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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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 고위 관료 가문 출신으로, 467년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지명되었다. 그는 동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반달족과 서고트족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리키머와의 갈등으로 인해 472년 로마에서 포위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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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미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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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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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
칭호 | 서로마 황제 |
통치 | |
재위 기간 | 467년 4월 12일 – 472년 7월 11일 |
선임 황제 | 리비우스 세베루스 |
후임 황제 | 올리브리우스 |
섭정 | 레오 1세 |
가족 | |
배우자 |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
자녀 | 알리피아 안테미올루스 마르키아누스 로물루스 |
출생 및 사망 |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사망지 | 로마 |
사망일 | 472년 7월 11일 |
종교 및 왕조 |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왕조 | 테오도시우스 (혼인으로) |
기타 정보 | |
유형 | 동로마 황제 |
2. 생애
453년,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450–457)의 딸인 마르키아 에우페미아와 결혼했다. 결혼 후 ''코메스''로 승진하여 다뉴브강 국경 방어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4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받고 ''군사령관''이 되었다. 455년,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함께 로마 집정관을 역임했다.[3]
이러한 영예는 마르키아누스가 안테미우스를 황제 후보로 선택했음을 시사한다. 요한 말랄라스는 마르키아누스가 아비투스 이후 안테미우스를 서방 황제로 지명했다고 기록했다.[3]
456년 아비투스가 폐위되고 마르키아누스는 안테미우스를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457년 사망했다. 서방은 리키머와 마요리아누스, 동방은 아스파르가 권력을 잡았다. 아스파르는 야만족 출신이라 황제가 될 수 없어 레오를 선택했고, 서방에서는 마요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30]
안테미우스는 레오 1세 아래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국경을 방어했다. 460년경 일리리쿰에서 발라미르의 동고트족을 격파했다. 466/467년 겨울, 다키아를 약탈한 훈족을 격파하고 세르디카를 포위했다. 굶주린 훈족이 전투를 수락하자, 기병 사령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항복을 제안한 훈족에게 탈주자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4]
2. 1. 출신과 초기 경력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인 프로코피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404년부터 415년까지 동방의 프라이펙투스였고 405년에 로마 집정관이었던 안테미우스였다. 그의 아버지는 422년부터 424년까지 ''동방의 군사령관''이었던 프로코피우스였으며, 그는 황제 율리아누스의 사촌이자 동로마 황제 발렌스 (재위 365–366)에 대항한 찬탈자였던 프로코피우스의 후손이었다.[26][27]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난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프로클로스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동료 학생들 중에는 마르켈리누스 (일리리쿰의 군사령관이자 총독), 플라비우스 일루스트리우스 푸사에우스 (동방의 프라이펙투스이자 467년 집정관), 메시우스 포에부스 세베루스 (470년 집정관이자 ''로마 시의 장관'') 그리고 팜프레피우스 (이교도 시인) 등이 있었다.[28]
453년, 그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 (450–457)의 딸인 마르키아 에우페미아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는 ''코메스''의 지위로 승진하여 다뉴브강 국경으로 보내져 453년 아틸라의 죽음 이후 방치된 국경 방어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454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454년 또는 455년에 ''파트리키우스''의 칭호를 받고 동방의 두 ''군사령관'' 또는 ''전 군사령관'' 중 한 명이 되었다. 455년, 그는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함께 로마 집정관을 역임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러한 영예로운 사건들은 마르키아누스가 안테미우스를 동방 또는 서방 왕좌의 가능한 후보로 선택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설은 안테미우스의 명성이 6세기 역사가 요한 말랄라스가 마르키아누스가 아비투스 이후 안테미우스를 서방 황제로 지명했다고 진술하도록 이끌면서 강화되었다.[29]
456년 10월, 서방 황제 아비투스가 폐위되었고 마르키아누스는 아마도 안테미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동방 황제는 자신의 동료를 선택하기 전에 457년 1월에 사망했다. 따라서 두 제국 모두 황제가 없었고, 권력은 서방 장군 리키머와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동방 ''군사령관'', 알란족 아스파르의 손에 있었다. 아스파르는 자신의 야만족 기원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그의 명성으로 독립하게 될 안테미우스에 반대하여, 낮은 계급의 군 장교인 레오를 선택했다. 서방에서는 리키머가 자신의 야만족 기원으로 인해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에 마요리아누스가 자색 옷을 받았다.[30]
안테미우스는 새로운 황제 아래에서 계속 복무했다. ''군사령관''으로서 그의 임무는 국경을 압박하는 야만족으로부터 제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460년경, 그는 일리리쿰에서 발라미르의 동고트족을 격파했다. 466/467년 겨울 동안, 그는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다키아를 약탈한 훈족 집단 (호르미다크가 이끌었음)을 격파했다. 약탈자들은 세르디카를 정복했고, 안테미우스는 굶주린 훈족이 공개 전투를 수락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도시를 포위했다. 기병 사령관(훈족)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안테미우스는 보병을 이끌고 승리했고, 호르미다크가 항복을 제안했을 때 안테미우스는 탈주자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31]
2. 2. 서로마 황제 즉위
46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고, ''일리리쿰 군사령관'' 마르켈리누스가 이끄는 군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했다.[5] 같은 해 4월 12일, 안테미우스는 로마에서 약 5~20km 떨어진 곳에서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5] 안테미우스의 즉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디오스코루스의 찬사로 축하받았다.[6]레오 1세가 안테미우스를 선택한 배경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잠재적인 동로마 황제 후보였던 안테미우스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보낼 수 있었다. 둘째, 반달 왕 가이세릭이 자신의 꼭두각시를 서로마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셋째,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반달족과 싸울 준비가 된 유능한 장군을 이탈리아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서로마 제국의 상황과 관련이 깊다.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한 후, 서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없었다.[30] 가이세릭은 자신의 후보인 올리브리우스를 지지했는데, 올리브리우스와 가이세릭의 아들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두 딸과 결혼하여 가이세릭과 혈연관계였다. 올리브리우스가 황위에 오르면 가이세릭은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레오 1세는 가이세릭을 라벤나의 황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어했으며, 세베루스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데 시간을 끌었다. 레오 1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가이세릭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일리리쿰, 펠로폰네소스, 그리스의 다른 지역까지 공격하여 약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30] 이에 레오 1세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2. 3. 통치와 업적
안테미우스 황제의 통치 기간은 동로마 제국과의 좋은 관계, 반달 왕국 및 서고트족과의 전쟁, 그리고 내부 정책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동로마 제국과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서로 협력하여 집정관을 선출하고 혼인을 통해 유대를 강화했다.[34] 468년에는 안테미우스가 단독 집정관 직을 맡았고, 이후 그의 아들 마르키아누스가 동로마 황제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35]
반달 왕국과의 전쟁은 실패했다. 468년 레오 1세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조직했지만, 본 곶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아프리카 회복은 좌절되었다.[9] 피터 헤더는 이 원정이 서로마 제국 회복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평가한다.[10]
서고트족과의 전쟁 역시 어려웠다. 리오타무스 왕이 이끄는 브리튼족 용병을 고용했지만 패배했고,[12] 안테미우스의 아들 안테미올루스가 이끄는 군대도 아를 전투에서 패배했다.[13]
안테미우스는 내부적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귀족에게 ''patricius''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갈리아 출신 인사들도 포함되었다.[30]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안테미우스에게 칭송 연설을 바친 대가로 높은 지위를 받기도 했다.[46]
2. 3. 1.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안테미우스 황제의 치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긍정적인 관계가 특징이었다. 동로마의 법령은 안테미우스를 마지막 서로마 제국 황제로 기록하고 있다.[34]동서 양 궁정은 매년 집정관 선출에 협력하여, 각 궁정에서 한 명씩 집정관을 지명하고 상대방의 지명을 수용하였다. 468년 즉위 첫 해, 안테미우스는 황제가 집정관이 되는 관례에 따라 단독 집정관(''sine collega'') 직을 맡는 영예를 누렸는데, 이는 레오 1세가 466년에 단독 집정관을 맡았던 것과 유사하다. 이듬해인 469년에는 안테미우스의 아들 마르키아누스와 레오 1세의 사위 제논(훗날 동로마 황제)이 집정관이 되었다.
470년, 안테미우스의 오랜 친구이자 프로클로스의 학교 동료였던 메시우스 포에부스 세베루스와 동방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Orientem) 플라비우스 요르다네스가 집정관이 되었다. 471년, 레오 1세는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총독 켈리우스 아코니우스 프로비아누스를 동료로 하여 네 번째 집정관직을 역임했다. 같은 해, 안테미우스의 아들 마르키아누스와 레오 1세의 딸 레온티아의 결혼으로 두 황제는 유대를 강화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이듬해 동로마 궁정의 지명으로 두 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안테미우스의 결혼 정책에는 외동딸 알리피아와 서방 제국의 유력한 군사령관 리키메르의 결혼도 포함되었다.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467년 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하여 모든 사회 계층이 참여한 축하 행사를 묘사했지만, 알리피아가 야만인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35]
2. 3. 2. 반달족과의 전쟁
반달족은 서방 제국에 큰 문제였다. 467년 말, 안테미우스는 마르켈리누스가 지휘하는 서방 로마 군대를 조직하여 반달족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나,[9] 악천후로 인해 로마 함대가 기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468년, 레오 1세, 안테미우스, 마르켈리누스는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조직했다. 이 작전의 총사령관은 레오의 매형인 바실리스쿠스였다(그는 7년 후 동로마 황제가 된다). 동부, 서부, 일리리아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1천 척 이상의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집결했으며, 대부분의 비용은 동로마 제국에서 지불했지만 안테미우스와 서방 재무부도 비용에 기여했다.[36] 로마 함대는 본 곶 전투에서 대패했는데, 이는 바실리스쿠스가 가이세리크에게 평화 조건을 마련할 5일의 시간을 주었고, 가이세리크가 그 틈을 타 자신의 함대를 모아 로마 함대를 기습하여 로마 함대의 절반 이상을 파괴했기 때문이다.[9] 바실리스쿠스는 시칠리아로 탈출하여 마르켈리누스를 만나려 했지만, 마르켈리누스는 나중에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레오는 가이세리크와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안테미우스는 동맹국을 잃었고, 실패한 작전으로 제국의 재정이 거의 고갈되면서 아프리카를 되찾는 것을 포기했다. 피터 헤더는 이 원정을 이 시점부터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만 통제하게 될 제국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다고 본다.[10]
2. 3. 3. 서고트족과의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처참한 원정 이후, 안테미우스는 서고트족의 팽창으로 위협받는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약화된 로마의 통제력을 틈타 야심 찬 왕 에우리크가 점령한 골의 재정복에 착수했다. 에우리크의 세력권은 또한 일부 제국 지방을 제국에서 분리시켰다. 남부 골의 아를과 마르세유는 여전히 서부 궁정의 통치를 받았지만, 아베르니아는 제국에서 고립되어 황제 아비투스의 아들인 에키디우스가 통치했으며, 이후 소위 수아송 왕국에 포함된 영토는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11]470년, 안테미우스는 브리튼족을 모집하여 에우리크와 싸우게 했다.[11] 리오타무스 왕이 이끄는 브리튼족은 초기에 성공하여 1만 2천 명의 병력으로 부르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고트족 영토의 중심부로 진입하여 데올을 정복하려 했지만, 서고트족 군대에 의해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패배했고, 리오타무스는 로마 동맹국인 부르군트족으로 도망쳐야 했다.[12]
안테미우스는 이 문제를 직접 처리하기로 하고 서고트족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안테미올루스를 명목상 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모았지만, 실제로는 장군 토리사리우스, 에버딩거스, 헤르미아누스가 지휘했다. 안테미올루스는 아를에서 이동하여 론 강을 건넜지만, 에우리크에게 가로막혀 패배했고 로마 장군들은 살해당했으며, 이 지역은 약탈당했다.[13]
2. 3. 4. 내부 정책과 원로원과의 관계
아프리카 지배를 잃고 서방 속주에 대한 통제마저 불안정해지자, 안테미우스의 이탈리아 지배는 내부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그리스 출신이었고, 동로마 황제가 동방 궁정에서 선택한 인물이었으며, 이교도라는 의심까지 받았다.[44][45]원로원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안테미우스는 이탈리아 및 갈리아 통치 계급 구성원들에게 ''patricius''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동방에서 흔히 행해지던, 심지어 민간인에게도 파트리키 칭호를 임명하는 관행을 도입했으며, 많은 귀족에게 이 칭호를 수여하여 일종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30]
새로운 ''patricii'' 중에는 로마누스와 메시우스 포에부스 세베루스와 같은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도 있었지만, 그는 관례를 어기고 갈리아 원로원 의원과 마그누스 펠릭스 및 갈리아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같이 눈에 띄는 경력이 없는 귀족들까지 임명했다.
시도니우스는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로마에 왔으며, 궁정 내의 그의 연락책이었던 집정관 바실리우스는 468년 1월 1일 안테미우스의 집정관 임기 시작 시에 수행할 칭송 연설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황제는 시인에게 파트리키 지위, ''Caput senatus''의 높은 지위, 그리고 심지어 이탈리아 귀족에게만 주어지던 로마 ''로마 장관'' 직책까지 수여했다.[46] 시도니우스는 매우 영향력이 커서, 갈리아의 프라에토리우스 총독이었고 서고트족과 동맹을 맺었던 아르반두스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황제를 설득했다.[47]
2. 4. 몰락과 죽음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는 군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리키메르였는데, 그는 이미 여러 황제들의 운명을 좌우했다.[16] 그러나 새 황제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에 의해 옹립되었고, 리키메르와 안테미우스의 딸 알리피아의 혼인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들의 관계가 파탄난 결정적인 사건은 리키메르의 지지를 받던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이자 귀족이었던 로마누스의 재판이었다. 안테미우스는 로마누스를 반역죄로 기소하여 470년에 사형을 선고했다.[17]리키메르는 반달족과의 전쟁을 위해 6,000명의 군사를 모았고, 로마누스가 처형된 후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안테미우스를 로마에 남겨두었다. 양측 지지자들 사이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리키메르와 황제는 파비아의 에피파니우스 주교의 중재로 1년간 휴전했다.[18]
472년 초,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고, 안테미우스는 병을 가장하여 구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올리브리우스를 보내 리키메르와 안테미우스 사이를 중재하게 했으나, 요한 말랄라스에 따르면 안테미우스에게 올리브리우스를 죽이라는 비밀 서신을 보냈다. 리키메르는 이 서신을 가로채 올리브리우스에게 보여주고 황제로 옹립했다.[19]
갈등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안테미우스는 귀족들과 도시 백성들을 이끌었고, 리키메르는 고트족 군사령관과 오도아케르의 병력을 포함한 야만족 부대를 이끌었다. 리키메르는 로마에서 안테미우스를 포위했고, 5개월 동안 전투가 이어졌다. 리키메르는 도시에 진입하여 테베레강의 항구를 팔라티노 언덕과 분리하여 황제 지지자들을 굶주리게 했다.[20]
양측은 갈리아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르군트족 출신 갈리아 군사령관 군도바드는 자신의 삼촌인 리키메르를 지지했다. 안테미우스는 빌리메르를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충성스러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입시켰다. 빌리머는 로마에 도착했지만, 리키메르가 아드리아누스 영묘 앞 폰스 엘리우스를 통해 테베레강 반대편에서 도시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다 사망했다.[21]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식량마저 부족해지자, 안테미우스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그의 병사들은 패배하여 많은 수가 죽었다.[20] 황제는 성 베드로 대성전 (또는 다른 자료에 따르면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472년 7월 11일에 군도바드[20][22] 또는 리키메르[23]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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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미우스 제국에는 이교도 협력자가 많았다. 군무장관 마르케리누스는 이교도였고 아테미우스 제국의 옛 친구였으며 470년도 집정관 겸 수도장관을 지낸 세베루스도 이교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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