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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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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콩키스타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과 벌인 투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9세기 말부터 기독교 세력의 영토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11세기 십자군의 영향으로 종교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13세기 중반 그라나다를 제외한 이슬람 세력이 소멸하고,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레콩키스타가 종결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스페인 민족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문학 작품과 축제에 반영되었다. 또한, 스페인어와 문화 전반에 이슬람 문명의 흔적을 남겼다. 현대에는 스페인 극우 세력의 이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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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국경의 후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국경의 후퇴
분쟁 개요
분쟁유럽 종교 전쟁
날짜711년/722년 - 1492년
장소이베리아 반도
결과포르투갈 왕국,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탈환
스페인 제국콩키스타도르의 형성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혼합
교전 세력
교전국 1기독교 왕국들
교전국 1 상세아스투리아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 (910-1230)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1385)
제노바 공화국
몰타 기사단
산티아고 기사단
교황청
교전국 2알안달루스
교전국 2 상세우마이야 칼리파국 (-751)
코르도바 토후국 (756-929)
무라비트 왕조 (1040-1147)
무와히드 칼리파조 (1121-1269)
마린 술탄국 (1244-1465)
그라나다 토후국 (1248-1492)
지휘관
지휘관 1엘 시드
스페인 지휘관알폰소 7세
페르난도 2세
페르난도 3세
하우메 1세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9세
알폰소 11세
알폰소 10세
엔리케 2세
엔리케 3세
후안 2세
이사벨 1세
페란도 2세
포르투갈 지휘관아폰수 1세
산슈 1세
아폰수 2세
산슈 2세
디니스
페드루 1세
페르난두 1세
주앙 1세
아폰수 5세
주앙 2세
지휘관 2타리크 이븐 지야드
코르도바 토후국 지휘관아브드 알 라흐만 1세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알 만수르
무라비트 왕조 지휘관유수프 이븐 타쉬핀
알리 이븐 유슈프
무와히드 칼리파조 지휘관아부 야쿠브 유수프 1세
야쿠브 알 만수르
무함마드 앗 나시르
마린 술탄국 지휘관아부 야쿠브 유수프 앗 나스르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
아불 하산 알리
아부 이난 파리스
그라나다 토후국 지휘관무함마드 1세
무함마드 7세
무함마드 12세

2. 개념 및 기간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의 분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중세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용어는 사건 발생 후 수 세기가 지나서야 역사학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레콩키스타'는 때때로 학자들이 이념적 분쟁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특정 관심사나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64]

9세기 말,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해야 한다는 미개척지주의적 이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64] 예를 들어, 익명의 기독교 연대기인 《크로니카 프로페티카》(883~884)는 711년 이슬람에게 정복된 서고트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을 주장하며, 히스파니아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적, 종교적 분열을 강조하고 무슬림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북부 기독교 왕국 주민들과 남부 이슬람 지배 엘리트 사이에는 민족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분열 의식이 존재했다.[164]

오른쪽


20세기 초 역사학에서는 레콩키스타의 기원을 선형적으로 접근하려 했으나,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었다.[164] 예를 들어, 평화로운 공존, 또는 적어도 국경에서의 제한적이고 국지적인 소규모 충돌 기간이 이베리아에서 781년의 무슬림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 왕국과 알-안달루스 사이의 군사적 갈등 기간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다.[164]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 군주들은 다른 기독교도와 무슬림과 싸웠고, 9세기 초 아리스타 왕조와 바누 카시 사이와 같이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협력과 동맹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164][166] 양측의 용병이 단순히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은 구분을 더욱 흐리게 했다.[166] 오늘날 이 기간은 상대적인 종교적 공존과 관용의 긴 에피소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67] 지속적인 '레콩키스타'라는 개념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도전받아 왔다.[168][169]

이슬람 알모아드 왕조와 주변 국가,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을 포함하여 1200년경.


11세기 후반에 시작된 십자군은 기독교 재정복의 종교적 이념을 강화시켰다.[170] 클레르몽 공의회 직전, 스페인 왕들은 종교적 차이를 무슬림과 싸울 이유로 사용했지만, 이전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70] 당시 알-안달루스에서 기독교 국가는 알모라비드에 직면했고, 더 나아가 지하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알모하드에 직면했다. 사실, 10세기와 11세기에 해당하는 이전의 문서들은 "재정복"이라는 생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169] 무슬림과 기독교인 적대감에 대한 선전 기록이 그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특히 론세스바예스 전투의 허구적 재현을 제공하는 11세기의 프랑스 무용담인 ''롤랑의 노래''는 이베리아의 ''사라센''(무어인)을 다루고, 수백 년 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1870년 패배 이후 국민의 도덕적, 국가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프랑스 학제에 도입되었다.[171][172][173]

프란시스코 프랑코


'레콩키스타'라는 현대적 개념의 통합은 19세기 스페인 민족주의의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중앙 집권적이고 카스티야적이며 확고한 가톨릭적인 민족주의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으며, 민족주의적, 낭만적, 때로는 식민주의적 주제를 연상시킨다. 이 개념은 프랑코 정권 시기인 20세기에 더욱 발전하여,[174]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인 국가 가톨릭주의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 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고, 기독교 왕국들의 재정복 과정을 미화하려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175]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는 지역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위협받는 스페인을 지키고자 했으며, 무슬림을 상대로 한 '해방 전쟁'이라는 레콩키스타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펠라기우스와 엘 시드를 내세우며 국민파가 분열된 교회와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십자군'이라 선전했고, '공산주의에 대한 레콩키스타', '독립을 꿈꾸는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레콩키스타'라 칭하며 스스로를 '레콩키스타도르'(재정복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2018년 당시 레콩키스타는 스페인의 우파~극우 정당들이 진보주의 및 지역 민족주의 세력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174][176][177][178][179]

스페인 내전 동안 공화파는 국민파 중 북아프리카 출신(대부분 모로코)의 아프리카 군단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국민파를 '외부로부터 온 적'이라며 레콩키스타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선전했다.[180]

일부 현대 작가들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국가 건설 과정이 과거 무어인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세기에 걸쳐 탈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레콩키스타 개념에 동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페인' 건국은 이베리아 기독교 왕국들의 "재정복" 과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181] 그러나 최근 다른 역사가들은 레콩키스타 개념이 후대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성'을 만들어낸 개념이라 비판한다. 일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레콩키스타 이전에는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독교 서고트 왕국의 상속자는 기술적으로 그들을 '재'정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82][183]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8세기 동안 이어진 '재정복'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스페인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184] 비록 많은 의문이 남아있지만,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185]

3. 역사

711년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이후부터 후우마이야 왕조 멸망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718년, 서고트 왕국 귀족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에서 기독교도를 이끌고 봉기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했다. 많은 사학자들은 이 해를 레콩키스타의 시작으로 본다. 722년(혹은 718년, 724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펠라요가 승리하면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국가의 첫 승리를 기록했다. 이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상징적인 첫 승리였고, 이후 아스투리아스는 레콩키스타의 거점이 되었다. 같은 시기, 칸타브리아 호족 페드로 공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있었다. 두 나라는 연합했고, 페드로 공의 아들 알폰소 1세는 펠라요의 딸과 결혼했다. 곧 양국은 통합되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남쪽으로 반격을 시작했다.[49]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 궁재 카를 마르텔이 승리하여 무슬림 세력의 피레네 산맥 이북 진출을 저지했다. 751년 메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되면서, 프랑크는 팽창 정책으로 이베리아 진출을 노렸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쿠스의 칼리프가 각지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750년, 아부 알-아바스 아스-사파가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아바스 혁명).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압드 알-라흐만 1세는 756년 코르도바에서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지만, 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배려하여 "코르도바의 아미르"를 칭했다.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중세 시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191] 중세 역사에서 이 용어는 사건 발생 후 수백 년이 지나서 발전했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실제 재정복으로서의 의미는 때때로 이념적 분쟁에서 무기로 사용했던 학자들의 특정 관심사나 편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후대에 "레콩키스타" 개념의 일부가 된 미개척지주의 이데올로기는 9세기 말경에 기독교의 반도 재정복에 대한 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164] 예를 들어, 익명의 기독교 연대기 ''예언 연대기''(883–884)는 711년 무슬림에게 정복된 서고트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 사이의 역사적 연결을 주장했으며, 히스파니아의 기독교와 무슬림의 문화적, 종교적 분열을 강조하고 무슬림을 몰아내고 정복된 영토를 복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양측의 글에서 북부의 작은 기독교 왕국 주민과 무슬림 지배 하의 남부 지배 엘리트 사이에는 민족과 문화를 기반으로 한 분열 의식이 있었다.[164]

20세기 초 역사학에서 사용된 ''레콩키스타''의 기원에 대한 선형적 접근 방식은 여러 문제로 복잡하다.[164] 평화로운 공존 또는 국경에서의 제한적이고 국지적인 소규모 충돌 기간은 이베리아에서 781년의 무슬림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 왕국과 알-안달루스 사이의 군사적 갈등 기간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다.[164] 또한, 기독교도와 무슬림 통치자 모두 다른 기독교도 및 무슬림과 싸웠고, 9세기 초 아리스타 왕조와 바누 카시 사이와 같이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협력과 동맹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164][166] 양측의 용병이 단순히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은 구분을 더욱 흐리게 했다.[166] 오늘날 이 기간은 상대적인 종교적 공존과 관용의 긴 에피소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67] 지속적인 ''레콩키스타''라는 개념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도전받아 왔다.[168][169]

11세기 후반 십자군은 기독교 재정복의 종교적 이념을 낳았다.[170] 클레르몽 공의회 직전 스페인 왕들은 종교적 차이를 무슬림과 싸울 이유로 사용했지만, 이전에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았다.[170] 당시 알-안달루스에서 기독교 국가는 알모라비드에 직면했고, 나아가 지하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알모하드에 직면했다. 10세기와 11세기의 이전 문서들은 "재정복"이라는 생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169] 무슬림과 기독교인 적대감에 대한 선전 기록이 그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특히 론세스바예스 전투의 허구적 재현을 제공하는 11세기의 프랑스 무용담 ''롤랑의 노래''는 이베리아의 ''사라센''(무어인)을 다루고, 수백 년 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1870년 패배 이후 국민의 도덕적, 국가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프랑스 학제에 도입되었다.

"''레콩키스타''"라는 현대적 개념의 통합은 19세기의 스페인 민족주의의 기초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앙 집권적이고 카스티야적이며 완강하게 가톨릭적인 브랜드의 민족주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으며, 민족주의적, 낭만적, 때로는 식민주의적 주제를 연상시킨다. 이 개념은 프랑코주의 시대에 20세기에 더욱 발전했다.[174] 이는 정권의 신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정체성인 국가 가톨릭주의의 역사적 담론의 핵심적인 원칙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담론은 알-안달루스의 공인된 역사적 비합법성과 기독교 정복의 숭고화를 통해 가장 전통적인 형태로 뒷받침되었다.[175]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무슬림에 대한 "재정복"의 "해방 전쟁"이라는 생각은 스페인 내전 동안 반공화파 반군에게 적합했으며, 이들은 스페인 조국의 기치를 위해 선동했으며, 지역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의 반란 추구는 펠라기우스 아스투리아스와 엘 시드 모두를 대표하는 프랑코가 있는 교회의 통일을 복원하기 위한 십자군이었다. ''레콩키스타''는 2018년 현재 다양한 정치적 맥락에서 재임 중인 진보적 또는 주변 민족주의 선택과 그들의 가치를 사무실에서 몰아내기 위해 스페인의 우익 및 극우 정당의 집결 호소가 되었다.[174][176][177][178][179]

같은 종류의 선전은 스페인 내전 동안 공화파에 의해 유포되었으며, 특히 프랑코 군대 중 아프리카 군의 두드러진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적을 외세 침략자로 묘사하고자 했으며, 이 군대는 북아프리카 출신 원주민 병사로 구성되었다.[180]

일부 현대 저자는 "''레콩키스타''"를 이베리아의 기독교 국가 건설 과정이 과거 여러 세대에 걸쳐 무어인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으로 자주 정의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 건설은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아니지만, 이베리아 국가가 "재건"되고 있는 과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181] 반대로, 다른 최근 역사학자들은 "''레콩키스타''"라는 전체 개념을 나중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a posteriori''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소수의 역사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전에는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서고트 왕국의 상속자는 기술적으로 이름을 암시하는 것처럼 그들을 ''재''정복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82][183] 8세기에 걸쳐 지속된 "재정복"이라는 생각을 의심한 최초의 스페인 지식인 중 한 명은 20세기 전반기에 글을 쓴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였다.[184] 그러나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185]

19세기부터 전통적인 서양 역사학, 개중에서도 스페인의 역사학은 토착 원주민으로부터 영토를 군사적인 수단으로 점령한 공통의 적ㅡ이슬람을 신봉하는 무슬림 세력에 대해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이 저항해 나가면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재정복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레콩키스타의 실체와 그 존재를 강조해왔다.[191][169]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지금의 레콩키스타가 스페인 민족주의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 이러한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192][193] 이 개념은 '스페인이 이슬람에 대항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이베리아에서의 이슬람의 존재(알안달루스)를 인정하지만, 대신에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의 영토를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중세의 과거에 대한 편향되고 왜곡된 비전"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194] 다른 주장들 중에서도 특히 학자들이 발전시킨 것 중 하나는, "어떠한 군사적 사건도 8세기 동안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95] 이러한 의미에서의 ''레콩키스타''는 19세기 무렵에야 처음 등장했으며, 1936년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권력을 잡으면서 스페인 왕립 학술원(RAE)의 사전에 등록되기도 했다.[196]오늘날에도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간간이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을 접한 스페인의 극우포퓰리즘적 정당인 Vox이슬람 제노포비아를 가진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인다.[194]

엘 시드를 묘사한 동상


레콩키스타와 관련된 여러 서사시와 노래는 중세 갈리시아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로 창작되었다. 특히 스페인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엘 시드의 인생을 다룬 서사시는 매우 유명하다.

레콩키스타는 때때로 7세기가 넘는 북부 기독교 왕국들 간의 내분으로 인해 잠시 미뤄지기도 했다. 그동안 기독교 세력과 알안달루스는 대부분 휴전 조약을 맺거나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특히 이슬람 측에서는 왕조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체가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스페인 사람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더욱더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영내 유대인이나 무어인을 철저하게 추방하려 했다. 무어인은 물론이고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 기간 동안 기독교인에 비해 많은 자유를 누리며 무슬림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0,000명의 모리스코들이 추방당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 전문직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어인의 대량 추방으로 스페인은 종교적 열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형성했으나, 경제 및 사회 구조가 완전히 무너졌다. 알람브라 칙령 이후 발렌시아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경제의 토대를 구성하던 노동 인구부터 급격히 감소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이 추방되자 스페인 고유의 문화적,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져 내렸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의 첨병에 나섰지만, 제노바 공화국아웃소싱할 수밖에 없었다.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제노바 상인들은 카스티야 내륙 지방의 조세권,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의 경제적 이권 등을 챙기면서 장기적으로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틀어지는 악영향을 끼쳤다. 스페인 제국은 중세의 종교적 공존 체제 콘비벤시아(Convivencia)를 해체하면서 전성기에 올랐지만, 제국 몰락의 원인 중 상당수는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 상실에서 기인했다.

그라나다 함락이 레콩키스타의 끝으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과 로마 영토였던 마우레타니아(모로코, 북알제리, 서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이 완료되지 않는 한 진정한 레콩키스타의 완료가 아니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공동왕과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스페인의 첫 번째 공주 이사벨을 포르투갈 왕가의 계승자 아폰수에게 시집보내 포르투갈 + 카스티야 + 아라곤의 모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진정한 스페인의 왕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아폰수는 사망했고 이사벨은 재혼을 거부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이라는 이상을 품은 두 왕가는 알폰소의 동생 마누엘과의 재혼을 추진했지만, 마누엘과 재혼한 이사벨마저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이 '미겔'은 평화왕으로 추앙받았으나 요절했다.

살아남은 다른 공주들은 이미 다른 왕가에 시집갔고, 유일한 후계자였던 후안마저 요절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 진정한 스페인이라는 야망은 흩어졌다. 합스부르크 황실로 시집 간 후아나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제튀니스 등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프랑스 발루아 왕가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제국을 함께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황가를 경계하면서 전쟁을 벌여 합스부르크는 국력 대부분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낭비했고, 스페인의 여력을 소진시켰다.

1580년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가의 대가 끊기고 마누엘 1세의 외손자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이베리아 연합)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스페인의 지배에 질린 포르투갈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베리아 재통합은 무산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과거의 통합과 평화왕을 그리워하며 (지브롤터 탈환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지 않는 이상 레콩키스타는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1002년 만수르 사후, 후우마이야 왕조는 쇠퇴했다. 1008년 코르도바 쿠데타로 산추엘로는 살해되고 히샴 2세는 퇴위당했다. 무함마드 2세와 술레이만 두 명의 칼리프가 옹립되어 내란이 일어났다. 1031년 히샴 3세 폐위로 후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고, 이베리아 반도는 타이파라 불리는 이슬람 소국들이 난립했다. 세비야, 사라고사, 톨레도, 그라나다, 바다호스 등 주요 타이파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유령을 분할했고, 서로 지배권을 다투었다.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무와히드 왕조는 쇠퇴했다. 1224년 유수프 2세 사망 이후 후계자 쟁탈전과 모로코에서의 베르베르족 반란으로 이베리아 지배력을 상실하고 소국들이 난립했다. 기독교 세력은 이 혼란을 틈타 남쪽으로 침공했다.

1230년, 레온 왕국포르투갈 왕국은 협력하여 이베리아 남서부를 침공, 레온은 메리다바다호스를, 포르투갈은 엘바스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아라곤 왕국과 협력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하여 1235년까지 제압했다. 같은 해, 레온 왕 알폰소 9세 사망 후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여 카스티야 왕국이 되었다.

카스티야는 1233년 우베다, 1236년 코르도바, 1243년 무르시아, 카르타헤나, 로르카를 공략했다. 아라곤은 1238년 발렌시아, 1248년 사티바를 점령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알미스라 조약으로 정복지를 분할했다. 1246년 카스티야는 세비야를 포위, 1248년 함락시켰다. 1251년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 나스르 왕조만 남았다.

1350년 페드로 1세 즉위 후 카스티야는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돌입했다. 1369년 엔리케 2세가 왕위를 찬탈,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교체되었다. 1388년 바욘 조약으로 왕조의 화합이 이루어졌다. 1474년 이사벨 1세 즉위,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 왕위에 오르며 공동 통치하였다.

레콩키스타 연표
연도사건
711년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상륙, 과달레테 강 전투 승리, 서고트 왕국 멸망
718년펠라요의 아스투리아스 왕국 건국
722년코바동가 전투에서 펠라요의 승리
732년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승리
750년우마이야 왕조 멸망, 아바스 왕조 흥기
751년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
756년압드 알 라흐만 1세의 후 우마이야 왕조 건국
778년샤를마뉴의 피레네 남하, 롱세보 전투. 후 우마이야 왕조의 팜플로나 공략
801년프랑크 왕국의 바르셀로나 공략
805년아스나르 갈린도 1세의 아라곤 백작령 건국
824년이ñ이고 아리스타의 나바라 왕국 건국
905년산초 1세의 나바라-아라곤 통합
914년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레온 천도, 레온 왕국 성립
929년압드 알 라흐만 3세의 칼리프 자칭
932년카스티야 백작령 창설
939년시만카스 전투 승리
976년히샴 2세 즉위, 무함마드 이븐 아비 아미르 (만수르) 대두
1008년코르도바 쿠데타, 후 우마이야 왕조 내란
1029년산초 3세의 카스티야 병합
1031년후 우마이야 왕조 멸망, 타이파 시대
1035년산초 3세 사망,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건국
1037년페르난도 2세의 레온 병합,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
1065년페르난도 2세 사망, 카스티야-레온 분할 상속
1072년알폰소 6세의 카스티야-레온 재통합
1076년산초 4세 암살, 아라곤의 나바라 계승
1085년알폰소 6세의 톨레도 함락
1086년알모라비 왕조 상륙, 잘라카 전투 승리
1091년알모라비 왕조의 타이파 병합 시작 (~1110년)
1118년알폰소 1세의 사라고사 공략
1134년카탈루냐-아라곤 연합 왕국 성립
1139년오리케 전투 승리, 포르투갈 왕국 독립 (1143년 승인)
1147년알모라비 왕조 멸망, 알모하드 왕조 흥기
1198년인노켄티우스 3세의 대 이슬람 통일 전선 호소
1212년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승리
1224년유수프 2세 사망, 알모하드 왕조 내란
1230년레온의 바다호스, 메리다, 포르투갈의 엘바스 공략, 아라곤-포르투갈의 발레아레스 제도 공격 (~1235년)
알폰소 9세 사망, 페르난도 3세의 레온 계승, 카스티야-레온 통합
1235년나스르 왕조그라나다 공략 (1238년 천도)
1236년카스티야의 코르도바 공략
1238년아라곤의 발렌시아 제압
1248년카스티야의 세비야 점령
1251년나스르 왕조만 남음
1260년카스티야의 아프리카 침공 시작
1269년마린 왕조의 마라케시 점령, 알모하드 왕조 멸망
1275년마린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 시작
1350년페드로 1세 즉위,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1369년엔리케 2세 즉위, 트라스타마라 왕가
1469년페르난도-이사벨 결혼
1474년이사벨 1세 즉위
1479년페르난도 2세 즉위, 스페인 왕국 탄생
1492년그라나다 함락, 나스르 왕조 멸망, 레콩키스타 종결


3. 1. 배경

718년, 서고트 왕국의 귀족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기독교도를 이끌고 봉기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했다. 많은 사학자들은 레콩키스타의 시작을 이 해로 보고 있다. 722년(혹은 718년, 724년) 펠라요는 코바동가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국가로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도에게는 상징적인 첫 승리였다. 이후 아스투리아스는 레콩키스타의 거점이 되었다. 같은 시기, 칸타브리아의 페드로 공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있었다. 두 나라는 협력하여, 페드로 공의 아들 알폰소 1세는 펠라요의 딸과 결혼했다. 곧 두 나라는 통합되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점차 남쪽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궁재 카를 마르텔이 승리하여 무슬림 세력의 피레네 산맥 이북 진출을 막았다. 751년 메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되면서, 프랑크는 팽창 정책으로 전환하여 이베리아 진출을 시작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넓은 영토 각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지만, 다마스쿠스의 칼리프는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750년, 아부 알-아바스 아스-사파가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아바스 혁명).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압드 알-라흐만 1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 756년, 코르도바에서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다. 다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코르도바의 아미르"를 칭했다.

후 우마이야 왕조는 북쪽의 기독교 세력, 국내의 아바스 왕조 지지자, 왕위를 노리는 왕족이나 귀족(우마이야 왕조의 유신)들로 인해 통치가 불안정했다. 압드 알라흐만 1세는 반항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지만, 이로 인해 일부 반항 세력이 프랑크 왕국에 접근하여 이베리아 침투를 초래했다.

778년, 샤를마뉴가 이끄는 프랑크 군은 남하하여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본국에서의 반란 소식에 철수해야 했다. 이때, 추격해 온 바스크 족과의 론세스바예스 전투가 일어났고, 후에 이 전투에서 전사한 브르타뉴 공 롤랑(루도란두스)을 모델로 하여 "롤랑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압드 알라흐만 1세는 이 기회에 팜플로나를 공략하여 북부 제압의 발판을 마련했다.

785년부터 프랑크 왕국은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루트비히 1세가 이끄는 프랑크 군은 지중해 방면에서 침공하여, 지로나를 공략하여 스페인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프랑크 군은 계속 남하하여, 801년에는 바르셀로나를 공략했다. 후 우마이야 군의 요격으로 침공은 중지되었지만, 바르셀로나는 프랑크 군의 군사 거점이 되었다. 865년, 프랑크는 바르셀로나 백작을 두고, 카탈루냐를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카탈루냐는 점차 프랑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결국 완전히 독립했다.

팜플로나는 한때 정복당했지만, 이네고 아리스타를 중심으로 곧 반기를 들었다. 이네고 아리스타는 후 우마이야 왕조의 진압군을 격퇴했고, 프랑크 군도 격퇴했다. 같은 시기, 하카에서도 아스나르 갈린도 1세가 프랑크 귀족을 몰아냈다. 이 두 반란으로 후 우마이야 왕조와 프랑크 왕국 모두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졌다. 805년, 아스나르 갈린도 1세가 아라곤 백령을 세웠고, 824년, 이네고 아리스타가 나바라 왕국(팜플로나 왕국)을 세웠다. 인접한 두 나라는 처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905년, 산초 1세 대에 혼인을 통해 통합했다.

3. 1. 1.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الأندلس|알 안달루스ar 이전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서고트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한 내분과 취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186]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크 왕이 이끄는 서고트 군대는 이슬람 군대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42]

로데리크 왕의 패배 이후,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는 타리크 이븐 지야드와 합류하여 히스파니아의 여러 도시와 요새를 공격했다. 712년에는 메리다, 코르도바, 사라고사와 같은 주요 거점들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피레네산맥 이남의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다만, 테오데미르의 팜플로나는 이슬람에게 복속하는 대가로 자치를 허용받았다. 무슬림들은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였다.

3. 1. 2. 이슬람의 약화

우마이야 왕조는 피정복민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지즈야(인두세)를 부과했다. 세파르딤(유대교도)와 모사라베(기독교도)는 지즈야를 납부하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사회적 격차는 존재했다.[42] 이 때문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잇따랐고, 고액의 지즈야를 피해 북부로 도망가거나 반란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43]

710년대 말까지, 무슬림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북상하여 칸타브리아 산맥 이북 및 피레네 산맥 이북까지 기독교 세력을 몰아넣었다. 이베리아 반도 남부는 이슬람의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의 어원)로 불리게 되었다.

739년에는 아랍인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베르베르인들이 대규모 항거를 일으켰다.

3. 2. 전개

718년, 서고트 왕국의 귀족 펠라요가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기독교도를 이끌고 봉기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했다. 많은 사학자는 레콩키스타의 시작을 이 해로 설정하고 있다. 722년 (혹은 718년, 724년이라고도 함) 코바동가 전투에서 펠라요가 승리하면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국가의 첫 승리를 기록했다.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도에게는 상징적인 첫 승리였으며, 이후 아스투리아스는 레콩키스타의 거점이 되었다. 같은 시기, 칸타브리아의 호족 페드로 공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있었다. 두 나라는 연합했고, 페드로 공의 아들 알폰소 1세는 펠라요의 딸과 결혼했다. 곧 양국은 통합되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남쪽으로 반격을 시작했다.[49]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궁재 카를 마르텔이 승리하여 무슬림 세력의 피레네 산맥 이북 진출을 저지했다. 751년 메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되면서, 프랑크는 팽창 정책으로 이베리아 진출을 노렸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다마스쿠스의 칼리프가 각지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750년, 아부 알-아바스 아스-사파가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 (아바스 혁명).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압드 알-라흐만 1세는 756년 코르도바에서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했지만, 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배려하여 "코르도바의 아미르"를 칭했다.

1002년 만수르 사후, 후우마이야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의 아들 산추엘로 (어머니는 나바라 왕의 딸)는 칼리프 후계자를 자칭하고 베르베르인을 우대하여 많은 세력의 반감을 샀다. 1008년 코르도바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산추엘로는 살해되고 히샴 2세는 퇴위당했다. 무함마드 2세와 술레이만 두 명의 칼리프가 옹립되어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술레이만은 카스티야에 지원을 요청하여 코르도바 공략에 성공했지만, 이는 선례가 되어 각지의 반란자들이 북부 기독교 세력을 내란에 끌어들였다. 내란은 격화되었고, 칼리프의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1031년 히샴 3세가 폐위되면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타이파라 불리는 이슬람 소국들로 분열되었다. 세비야, 사라고사, 톨레도, 그라나다, 바다호스 등 주요 타이파들이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를 분할하여 서로 지배권을 다투었다.

1031년 후우마이야 왕조 멸망 이후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었고, 기독교 세력은 국토 회복 운동을 추진했다.

1224년, 유수프 2세 사망 후 무와히드 왕조는 후계자 쟁탈전으로 3명의 칼리프가 옹립되며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모로코에서도 베르베르족의 반란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무와히드 왕조는 이베리아 지배력을 상실하고 여러 소국이 난립했다. 기독교 세력은 이 혼란을 틈타 남쪽으로 침공을 재개했다.

1230년, 레온 왕국포르투갈 왕국은 협력하여 이베리아 남서부를 침공, 레온은 메리다바다호스를, 포르투갈은 엘바스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아라곤 왕국과 협력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 1235년까지 제압하고 제도를 양국으로 분할했다. 같은 해 말, 레온 왕 알폰소 9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여 양국은 통합, 카스티야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은 1233년 우베다를 공략하고, 1236년6월 29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1243년무르시아가 항복하고, 여름까지 카르타헤나, 로르카를 공략했다. 아라곤은 1238년 발렌시아를 제압하고, 1248년 사티바를 공략했다. 그라나다 동쪽은 모두 기독교 세력의 차지가 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알미스라 조약을 체결하여 정복지를 분할했다.

1246년, 카스티야는 세비야를 포위, 2년간의 공성전 끝에 1248년11월 23일 함락시켰다. 이후 카스티야는 1251년까지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했다. 이로써 그라나다나스르 왕조를 제외한 무슬림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졌다.

3. 2. 1. 초반부

안바사 이븐 수하임 알칼비 에미르가 기독교인에게 세금을 대폭 인상하자 알-안달루스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고, 이후 무능한 에미르들은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49] 722년경, 무슬림 군사 원정대가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스페인어로는 펠라요, 아스투리아스어로는 펠라유)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전통적인 역사학은 펠라기우스의 코바동가에서의 승리를 ''레콩키스타''의 시작으로 칭송한다.[49]

나바라[50]아스투리아스 두 북부 왕국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코르도바에 기반을 둔 우마이야 왕조 통치자들은 피레네 산맥 너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아랍-베르베르 군대는 아스투리아스 깊숙이 정기적으로 침입했지만, 이 지역은 캠페인 기간 동안 불편함이 많고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슬람 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한 ''막다른 골목''이었다.[51]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1세는 메세타의 아랍-베르베르 요새를 습격하는 데 집중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영토를 인근 갈리시아인과 바스크인들을 희생시켜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52] 초창기에는 아스투리아스가 왕국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고, 이 때문에 혼인 동맹과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했다. 737년 펠라요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투리아스의 파빌라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파빌라는 용기 시험을 하던 중 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 왕조는 살아남아 왕국의 경계를 점차 확장하여 775년경에는 히스파니아 북서부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 연대기에서는 그와 그의 후계자들, 즉 ''바누 알폰스''에게 공을 돌리고 있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791년부터 842년까지) 재위 기간 동안 북서부 왕국의 남쪽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한 왕의 원정대가 798년에 리스본에 도착하여 약탈했는데, 이는 아마도 카롤링거 왕조와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53]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샤를마뉴와 교황이 알폰소 2세를 아스투리아스 왕으로 인정한 후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야고보의 유해가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되었다고 선언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수 세기 후 고립된 아스투리아스와 카롤링거 영토 및 그 너머를 연결하는 소통 채널을 열었다.[54]

3. 3. 중반부

안바사 이븐 수하임 알-칼비 에미르가 기독교인에게 세금을 대폭 인상하자 알-안달루스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고, 이후 에미르들은 이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49] 722년경, 무슬림 군사 원정대가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전통적인 역사학은 펠라기우스의 코바동가 전투에서의 승리를 ''레콩키스타''의 시작으로 본다.[49]

나바르[50]와 아스투리아스 두 북부 왕국은 규모는 작았지만 독립을 유지했다.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 통치자들은 피레네 산맥 너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권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아랍-베르베르 군대는 아스투리아스 깊숙이 정기적으로 침입했지만, 이 지역은 이슬람 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한 ''막다른 골목''과 같았다.[51]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1세는 메세타의 아랍-베르베르 요새를 습격하는 한편, 갈리시아인과 바스크인들을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했다.[52] 초기 아스투리아스는 왕국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혼인 동맹과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했다. 737년 펠라요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투리아스의 파빌라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파빌라는 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 왕조는 살아남아 775년경에는 히스파니아 북서부 전체를 포함하도록 왕국을 확장했다. 아랍 연대기에서는 그와 그의 후계자들을 ''바누 알폰스''라고 칭한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 재위 기간 동안 왕국은 남쪽으로 확장되었으며, 798년에는 리스본을 약탈하기도 했다.[53]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샤를마뉴와 교황이 알폰소 2세를 아스투리아스 왕으로 인정하면서 확고해졌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야고보의 유해가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되었다고 선언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은 고립된 아스투리아스와 카롤링거 영토 및 그 너머를 연결하는 소통 채널을 열었다.[54]

3. 3. 1. 타이파 분열기와 기독교 왕국들의 성장

코르도바 토후국 멸망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제후국들이 난립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타이파 국가라고 불렀는데, 이는 "분파" 또는 "파당"을 뜻하는 아랍어 '물라크 알 타이프(mulūk al-ṭawāʾif)'에서 유래했다.[49] 이들의 상황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비슷했다. 각 타이파는 통치자 배경이 다양했는데, 아랍인, 베르베르인, 슬라브계 맘루크 출신 백인들도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국력과 영토 면에서 무슬림 소국들을 압도하며 "보호 거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들은 타이파 간 전쟁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조공이나 금화를 받아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타이파 전쟁에 개입하여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며 이슬람 세력권을 축소했다.

3. 3. 2. 톨레도 함락 (1085년)

1085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인 알폰소 6세톨레도를 함락한 것은 코임브라 재정복(1061년)이 포르투갈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 것처럼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톨레도는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에 위치한 메세타 고원의 핵심적인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기독교 왕국에게 넘어간 건 레콩키스타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톨레도 시가지의 모습


알폰소 6세의 초상화


톨레도 함락과 비슷한 시기에 십자군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레콩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이 이루어진 시대였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가톨릭 국가들의 연속체로서 '서고트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이어지는 중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으로서 계승성을 표명한 역사적 사료는 9세기의 《알베다 수도원 연대기(Crónica Albedense)》밖에 없었고, 다른 사료들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왕국들의 이베리아 반도 '수복'이란 의식을 딱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이 스페인의 기독교도들을 돕는 것은 레반트에서 성전을 치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선전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간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자 레콩키스타는 가톨릭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 역사적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교황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에게 레콩키스타가 곧 십자군 전쟁이므로 따로 군대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톨레도 함락 이후 약 반 세기 뒤 쓰여진 알폰소 7세 시절 쓰여진 《황제 알폰소 연대기(Chronica Adefonsi imperatoris)》를 기점으로 이후의 연대기와 사료들은 강렬한 종교적, 지정학적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원을 아스투리아스를 넘어 서고트 왕국에서 찾으면서 단순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한때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고토의 회복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3. 3. 3.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이끄는 무라비트 왕조 군대는 알폰소 6세의 기독교 군대를 대파하고, 알안달루스의 타이파들을 보호했다. 유수프는 타이파 통치자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하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말리키파 법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으로 1090년부터 타이파들을 차례로 합병했다. 1106년까지 사라고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타이파들이 무라비트 왕조에 흡수되었다.[49]

무라비트 왕조는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엘 시드가 점령했던 발렌시아를 1102년에 탈환하며 기독교 세력을 압박했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지켰지만, 우클레스 전투에서 아들을 잃었다. 이후 1140년대까지 무라비트 왕조와 가톨릭 국가들은 치열하게 싸웠는데, 초기에는 무라비트 왕조가 우세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무와히드 칼리파조에 의해 몰락하면서 기독교 세력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3. 3. 4.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

무라비트 왕조 통치 하인 1144년경의 이베리아 반도


알리 이븐 유수프는 1138년과 1139년에 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에게 잇달아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알안달루스의 주민들은 타민족 왕조인 무라비트 왕조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마침내 무라비트 왕조는 알안달루스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각지에서는 다시 타이파국들이 생겨났다. 기독교 국가들은 이러한 호재에 큰 탄력을 받아 대대적인 남진을 시작했는데, 일례로 아라곤 왕국우에스카(1096), 사라고사(1118), 토르토사(1148), 레리다(1149) 등을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지중해 연안에 걸친 이베리아 반도 동부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영국과 독일, 플랑드르에서 온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리스본을 함락시키면서 그들의 영토를 약 2배로 늘렸다. 이로써 수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 보였다.

12세기 후반까지 기독교 국가와 무와히드 왕조의 싸움은 거의 호각을 이루었다. 기독교 국가들은 각자의 세력 확장에 중점을 두고 통일 전선을 펼쳐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무와히드 왕조도 본거지가 북아프리카에 있어 동쪽으로의 확장을 주안점으로 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는 그만큼 전력을 쏟지 않았다. 이러한 양 세력의 사정으로 인해 결정적인 국면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1184년에 야쿠브 만수르가 즉위하자 무와히드 왕조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1195년, 알라르코스의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1197년에는 마드리드, 톨레도를 공격하여 기독교 세력을 압박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는 무와히드 왕조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기독교 세력은 위기감을 느꼈다.

3. 4. 후반부

안바사 이븐 수하임 알칼비 에미르가 기독교인에게 세금을 대폭 인상하자 알안달루스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고, 이후 무능한 에미르들은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 722년경, 무슬림 군사 원정대가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전통적인 역사학은 펠라기우스의 코바동가에서의 승리를 ''레콩키스타''의 시작으로 칭송한다.[49]

나바르[50]아스투리아스 두 북부 왕국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코르도바에 기반을 둔 우마이야 왕조 통치자들은 피레네 산맥 너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아랍-베르베르 군대는 아스투리아스 깊숙이 정기적으로 침입했지만, 이 지역은 이슬람 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한 ''막다른 골목''이었다.[51]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1세는 메세타의 아랍-베르베르 요새를 습격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영토를 인근 갈리시아인과 바스크인들을 희생시켜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52] 초창기 아스투리아스는 왕국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고, 혼인 동맹과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했다. 737년 펠라요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투리아스의 파빌라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스투리아스의 펠라요 왕조는 살아남아 왕국의 경계를 점차 확장하여 775년경에는 히스파니아 북서부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 (791년~842년) 재위 기간 동안 북서부 왕국의 남쪽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798년에는 리스본을 약탈하기도 했다.[53]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샤를마뉴와 교황이 알폰소 2세를 아스투리아스 왕으로 인정한 후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야고보의 유해가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되었다고 선언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수 세기 후 고립된 아스투리아스와 카롤링거 영토 및 그 너머를 연결하는 소통 채널을 열었다.[54]

1002년 만수르 사후, 후우마이야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008년, 코르도바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산추엘로는 살해되고 히샴 2세는 퇴위당했다. 무함마드 2세와 술레이만이라는 2명의 칼리프가 옹립되어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1031년, 히샴 3세가 폐위되고, 후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타이파라고 불리는 이슬람 소국들이 병립하게 되었다. 세비야, 사라고사, 톨레도, 그라나다, 바다호스 등 주요 타이파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유령을 분할했고, 그들은 서로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무와히드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224년, 유수프 2세 사망 이후 후계자 쟁탈전과 모로코에서의 베르베르족 반란으로 인해 이베리아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여러 소국이 난립하게 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이 혼란을 틈타 남쪽으로 침공을 재개했다.

1230년, 레온 왕국포르투갈 왕국은 협력하여 이베리아 남서부를 침공, 레온은 메리다바다호스를, 포르투갈은 엘바스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아라곤 왕국과 협력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하여 1235년까지 제압했다. 같은 해, 레온 왕 알폰소 9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여 양국은 통합, 카스티야 왕국이 되었다.

카스티야는 공세를 강화하여 1233년 우베다, 1236년 코르도바, 1243년 무르시아, 카르타헤나, 로르카를 공략했다. 아라곤은 1238년 발렌시아, 1248년 사티바를 점령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알미스라 조약을 체결, 정복지를 분할했다. 1246년 카스티야는 세비야를 포위, 1248년 함락시켰다. 1251년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 나스르 왕조를 제외한 무슬림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소멸했다. 나스르 왕조는 카스티야에 신종을 맹세했다.

1350년 페드로 1세 즉위 후 카스티야는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돌입했다. 1369년, 엔리케 2세가 왕위를 찬탈,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교체되었다. 1388년 바욘 조약으로 왕조의 화합이 이루어졌다. 1474년 이사벨 1세 즉위,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 왕위에 오르며 공동 통치하였다.

레콩키스타 연표
연도사건
711년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상륙, 과달레테 강 전투 승리, 서고트 왕국 멸망
718년펠라요의 아스투리아스 왕국 건국
722년코바동가 전투에서 펠라요의 승리
732년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승리
750년우마이야 왕조 멸망, 아바스 왕조 흥기
751년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로 교체
756년압드 알 라흐만 1세의 후 우마이야 왕조 건국
778년샤를마뉴의 피레네 남하, 롱세보 전투. 후 우마이야 왕조의 팜플로나 공략
801년프랑크 왕국의 바르셀로나 공략
805년아스나르 갈린도 1세의 아라곤 백작령 건국
824년이ñ이고 아리스타의 나바라 왕국 건국
905년산초 1세의 나바라-아라곤 통합
914년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레온 천도, 레온 왕국 성립
929년압드 알 라흐만 3세의 칼리프 자칭
932년카스티야 백작령 창설
939년시만카스 전투 승리
976년히샴 2세 즉위, 무함마드 이븐 아비 아미르 (만수르) 대두
1008년코르도바 쿠데타, 후 우마이야 왕조 내란
1029년산초 3세의 카스티야 병합
1031년후 우마이야 왕조 멸망, 타이파 시대
1035년산초 3세 사망,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건국
1037년페르난도 2세의 레온 병합,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
1065년페르난도 2세 사망, 카스티야-레온 분할 상속
1072년알폰소 6세의 카스티야-레온 재통합
1076년산초 4세 암살, 아라곤의 나바라 계승
1085년알폰소 6세의 톨레도 함락
1086년알모라비 왕조 상륙, 잘라카 전투 승리
1091년알모라비 왕조의 타이파 병합 시작 (~1110년)
1118년알폰소 1세의 사라고사 공략
1134년카탈루냐-아라곤 연합 왕국 성립
1139년오리케 전투 승리, 포르투갈 왕국 독립 (1143년 승인)
1147년알모라비 왕조 멸망, 알모하드 왕조 흥기
1198년인노켄티우스 3세의 대 이슬람 통일 전선 호소
1212년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승리
1224년유수프 2세 사망, 알모하드 왕조 내란
1230년레온의 바다호스, 메리다, 포르투갈의 엘바스 공략, 아라곤-포르투갈의 발레아레스 제도 공격 (~1235년)
알폰소 9세 사망, 페르난도 3세의 레온 계승, 카스티야-레온 통합
1235년나스르 왕조그라나다 공략 (1238년 천도)
1236년카스티야의 코르도바 공략
1238년아라곤의 발렌시아 제압
1248년카스티야의 세비야 점령
1251년나스르 왕조만 남음
1260년카스티야의 아프리카 침공 시작
1269년마린 왕조의 마라케시 점령, 알모하드 왕조 멸망
1275년마린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 시작
1350년페드로 1세 즉위,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1369년엔리케 2세 즉위, 트라스타마라 왕가
1469년페르난도-이사벨 결혼
1474년이사벨 1세 즉위
1479년페르난도 2세 즉위, 스페인 왕국 탄생
1492년그라나다 함락, 나스르 왕조 멸망, 레콩키스타 종결


3. 4. 1. 레콩키스타의 분수령: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212년 7월 16일, 현재 안달루시아 북부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 약 5만 명과 무함마드 나시르가 이끄는 무와히드 왕조군 약 12만 명이 격돌했다.[49]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의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무와히드 군은 6만 명 이상 (10만 명 이상이라고도 함)의 사망자를 냈다고 전해진다.[49] 이로 인해 무와히드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군사력은 크게 감퇴했다.

1184년에 야쿠브 만수르가 즉위하자 무와히드 왕조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49] 1195년, 알라르코스의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1197년에는 마드리드, 톨레도를 공격하여 기독교 세력을 압박했다.[49]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가톨릭의 위신을 발양하고 이슬람 격퇴를 목표로 기독교 국가 간의 싸움을 중지하고 대 무슬림으로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49] 이에 호응하여 유럽에서는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49]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알폰소 8세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되었다.[49] 포르투갈레온에서 병력이 파견되었고, 나바라 왕 산초 7세, 아라곤 왕 페드로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49] 연합군은 총 6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승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다.[49] 카스티야아라곤은 전투 직후 왕이 사망하여 후계자 다툼으로 내란 직전 상태가 되었다.[49] 레온과 포르투갈은 세력 확장에 나섰지만 단독으로 승리할 수 있을 만큼 무와히드 왕조 군이 약화되지 않아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49]

3. 4. 2.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몰락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대패한 후, 무와히드 칼리파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49] 1224년 유수프 2세가 사망하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3명의 칼리프가 옹립되는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같은 시기 모로코에서도 베르베르족의 반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무와히드 왕조는 곧 이베리아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여러 소국이 난립하게 되었다.

1228년, 알안달루스 대부분이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다시 타이파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독교 세력은 이 혼란을 틈타 남쪽으로의 침공을 재개했다. 1230년, 레온 왕국포르투갈 왕국은 협력하여 이베리아 남서부를 침공, 레온은 메리다바다호스를, 포르투갈은 엘바스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아라곤 왕국과 협력하여 발레아레스 제도를 공격, 1235년까지 제압하고 획득한 제도는 양국으로 분할되었다.

같은 해 말, 레온 왕 알폰소 9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여 양국은 통합되었고, 이후에는 단순히 카스티야 왕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은 공세를 강화하여 1233년에 우베다를 공략했고, 1236년 6월 29일에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1243년 초, 무르시아가 카스티야에 항복했고, 여름까지 카르타헤나, 로르카를 공략했다. 한편, 아라곤은 1238년에 발렌시아를 제압했고, 1248년에는 사티바를 공략했다. 이 시점에서 그라나다 동쪽은 모두 기독교 세력의 것이 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정복지의 분할에 관한 협정(알미스라 조약)을 체결하고 각자의 몫을 받았다.

1246년, 카스티야는 세비야를 포위했다. 세비야는 2년에 걸친 공성전을 치렀고, 1248년 11월 23일에 함락되었다. 세비야를 제압한 카스티야는 더욱 남하하여 1251년까지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그라나다나스르 왕조를 제외하고, 무슬림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소멸했다.

1260년, 카스티야는 북아프리카 침공을 시작했다. 1269년, 마린 왕조가 마라케시를 점령하면서 알모하드 왕조는 멸망했다.

3. 4. 3. 기독교 국가들의 대공세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쇠퇴는 레콩키스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 군이 대패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주도권은 기독교 세력에게 넘어갔다.[49] 이후 무와히드 칼리파조는 내분과 쇠퇴를 거듭했고, 1224년 유수프 2세 사망 이후 칼리파 자리를 두고 내란이 발생했다. 이 틈을 타 1225년부터 레온-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무와히드 칼리파조의 알안달루스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230년, 레온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협력하여 이베리아 남서부를 침공, 레온은 메리다, 바다호스를, 포르투갈은 엘바스를 점령했다. 같은 해, 레온 왕 알폰소 9세가 사망하고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국을 계승하면서 양국은 통합되었다.

통합된 카스티야 왕국은 공세를 강화하여 1236년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1243년에는 무르시아가 항복하고, 카르타헤나, 로르카가 함락되었다. 한편, 아라곤 왕국은 1238년 발렌시아를, 1248년에는 사티바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그라나다 동쪽 지역은 모두 기독교 세력의 영토가 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알미스라 조약을 체결하여 정복지를 분할했다.

1246년, 카스티야는 세비야를 포위, 2년간의 공성전 끝에 1248년 함락시켰다. 이후 카스티야는 1251년까지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는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왕국)만이 유일한 이슬람 세력으로 남게 되었고, 나스르 왕조는 카스티야에 신종을 맹세했다.

3. 4. 4. 이슬람 세력 최후의 노력: 마린 술탄국

마린 술탄국은 무와히드 칼리파조가 쇠퇴한 후 모로코 지역에서 건국되었다. 마린 술탄국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개입하여 기독교 세력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1275년, 마린 술탄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역침공하여 카스티야와 전쟁을 벌였으나, 14세기 중반 내분으로 인해 카스티야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는 무슬림 세력에 의한 마지막 이베리아 침공이었다. 1340년 리오살라도 전투에서 마린 술탄국은 패배하며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49]

3. 4. 5. 그라나다 토후국

1232년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그라나다나스르 왕조를 건국하여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으로 삼았다.[49] 나스르 왕조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방어선으로 삼아 기독교 세력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나스르 왕조의 영토


나스르 왕조는 교묘한 외교 전략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 상황에 따라 최적의 동맹 상대를 선택하거나 신종 관계를 맺었다. 1246년부터 시작된 세비야 포위전에는 카스티야의 지휘 아래 참전하기도 했다. 1264년 카스티야의 압력이 강해지자 북아프리카의 마린 왕조를 끌어들여 이에 대항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과 지리적 이점 덕분에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후의 이슬람 세력으로 1492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라나다에는 기독교 세력에 쫓겨난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이주해 왔으며, 이들의 공헌으로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베리아 이슬람 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세계유산 알함브라 궁전은 나스르 왕조 시대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 4. 6. 레콩키스타의 종결: 그라나다 전쟁

Reconquistaes의 종결은 1482년부터 1492년까지 벌어진 그라나다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두 왕국은 연합 왕국을 이루었다. 이 연합 왕국은 1482년그라나다 토후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1486년까지 그라나다의 서쪽 절반을 제압하고, 1489년까지 나머지 동쪽 절반도 제압했다. 1490년, 카스티야는 무슬림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를 포위했다. 그라나다는 2년에 걸친 공성전을 치렀고, 그 사이에 카스티야는 군사 거점으로 산타페를 건설했다. 마침내 1492년 1월 2일, 알람브라 궁전이 함락되면서 나스르 왕조는 멸망했고, 이로써 레콩키스타는 종결되었다.

3. 4. 7. 공수의 역전: 세우타 함락

1415년, 포르투갈 왕국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점령하며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알렸다.[49]

4. 기독교 군사

중세 이베리아의 기독교 군대는 주로 기병대와 보병으로 구성되었다.[166] 기병대는 대부분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10세기 이후에는 평민 기사들도 기병대에 동원되었다.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의 분위기로 점철된 이 시기에는 전쟁과 일상이 긴밀하게 얽혀 레콩키스타 내내 군대가 지속적으로 양성되었다.

짐 브래드버리는 레콩키스타에 참여한 기독교 세력들이 모두 종교적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토착 기독교 군대와 다른 지역에서 온 기사단(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턴기사단) 및 이베리아 내부에 설립된 기사단(산티아고, 알칸타라, 칼라트라바)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166]

반면 토착 기독교 군대는 이슬람 제후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현지 용병들은 충분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통치자를 위해 싸우기도 했다. 엘 시드는 이러한 용병 지도자의 대표적인 예이다.[166]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칼릭스토 2세는 레콩키스타를 십자군의 일부로 선언하고, 그 참여자들을 동방의 십자군과 동등한 영적 지위를 가진 십자군으로 선언했다.[109]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3세기에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베리아 반도 안팎의 유럽 여러 지역의 전사들을 설득하여 알모아드 칼리파국 군대에 맞서 이베리아인들을 지원하도록 했다.[110]

레콩키스타 시대의 기병 전술은 주로 기사들이 적에게 접근하여 자벨린을 던지고 안전한 거리로 후퇴한 뒤, 다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적의 대형이 충분히 약화되면 기사들은 을 들고 돌격했다. 11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랜스 차징과 같은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166]

4. 1. 동기 부여와 사명

짐 브래드버리는 레콩키스타에 참여한 기독교 세력들이 모두 종교적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토착 기독교 군대와 다른 지역에서 온 기사단(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턴기사단) 및 이베리아 내부에 설립된 기사단(산티아고, 알칸타라, 칼라트라바)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166] 기사단은 대체로 세속적인 군대보다 종교 전쟁에 더 헌신적이었고, 무슬림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포로를 참수하는 등 가혹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166]

반면 토착 기독교 군대는 이슬람 제후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현지 용병들은 충분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통치자를 위해 싸우기도 했다. 엘 시드는 이러한 용병 지도자의 대표적인 예이다.[166] 이베리아 반도 자체의 인구로는 동원 가능한 병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용병은 때때로 전투의 결과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다. 주요 용병으로는 노르드인, 플랑드르 창병, 프랑크 기사, 무어인 기마궁수, 베르베르 경기병 등이 있었다.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칼릭스토 2세는 레콩키스타를 십자군의 일부로 선언하고, 그 참여자들을 동방의 십자군과 동등한 영적 지위를 가진 십자군으로 선언했다.[109]

13세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베리아 반도 안팎의 유럽 여러 지역의 전사들을 설득하여 알모아드 칼리파국 군대에 맞서 이베리아인들을 지원하도록 했다.[110] 알모아드 왕조는 레콩키스타의 이전 성과를 무효화하고 로마로 진군하려는 의도로 유럽으로 진격했다.[111] 이 십자군 원정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십자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절정에 달했고, 전쟁의 흐름을 기독교도에게 유리하게 돌렸다.[112][113]

4. 2. 기병대 및 보병

중세 이베리아의 기독교 군대는 주로 기병대와 보병으로 구성되었다.[166] 기병대는 대부분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10세기 이후에는 평민 기사들도 기병대에 동원되었다.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의 분위기로 점철된 이 시기에는 전쟁과 일상이 너무나도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따라서 레콘키스타 내내 군대가 지속적으로 양성되었다.

레콘키스타 시대의 기병 전술은 기사들이 적에게 접근하여 자벨린을 던지고 안전한 거리로 후퇴한 뒤, 또 다른 공격을 이어나가는 것이 주로 사용되었다. 적의 대형이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생각하면 기사들은 을 들고 돌격했다. 기사는 왕실 기사, 귀족 기사(카발레로스 이달고), 평민 기사(카발레로스 빌라노스)의 세 계급으로 나뉘었다.

레콩키스타 초기의 왕실 기사들은 하우버크, 연꼴 방패, 창, 도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귀족 기사들은 영주나 하급 귀족 출신이어도 말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했지만, 평민들은 대체로 그러지 못했다. 중세 유럽과는 다르게, 레콘키스타 시대의 기병은 봉건 영주가 제공하는 병력이 아니라 자체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카스티야 백작의 통솔을 받았다. 기병대가 아닌 귀족이나 일반 기사들은 평범한 갑옷과 자벨린, 창, 검, 둥근 방패 등으로 경무장했다.

보병 대부분은 농민들이었고, 활과 화살, 창, 단검 따위만 들고 있었으며 방패나 갑옷은 갖춰 입지도 못하는 등 무장 상태가 열악했다. 이들은 주로 보조 병력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아군 측 기병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군을 묶어두거나 적 보병대가 아군 기병에게 돌진하는 것을 방어하는 용도로 자주 쓰였다. 보병들은 장궁, 합성궁, 석궁 등 주로 활 종류의 원거리 무기를 선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3. 장비

중세 초기 스페인 군대의 갑옷은 일반적으로 철제 비늘이 달린 가죽 갑옷, 코 보호대가 달린 둥근 투구나 사슬 투구 등이 사용되었다.[166] 방패는 왕실 기사들이 사용한 연꼴 방패를 제외하고는 원형이나 타원형인 경우가 많았으며, 대개는 기하학적인 문양, 십자가, 또는 술잔 등의 장식이 달려있었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별도의 덮개가 있었다. 대부분 나무 방패였지만 가끔 철제 방패도 있었다.[166]

강철 검은 보병과 기병을 가리지 않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무기였다. 기병은 주로 긴 양날검을 사용했지만 보병은 짧은 외날검을 사용했고, 가드는 반원형 또는 직선형이었으며 항상 여러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창과 자벨린의 길이는 최대 1.5m에 달했고 창끝은 철로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도 30cm 길이의 매우 날카로운 끝을 가진 이중 창은 투척이나 근접 전투에서 매우 유용했다. 메이스 및 워해머는 흔하진 않았지만 가끔 기병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스페인 군인들은 여러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검, 자벨린, 창, 활/화살 또는 석궁/볼트를 휴대해 놓았다. 갑옷 또한 한 단계 발전하여 퀼트 재킷 위에 상체, 관절, 그리고 무릎까지 덧댄 사슬갑옷, 철제 투구, 팔과 허벅지를 보호하는 금속/가죽 보호대 등이 추가되었다.

4. 4. 전술의 변화

11세기 후반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전통적인 전술과 장비, 기마 창술 등이 계속 선호되었지만, 프랑스에서 랜스 차징과 같은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166] 12세기와 13세기에는 갑옷이 발전하여 퀼트 재킷 위에 상체, 관절, 무릎까지 덧댄 사슬갑옷, 철제 투구, 금속/가죽 보호대 등이 추가되었다. 기사들은 검, 자벨린, 창, 활/화살 또는 석궁/볼트 등 다양한 무기를 휴대했다.

방패는 여전히 나무 또는 가죽으로 만들어졌지만, 둥글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바뀌고 철제 테두리로 강화되었다. 기사나 귀족의 방패에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지기도 했다. 기독교도들은 무어인들의 기마술(라 지네타)을 받아들여 경기병 운용에 활용했고, 프랑스식 긴 등자 끝과 넓은 안장을 도입하여 중기병 운용을 개선했다. 말에게는 마갑이 착용되기도 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는 중기병이 중무장한 기사들과 함께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5. 영향

레콩키스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축출된 사건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은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더욱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영내의 유대인과 무어인을 철저하게 추방하려 했다. 특히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고 여겨졌다.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에는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만 명의 모리스코들이 추방당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어인의 대량 추방은 스페인의 경제 및 사회 구조를 무너뜨렸다. 알람브라 칙령 이후 발렌시아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경제의 토대를 구성하던 노동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이 추방되면서 스페인 고유의 문화적,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져 내렸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에 나서 귀금속, 양모, 농작물 등 산업 부흥을 이루었지만, 이를 유통하고 관리할 금융-상업 계층이 없어 제노바 공화국아웃소싱할 수밖에 없었다.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자금줄과 상업 행위에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틀어지는 악영향을 끼쳤다. 스페인 제국은 중세의 종교적 공존 체제인 콘비벤시아(Convivencia)를 해체하면서 전성기에 올랐지만, 제국 몰락의 장기적인 원인 중 상당수는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 상실에서 기인했다.

당시에는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과 마우레타니아(모로코, 북알제리, 서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이 완료되어야 진정한 레콩키스타가 완료된다고 생각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공동왕,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스페인의 첫 번째 공주 이사벨을 포르투갈 왕가의 계승자 아폰수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아폰수의 사망과 이사벨의 재혼 후 사망으로 실패했다. 살아남은 후계자 미겔마저 요절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이라는 야망은 흩어졌다.

합스부르크 황실로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제튀니스 등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1580년 포르투갈 왕국의 아비스 왕가 대가 끊기고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가 잇달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스페인의 폭정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베리아 재통합은 무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과거의 통합을 그리워하며 지브롤터 탈환과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통해 레콩키스타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콩키스타도르와 레콩키스타는 '정복하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콩키스타르(conquistar)'에서 유래했다. 레콩키스타에서 활약한 콩키스타도르들은 대항해시대에 신대륙으로 건너가 정복을 계속했다. 스페인인들은 로마 가톨릭을 아시아에도 전파하려 했고, 이는 센고쿠 시대 일본 가톨릭의 시작,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 조선과도 일부 연관이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임진왜란조선중국을 가톨릭화할 기회로 보고 일본 침략에 조력했지만,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면서 실패했다. 일본 가톨릭화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레콩키스타 당시 기독교 국가들의 수호 성인이었던 무어인 처단자 성 야고보 신앙은 신대륙으로 건너가 콩키스타도르들 사이에서 '인디오 처단자 성 야고보'로 숭배받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극우파들은 '빨갱이 처단자 성 야고보'로 이용하려 했지만, 반프랑코 진영의 선전에 반박당해 묻혔다.

5. 1.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축제

2016년 페고에서 열린 ''무어인과 기독교인'' 축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레콩키스타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무어인과 기독교인"을 의미하는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노스''(스페인어), ''모로스 이 크리스티안스''(카탈루냐어), ''모로스 이 크리스탕스''(포르투갈어) 및 ''모로스 이 크리스티안스''(갈리시아어)라는 축제는 화려한 의상과 많은 불꽃놀이를 동반한 퍼레이드로 전투를 재현하며, 특히 발렌시아 지방의 알코이, 온티넨트, 비예나와 같은 중부 및 남부 도시에서 열린다.

5. 2. 장기적인 관점에서

2016년의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 세력의 영토 확장 속도인 "레콩키스타의 속도"는 오늘날까지 스페인 경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기 군사 정복 단계를 거친 후, 기독교 국가들은 정복된 토지를 병합했다. 광대한 변경 지역이 한 번에 병합되었을 때, 토지는 주로 귀족과 군사 기사단에게 주어졌으며, 이는 장기적인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소규모 지역의 병합은 일반적으로 개인 정착민들의 참여를 허용했고, 왕실의 후원 아래 놓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는 더 공정한 토지 분배와 더 큰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졌으며, 장기적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00]

5. 3. 스페인 극우

극우 지지자들이 프랑코주의 깃발을 흔들며 참석한 그라나다 군대 열병식 (2016년 1월 2일)


십자군과 더불어 '레콩키스타'라는 용어는 현대 극우의 정치적 담론에서 중요한 결집점 역할을 한다. 이는 스페인,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극우 세력의 이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139] 특히, 21세기 온라인 극우 단체들은 레콩키스타와 십자군에 대한 언급을 인터넷 밈 형태로 자주 사용하며 이슬람 혐오를 확산시키고 있다.[140] 이러한 경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정체성 단체들에서도 나타난다.[141]

매년 1월 2일, 그라나다에서는 술탄 보압딜이 항복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는 프랑코 정권 초기부터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며,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에는 극우 단체들이 공개 집회를 열고 정치적 요구를 표명하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다.[143] 이 행사에는 보통 스페인 외인 부대가 참여하여 "El novio de la muerte" ("죽음의 연인")를 부르며 행진한다.[142] 극우 세력은 1월 2일이나 2월 2일 등 레콩키스타와 관련된 역사적 날짜나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등 관련 자치 공동체의 지역 축제를 내세워 문화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143]

5. 4.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이슬람 문명의 영향

체스를 두는 유대인무슬림. 체스는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이슬람권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서유럽인 제자를 가르치는 이븐 루시드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세 초기의 이슬람, 그리고 그들과 같은 문화적 영향을 공유하던 알안달루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당시의 서유럽 문명 근간에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로 산치오아테네 학당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연구한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가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븐 루시드가 재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고 이를 반박하면서 중세 서양 철학을 다듬었으며, 알안달루스의 수학, 천문학, 연금술, 의학 등은 중세 초기의 수많은 서유럽 지식인들이 공부했다. 이는 헬레니즘 문명을 통해 이어진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학, 철학, 공학 등을 중세 이슬람 제국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혼란을 겪은 서유럽보다 상대적으로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이교도 학문이라도 배우면 이득이 되기에, 700년 넘게 공존하며 배우지 않을 리 없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쓰는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서 최초로 도입한 곳이 레콩키스타 당시의 이베리아 반도였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에서 가톨릭 교조주의가 수백 년 동안 기승을 부리며 아랍-이슬람 문화와 유대 문화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지만, 전통 민요, 춤, 음식, 농경, 미술 등 일상 문화에 녹아든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청산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청산을 주도한 엘리트들도 이슬람 문명의 유산은 취사선택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가톨릭 군주-합스부르고 왕조 시대(15~17세기) 궁전, 귀족 저택, 주교궁, 관광 명소에는 이슬람 모스크의 기하학적 패턴(아라베스크) 장식이 빠지지 않는다. 플라멩코, 카스티야, 아라곤 등 중부 고원 지방의 춤 호타, 파에야 같은 쌀 요리 등 민속 문화에도 아랍의 영향이 강하며, 이슬람 지배를 거의 받지 않은 칸타브리아 산맥 이북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지방에서나 민속 문화가 이슬람과 상관없고 고대 켈트족 영향이 드러난다.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라는 말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이슬람 문화 잔재 청산이 가속화되었지만, 스페인어의 아랍어 잔재 제거는 불가능했다. 코르도바 토후국 시기 모사라베 상당수는 아랍어를 일상어로 썼고, 기독교도 중에는 라틴어를 몰라 아랍어로 미사를 보기도 했다. 현대 스페인어에 남은 아랍어 영향은 16세기 소설 《돈키호테》에도 나오는데,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alfombra(카펫), alcazar(왕궁), arroz(쌀), almohada(베개) 같이 al-로 시작하는 단어는 아랍어에서 왔다"고 가르칠 만큼 당대에도 널리 알려졌다. 《돈키호테》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메타픽션 구조로 집필하며 중간 '번역자'로 설정한 캐릭터가 아랍인일 만큼,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였어도 문화적으로 짙었던 이베리아 무슬림 문화의 영향을 다룬다.

오늘날 스페인 중남부(카스티야-안달루시아) 사람들은 alcalde(시장)가 다스리는 도시에서 tarifa(요금)를 내고 버스를 타며, almacén(가게)에서 almuerzo(점심)로 arroz(쌀)을 사고, 건물주에게 alquiler(월세)를 내며, alcancía(저금통)에 돈을 넣고, alarife(건축기사)가 almoneda(경매)에서 낙찰받아 지은 alfombra(양탄자)가 깔린 alcoba(침실)에서 algodón(솜)을 누벼넣은 almohada(베개)를 베고 잔다. 아랍어를 없애려 해도 일상어이기에 불가능했고,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스페인어 ojalá(오할라)는 '알라이시여 제발!'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최고 수석 주교좌 성당인 톨레도 대성당 내부. 천장 장식이 이슬람식이다.


스페인에는 알 안달루스의 이슬람 건축 양식을 재해석한 알무데하르(Almudejar) 건축 양식이 있는데,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사조 때부터 유럽과 다른 스페인만의 문화 정체성을 강조할 때마다 정부 기관에서 기차역, 상업 빌딩에 채택했다. 프랑코 정권 시절 국가 주도 관광 사업 구호처럼 '스페인은 유럽과 다르다!'를 강조할 때마다 코르도바 메스키타, 네오무데하르 건축물을 들이민다. 유럽인들이 스페인을 '유럽도 아닌 아랍'이라 무시하면 화내며 성 야고보를 숭상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유럽과 다른 점'을 아랍 이슬람에서 찾고 적극 수용하는 이중적이고 복잡미묘한 현대 스페인의 문화 정체성과 자기 인식을 만든 것이 레콩키스타의 유산이다.

5. 5.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

기존 스페인의 카스티야 중심, 가톨릭 우월 교권 민족주의(nacionalcatolicismo)는 20세기에 들어와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 지방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가톨릭 군주 치세 이후 제국·왕정 시대 내내 이슬람-무어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나쁘고 비(非)스페인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경향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48년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España en su historia》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이후의 압스부르고 왕조 치하 근세를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했다. 반면 서로 전쟁은 해도 기독교권이나 이슬람권이나 공통적으로 자국 내 이교도 공동체를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는 없었던 레콩키스타 시절의 중세를 '''세 종교(이슬람, 기독교, 유대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빛나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한 황금기'''로 재조명하는 사관이 한동안 유행했다. 이는 마르틴 루터로 인해 본격적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열풍에 맞서 매우 강해진 가톨릭 수호-종교재판-이단심문을 특히 근세 스페인에서 주도하게 된 것에 대한 반동 심리에서 기인했다.

이런 가톨릭 유일주의로 점철된 근세 스페인을 부정하고, 중세적 종교적 관용과 다양성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던 사관도 스페인 사학계가 근대성 논쟁에서 객관적으로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학적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에는 많이 퇴색되었다. 오늘날 중세 스페인 사회사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현대적 공론은, 가톨릭 유일신앙을 추구한 근세에 비해서는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가 더 종교적 다양성이 있었지만, 이는 실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타자에 대한 철학적 존중에 기반한 현대적 의미의 '관용'은 아니었다. 또한 레콩키스타 자체가 약 7세기 반에 걸쳐 이루어진 장기적 군사 작전이었던 만큼 시대에 따라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는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층 가문이었던 코르도바 토후국(후우마이야 왕조)의 경우에는 비잔틴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짙었던 시리아, 레반트에 근거지를 두어 이교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공존에 익숙했다. 반면 발흥지가 당대 문명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 일대였던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칼리파조 같은 베르베르계 국가들은 종교적 원리주의를 구심점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적 개혁운동으로 시작했으므로 타 종교인들에 대한 불관용이 더 심했다.

포르투갈 메르톨라에 있는 한 작은 교회. 오래된 모스크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현대 이베리아 반도 중세 사학계에서는 보통 흑사병 이후로 기독교권의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이 강해지며, 이러한 기조가 르네상스 시절까지 유지되었고, 나머지 유럽 가톨릭 세계도 종교재판 설립, 알비 십자군과 같은 기독교 내부의 이단 박멸 체계가 성립함에 따라 결국 1492년 알람브라 칙령 및 비개종 이교도 전면 추방, 이후 종교재판소를 통한 개종자 박해와 무어인 추방으로 정점을 맺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근대의 자유주의자가 자기 시대에 대한 불만을 중세에 투영하여 만든 '관용적인 중세 이슬람, 비관용적인 중세 가톨릭'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탈피하여, 스페인 민족주의도 아니고 가톨릭 근본주의도 아니며 무슬림 미화도 아닌 실증적인 설명을 내놓고 있다.

6세기 가량 이어진 이슬람의 이베리아 지배와 7세기 넘게 이어진 기독교의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나쁜가?"를 따지는 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멀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체제에서는 강경한 순간들을 양쪽 어디에서든 선택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정치적, 상황적 이해관계에서 관용과 불관용은 뒤집힐 수 있었다. 중세 스페인 안에서 기독교 지역과 이슬람 지역을 비교할 경우 이 점은 더 명백해진다. 중세 스페인에서 기독교 치하 무슬림과 이슬람 치하 기독교도의 처지는 비슷했으며, 양쪽은 모두 '원칙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효용성 때문에'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이때의 '종교적 관용'은 알안달루스라는 국명이 무색하게도 중세 이베리아 이슬람 특유의 오랜 지방 세력 간 군웅할거와 합종연횡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즉 이슬람 세력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영내의 타종교인들에게 일관성 있는 종교 탄압을 할 여력이 부족했던 결과였을 뿐, 이들이 자비심을 보이거나 인권 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5. 6. 인종적 교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적 유형이 생겨났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간의 교류는 단순한 갈등을 넘어, 때로는 평화로운 공존과 협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9세기 초 아리스타 왕조와 바누 카시와 같이 서로 협력하며 동맹을 맺은 경우도 있었고,[164][166] 양측에 고용된 용병들은 종교에 관계없이 더 많은 보수를 주는 세력에서 싸웠다.[166]

6. 현재

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무어와 기독교인'을 뜻하는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노스 축제를 통해 레콩키스타를 기념하고 있다. 이 축제는 특히 발렌시아주 중남부 마을에서 화려한 복장, 불꽃놀이, 퍼레이드와 함께 열리며, 사람들은 무어인과 기독교인으로 분장하여 전투를 재현한다.[194]

레콩키스타는 스페인 극우 세력에게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극우 정당인 Vox는 '문명의 충돌' 개념과 이슬람 혐오증을 내세우며 레콩키스타를 자신들의 주장에 활용한다.[174][176][177][178][179]

레콩키스타는 19세기 스페인 민족주의의 성장과 함께 현대적 개념으로 통합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시절에는 국가 가톨릭 주의의 역사적 근거이자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으로 활용되었다.[174]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파는 레콩키스타를 '해방 전쟁'으로 규정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했고,[180] 프랑코는 스스로를 '레콩키스타도르'(재정복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레콩키스타는 스페인 문화에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남겼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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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The Fall of Al-Andalus and the Evolution of its Memory in Modern Arab-Muslim Historiography https://muse.jhu.edu[...]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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