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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소바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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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카소바스 조약은 1474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의 종식을 위해 147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아폰수 5세와 후아나 데 트라스타마라의 결혼을 무효화하며,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아프리카 해안 등 분쟁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스페인의 대서양 항해 및 무역 활동을 제한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이 조약은 식민주의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유럽 열강이 세계를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식민지화할 권한을 가지며 원주민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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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소바스 조약
지도 정보
조약 정보
조약 이름알카소바스 조약
체결일1479년 9월 4일
장소알카소바스, 포르투갈 왕국
서명자이사벨 1세 여왕
페르난도 2세 왕
아폰수 5세
주앙 2세 왕자
주요 내용
상속카스티야 왕위 계승 인정, 아폰수 5세의 카스티야 왕위 주장 포기
영토카나리아 제도: 카스티야 왕국에 귀속
기니 해안, 미나, 카보베르데 제도, 마데이라 제도, 아소레스 제도: 포르투갈 왕국에 귀속
모로코 정복 권한: 포르투갈 왕국에 부여
결혼이사벨 여왕의 손녀 이사벨과 아폰수 5세의 손자 아폰수의 결혼 협상
이후 이사벨과 아폰수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음
전쟁 종결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종결
배경 정보
이전 조약톨레도 조약 (1479년)
후속 조약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년)
영향
포르투갈대서양 항해와 아프리카 탐험 주도권 강화
아프리카 서해안 무역 독점
카스티야카나리아 제도 확보
아메리카 대륙 탐험 및 식민지 개척에 집중

2.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1475년 ~ 1479년)

1474년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는데, 후아나가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13] 엔리케 4세는 신체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했고,[14] 후아나의 생부는 벨트란 데 라 쿠에바로 알려져 있었다.[15]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하여 그녀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했다.[16] 아폰수 5세는 어린 시절 즉위하여 섭정과 대귀족에게 휘둘렸으나, 아프리카 원정에서 성공하며 자신감을 얻어 카스티야 왕위를 노렸다.[17] 그러나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18][19][20]

이 전쟁은 육지와 대서양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기니의 금과 노예 무역, 그리고 대서양 항해와 탐사에 대한 권리를 두고 양국이 충돌했다. 지상전과 달리 해상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했다.[21][22] 전쟁은 3년 더 이어졌고,[23] 육지에서는 카스티야, 바다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한 상황이 계속되었다.[24]

결국 양국은 알카소바스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포르투갈은 카스티야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대서양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얻었다.

2. 1. 분쟁의 발단

1474년 12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사망 후, 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1462~1530) 사이에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다.[13] 분쟁의 원인은 후아나가 선왕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엔리케 4세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하였고,[14] 후아나의 생부는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이라고 알려져 있었다.[15]

페르디난드와 이사벨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한 후, 후아나의 권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하였다.[16] 아폰수 5세는 6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후 섭정과 대귀족들에게 휘둘리며 다소 무능한 군주로 성장했으나, 약한 국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실시하여 예상외로 선전하였다.[17] 자신감이 생긴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의 왕권을 노리며 전쟁을 벌였으나,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패배하며 난관에 부딪혔다.[18][19][20]

육상에서의 전투와 병행하여 대서양에서도 해상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프리카 기니에 대한 교역권과 대서양 항해와 탐사에 대해 양국 간에 주장이 충돌한 결과였다. 지상에서와는 달리 대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하였다.[21][22]

2. 2. 포르투갈의 개입

1474년 12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1462~1530) 사이에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다.[13] 후아나는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다.[14] 엔리케 4세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했기에,[14] 후아나의 생부는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이라고 알려져 있었다.[15]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한 후, 후아나의 권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했다.[16] 아폰수 5세는 6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과 대귀족들에게 휘둘리며 다소 무능한 군주로 성장했다. 그는 약한 국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실시했는데, 예상외로 선전하였다.[17] 자신감이 생긴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의 왕권을 노리며 전쟁을 벌였으나,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패배하며 난관에 부딪혔다.[18][19][20]

이 전쟁은 육상 전투와 더불어 대서양에서도 해상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프리카 기니에 대한 교역권과 대서양 항해 및 탐사에 대해 양국 간의 주장이 충돌한 결과였다. 지상과는 달리 대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했다.[21][22] 전쟁은 3년 더 지속되었는데,[23] 육지에서는 카스티야가, 바다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했다.[24]

2. 3. 주요 전투

1476년 3월 1일에 벌어진 토로 전투는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5][6] 이 전투는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 1세의 전략적 승리로 평가받는다.[7] 1478년에 벌어진 기니 해전에서는[8] 포르투갈이 승리하여 대서양과 분쟁 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했다.

역사가 스티븐 R. 바운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9]

3. 알카소바스 조약 (1479년)

1479년 9월 4일 포르투갈 알카소바스에서 카스티야 왕국포르투갈 왕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종식되었다.[3]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


이 조약은 후아나 데 트라스타마라와 아폰수 5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가톨릭 군주에게 양보하며, 가톨릭 군주들은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또한, 양국 간 대서양 영토를 분할하고 각자의 영향권을 획정했다.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기니, 마데이라, 아소르스, 카보베르데 등 분쟁 중이던 모든 영토와 해안은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남았다. 포르투갈은 페즈 왕국 정복 독점권도 획득했다. 카스티야는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고, 포르투갈은 카나리아 제도 남쪽의 모든 대서양에서 항해, 정복 및 무역 독점권을 얻어 대서양 패권을 확보했다.

포르투갈은 이사벨지참금 형태로 106,676 도블레(dobles of gold)의 전쟁 배상금을 받았다.[3] 후아나는 포르투갈에 머물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전자를 선택했다. 후아나와 아폰수를 지지했던 카스티야인들은 사면받았다.

1481년 교황청칙 「영원한 왕(Aeterni regis)」에 의해 추인된 이 조약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카스티야의 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카스티야인들이 포르투갈의 허가 없이 포르투갈 영토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대서양에서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영향권을 설정하여 공공연한 적대 관계를 종식시켰지만, 미래의 영유권 주장과 갈등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라이벌이었던 카스티야는 이웃 국가보다 대서양 탐험을 늦게 시작했으며, 15세기 후반에야 카스티야의 선원들이 경쟁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경쟁은 카나리아 제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다.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과 레콩키스타 완료 이후, 더 큰 국가가 새로운 무역로와 해외 식민지를 찾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1492년, 국가의 공동 통치자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대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미래 발견을 위한 영역"을 최초로 정의한 문서이며, 특히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제도에 대한 두 왕국의 권리"를 명확히 구분했다.[10] 이는 유럽 열강이 나머지 세계를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그 안에 있는 영토를 식민지화할 권한을 가지며, 거기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최초의 국제 문서 중 하나이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2], 베를린 회의 등 후속 국제 조약 및 문서의 시초로 간주될 수 있다.[11]

3. 1. 주요 내용


  •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야 왕위가 인정되었다.
  • 아폰수 5세와 후아나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으며,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다.[25]
  • 후아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였다.[25]
  • 후아나와 아폰수 5세를 지지한 카스티야인들은 사면받았다.[25]
  •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지배권은 카스티야에 귀속되었다.[26][27][28]
  •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하고 양국간에 분쟁 중인 모든 영토와 아프리카 해안에 대해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주요 지역은 기니의 금광산, 마데이라, 아조레스, 케이프 베르데이다. 포르투갈은 페즈 왕국 독점 정복권도 가진다.[29][30]
  •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 남쪽의 바다(북위 26도 이남)에서 항해, 정복, 지배, 개척, 탐험, 무역활동을 할 수 없다. 대서양에서 이미 알려진 영토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견될 영토에 대한 소유권은 포르투갈에게 있었다.
  • 모우라 약정: 아폰수(아폰수 5세의 손자)와 이사벨(페르난도 2세의 딸)은 함께 모우라 마을에서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거주하며, 관련 비용은 스페인에서 책임진다.
  • 포르투갈은 전쟁 보상금을 이사벨(페르난도 2세의 딸)의 지참금 형태로 106676dobles of gold를 받았다.[31]

4. 조약의 결과 및 영향

이사벨 1세는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왕권을 보장받았으나, 카나리아 제도 남쪽 바다인 대서양(북위 26도 이남)에서 포르투갈의 독점적 탐험, 항해, 상업권을 인정해야 했다. 이는 스페인의 대서양 활동을 사실상 봉쇄하는 것이었다.[32]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루메우 데 아르마스는 가톨릭 군주(페르난도 2세, 이사벨 1세)가 평화를 지나치게 비싼 값으로 샀다고 평가했고,[32] 역사학자 몬세라트 레온 게레로는 스페인이 대서양을 통한 영토 확장을 포기해야 했다고 덧붙였다.[33]

포르투갈의 경쟁국이었던 카스티야는 대서양 탐험 시작이 늦었고, 15세기 후반에야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초기 경쟁은 카나리아 제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고, 카스티야가 승리했다.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 레콩키스타 완료 이후, 스페인은 새로운 무역로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전념하게 되었다. 1492년, 스페인 공동 통치자들은 포르투갈을 우회하여 대서양을 서쪽으로 건너 아시아에 도달하고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대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콜럼버스가 알카소바스 조약을 위반했음을 인지한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스페인에 강력히 항의하며 영토 반환을 요청했고, 양국 간 분쟁이 발생했다.[34] 양국은 분쟁 해결을 위해 교황청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안은 스페인에 유리했다.[35] 주앙 2세는 교황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36] 약 1년간의 협상 끝에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영토 경계선을 규정했다.[37]

4. 1. 조약 비준

1481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교황 칙서 「영원한 왕(Aeterni regis)」을 통해 알카소바스 조약을 비준했다.[32] 이 조약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카스티야의 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카스티야인들이 포르투갈의 허가 없이 포르투갈 영토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했다.[33]

4. 2. 스페인의 대서양 진출 제약

이사벨 1세는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왕권을 보장받았으나, 카나리아 제도 남쪽 바다인 대서양(북위 26도 이남)에서 포르투갈의 독점적 탐험, 항해, 상업권을 인정해야 했다. 이는 스페인의 대서양 활동을 사실상 봉쇄하는 것이었다.[32]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루메우 데 아르마스는 가톨릭 군주(페르난도 2세, 이사벨 1세)가 평화를 지나치게 비싼 값으로 샀다고 평가했다.[32] 역사학자 몬세라트 레온 게레로는 스페인이 대서양을 통한 영토 확장을 포기해야 했다고 덧붙였다.[33]

1481년 교황 칙서 「영원한 왕(Aeterni regis)」으로 승인된 이 조약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해안 탐험을 계속하도록 보장하는 동시에,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카스티야의 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카스티야인들이 포르투갈 허가 없이 포르투갈 영토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대서양에서 양국의 영향권을 설정하여 적대 관계를 종식시켰지만, 미래의 영유권 주장과 갈등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경쟁국이었던 카스티야는 대서양 탐험 시작이 늦었고, 15세기 후반에야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초기 경쟁은 카나리아 제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고, 카스티야가 승리했다.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 레콩키스타 완료 이후, 스페인은 새로운 무역로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전념하게 되었다. 1492년, 스페인 공동 통치자들은 포르투갈을 우회하여 대서양을 서쪽으로 건너 아시아에 도달하고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대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4. 3. 영토 분쟁 및 토르데시야스 조약

콜럼버스가 알카소바스 조약을 위반했음을 인지한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이 사실을 스페인에 통보하며 강력히 항의하고 영토 반환을 요청하자 양국간에 분쟁이 발생했다.[34] 양국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청에 분쟁 조정을 요청하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 3일 칙령을 통해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교황의 중재안은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에 유리하며 편파적이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는 교황의 중재안을 거부했다.[35]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 단독으로[36] 약 1년여의 협상 과정을 거쳐 1494년에 새로운 영토 경계선을 규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37]

5. 역사적 의의

알카소바스 조약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미래 발견을 위한 영역"을 최초로 정의한 문서이며,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제도에 대한 두 왕국의 권리를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0] 그러나 이 조약은 유럽 열강이 세계를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원주민의 동의 없이 영토를 식민지화할 권한을 가진다는 원칙을 공식화했기에 비판받기도 한다.[11] 이 조약은 이후 토르데시야스 조약[12], 베를린 회의 등 유사한 원칙에 기반한 국제 조약들의 선례가 되었다.[11]

5. 1. 식민주의 팽창의 선례

알카소바스 조약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미래 발견을 위한 영역"을 최초로 정의한 문서이며, 특히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제도에 대한 두 왕국의 권리"를 명확히 구분했다.[10] 이 조약은 식민주의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유럽 열강이 나머지 세계를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그 안의 영토를 식민지화할 권한을 가지며, 거기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최초의 국제 문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 탈식민화까지 유럽 열강의 이념과 관행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원칙으로 남았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동일한 기본 원칙에 기반한 많은 후속 국제 조약 및 문서의 시초로 간주될 수 있다.[11] 여기에는 세계 탐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입장을 더욱 명문화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12]과, 4세기 후 아프리카를 식민지 세력권으로 나눈 1884년 베를린 회의의 결의안이 포함된다.

5. 2. 비판적 시각

알카소바스 조약은 유럽 열강이 세계를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원주민의 동의 없이 영토를 식민지화할 권한을 가진다는 원칙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최초의 국제 문서 중 하나로, 20세기 탈식민화까지 유럽 열강의 이념과 관행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원칙으로 남았다.[11]

이 조약은 식민주의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미래 발견을 위한 영역"을 최초로 정의하면서,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제도에 대한 두 왕국의 권리를 명확히 구분했다.[10] 이는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영토 분할을 정당화하고, 원주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12], 1884년 베를린 회의 등 동일한 기본 원칙에 기반한 많은 후속 국제 조약 및 문서의 시초로 여겨진다.[11]

참조

[1]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 서적 A history of Portuguese overseas expansion, 1400–1668 http://www.google.co[...] Routledge
[3] 서적 (제목 없음)
[4] 서적 European Treaties Bearing o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nd Its Dependencies to 1648 https://books.google[...] 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Lawbook Exchange
[5] 서적 Spain, the mainland https://books.google[...] E. Benn
[6] 서적 Atlantic emporium: Portugal and the wider world, 1147–1497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the South
[7] 서적 The council of the Santa Hermandad: a study of the pacification forces of Ferdinand and Isabell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ami Press
[8] 서적 Década IV https://books.google[...]
[9] 서적 1494: How a family feud in Medieval Spain divided the world in half https://books.google[...] D and M publishers inc.
[10] 서적 Toscanelli and Columbus https://archive.org/[...] Sands & Co. 2020-12-29
[11] 서적 The epochs of international law https://books.google[...] De Gruyter 2020-12-29
[12]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3] 서적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4] 서적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5] 서적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6] 서적 European Treaties Bearing o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nd Its Dependencies to 1648 https://books.google[...] 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Lawbook Exchange
[17] 서적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8] 서적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9] 서적 Spain, the mainland E. Benn
[20] 서적 Atlantic emporium: Portugal and the wider world, 1147–1497 University press of the South
[21] 서적 A history of Portuguese overseas expansion, 1400–1668 Routledge
[22] 서적 Década IV
[23] 서적 Isabel of Castile The Knickerbocker Press
[24]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5] 서적 The Spain of the Catholic Monarchs 1474–1520 Blackwell Publishers Inc
[26] 서적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7] 서적 Decada IV
[28] 서적 Decada IV
[29] 서적 Chronica de El-Rei D. Affonso V
[30] 서적 Portugueses en la frontera de Granada
[31] 서적
[32] 서적 (제목 없음) MAPFRE
[33] 서적 El segundo viaje colombino University of Valladolid
[34] 서적 조약의 세계사 https://terms.naver.[...] 미래의 창
[35] 서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36] 서적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37] 서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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