폭군으로 평가받았으나, 근대 이후 중립 외교와 실용적인 면모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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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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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광해군 (光海君) |
휘 | 이혼 (李琿) |
로마자 표기 | I Hon |
생년월일 | 1575년 6월 4일 |
출생지 | 한성부, 조선 |
사망일 | 1641년 8월 7일 |
사망지 | 제주목, 전라도, 조선 |
매장지 | 광해군묘, 남양주, 한국 |
종교 | 유교 ( 성리학) |
본관 | 전주 이씨 |
통치 | |
왕조 | 이씨 |
즉위 | 1608년 3월 |
퇴위 | 1623년 4월 12일 |
재위 기간 | 1608년 3월 – 1623년 4월 12일 |
즉위식 | 정릉동 행궁 서청 |
선왕 | 선조 |
후왕 | 인조 |
섭정 | 1592년 – 1608년 |
섭정 군주 | 선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선조 |
어머니 | 공빈 김씨 |
배우자 | 폐비 유씨 |
자녀 | 4남 1녀 |
아들 | 폐세자 이지 |
딸 | 폐옹주 이씨 |
존호 | |
존호 |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 (추탈) 체천흥운준덕홍공 신성영숙흠문인무 서륜입기명성광렬 융봉현보무정중희 예철장의장헌순정 건의수정창도숭업 (體天興運俊德弘功 神聖英肅欽文仁武 敍倫立紀明誠光烈 隆奉顯保懋定重熙 睿哲莊毅章憲順靖 建義守正彰道崇業) (추탈) |
기타 | |
묘호 | 광해군묘 |
능묘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
2. 어린 시절
2. 1. 출생과 성장
1575년 선조와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면서 부왕의 냉대 속에 성장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부왕 선조는 왕자들을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였는데, 이때 광해군도 친형 임해군, 이복동생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포함되었다.2. 2. 세자 건저의 문제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와 그녀의 아들 신성군을 총애했지만,[20][21] 자질로는 광해군이 유력한 세자 후보였다. 그러나 선조는 방계승통에 서얼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미루었다.1591년, 선조가 40세가 되자 대신들은 후계 문제를 논의,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좌의정 정철 등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로 결정했다.[23] 그러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기축옥사(1589)로 동인들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과 정철 및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계략을 꾸몄다.[24] 이산해는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서인들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고,[25] 병을 핑계로 주청 당일 경연에 불참했다.[20]
이산해의 계략을 모르는 정철은 경연 중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고, 선조는 진노하여 정철을 파직하고 유배 보냈다.[26][27] 이후 서인을 멀리하고 동인들을 가까이하며, 정철과 서인의 처결 문제를 동인들과 의논할 때 동인들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28]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 때 서인에게 크게 화를 입은 동인들이 북인 붕당을 형성하여 복수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했으나 이 일로 동인이 다시 득세했고, 이후 세자 책봉 문제는 금기 사항이 되었다.[29]
3. 세자 시절
3. 1.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신성군이 피난길에 사망하고 분조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6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30]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어 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30]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후,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에 힘썼다.[31]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민심을 위무하며 군량미를 모아 백성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았다.[32]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지위를 굳혔으나, 명나라는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승인을 거부했다.[33]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없다.
3. 2. 왕위 계승
1600년 의인왕후가 사망하고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34]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34] 선조는 서얼이자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감 때문에[35]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적자를 세자로 삼고자 했다.[36] 그러나 임진왜란 때 18세의 나이로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신망을 쌓은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36]명나라는 1604년(선조 37) 11월에 광해군에 대한 세자 승인 거부 의사를 재확인했다.[37][38]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유영경 등 소북(小北)파는 적통론과 광해군이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영창대군 옹립을 지지했다.[39] 반면, 정인홍 등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였다.[39]
1608년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발각되었다.[40][41] 선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결정권은 인목왕후에게 넘어갔다.[41][43] 유영경은 영창대군 즉위 후 수렴청정을 청했으나, 인목왕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광해군 즉위 교서를 내렸다.[41][43]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庶子)로,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는 광해군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사망하였다. 그는 형 임해군이 있었으나, 임해군은 능력이 부족했다.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임금이 명나라 국경으로 피난하자, 그는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방어 전투를 수행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중과 이후, 그는 왕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592년부터 노쇠하고 무능한 선조를 대신하여 사실상 조선의 통치자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지휘하고 전쟁 이후 국가 재건을 담당하였다.[1]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소북의 지지를 받는 동복 동생 영창대군의 존재로 인해 그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4. 즉위 이후
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44] 세자 교체 기도에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44]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44]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처형되고,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44]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44]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44]
사후 악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능 있고 실용적인 정치가였다.[2] 그는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문서 복원을 후원했다.[2]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토지 조례를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창덕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의 재건을 명령했다.[2] 또한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았던 호패 신분증 제도를 재도입하기도 했다.[2]
1616년 담배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고, 곧 한국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4. 1. 즉위 초기
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44] 세자 교체 기도에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44]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44]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처형되고,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44]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44]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44]
사후 악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능 있고 실용적인 정치가였다.[2] 그는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문서 복원을 후원했다.[2]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토지 조례를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창덕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의 재건을 명령했다.[2] 또한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았던 호패 신분증 제도를 재도입하기도 했다.[2]
1616년 담배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고, 곧 한국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4. 2. 일본과 수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반대하여 군사를 파병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과 수교를 단행하였다.[45]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주를 내세워 159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끈질기게 요청해왔다. 조정 대신들간에 찬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매우 적극적으로 나오자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노력한후 조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허용하는 안을 추진하였다.[46] 광해군은 수교의 선행조건으로 국서를 일본이 정식으로 먼저 보낼것과 임진왜란 중에 성종, 정현왕후, 중종의 무덤을 훼손한 범인 인도 등을 요청했는데, 일본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자 교섭에 임하여 수교하였다.[47] 1617년에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4. 3. 국방과 외교정책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48]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48]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였다.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를 후금에 전달하여 본의 아닌 출병 이었음과 전쟁을 원치 않는 다는 점을 후금에 알렸다. 이와 같은 실리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갈등을 피해갔다.[48]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점을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일이라며 크게 반발하였다.[48]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의 주둔하자,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48]
외교에서는 명나라와 여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이 여진의 군사력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명나라의 종주권 하에 있으면서도 여진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이는 명나라와 고집 센 유교 유교도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3] 또한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1617년에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4. 4. 민생과 문화
광해군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쌀로 조세를 내도록 했다.[49]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알려졌으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49]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새로 지었다.[49] 또한, 전쟁으로 불탄 서적들을 다시 간행하는 데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펴냈다.[49]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 서적인 《동의보감》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49]
광해군은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문서 복원을 후원했으며, 토지 조례를 개정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2] 또한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던 호패 신분증 제도를 다시 도입했다.[2]
광해군은 백성들이 세금을 더 쉽게 낼 수 있도록 대동법을 시행했으나, 이 법은 당시 최대 곡창지대였던 경기도에서만 시행되었고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는 1세기가 걸렸다. 국가 재건과 옛 번영 회복을 위해 출판을 장려하여, 동의보감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쓰이고 여러 역사 기록들이 다시 쓰였다. 1616년 담배가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어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5. 왕권 강화책
5. 1. 정적 숙청
1609년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과 1613년 계축옥사를 일으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의인왕후 능 저주설을 조작하였다. 김제남은 사후 3년 만에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은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하고 모두 화를 당하였다. 1614년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한 뒤 방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에는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하고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였다.광해군은 이이첨 등과 함께 영창대군 살해 직후부터 인목대비 폐비 공작을 전개하여, 1618년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5. 2. 궁궐 복원 공사
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50]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 이반의 원인이 되었다.[50]5. 3. 측근들의 권력 남용
이이첨,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권력을 구축하였다.[51] 이들의 행위는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51] 이이첨과 정인홍이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사림의 반발이 거세졌다.[51]1623년 인조반정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위해를 끼쳤다.
6. 폐위와 말년
1623년 3월 14일 새벽,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여 능양군반정이 일어났다.[52]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과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갔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세자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능양군과 반정 세력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했다.[52]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처형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되었다.[52]
1623년 4월 11일, 서인 세력의 쿠데타로 폐위된 광해군은 도주했으나 체포되었다.[4] 그는 강화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41년 사망했다.[5] 다른 조선 국왕들과 달리 사당(왕릉)이 없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에 안장되었다. 서인 세력은 능양군을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로 옹립했고, 인조는 친명반금(親明反金) 정책을 펼쳐 이후 두 차례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6. 1. 능양군반정 (인조반정)
1623년 3월 14일 새벽,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여 능양군반정이 일어났다.[52]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과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갔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세자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능양군과 반정 세력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했다.[52]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처형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되었다.[52]1623년 4월 11일, 서인 세력의 쿠데타로 폐위된 광해군은 도주했으나 체포되었다.[4] 그는 강화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41년 사망했다.[5] 다른 조선 국왕들과 달리 사당(왕릉)이 없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에 안장되었다. 서인 세력은 능양군을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로 옹립했고, 인조는 친명반금(親明反金) 정책을 펼쳐 이후 두 차례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6. 2. 세자와 유배
광해군은 폐위 후 왕비 유씨, 세자 지, 세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52] 세자와 세자빈은 탈출 실패 후 자결했다.[52] 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능양군은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세자 지는 그 말에 따라 자진한다. 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뒤에 깨어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52]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도 유배 생활 중 화병으로 사망했다.[53]1623년 4월 11일, 광해군은 서인 세력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김류가 주도한 이 쿠데타는 밤에 일어났으며, 광해군은 도주했으나 나중에 체포되었다.[4] 그는 먼저 강화도에, 그리고 나서 제주도에 유배되어 1641년 사망했다.[5] 다른 조선 국왕들과 달리 사당(왕릉)이 없다. 그의 유해와 류씨(柳氏) 부인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의 비교적 소박한 곳에 안장되었다.
6. 3. 유배생활
1624년 이괄의 난 때 능양군은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52]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능양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다음날 6월 7일 광해는 제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 또는 제주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54][52]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 출입이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다.[52][54]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4]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능양군과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1623년 4월 11일, 광해군(光海君)은 서인(西人) 세력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김류가 주도한 이 쿠데타는 밤에 일어났으며, 광해군은 도주했으나 나중에 체포되었다. 그는 먼저 강화도에, 그리고 나서 제주도에 유배되어 1641년 사망했다.[5] 다른 조선 국왕들과 달리 사당(왕릉)이 없다. 그의 유해와 류씨(柳氏) 부인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의 비교적 소박한 곳에 안장되었다. 서인 세력은 능양군(寧陽君)을 제16대 국왕 인조로 옹립했고, 그는 명나라를 지지하고 후금(청나라)을 반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그 후 두 차례의 후금의 침입으로 이어졌다.
6. 4. 사망
1641년 7월 1일에 제주도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55][56]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 무렵에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55][56]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봉사하게 되었으며,[58] 1643년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 로 이장하여[57][58] 부인 유씨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하였다. 그의 묘소는 1991년 10월 25일에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60]광해군 사후에 그의 딸은 폐옹주되어 서인으로 전락하였으나 능양군의 말에따라 이현궁에서 지낼수 있었다.[59] 또한 20세 넘도록 시집을 못갔으나 능양군이 혼수를 마련해주어 박징원과 혼인하였다. 논밭, 집과 노비가 주어졌으며 광해군의 외손이 광해군의 제사를 모셨다 한다.[58]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방문을 원하면 문화재청 사릉 관리사무소에 사전문의나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60] 다른 조선 국왕들과 달리 사당(왕릉)이 없다. 그의 유해와 류씨(柳氏) 부인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의 비교적 소박한 곳에 안장되었다.
7. 사후 평가
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 살해 및 인목왕후를 폐위하는 등의 패륜 행위로 인해 연산군과 더불어 패륜 군주로 규정되었다.[61][62]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전쟁에서 강홍립을 파견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것 또한 명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폭군 또는 혼군(昏君)으로 비판받았다.[61][62]
1933년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에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61] 현대에는 폭군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었으나, 내치 붕괴로 인해 소극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도 있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궁궐 건설에 집중하여 경제를 파탄 냈다는 비판을 받는다.[63] 이는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이다.[63]
광해군은 폐위된 왕 중 연산군과 함께 사묘(廟)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복위되지 못한 왕이다.
오항녕 역사가는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정책 또한 잘못되었으며, 신하 및 백성과의 소통에 실패했다고 비판한다.[6] 반면, 이덕일 역사가는 광해군이 정치적 실수는 있었지만, 동의보감 간행과 대동법 시행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고 칭찬한다.[6] 국내 정책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6]
근대 이후 현대 역사학이 도입되고, 이씨조선 멸망으로 왕조의 공식 기록을 절대시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일부 학자들은 광해군이 폭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광해군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국내의 복흥 정책을 추진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했으며, 후금(청나라)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민족 간에 균형 잡힌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광해군 시대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이후 당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으며, 국정에 대한 결정도 광해군 본인의 의사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친족 왕족 폐위는 광해군의 측근인 이이첨이 독단으로 실행했다는 견해도 있다. 광해군의 폐위는 서인에 의한 궁정 쿠데타로, 당쟁에 휘말린 결과라는 인상이 강하다.
8. 시조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64]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는 비바람이 치는 척박하고 초라한 귀양생활을,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는 그러한 척박함과 비교되는, 노도처럼 치는 푸른바닷물과 가을빛이 든 푸른 산 등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척박함과 푸름의 대비는 화자의 마음을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자내면 속에서는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9. 기타
2002년 11월 15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버 조선왕조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 추숭하였다.[65] 그러나 이는 사시(私諡)로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65] 일부 한자문화권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66][67]
10. 가족 관계
광해군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68][69][70]
왕비는 폐비 유씨이며,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71] 슬하에 폐세자 지 등 4명의 왕자를 두었으나, 유씨 소생 3명 외에는 자료 부족으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79][81]
후궁으로는 소의 윤씨, 소의 홍씨, 숙의 권씨, 수빈 허씨, 숙의 원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숙원 한씨, 상궁 김씨(김개시), 상궁 이씨, 상궁 최씨, 궁인 조씨, 궁인 변씨 등이 있다. 소의 윤씨에게서는 옹주 1명을 얻었다.[82][83]
11. 광해군이 등장하는 작품
- 1962년 영화 《인목대비》에서 허장강이 연기하였다.
- 1982년 MBC TV 드라마 《여자열전 서궁엄마》에서 이덕화가 연기하였다.
- 1985년 MBC TV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에서 황치훈이 연기하였다.
- 1986년 MBC TV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폭군 광해군》에서 이희도가 연기하였다.
- 1995년 TV 드라마 《서궁》에서 김규철이 연기하였다.
- 1995년 KBS TV 드라마 《대장금》에서 김규철이 연기하였다.
- 1999년~2000년 TV 드라마 《허준》에서 김승수가 연기하였다.
- 2000년~2001년 KBS TV 드라마 《허규(허균) 조선왕조를 흔든 남자》에서 김주승이 연기하였다.
- 2003년 TV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 지성이 연기하였다.
- 2004년~2005년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인과 주민수가 연기하였다.
- 2008년 TV 드라마 《홍길동》에서 조희봉이 연기하였다.
- 2008년 TV 드라마 《탐나는 도다》에서 이호성이 연기하였다.
-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이 연기하였다.
- 2013년 TV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이상윤과 노영학이 연기하였다.
- 2013년 MBC TV 드라마 《허준, 원작 이야기》에서 인교진이 연기하였다.
- 2014년 KBS TV 드라마 《간서치열전》에서 임호가 연기하였다.
- 2014년 TV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서인국, 홍은택, 서동현이 연기하였다.
- 2015년 MBC TV 드라마 《화려한 유혹》에서 차승원과 이태환이 연기하였다.
- 2015년 TV 드라마 《징비록》에서 노영학이 연기하였다.
- 2016년 영화 《대립군》에서 여진구가 연기하였다.
- 2019년 TV 드라마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가 연기하였다.
- 2019년 TV 드라마 《조선로코-녹두전》에서 정준호와 장동윤이 연기하였다.
- 2020년 영화 《자객》에서 장현성이 연기하였다.
- 2020년 영화 《검객》에서 장현성이 연기하였다.
- 2021년 MBN TV 드라마 《보쌈-스틸러》에서 김태우가 연기하였다.
- 2013년 에우디아(Euodia)가 집필한 소설 『광해군의 연인』은 웹 포털 네이버(Naver)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광해군과 시간 여행을 하는 여고생의 러브스토리를 다룬다.[11]
- 래퍼 어거스트 디의 2020년 대취타에서 영감을 받은 군악곡 대취타에서 언급되었다.[7][8] 이 노래의 가사와 럼펀스가 감독한 뮤직비디오는 2012년 영화 관상에서 더욱 영감을 받았으며, 어거스트 디는 현대판 분신의 등장에 위협받는 흉터투성이의 폭군을 연기한다.[9][10]
12. 관련 문화재
-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은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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