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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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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라니야는 고대 이란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코카서스 지역에 존재했던 중세 국가이다. 8세기부터 9세기까지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9세기 말에 독립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13세기에 몽골의 침략으로 쇠퇴하여 14세기 말 티무르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알라니아는 오늘날 오세트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역사를 기리고 있다.

2. 명칭

알라니야(Alania)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 어근 *''Aryāna-''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인도-이란어족 어근 *''arya''- (''아리아인'')의 파생어이다. 이는 이란의 이름(''Ērān'')과 관련이 있는데, 이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 ''*Aryānām'' ('아리아인의')에서 유래되었다.[6] 다른 자료에서는 "Ās"로 언급된다. 러시아 연대기 및 헝가리 자료에서는 "Yas"로 불린다.

3. 영역

코카서스 알란족은 서쪽의 쿠반 강과 그 지류인 젤렌추크 강의 수원지에서 동쪽의 다리알 협곡에 이르기까지 코카서스 평원과 주요 산맥의 산기슭 일부를 점령했다. 10세기 역사가 알 마수디에 따르면, 알란 왕국은 다게스탄에서 압하스까지 뻗어 있었다. 후두드 알-알람에 따르면, 북쪽으로는 알란족이 헝가리인과 불가르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딴 다리알 협곡을 '알란의 문'이라고 불렀다.

4. 사회

알마수디(Al-masudi)에 따르면, 알란의 통치자는 주변 통치자들 사이에서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었으며, 3만 명의 기병을 소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알란 왕국은 끊임없이 이어진 일련의 정착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닭이 (그중 하나에서) 울면, 왕국의 다른 지역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왜냐하면 마을들이 서로 섞여 있고 가깝게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후두드 알알람에 따르면 알라니아는 1,000개의 정착지를 가진 광대한 국가로 묘사된다. 인구는 기독교인과 이교도, 산악인과 유목민으로 구성되었다.[1]

5. 역사

알란족은 사르마티아인의 이란어족 분파에서 기원했다. 이들은 훈족의 침략으로 유럽과 코카서스 지역으로 나뉘었다. 코카서스 알란족은 서쪽의 쿠반강 발원지에서 동쪽의 다리알 협곡에 이르는 북코카서스 평원과 대(大) 코카서스산맥의 산기슭 일부를 점령했다.[7]

8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알라니아는 비잔티움, 하자르, 조지아, 몽골 등 주변 강대국의 영향을 받으며 복잡한 역사를 겪었다. 8세기 비잔틴-아랍 전쟁과 하자르-아랍 전쟁 동안 알라니아는 중요한 완충 국가 역할을 했다. 9세기 말에는 하자르로부터 독립했고, 10세기 초에는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후 비잔틴 제국 및 조지아와 동맹을 맺으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초, 알라니아 왕국은 여러 족장들이 다투는 자치 부족과 마을들로 붕괴되었다. 헝가리 수도승 율리아누스는 1236년에 "마을만큼 왕자가 많고, 서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가 없다. 그곳의 전쟁은 끊이지 않고, 지도자는 지도자끼리, 마을은 마을끼리 싸운다."라고 기록했다. 1222년 제베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킵차크족과 계략을 꾸며 알란족을 격파했고, 1239년에는 몽케와 구유크 치하에서 두 번째 침략이 시작되어 알라니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14세기 말 티무르의 침략으로 알란족은 코카서스 산맥 깊숙이 도망쳤고, 일부는 체르케스인 카바르디안과 투르크족 카라차이인발카르인에게 흡수되었다.

5. 1. 하자르 카간국의 속국 (8세기-9세기)

비잔틴-아랍 전쟁과 하자르-아랍 전쟁 동안 알라니아는 중요한 완충 국가였다. 8세기 초, 신앙 고백자 테오파네스는 레오 3세가 알라니아로 파견된 임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레오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의 지시를 받아 알란 지도자 이탁세스를 매수하여 압하지아 왕국과의 "오랜 우정"을 끊도록 했다. 압하지아는 알-왈리드 1세 칼리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8]

알렉산드르 로이나슈빌리가 찍은 19세기의 사진 속 다리알 협곡. 현대 러시아 요새 뒤 언덕에는 알라니아와 조지아를 분리하는 중세 국경 성의 유적(때로는 "타마르의 성"이라고 불림)이 있다.


레오가 황제가 된 후, 우마르 2세의 군대가 알라니아를 침략했다. 하자르 족장 바르지크가 알란을 도왔고, 722년 알란-하자르 연합군은 아랍 장군 타비트 알-나흐라니에게 승리했다. 하자르는 이 시기에 알라니아에 스키마르 등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728년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는 알란의 관문을 통과하여 알란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8년 후,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는 알라니아의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 그 관문을 통과했다.

코카서스의 알란은 남쪽에서 침략해오는 세력에 맞서 하자르 카간국과 연합하여 싸웠고, 결국 하자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9세기까지 하자르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아 하자르 왕 벤자민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이 이끄는 연합에 맞서 싸웠다.[9]

5. 2. 독립과 기독교화 (9세기-10세기)

9세기 말, 알라니아는 하자르로부터 독립했다.[10] 10세기 초, 알란족은 북 코카서스에서 활동한 압하지아의 왕 콘스탄틴 3세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알란 영토에 군대를 파견했고, 비잔틴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와 함께 알란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10] 이 개종은 지역 대주교 페테르에게 보낸 니콜라스 미스티코스 총대주교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압하지아의 왕 게오르기 2세의 노력으로 임명되었다.[10] 리처드 폴츠는 일부 엘리트 알란 가문만이 기독교화되었고, 대다수의 인구는 원래의 이교도 전통을 계속 따랐다고 주장했다.[11]

이븐 루스타가 903년에서 913년 사이에 알라니아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왕은 이미 기독교인이었다. 페르시아 여행자는 알라니아로 오기 전에 바로 동쪽에 있는 기독교 왕국인 사리르를 거쳤다.[12]

알라니아 왕국의 현존하는 건축 기념물로는 아르크히즈에 있는 세 개의 교회, 쇼아나 교회, 센티 교회가 있다.

5. 3. 전성기와 쇠퇴 (11세기-13세기)

하자리아가 멸망한 후, 알란 왕들은 북부 페체네그족과 킵차크족 등 초원 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비잔틴 제국 및 조지아 통치자들과 자주 동맹을 맺었다. 요한 스킬리체스는 알다 오브 알라니아가 남편 "압하지아의 게오르기"(즉, 조지아의 게오르기 1세)가 사망한 후, 황제 로마누스 3세로부터 해상 봉토인 아나코피아를 받았다고 보고한다.[14] 이 사건은 1033년에 일어났는데, 같은 해 알란족과 루스족이 현대 아제르바이잔시르반 해안을 약탈했다.

이 약탈은 비잔틴 제국과 루스 종속국인 트무타라칸의 공작 체르니히우의 므스티슬라프에 의해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르메니아에서 계획된 비잔틴의 확장에 직면하여 코카서스의 여러 이슬람 토후국을 위협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15] 1030년에 비잔티움에 들어온 스칸디나비아 출신 루스 약탈자들이 이 약탈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15] 당시 알란 왕은 가브리엘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비잔틴 칭호인 '엑수시오크라토르'를 사용하여 자신을 칭한 동시대 그리스 인장에서 알려져 있다.[16]

알라니아의 왕이자 '엑수시오크라토르'인 가브리엘의 그리스 인장, 1030–1045년경


알라니아는 동슬라브 연대기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알란족이 루스 공국인 트무타라칸과 무역 접촉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1041년에 제작된 키릴 문자가 새겨진 석조 묘비가 알라니아 바로 북쪽에 있는 현재 스타브로폴 지방의 볼쇼이 예고르릭 강둑에 서 있다.[14] 약 1200년경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러시아 십자가가 중세 알라니아의 중심지인 아르키스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15]

11세기 알란 왕의 추정 묘사, 아마도 두르굴렐, 센티 교회에 있음


알란족과 조지아인들은 12세기와 13세기에 바이나흐족과 드발족의 기독교화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조지아 선교사들이 알라니아에서 활동했고,[7] 알란 군대는 조지아 군주들이 이슬람 이웃에 대항하여 자주 고용했다. 알란-조지아 동맹은 1060년대에 공고해졌는데, 당시 알란족이 무슬림 아란을 가로질러 공격하여 간자를 약탈했다. 1120년대에 조지아의 왕 다비드 4세는 알란족을 킵차크족과 화해시키기 위해 다리알을 방문했고, 그 결과 킵차크족은 알라니아를 거쳐 조지아 영토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다비드의 아들 데메트레 1세 또한 1153년경에 아랍 역사가 이븐 알-아즈라크를 동반하여 알라니아로 여행했다. 이 동맹은 1187년에 알라니아 공작 다비드 소슬란이 알라니아계 혼혈이었던 타마르 여왕과 결혼하면서 정점에 달했고, 그들의 후손들은 19세기까지 조지아를 통치했다. 중세 알라니아 공주들은 비잔틴 및 러시아의 류리크 왕조 통치자들과 여러 번 결혼했다. 예를 들어, 오세티아의 마리아는 블라디미르에 공주 수녀원을 세웠으며, 브세볼로트 빅 네스트의 아내이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할머니였다.

5. 4. 몽골의 침입과 멸망 (13세기-14세기)

제베수부타이 장군이 이끄는 몽골군은 1222년에 처음으로 알란족과 만났는데, 이들은 킵차크족과 동맹을 맺고 계략을 꾸며 알란족을 격파했다.[1] 그 후 서쪽으로 더 진격하여 1223년 칼카 강 전투에서 루스 연합군을 격파했다.[1]

1245년 코카서스 지역의 정치 지도


몽케와 구유크 치세하에 1239년에 몽골의 두 번째 침략이 시작되었다.[2] 일부 알란 요새는 몽골에 저항했지만, 많은 지역 귀족들이 침략자들과 협력하여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하려 했다.[2] 저항한 자들은 아지스라는 인물이 이끄는 연맹을 결성했다.[2] 1239년 11월 또는 12월에 시작되어 1240년 2월까지 이어진 마가스 포위 공격으로 침략은 절정에 달했다.[2] 알란 지원군에도 불구하고 요새는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당했으며, 아지스도 포로로 잡혔다.[2] 많은 알란인들이 서쪽으로 도망쳐 1239년에 헝가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16세기까지 언어를 보존한 야스인(jászsok)으로 알려졌다.[2]

침략 이후 몽골군은 《원사》에 따르면 아르슬란과 항후시라는 두 명의 현지 가신 왕자를 세워 통치하게 했다.[3] 두 사람 모두 몽골 군대에 합류했지만, 곧 전투에서 사망했다.[3] 1240년에 군대가 철수하면서 몽골의 영향력은 빠르게 약화되었다.[3] 몽골군은 기마병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수천 명의 알란인들을 몽골로 이주시켰다.[3] 그들은 몽골어로 ''아수드'' 또는 만다린어로 ''아수''로 알려졌으며, 세무의 일원이었다.[3] 쿠빌라이 칸은 알란 여성과의 딸을 두고 있었고, 1271년에 원나라를 건국하면서 3,000명의 정예 알란 근위대를 창설했는데, 이는 1309년까지 30,0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3] 1299년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들은 1368년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원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며, 토곤 테무르를 몽골로 호위했다.[3] 그들은 1510년 반란이 실패할 때까지 몽골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으며, 비록 완전히 몽골화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인 씨족으로 남아 있다.[3]

13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기독교 벽화가 남아 있는 누잘 예배당.


알라니아의 테오도르 주교는 게르마노스 2세 총대주교 재임 기간(1222~40)에 작성된 장문의 서신 설교에서 자신의 수도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다.[4] 프랑스-플랑드르 출신의 수도승이자 여행가인 윌리엄 루브루크는 1253~1255년의 여행 기록에서 몽골의 신하로 크림 반도, 아스트라한 옛 아스트라한, 칸의 수도 카라코룸, 그리고 코카서스 고향에서 자유민으로 살고 있는 알란인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4]

민간 영웅 "자달레스키 나나"(자달레스크의 어머니)의 조각상. "오세트족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며, 티무르의 침략 당시 동굴에 고아들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고전 알라니아는 14세기 말 투르크-몽골계 군벌 티무르가 침략하면서 마침내 종말을 맞았다.[5] 1395년 테레크 강 전투에서 골든 호드를 격파한 그는 이후 여러 알란 족장들을 공격하여 몇 달 동안 학살과 노예화가 이어졌는데, 이는 "자달레스크의 어머니"라는 오세트 민요에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5] 티무르의 침략으로 알란족은 코카서스 산맥 깊숙이 도망쳤고, 코카서스 북쪽 초원 지대에서 알란족의 존재는 사라졌다.[5] 남은 소수는 결국 체르케스인 카바르디안과 투르크족 카라차이인발카르인에게 흡수되었다.[5] 산으로의 후퇴는 새로운 민족의 민족 형성으로 이어졌다.[5] 서쪽의 디고르와 동쪽의 아이론으로 대표되는 오세트인이다.[5] 오세트인들은 1774년까지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그들은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요청했고, 그 결과 1784년 블라디캅카스가 건설되었으며 러시아의 코카서스 정복이 시작되었다.[5]

6. 통치자

알라니아의 통치자들이 사용한 명칭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 기록에서 그들은 "영주", "공작", "왕", "차르" 등으로 불렸으며, 비잔틴인들은 ''엑수시오크라토르''(''exousiokrator'')라고 불렀다. 비잔틴인들은 다른 외국 통치자들에게는 ''아르콘''(arkhon) 또는 ''엑수시아스테스''(exousiastes)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엑수시오크라토르''는 사용하지 않았다.[17]

알려진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통치 시기비고
바주크1세기 말/2세기 초이베리아 아르사크 왕조와 동맹
안바주크/암바주크바주크와 공동 통치
아쉬카다르4세기 초아르메니아의 트르다트 3세의 아내인 아슈헨의 아버지
이타즈8세기 초압하지야와 전쟁
다비드10세기 말 (964/965년경 활동)비잔틴 그리스어 비문에 따르면 센티 교회에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통치 기간 동안 알라니아의 엑수시오크라토르로 언급. 센티 교회 건설. 같은 비문에는 마리아라는 여성이 그의 엑수시오크라토리사로 언급됨. 다비드와 마리아는 세례명일 수 있음.
카치르-우쿨레/카치루크 울루 (카치루크/아치루흐 선임? 다비드 울루와 비교)1237년경통일된 알란 왕국의 마지막 알려진 통치자.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 살해됨.
인디아부13세기경
페레잔1290년경


7. 유산

소련 말기에 코카서스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 북오세티야 ASSR의 많은 지식인들은 "알라니야"라는 명칭의 부활을 요구했다. 오세티야의 저명한 언어학자 T. A. 구리예프는 이 아이디어를 주창하며 오세티야인들이 알란족의 이름을 자칭으로 받아들이고 북오세티야를 알라니야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라니야"라는 용어는 다양한 기업, TV 채널, 정치 및 시민 단체, 출판사, 축구팀, 항공사 등의 이름으로 오세티야의 일상생활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1994년 11월, "알라니야"라는 명칭이 공화국 명칭(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에 공식적으로 추가되었다.[22]

참조

[1] 웹사이트 ALANS http://www.iranicaon[...] Bibliotheca Persica Press 2015-05-16
[2] 서적 2006
[3] 서적 2009
[4] 웹사이트 Alani http://global.britan[...] Encyclopædia Britannica (company) 2015-05-16
[5] 웹사이트 OSSETIC LANGUAGE i. History and description http://www.iranicaon[...] Bibliotheca Persica Press 2015-05-16
[6] 웹사이트 ALANS http://www.iranicaon[...] Bibliotheca Persica Press 2015-05-16
[7] 웹사이트 Alans. http://www.iranica.c[...] 2007-08-20
[8] 서적 The Chronicle of Theophanes: Anni Mundi 6095–6305 (A.D. 602–81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9] 서적 Khazarian Hebrew Documents of the Tenth Century Cornell University Press
[10]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Reaktion Books
[11] 서적 The Ossetes: Modern-Day Scythians of the Caucasus Bloomsbury
[12] 문서
[13] 문서
[14] 웹사이트 Kuznetsov, X-II http://fandag.ru/loa[...]
[15] 웹사이트 Kuznetsov, X-I http://fandag.ru/loa[...]
[16] 문서
[17] 서적 Constantine Porphyrogenitus and his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1973
[18] 웹사이트 Е. ЗИЧИ. ПУТЕШЕСТВИЕ ПО КАВКАЗУ И ЦЕНТРАЛЬНОЙ АЗИИ. DrevLit.Ru - библиотека древних рукописей https://drevlit.ru/d[...] 2024-10-12
[19] 간행물 Urdure http://www.nplg.gov.[...] Favorite
[20] 문서
[21] 문서
[22] 간행물 The Politics of a Name: Between Consolidation and Separation in the Northern Caucasus http://src-h.slav.ho[...]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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