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라브리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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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1843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04년 사망한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나폴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철학, 역사, 민족지학을 연구했으며, 1870년대 초 언론 활동을 시작하며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이후 로마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교육, 저술, 논쟁에 참여했으며,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점진적으로 사상을 전환했다. 라브리올라는 헤겔과 헤르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지침으로 보았으며, 실천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강조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소론'과 '사회주의와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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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라브리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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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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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
출생 이름 | 안토니오 마리아 마르치알레 라브리올라 |
로마자 표기 | Antonio Maria Marziale Labriòla |
출생 | 1843년 7월 2일 |
출생지 | 카시노, 교황령 |
사망 | 1904년 2월 12일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왕국 |
가족 | 테레사 라브리올라 (딸) |
모교 |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 |
철학적 배경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19세기 철학 |
사상 | 마르크스주의 |
주요 사상 |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하는 이론 실천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
2. 생애
라브리올라는 교황령 카시노에서 태어나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학교 교사로 일하며 철학, 역사, 민족지학에 관심을 가졌고, 언론 활동을 통해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1874년 로마에서 교수로 임명된 후, 평생 교육, 저술, 논쟁에 참여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1873년부터 나타났지만,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은 점진적이었으며 1889년까지는 사회주의적 관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1904년 2월 2일 로마에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라브리올라는 당시 교황령에 소속된 카시노에서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1년에 그는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그는 나폴리에 남아 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철학, 역사, 민족지학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1870년대 초 라브리올라는 저널리즘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 시기부터 그의 저술은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 관점을 보여주었다.[1]1874년 라브리올라는 로마에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로마에서 일생동안 교육, 저술, 논쟁에 참여하였다. 1873년 이후 자유주의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로의 관점 전환은 점진적이었고, 1889년까지 사회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1904년 2월 2일에 그는 사망하였다.[1]
2. 2. 언론 활동과 자유주의
라브리올라는 1870년대 초 언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시기부터 그의 저술은 자유주의적이고 반교권주의적 관점을 보여주었다.[1] 1873년 이후 그는 자유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마르크스주의로의 관점 전환은 점진적이었고, 1889년까지는 사회주의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1]2. 3. 로마 대학교 교수 임용과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
라브리올라는 1874년 로마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로마에서 평생 동안 교육, 저술, 논쟁에 참여하였다. 1873년부터 자유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로의 관점 전환은 점진적이었고, 1889년까지는 사회주의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1904년 2월 2일 로마에서 사망했다.[1]2. 4. 사망
라브리올라는 1904년 2월 2일 로마에서 사망했다.[1] 그는 1873년부터 자유주의를 비판했지만,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은 점진적이었으며, 1889년까지 명시적으로 사회주의적 관점을 표현하지 않았다.[1]3. 사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라브리올라는 마르크스주의를 카를 카우츠키와 같은 정통 이론가들보다 열린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침으로 보았으며, 사회의 복잡성을 반영하여 유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 이론으로 이해했으며, 경험에 따라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강조했다. 그가 사용한 "실천의 철학"이라는 표현은 그람시의 ''옥중 수기''에 영향을 주었다.[3][4]
3. 1. 헤겔과 헤르바르트의 영향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과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카를 카우츠키와 같은 사람들의 정통 이론보다 좀 더 개방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접근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최종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역사 도식으로 보지 않고, 인간사를 이해하는 지침들의 조합으로 보았다.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사회 과정과 힘들의 다양성을 고찰하려면 이 지침들은 다소 엄격하지 않아야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영구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만일 경험이 이념을 거스를 때 그 이념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비판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서술, 즉 "실천철학"(philosophy of praxis)이라는 명칭은 후일 그람시의 《옥중 수기》에서 다시 나타난다.[3][4]
3. 2. 실천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과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카를 카우츠키와 같은 정통 이론가들보다 개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최종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역사 도식으로 보지 않고, 인간사를 이해하는 지침들의 조합으로 보았다.[3]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서 작동하는 복잡적인 사회 과정과 힘들의 다양성을 고찰하려면 이 지침들은 다소 엄격하지 않아야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영구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경험이 이념을 거스를 때 그 이념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비판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철학"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람시의 ''옥중 수기''에서 다시 나타난다.[4]
3. 3. 비판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헤겔과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카를 카우츠키와 같은 정통 이론가들보다 개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최종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역사 도식으로 보지 않고, 인간사를 이해하는 지침들의 조합으로 보았다.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사회 과정과 힘들의 다양성을 고찰하려면 이 지침들은 다소 엄격하지 않아야 했다. 맑스주의는 영구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만일 경험이 이념을 거스를 때 그 이념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비판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했다.[3]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서술 즉 "실천철학"이라는 명칭은 후일 그람시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0862 옥중수고]》에서 다시 나타난다.[4]
4. 저작
-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Essays on the Materialistic Conception of History'' (Wentworth Press, 2019).
-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Socialism and Philosophy'' (Wentworth Press, 2019).
참조
[1]
서적
My Life
https://www.marxists[...]
2020-03-23
[2]
웹사이트
Antonio Labriola e la sua Università
http://www.culturedu[...]
[3]
서적
Theories of Ideology: The Powers of Alienation and Subjection
BRILL
2013
[4]
간행물
Praxis
Blackwell Publishers Ltd.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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