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화정동 오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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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산 화정동 오정각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김문기와 그의 후손 4명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각이다. 1870년에 건립되었으며, 김문기 부자의 충신 정문과 김충주 등 3명의 효자 정문을 모시고 있다. 오정각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인근에는 김충주를 기리는 고송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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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화정동 오정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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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각 정보 | |
명칭 | 오정각 |
구분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7 |
지정일 | 1983년 9월 19일 |
주소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29번지 |
시대 | 알 수 없음 |
소유자 | 김용헌 |
면적 | 알 수 없음 |
수량 | 1동 |
문화재청 ID | 31,00070000,31 |
2. 역사
조선 고종 7년(1870)에 건립되었으며, 1968년 보수, 1976년 단청 작업을 거쳤다. 1981년 시흥군에서 정화사업을 실시했고, 1983년에는 오정각 입구에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는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새겨져 있고, 뒷면과 양쪽 옆면에는 김문기 등 5대의 행적, 관직, 덕망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정문은 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말한다. 오정각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이조판서 김문기와 아들 현석에 대한 충신정문과 효자정문 등 5대에 걸친 정문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이다.2. 2. 연혁
현재 건물은 조선 고종 7년(1870)에 건립되었으며, 1968년에 보수, 1976년에 단청 작업을 거쳐 1981년 시흥군에서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3년에는 오정각 입구에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세워졌다.3. 구조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칸 처마 밑에는 '''오정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한 칸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시 ‘오세충효(五世忠孝)’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김문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건물 뒤쪽에는 김문기의 정문을 중심으로 5대 정문이 서 있다.
3. 1. 오정각
정문은 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말한다.오정각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이조판서 김문기와 아들 현석에 대한 충신정문과 효자정문 등 5대에 걸친 정문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고종 7년(1870)에 세웠다고 하며, 1968년 보수하였고 1976년 단청을 거쳐 1981년에 시흥군에서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정각 입구에는 1983년에 세운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오정각중수기념비’라 새겼고, 뒷면과 양쪽 옆면에는 김문기 등 5대의 행적, 관직, 덕망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칸 처마 밑에는 오정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한 칸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시 ‘오세충효(五世忠孝)’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김문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건물 뒤쪽에는 김문기의 정문을 중심으로 5대 정문이 서 있다.
3. 2. 오정각중수기념비
오정각 입구에는 1983년에 세워진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있다. 비석 앞면에는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새겨져 있고, 뒷면과 양쪽 옆면에는 김문기 등 5대의 행적, 관직, 덕망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4. 인물
오정각은 김문기와 그의 아들 김현석을 기리는 충신 정문과, 손자 김충주, 증손자 김경남, 고손자 김약전을 기리는 효자 정문을 모신 곳이다. 김문기는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고 1455년(세조 1)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가 되었으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처형되었다. 김현석은 영월군수로 재임 중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김충주는 노비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안산에서 숯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고, 평생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김경남과 김약전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4. 1. 김문기 (金文起, 1399~1456)
'''김문기'''(金文起, 1399~1456)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55년(세조 1)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가 되었으나,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병력 동원을 책임진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452년(문종 2),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이후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문기는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김현석은 영월군수로 재임 중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1731년(영조 7), 왕명으로 김문기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1870년에는 김문기와 그의 아들의 충절, 그리고 김충주와 그의 아들, 손자의 효성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다. 같은 해, 이 정려들을 보관하기 위해 오정각이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김현석의 아들 김충주는 노비로 끌려가는 벌을 받았으나, 탈출하여 안산의 산에서 숯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김충주는 평생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애도하며 살았고, 그의 아들 김경남과 손자 김약전 또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2. 김현석 (金玄錫)
김현석(金玄錫)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김문기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자 영월군수로 재임 중 순절하였다. 김현석의 아들 김충주는 노비로 끌려가는 벌을 받았으나 탈출하여 안산의 한 산에서 숯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김충주는 평생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애도하며 살았고, 그의 아들 김경남과 손자 김약전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3대가 효자로 칭송받았다.4. 3. 김충주 (金忠柱)
김충주(金忠柱)는 김현석의 아들로, 노비가 되는 벌을 받았으나 탈출하여 안산의 산에서 숯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평생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애도하며 살았으며, 그의 아들 김경남과 손자 김약전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3대가 효자로 칭송받았다.4. 4. 김경남 (金景男), 김약전 (金若銓)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은 영월군수로 재임 중 아버지와 같이 순절하였다. 김현석의 아들 김충주는 노비가 되는 벌을 받았으나, 탈출하여 안산의 한 산에서 숯을 만들며 여생을 보냈다. 김충주는 평생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애도하며 살았고, 그의 아들 김경남과 손자 김약전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3대가 효자로 일컬어졌다.5. 문화재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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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고송정 (孤松亭)
후손들은 선조인 김충주가 망월암에 올라가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과 할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일생을 보냈고, 그곳에 있던 소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하여 그가 살던 집터에 고송정(孤松亭)을 지었다. 김충주의 아들 김경남과 손자 김약전도 효성이 지극하여 3대가 효자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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