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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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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이자 미하일 9세의 아들로, 1328년 조부 안드로니코스 2세를 퇴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발칸 반도에서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을 병합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1341년 사망 후 그의 사후 섭정 문제를 둘러싼 내전으로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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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4세기 세밀화.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주립 도서관 소장.
14세기 세밀화.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주립 도서관 소장.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전체 이름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네노스 팔라이올로고스
출생일1297년 3월 25일
출생지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일1341년 6월 15일 (44세)
사망지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동방 정교회
통치
즉위1328년 5월 24일
대관식1325년 2월 2일
선임 황제안드로니코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
후임 황제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섭정1308/1313년 공동 황제로서
섭정 유형선포
대관식 유형대관식
가문
왕가팔라이올로고스 가문
아버지미카엘 9세 팔라이올로고스
어머니리타 아르메니아
배우자
배우자브라운슈바이크의 이레네
사보이의 안나
자녀트라페준타 황후 이레네
마리아 (이레네로 개명)
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

2. 생애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손자이자 공동 황제였던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로, 1297년 3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동생 마누일을 사고로 죽게 하고 아버지 미하일 9세마저 충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사건과 평소의 방탕한 행실 등으로 인해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1321년, 측근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 등과 함께 할아버지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켰다. 7년간의 내전 끝에 13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할아버지를 퇴위시킨 후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로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라는 큰 위협 속에서 시작되었다. 1329년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스만 군주 오르한에게 패배하면서 니케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주요 영토를 상실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소아시아에서의 실패 이후, 그는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려 세르비아불가리아 제국에 대항하며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340년에는 혼란에 빠진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분열되었던 동로마 세력을 일부나마 통합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두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부인 사보이아의 안나와의 사이에서 후계자인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를 비롯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제국의 안정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1341년 6월 15일, 4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와 그의 강력한 측근이었던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 사이에 또 다른 파괴적인 내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내전

안드로니코스 3세는 1297년 3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동 황제였던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였고, 할아버지는 당시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였다. 1313년경,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버지 미하일 9세에 이어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공동 황제이자 황위 계승자로 추대되었다.

1318년 3월, 안드로니코스 3세는 브룬스비크-그뤼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인 브룬스비크의 이레네와 결혼했다. 1321년경 아들을 낳았으나 유아기에 사망했다.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실수로 자신의 동생인 마누일을 죽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아버지 미하일 9세는 슬픔 속에서 사망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과 더불어 안드로니코스 3세와 그의 측근들의 방탕한 생활 방식은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와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황위 계승자로서 부적절한 행실을 보인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실망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대신 미하일 9세의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공작과 그의 서자 미하일 카타로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그의 친구이자 측근인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 슐기안네스, 테오도로스 슈나데노스 등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그는 수도를 떠나 트라키아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반대 황제로서 통치를 시작하며 7년간의 내전의 서막을 열었다. 반란 초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를 달래기 위해 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이는 내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감세와 같은 인기 영합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으며 세력을 넓혀갔다.

내전 중이던 1324년 8월, 첫 부인인 이레네 황후가 자녀 없이 사망했다. 1326년 10월, 안드로니코스 3세는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의 딸인 사보이아의 안나와 재혼했고, 1327년 딸 마리아(후에 이레네로 개명)가 태어났다. 같은 해, 안드로니코스 3세는 체르노멘 조약을 통해 불가리아의 미하일 시시만과 동맹을 맺어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 대항하고자 했다.

여러 차례의 평화 협정과 전투 끝에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다. 내전을 막지 못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는 결국 손자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이로써 길었던 내전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2. 2. 두 번의 결혼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18년 3월, 브룬스비크-그뤼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인 브룬스비크의 이레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1321년경 그녀는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이레네 황후는 1324년 8월 16일 또는 17일에 살아남은 자녀 없이 사망했다.

1326년 10월,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메데오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브라반트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사보이아의 안나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비고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Maria Palaiologina, 이름을 이레네(Eirene)로 개명)불가리아의 미하일 아센 4세와 결혼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년 6월 18일 출생)후계자, 비잔티움 제국 황제
미카일 팔레올로고스 (Michael Palaiologos)데스포테스(despotes, 계승자로 지명됨)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Irene Palaiologina, 이름을 마리아(Maria)로 개명)프란체스코 1세 가툴루시오와 결혼



당대의 비잔티움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3세는 사생녀 이레네 팔레올로기나도 두었다. 그녀는 바실레이오스 (트라페준타) 황제와 결혼하여 1340년부터 1341년까지 트라페준타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5] 또한, 당대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Rihla)에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또 다른 딸 바얄룬(Bayalun)의 존재를 기록했다. 그녀는 킵차크 칸국우즈베크 칸과 결혼했으며, 이븐 바투타는 1332년 말 또는 1334년에 그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동행했다고 주장했다.[6]

3. 통치

안드로니코스 2세Ανδρόνικος Β'grc의 손자이자 미하일 9세Μιχαήλ Θ'grc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할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하자, 친구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 등과 함께 1321년부터 7년간 내전을 벌였다. 결국 13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할아버지를 퇴위시킨 뒤 단독 황제Ανδρόνικος Γ'grc가 되었다.

황제 즉위 후, 동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펠레카논 전투(1329년) 패배 후 니케아 등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에 제국의 전략 중심을 발칸 반도로 옮겨, 세르비아, 불가리아 제국과 경쟁하는 한편, 에피로스 데스포타국을 1340년 제국 영토로 완전히 병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최측근인 칸타쿠제노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계 문제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첫 아내 아델하이트-아이레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요절하고 아내도 일찍 사망(1324년)했다. 1326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의 딸 조반나(Giovanna di Savoiait, 그리스식 이름 안나)와 재혼했으나, 장남 요안니스가 태어나기 전(1332년) 중병을 앓아 후계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후 차남 미카엘과 딸이 태어났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45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3. 1. 대외 관계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동쪽의 오스만 제국과 서쪽의 발칸 반도 국가들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및 군사 활동을 펼쳤다. 제국의 대외 관계는 소아시아에서의 방어와 발칸 반도 및 에게 해에서의 영향력 유지 및 확대에 초점이 맞춰졌다.

치세 초반,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박에 직면했다. 펠레카논 전투(1329년)에서의 패배 이후 니케아(1331년)와 니코메디아(1337년) 등 주요 거점을 상실하며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오스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는 제국의 전략 중심을 발칸 반도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발칸 반도에서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제국 등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불가리아와는 루소카스트로 전투(1332년) 이후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고, 세르비아와는 시르기안네스 팔라이올로고스 망명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나 암살[2] 후 평화 조약을 체결하며 일부 영토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2][3]

해상에서는 1329년 제노바 세력을 몰아내고 키오스 영주령을 되찾고, 1334년 포카이아를 회복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약화된 비잔티움 해군을 재건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리스 본토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1333년경 테살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고, 1337년부터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의 내분을 이용하여 1340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제국 영토로 병합했다. 이는 제4차 십자군 이후 분열되었던 동로마 세계를 일부 통합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그의 치세 동안 무슬림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1332년 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황제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며[1], 1341년 사망 직전에는 펠로폰네소스의 라틴 영주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기도 했다.

3. 1. 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를 위협하면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는 시작부터 큰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오스만군은 제4차 십자군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전까지 제국의 임시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 니케아를 포위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구이자 심복인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와 함께 니케아 구원을 위한 원정에 나섰으나, 1329년 6월 10일 또는 15일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 오르한에게 패배하고 부상까지 입어 후퇴해야 했다. 이 패배는 소아시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군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1331년 니케아는 함락되어 이즈니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니케아 함락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코메디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비잔티움 영토라도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고,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마저 오르한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소아시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력은 거의 사라졌으며,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와 소수의 항구만이 제국의 통제하에 남게 되었다.

소아시아에서의 연이은 패배와 영토 상실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비잔티움 제국이 전략의 중심을 발칸 반도로 옮기는 결과를 낳았다.

3. 1. 2. 발칸 반도에서의 경쟁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소아시아의 니케아 등 영토를 상실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의 관심을 발칸 반도로 돌렸다. 비록 1329년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르한에게 패배하며 소아시아 영토 회복은 어려워졌지만, 발칸 반도에서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제국 등과 경쟁하며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1329년에는 제노바의 마르티노 자카리아가 지배하던 키오스 영주령(키오스, 사모스, 코스 포함)에 해군 원정을 보내 자카리아를 축출하고 섬들을 제국의 통치하에 두었다. 약화된 비잔티움 해군을 재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332년까지 10척의 군함을 확보하고 비상시에는 100척의 상선을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서의 경쟁은 순탄치 않았다. 1330년 7월 28일, 벨바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격파하면서 불가리아와의 동맹은 큰 의미를 잃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약화된 불가리아를 상대로 트라키아를 병합하려 했으나, 1332년 7월 18일 루소카스트로 전투에서 새로운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알렉산더에게 패배했다. 결국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자신의 딸 마리아(이레네로 개명)를 이반 알렉산더의 아들인 미래의 미하일 아센 4세와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세르비아와의 관계도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칸타쿠제노스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망명한 시르기안네스 팔라이올로고스가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게 의탁하여 제국 서부 영토 공략에 나섰다. 시르기안네스의 도움으로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오흐리드, 프리렙, 스루미차 등을 점령하고 카스토리아까지 함락하며 테살로니키 성벽까지 진격했다.[2]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34년, 장군 스프란체스 팔라이올로고스를 거짓 투항시켜 세르비아 진영에 잠입시킨 후 시르기안네스를 암살하게 하여 세르비아의 공세를 막았다.[2] 시르기안네스의 전략적 능력에 크게 의존했던 두샨은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북쪽에서 헝가리의 공격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협상에 응했다.[2] 1334년 8월 26일 맺어진 평화 협정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오흐리드, 프리렙, 스루미차 등 세르비아가 점령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2][3] 이후 1340년, 두샨이 중병에 걸린 틈을 타 그의 주요 사령관 중 한 명인 흐렐랴가 스트루마 강 중류 지역의 영지를 가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 귀순했다.[4]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발칸 반도 내 다른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1333년경 테살리아의 통치자 스테판 가브리엘로풀로스가 사망하자, 분열된 틈을 타 이 지역에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한 1337년에는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의 내부 혼란을 이용하여 니케포로스 2세 오르시니로부터 영토를 회복했으며, 1340년에는 에피로스를 완전히 제국 영토로 병합하여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지속된 동로마 세계의 분열을 일부 해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말년인 1341년에는 펠로폰네소스의 라틴 영주들이 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병상에서 이 사절단을 만난 직후인 1341년 6월 15일 사망했다. 그의 치세 동안 발칸 반도에서 제국의 영토를 일부 확장하고 분열된 그리스 세계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 강력한 경쟁자들의 부상과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3. 1. 3. 에페이로스 전제공국 병합

소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펠레카논 전투에서 패배하고 니케아를 상실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의 관심을 발칸 반도로 돌렸다.

테살리아를 통치하던 스테판 가브리엘로풀로스가 1333년경 사망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 지역의 분열 위기를 이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력을 확장했다. 한편, 세르비아는 칸타쿠제노스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망명한 시르기안네스 팔라이올로고스를 앞세워 제국 서부 영토를 공략했다. 세르비아는 오흐리드, 프리렙, 스트루미차 등을 점령하고 테살로니키까지 진격했다.[2]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암살자를 보내 시르기안네스를 살해(1334년)하여 세르비아의 공세를 막고 사태를 수습했다.[2] 이후 1334년 8월 26일, 비잔티움 제국은 세르비아와 평화 협정을 맺고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에서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인정했다.[2][3]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37년, 에페이로스 전제공국 내부의 분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니케포로스 2세 오르시니로부터 에페이로스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회복했다. 같은 시기에 테살리아 역시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에페이로스 병합 과정에는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와 테오도로스 슈나데노스 등의 협력이 있었다.

마침내 1340년, 에페이로스는 완전히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병합되었다. 이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여러 세력으로 나뉘었던 구 동로마 제국 영토가 다시 통합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분열되었던 동로마 세력에 일단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다.

3. 2. 내정

요한 칸타쿠제누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최측근이자 μεγάς δομέστικος|메가스 도메스티코스grc(총사령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후일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했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냥이나 전쟁을 즐기는 동안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제국의 운영을 이끌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 제국의 사법 제도를 개혁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Πανδίκαιοι τῶν Ῥωμαίων|판디카이오이 톤 로마이온grc("로마인들의 보편적 재판관들")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4명의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를 통해 제국 내의 법적 분쟁을 처리하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시도였다.

4. 죽음과 유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6월 15일, 44세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만성 말라리아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7] 그의 시신은 하기아 소피아에 잠시 안치된 후 호데곤 수도원에 매장되었다.[7]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의 통치가 동로마 제국이 아직 회복 가능성을 가졌던 시기에 끝났다고 평가하며, 제국의 최종적인 몰락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그에게 묻지는 않는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과 협력하며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했고, 4차 십자군 이후 제국이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던 시기를 이끌었다. 특히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을 제국에 재통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해 니케아를 포함한 소아시아의 중요 영토를 상실했으며, 이는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군사적 열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는 불과 9세였기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다. 이는 곧바로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와 황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져 파괴적인 1341년-1347년 비잔티움 내전을 촉발했다. 이 내전은 제국의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소진시키고 국력을 극도로 약화시켜, 이후 세르비아 제국의 팽창과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정복을 막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3세의 죽음은 제국을 뒤흔든 혼란의 시작이었으며, 그 씨앗은 그의 생전에 이미 뿌려져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5. 평가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 시기까지는 비잔티움 제국이 아직 유지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보며, 제국의 몰락이 반드시 그의 리더십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으나, 제국의 힘이 부족하여 불가리아, 세르비아, 오스만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적극적인 지도력을 보였고 유능한 관리들과 협력하여, 제4차 십자군 이후 발칸 반도와 그리스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에서 일부 영토를 상실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하는 발판을 내주게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6월 15일, 44세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는데, 만성 말라리아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7] 그의 사후, 어린 아들 요한 5세 팔라이올로고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9살에 불과하여 섭정이 필요했다. 섭정 자리를 둘러싼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의 갈등은 파괴적인 1341년-1347년 비잔티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은 제국의 힘을 크게 소진시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었고, 약화된 제국은 세르비아 제국의 성장을 막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을 힘도 잃게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 개인에 대한 평가는 유능하다는 시각과 무능하다는 시각이 엇갈린다.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처럼 지능이 높았다고 여겨지지만, 나태하고 변덕스러우며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사료마다 그의 성격 묘사가 달라,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고 기록했다.

6. 가족 관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손자이자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이다. 1320년 동생 마누일을 사고로 죽게 한 사건은 아버지 미하일 9세의 사망과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그의 누이 테오도라 팔라이올로기나는 1324년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시슈만과 결혼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은화 바실리콘


안드로니코스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1318년 3월 결혼한 브라운슈바이크-그뤼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인 브룬스비크의 이레네(본명 아델하이트, Adelheid)이다. 그녀는 1324년 8월 16일 또는 17일에 사망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1321년 출생), 1322년 유아기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1326년 10월 결혼한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브라반트의 마리의 딸인 사보이아의 안나(본명 조반나, Giovanna)이다. 안나와의 사이에서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배우자비고
마리아(에이레네로 개명) 팔라이올로기나1327년 – 1356년 이후미하일 아센 4세 (불가리아 공동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1332년 6월 18일 – 1391년헬레네 칸타쿠제네동로마 제국 황제 (1341년–1391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1337년 – ?데스포테스(전제공)
이레네(마리아로 개명) 팔라이올로기나? – 1384년 8월 6일?프란체스코 1세 가틸루시오 (레스보스 섬 군주)1355년 결혼. 1384년 지진으로 남편, 아들들(프란체스코 2세 제외)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추정.



또한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는 서자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당대의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에 따르면, 서녀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코므네네가 있었다. 그녀는 트라페준타 제국의 황제 바실레이오스 메가스 코므네노스와 1335년 결혼했으며, 남편 사후 잠시 트라페준타 제국을 통치(1340년–1341년)했다.[5]
  • 당대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리흘라)에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또 다른 서녀(바얄룬, Bayalun)가 킵차크 칸국우즈베크 칸과 결혼했다고 기록했다. 이븐 바투타는 1332년 말 또는 1334년에 그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동행했다고 주장한다.[6]
  •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Θεόδωρος Παλαιολόγος)라는 인물이 근위대 사령관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Travels of Ibn Battutah Picador 2002
[2]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http://dx.doi.org/10[...]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3] 서적 Byzantium: The Decline and Fall
[4]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http://dx.doi.org/10[...]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5] 서적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of the Byzantine Era: 1204-1461 Argonaut 1969
[6] 서적 The Adventures of Ibn Battut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7] 간행물 The tombs of the Palaiologan emperors 2018
[8] 웹사이트 Andronicus III Palaeologus Byzantine emperor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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