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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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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드레 바쟁은 1918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58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이다. 그는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하고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누벨바그에 이론적 영향을 미쳤다. 바쟁은 리얼리즘 영화 이론과 작가주의를 주창했으며, 심도 초점, 와이드 샷, 미장센을 통한 "진정한 연속성"을 선호했다. 그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는 영화 이론에 대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의 장편 데뷔작 《400번의 구타》를 바쟁에게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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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드레 바쟁, "Qu'est-ce que le cinéma?" 세 번째 볼륨 표지
출생일1918년 4월 18일
출생지앙제, 프랑스
사망일1958년 11월 11일 (40세)
사망지노장쉬르마른, 프랑스
직업영화 평론가, 영화 이론가
모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드 생클루
로마자 표기André Bazin

2. 생애

앙드레 바쟁은 1918년 프랑스 앙제에서 태어났다.[18][2] 1941년 생클루의 리옹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말을 더듬는 증세로 교사가 되지는 못했다.[2] 독일 점령기 동안 파리에서 시네 클럽을 설립하고 운영했으며,[2] 전쟁 중 '노동과 문화'에서 활동하며 미래의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듀서 자닌 키르슈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49년 결혼하여 아들 플로랑을 두었다.[3]

전후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며 1951년에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공동 창간했다.[5] 1954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2] 1958년 11월 11일 노장 쉬르 마른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앙드레 바쟁은 1918년 4월 18일 프랑스 메-에-루아르 주 앙제에서 태어났다.[18][2] 처음에는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1938년 파리 교외 오드센 주 생클루에 있는 리옹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2] 그러나 1941년 교직 자격 구두 시험에서 말을 더듬는 증세 때문에 실패했고, 교사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되었다.[2]

이후 파리에서 학생 단체인 '문학의 집'(Maison des Lettres프랑스어)에 참여하며 배우이자 극작가인 피에르-에메 투샤르(1903년–1987년)와 교류했다. 독일 점령 하의 파리 시기에는 시네 클럽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활동을 했다.[2] 그는 로제 레나르를 시네 클럽에 초청했는데, 바쟁은 잡지 『에스프리』(Esprit프랑스어)에 연재된 레나르의 글 "관객의 작은 학교"(La Petite école du spectateur프랑스어)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프랑스 공산당과 연관된 활동가 단체인 '노동과 문화'(Travail et culture프랑스어)에서 일하면서 미래의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듀서인 자닌 키르슈를 만났다.[3] 두 사람은 1949년에 결혼하여 아들 플로랑을 낳았다.[3]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바쟁은 전쟁으로 훼손된 문화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노동과 문화' 및 '민중과 문화'(Peuple et culture프랑스어)와 협력하여 대중 교육에 참여했으며, 독일, 알제리, 모로코 등지의 공장을 방문하여 시네 클럽을 만들고 강연 활동을 펼쳤다.

2. 2. 전쟁 중 활동과 만남

1941년 생클루에 있는 리옹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직을 지망했으나, 말을 더듬는 증세 때문에 교사 자격을 얻지 못했다.[2] 이후 파리에서 학생 단체인 '문학의 집'(Maison des Lettresfra)에 참여하며 피에르-에메 투샤르와 교류를 시작했다. 파리의 독일 점령기 동안에는 시네 클럽을 설립하고 운영했으며,[2] 로제 레나르를 초청하기도 했다. 바쟁은 잡지 『에스프리(Espritfra)』에 연재된 레나르의 글 "관객의 작은 학교(La Petite école du spectateurfra)"를 즐겨 읽었다.

전쟁 중에는 프랑스 공산당과 연관된 활동가 단체인 '노동과 문화'(Travail et culturefra)에서 활동하며 미래의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듀서가 될 자닌 키르슈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49년 결혼하여 아들 플로랑을 낳았다.[3]

1944년 프랑스 해방 이후, 전쟁으로 훼손된 문화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바쟁은 '노동과 문화' 및 '민중과 문화'(Peuple et culturefra)와 계약을 맺고 대중 교육에 힘썼다. 이를 위해 독일, 알제리, 모로코 등 여러 지역의 공장을 방문하여 시네 클럽을 창설하고 강연 활동을 펼쳤다.

2. 3.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과 활동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바쟁은 전쟁으로 훼손된 문화를 되살리는 데 힘썼다. 그는 Travail et culture|트라바이 에 퀼튀르프랑스어 및 Peuple et culture|푀플 에 퀼튀르프랑스어와 협력하며 대중 교육에 참여했고, 독일, 알제리, 모로코 등지의 공장에서 시네 클럽을 창설하고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바쟁은 『L'Écran français|레크랑 프랑세프랑스어』, 『Le Parisien Libéré|르 파리지앵 리베레프랑스어』, 『Esprit|에스프리프랑스어』 등 여러 잡지에 영화 비평을 기고했으며, 『Radio-Cinéma-Télévision|라디오-시네마-텔레비지옹프랑스어』(후의 『텔레라마』) 창간에도 참여했다. 또한, 소년 감별소를 나온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나 정신적 지주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1951년, 바쟁은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두카와 함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공동 창간했다.[5] 그는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초대 편집장으로서 잡지를 이끌었다.[5] 바쟁은 인격주의[14]에 영향을 받아 영화가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생각은 작가주의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 존 포드와 같은 감독들을 옹호했다.[5] 특히 1954년에는 그의 제자였던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계에 대한 비판적 선언문인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윈 세르텐 탕당스 뒤 시네마 프랑세프랑스어"를 잡지에 실었다.[5]

''카이에 뒤 시네마''는 바쟁의 지도 아래 젊은 비평가들과 미래의 영화감독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들은 훗날 누벨 바그 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5]

2. 4. 트뤼포와의 관계

앙드레 바쟁은 소년 감별소를 나온 10대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나 돌보게 되었다. 당시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트뤼포에게 바쟁은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보호자와 같은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 《400번의 구타》 촬영 시작 다음 날 사망한 바쟁에게 이 영화를 헌사하였다.

3. 영화 비평 및 이론

앙드레 바쟁은 '몽타주' 기법을 중심으로 한 형식주의 영화 이론에 반대하며, '리얼리즘' 영화 이론과 '작가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비평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43년부터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1951년에는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두카와 함께 유명 영화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를 공동 창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 연구 및 비평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쟁은 사망할 때까지 이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그의 주요 비평과 이론은 사후에 ''영화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cinéma?프랑스어)라는 제목의 4권짜리 저서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출판되었다.[5] 이 책의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두 권으로 출간되었고, 영어권 영화 연구의 주요 텍스트가 되었다. 이후 캐나다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며[5], 2018년에는 더 광범위한 내용을 담은 ''앙드레 바쟁: 선집 1943–1958''이, 2022년에는 각색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앙드레 바쟁의 각색에 관하여: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이 출간되었다.[5]

바쟁의 비평은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에 기반하며, 이를 위해 미장센, 심도 초점, 롱 테이크 등의 기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영화감독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자신만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작가'로 간주하는 작가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론과 비평은 이후 누벨 바그를 비롯한 새로운 영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리얼리즘 이론

앙드레 바쟁은 '몽타주'로 대표되는 형식주의 영화 이론에 맞서 '리얼리즘' 영화 이론을 펼쳤으며, '작가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영화가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고 본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화 이론과 달리, 영화나 장면의 해석은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은 "객관적 현실"을 충실히 묘사하는 영화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다큐멘터리[7]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8]처럼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을 옹호했다. 그는 편집이나 시각 효과 같은 인위적인 기법보다는 화면 속 요소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미장센'을 통해 현실의 연속성을 담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를 위해 심도 초점(오손 웰스, 윌리엄 와일러 등이 사용)[9], 와이드 샷(장 르누아르가 사용), 그리고 "깊이 있는 숏"의 사용을 강조했다.

Deep focus framing.
오스카 수상작인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에서 감독 윌리엄 와일러와 촬영 감독 그레그 톨랜드는 심도 초점을 사용하여 중요한 인물을 프레임의 먼 배경에 보이게 했다.


예를 들어, 바쟁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촬영: 그레그 톨랜드)의 한 장면을 분석하며 심도 초점 기법의 효과를 설명했다. 그는 이 장면에서 화면 앞쪽의 부차적인 행동과 화면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핵심적인 사건(이야기의 전환점)이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고 감독이 의도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고 보았다.

:전경의 액션은 부차적이지만, 화면의 특권적인 위치와 표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날카로운 주의를 요구할 만큼 흥미롭고 특이하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액션, 즉 이 순간에 이야기의 전환점을 구성하는 것은 방 뒤쪽의 작은 직사각형 안에서 거의 은밀하게 전개된다화면의 왼쪽 구석에서.... 따라서 관객은 감독이 계획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된다.[10]

객관적 현실, 심도 초점 및 몽타주 시퀀스의 부재에 대한 집중은 영화나 장면의 해석은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는 바쟁의 믿음과 연결된다. 이는 영화가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강조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화 이론과 대립했다.

더들리 앤드류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과 인격주의는 바쟁의 영화관에 대한 견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요소이다.[11] 빅터 브루노는 이러한 영향—특히 로마 가톨릭—이 바쟁의 "현실주의"에 대한 이해의 본질이 흘러나오는 샘이며, 그에 따르면 이는 물질 (일부 학자들이 현실주의라고 부르기도 함)보다는 형이상학적 현실주의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12]

또 다른 학자인 톰 거닝은 앙드레 바쟁에게 세 번째 영향을 준 요소를 확인한다: 헤겔 철학. 거닝에 따르면, 바쟁이 롱 테이크를 선호하는 것은 헤겔의 시간 속에서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유사하다.[13] 이 아이디어는 바쟁이 롱 테이크를 자유의 수단으로 특권을 부여했고 헤겔은 역사의 전개가 완벽하게 체계화된 패러다임으로 결론지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일부 저자에 의해 기각되었다.[12]

어쨌든, 바쟁의 인격주의[14]는 영화가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을 나타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 아이디어는 작가주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수아 트뤼포의 기사 "프랑스 영화의 특정한 경향"의 선언문은 1954년 그의 스승 바쟁에 의해 ''카이에 뒤 시네마''에 게재되었다. 바쟁은 또한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존 포드와 같은 감독을 옹호했다.

장 르누아르는 회고하면서 바쟁을 "과거의 시인들이 왕에게 왕관을 수여했듯이 영화에 특허 또는 로열티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바쟁은 수준 높은 작품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고 해설하는 도박을 걸었다. 그렇게 하면 대중의 영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엄격해지고, 단순한 상업 영화에는 만족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화는 대중을 해방하는 수단이었다. 오슨 웰스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한 것도 같은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5] 1958년 작품 『검은 독수리』가 공개되었을 때 웰스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또한, 찰리 채플린장 르누아르에 대해서도 각각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 마르셀 카르네의 『해는 떠오른다』(Le jour se lève프랑스어)에 대해서는, 웰스의 『시민 케인』에 필적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기지가 넘치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바쟁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작품에 대해서만 글을 쓰는 주의였다.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트뤼포에게 평론 집필을 맡긴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면』(Si Paris nous était conté프랑스어사샤 기트리 감독·각본, 1955년)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트리라면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수아 트뤼포는 『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면』을 마음에 들어 했고, 이 작품을 제대로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은 파리에서 트뤼포뿐이므로, 나는 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3. 2. 작가주의 이론

'몽타주(montage)'로 대변되는 형식주의적 영화 이론에 반하여 '리얼리즘' 영화 이론을 펼쳤고, '작가주의(auteurisme)'를 주창하였다. 그는 1943년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1951년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조제프마리 로 두카와 함께 영화 잡지 ''영화 평론지''(Cahiers du cinéma)를 공동 창간했다. 이 잡지는 작가주의를 논의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바쟁은 영화가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과 스타일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그의 인격주의적 신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14], 영화를 감독이라는 '작가(auteur)'의 창조물로 간주하는 작가주의 이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는 오손 웰스, 윌리엄 와일러 등이 사용한 심도 초점이나 장 르누아르의 와이드 샷, 롱 테이크 같은 기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편집을 통한 인위적인 의미 부여보다는 감독이 창조한 미장센 안에서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며 감독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과 연결된다.[9]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존 포드와 같은 감독들을 옹호했다.

작가주의 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바쟁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프랑수아 트뤼포1954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은 바쟁이 편집장으로 있던 ''영화 평론지''에 게재된 것이었다. 이 글은 기존 프랑스 영화계의 관습적인 제작 방식을 비판하고 감독 중심의 영화 만들기를 주장하며 작가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장 르누아르는 바쟁을 "과거의 시인들이 왕에게 왕관을 수여했듯이 영화에 특허 또는 로열티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영화와 감독의 지위를 예술적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음을 시사했다. 바쟁은 수준 높은 작품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해설함으로써 대중의 영화적 안목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오손 웰스에 대한 해설서나 찰리 채플린, 장 르누아르에 대한 책을 저술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작품과 감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비평 활동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3. 3. 주요 비평 대상



바쟁의 비평은 "객관적 현실"을 충실히 묘사하는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6] 그는 특히 다큐멘터리[7]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그가 "해방의 이탈리아 학파"라고 부른[8])를 옹호했다. 그는 심도 초점(오손 웰스, 윌리엄 와일러 등)[9], 와이드 샷(장 르누아르), 그리고 "깊이 있는 숏"의 사용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편집이나 시각 효과 실험보다는 ''미장센''을 통한 "진정한 연속성"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바쟁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 그레그 톨랜드 촬영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의 한 장면을 상세히 분석하며 심도 초점 기법의 효과를 설명했다.

전경의 액션은 부차적이지만, 화면의 특권적인 위치와 표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날카로운 주의를 요구할 만큼 흥미롭고 특이하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액션, 즉 이 순간에 이야기의 전환점을 구성하는 것은 방 뒤쪽의 작은 직사각형 안에서 거의 은밀하게 전개된다 화면의 왼쪽 구석에서.... 따라서 관객은 감독이 계획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된다.[10]


이처럼 객관적 현실, 심도 초점, 그리고 몽타주 시퀀스의 부재에 대한 강조는 영화나 장면에 대한 해석을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는 바쟁의 믿음과 연결된다. 이는 영화가 현실을 적극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보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화 이론과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더들리 앤드류에 따르면, 바쟁의 영화관에는 로마 가톨릭 신앙과 인격주의 사상이 깊은 영향을 미쳤다.[11] 빅터 브루노는 특히 가톨릭 신앙이 바쟁의 "리얼리즘" 개념의 핵심이며,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현실(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보다는 형이상학적 리얼리즘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12]

또 다른 학자인 톰 거닝은 헤겔 철학을 바쟁에게 영향을 준 세 번째 요소로 지목한다. 거닝은 바쟁이 롱 테이크 기법을 선호한 것을 헤겔이 이해한 시간 속 역사의 전개 방식과 연결시킨다.[13]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바쟁이 롱 테이크를 자유의 표현 수단으로 본 반면, 헤겔은 역사의 전개가 정해진 틀 안에서 완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12]

바쟁의 인격주의적 관점[14]은 영화가 감독 개인의 비전을 반영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는 작가주의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 프랑수아 트뤼포가 쓴 작가주의 선언문 격인 "프랑스 영화의 특정한 경향"은 1954년 바쟁이 편집장으로 있던 ''영화 평론지''에 실렸다. 바쟁 자신도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 존 포드와 같은 감독들의 작가적 역량을 옹호했다.

장 르누아르는 바쟁을 "과거 시인들이 왕에게 왕관을 수여했듯이 영화에 특허 또는 로열티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바쟁은 수준 높은 작품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해설함으로써 관객의 안목을 높이고자 했다. 그는 이를 통해 관객들이 단순한 상업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더 수준 높은 영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문화는 대중 해방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오손 웰스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하고 1958년 그의 영화 ''검은 독수리'' 개봉 당시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는 또한 찰리 채플린장 르누아르에 대한 책도 각각 저술했다. 마르셀 카르네의 ''해는 떠오른다''에 대해서는 웰스의 ''시민 케인''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바쟁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만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샤 기트리 감독의 1955년 영화 ''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면''에 대해 그는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트리라면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고, 이 작품을 제대로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은 파리에서 트뤼포뿐이므로, 나는 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고 말하며 트뤼포에게 평론을 맡기기도 했다.

4. 영향

1958년 11월 11일, 파리 교외의 발드마른 노장쉬르마른에서 백혈병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정성을 들여 키운 젊은 제자들이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바쟁이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년 뒤, 그의 제자이자 누벨바그의 기수였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장편 데뷔작이자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 ''400번의 구타''를 발표했다. 트뤼포는 이 영화를 스승인 앙드레 바쟁에게 헌정하며 그의 영향력과 가르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4. 1. 프랑스 누벨바그에 미친 영향

앙드레 바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 연구 및 비평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그가 공동 창간한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훗날 프랑스 누벨바그의 주요 비평가 및 감독들의 활동 기반이 되었다.

바쟁의 영화 비평은 "객관적 현실"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에 기반했다.[6] 그는 다큐멘터리[7]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8]처럼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오손 웰스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사용한 심도 초점 기법,[9] 장 르누아르 감독의 와이드 샷 촬영 등을 선호했는데, 이는 편집이나 시각 효과를 통한 인위적인 조작보다는 화면 자체의 구성(미장센)을 통해 현실의 연속성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보았다. 그는 와일러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의 한 장면 분석을 통해, 심도 초점이 어떻게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현실감을 부여하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전경의 액션은 부차적이지만, 화면의 특권적인 위치와 표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날카로운 주의를 요구할 만큼 흥미롭고 특이하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액션, 즉 이 순간에 이야기의 전환점을 구성하는 것은 방 뒤쪽의 작은 직사각형 안에서 거의 은밀하게 전개된다--화면의 왼쪽 구석에서.... 따라서 관객은 감독이 계획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된다."[10] 바쟁은 이러한 기법들이 관객 스스로 장면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도록 유도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몽타주 시퀀스처럼 감독이 의미를 강제하는 방식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과 비평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기존 프랑스 영화의 연극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에 반발하며 현실을 포착하려는 새로운 영화 미학을 추구했는데, 바쟁의 이론은 이러한 경향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바쟁의 인격주의[14] 신념은 영화가 감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는 훗날 누벨바그의 핵심 개념인 작가주의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쟁은 자신의 제자이자 누벨바그의 기수였던 프랑수아 트뤼포가 쓴 작가주의 선언문 격인 "프랑스 영화의 특정한 경향"이라는 글을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어주며 이 새로운 영화 운동을 지지했다. 바쟁이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 존 포드와 같은 감독들을 옹호한 것 역시 작가주의적 관점과 연결된다.

장 르누아르는 바쟁을 "과거의 시인들이 왕에게 왕관을 수여했듯이 영화에 특허 또는 로열티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하지만 바쟁은 1958년 11월 11일, 파리 교외의 발드마른 노장쉬르마른에서 백혈병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년 뒤, 그의 제자 프랑수아 트뤼포는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 ''400번의 구타''를 발표했다. 바쟁은 자신이 지지하고 키워낸 젊은 감독들이 프랑스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누벨바그를 통해 이어졌다. 트뤼포는 자신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를 스승인 앙드레 바쟁에게 헌정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4. 2. 국제적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화 연구 및 비평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앙드레 바쟁의 영향력은 그의 사후 출판된 저서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총 4권으로 출간된 그의 글 모음집 ''영화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 cinéma?|케스 크 르 시네마?프랑스어)는 그의 영화 이론을 집대성한 핵심 저작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의 주요 내용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영어로 번역되어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들은 영어권 국가의 대학 영화 강좌에서 중요한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오랫동안 내용 업데이트나 수정 없이 유지되었다. 이후 2009년, 캐나다의 출판사 카부스(Caboose)는 캐나다 저작권법을 활용하여 주요 에세이들을 새로운 번역과 함께 단권으로 출판했다. 번역가 티모시 바나드(Timothy Barnard)의 주석이 달린 이 책은 바쟁의 글에 대한 최초의 수정 및 주석판으로 평가받는다. 2018년에는 바나드가 번역한 바쟁의 글들을 더 폭넓게 수록한 ''앙드레 바쟁: 선집 1943–1958'' (''André Bazin: Selected Writings 1943–1958'')이 출간되었고,[5] 2022년에는 각색 문제를 다룬 에세이 모음집 ''앙드레 바쟁의 각색에 관하여: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 (''André Bazin on Adaptation: Cinema's Literary Imagination'')이 출판되는 등 그의 저작에 대한 연구와 소개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바쟁의 비평 이론은 흔히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7] 및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학파의 영화 (또는 그가 "해방의 이탈리아 학파"[8]라고 칭한 영화들)를 옹호한 것으로 요약된다.[6] 그는 심도 초점 (오손 웰스, 윌리엄 와일러 사용)[9], 와이드 샷 (장 르누아르 사용)과 "깊이 있는 숏"(plan-séquence|플랑 세캉스프랑스어, 시퀀스 숏)의 사용을 옹호했으며, 편집과 시각 효과 실험보다는 ''미장센''을 통한 "진정한 연속성"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그는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촬영: 그레그 톨랜드)의 한 장면을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심도 초점 구성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전경의 액션은 부차적이지만, 화면의 특권적인 위치와 표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날카로운 주의를 요구할 만큼 흥미롭고 특이하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액션, 즉 이 순간에 이야기의 전환점을 구성하는 것은 방 뒤쪽의 작은 직사각형 안, 즉 화면 왼쪽 구석에서 거의 은밀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관객은 감독이 계획한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된다.[10]


이처럼 객관적 현실, 심도 초점, 그리고 몽타주의 배제에 대한 강조는 영화나 장면에 대한 해석을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야 한다는 바쟁의 믿음과 연결된다. 이는 영화가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고 강조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화 이론과 대립했다.

더들리 앤드류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과 인격주의는 바쟁의 영화관에 대한 견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요소이다.[11] 빅터 브루노(Victor Bruno)는 이러한 영향—특히 로마 가톨릭—이 바쟁의 "현실주의"에 대한 이해의 본질이 흘러나오는 샘이며, 그에 따르면 이는 물질적 현실주의(일부 학자들이 현실주의라고 부르기도 함)보다는 형이상학적 현실주의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12]

또 다른 학자인 톰 거닝(Tom Gunning)은 헤겔 철학 역시 바쟁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거닝은 바쟁이 롱 테이크를 선호하는 것을 헤겔의 시간 속에서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유사하다고 보았으나,[13] 롱 테이크를 통한 '자유'를 강조한 바쟁의 생각과 역사의 정해진 결말을 상정한 헤겔 철학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12]

한편, 바쟁의 인격주의적 관점[14]은 영화가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을 나타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 아이디어는 작가주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수아 트뤼포의 기사 "프랑스 영화의 특정한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프랑스어)의 선언문은 1954년 그의 스승 바쟁에 의해 ''카이에 뒤 시네마''에 게재되었다. 바쟁은 또한 하워드 혹스, 윌리엄 와일러존 포드와 같은 감독을 옹호했다.

동시대의 거장 장 르누아르는 바쟁을 "과거 시인들이 왕에게 왕관을 수여했듯이 영화에 고귀한 지위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공헌을 높이 샀다. 바쟁은 1958년 11월 11일, 발드마른주 노장쉬르마른에서 백혈병으로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장편 데뷔작인 ''400번의 구타''를 스승 바쟁에게 헌정하며 그의 정신을 기렸다.

5. 저서


  • ''Orson Welles프랑스어'' (1950) (장 콕토 서문)
  • ''Qu'est-ce que le cinéma?프랑스어'' (영화란 무엇인가?, 전 4권)
  • * 제1권. ''Ontologie et langage프랑스어'' (존재론과 언어, 1958)
  • * 제2권. ''Le cinéma et les autres arts프랑스어'' (영화와 다른 예술들, 1959)
  • * 제3권. ''Cinéma et sociologie프랑스어'' (영화와 사회학, 1961)
  • * 제4권. ''Une esthétique de la réalité : le néo-réalisme프랑스어'' (현실의 미학: 네오 리얼리즘, 1962)
  • * 영어 번역본: ''What Is Cinema? Vol. 1 & 2'' (휴 그레이 번역/편집, 1967–1971)[1]
  • ''Jean Renoir프랑스어'' (1971) (프랑수아 트뤼포 편집)
  • * 영어 번역본: ''Jean Renoir'' (W.W. 헐시 2세 & 윌리엄 H. 시몬 번역, 1973)[2]
  • ''Orson Welles프랑스어'' (1972) (앙드레 S. 라바르트 편집, 1950년판과는 다른 버전)
  • * 영어 번역본: ''Orson Welles: A Critical View'' (1978)[3]
  • ''Charlie Chaplin프랑스어'' (1972) (프랑수아 트뤼포 편집)
  • * 영어 번역본: ''Essays on Chaplin'' (장 보동 번역/편집, 1985)[4]
  • ''Le Cinéma de la cruauté프랑스어'' (잔혹의 영화, 1975) (프랑수아 트뤼포 편집)
  • * 영어 번역본: ''The Cinema of Cruelty: From Buñuel to Hitchcock'' (사빈 데스트레 번역, 1982)[5]
  • ''Le Cinéma de l'Occupation et de la Résistance프랑스어'' (점령기와 레지스탕스의 영화, 1975) (프랑수아 트뤼포 편집)
  • * 영어 번역본: ''French Cinema of the Occupation and Resistance: The Birth of a Critical Esthetic'' (스탠리 호크먼 번역, 1981)[6]
  • ''Le Cinéma français de la Libération à la Nouvelle Vague (1945-1958)프랑스어'' (해방에서 누벨 바그까지의 프랑스 영화 (1945-1958), 1983) (장 나르보니 편집)
  • * 영어 번역본: ''French Cinema from the Liberation to the New Wave, 1945–1958'' (버트 카르둘로 편집, 2005)[7]
  • ''Bazin at Work: Major Essays & Reviews From the Forties & Fifties'' (버트 카르둘로 편집/번역, 알랭 피에트 번역, 1996)[8]
  • ''André Bazin: Selected Writings 1943–1958'' (티모시 바나드 번역, 2018)[9]
  • ''Écrits complets프랑스어'' (완전한 글, 전 2권, 2018) (에르베 주베르-로랑생 편집, 약 2,700편 수록)

6. 대중문화

프랑수아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 촬영 시작 다음 날 사망한 바쟁에게 이 영화를 헌정했다.[16]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웨이킹 라이프》에는 영화 제작자 카베 자헤디와 시인 데이비드 주얼이 바쟁의 영화 이론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바쟁의 기독교적 관점과 모든 숏이 창조물에 나타난 신의 표현이라는 믿음이 강조된다.[17]

참조

[1] 서적 The Major Film Theories: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Divining the real: the leaps of faith in André Bazin's film criticism | Sight & Sound https://www2.bfi.org[...] 2018-04-18
[3] 웹사이트 Obituary: Janine Bazin http://www.theguardi[...] 2003-06-17
[4] 웹사이트 Andre Bazin dies http://www.focusfeat[...] 2015-01-18
[5] 웹사이트 André Bazin: Selected Writings 1943–1958 https://www.cabooseb[...] Caboosebooks.net 2018-04-18
[6] 논문 An Analysis of Film Critic Andre Bazin's Views on Expressionism and Realism in Film http://www.inquiries[...] 2009-09-04
[7] 웹사이트 André Bazin https://www.oxfordbi[...]
[8] 논문 Review: What is Cinema? by André Bazin https://online.ucpre[...] 2011-03-01
[9] 웹사이트 Bazin Andre What Is Cinema Volume 1 http://archive.org/d[...]
[10] 서적 Bazin at Work: Major Essays & Reviews from the Forties & Fifties Routledge
[11] 서적 André Bazin Oxford University Press
[12] 논문 Archaism and Hegel in the Supply Reel: A Philosophical Look at André Bazin's Realism http://www.centar-fm[...] 2021
[13] 서적 Opening Bazin: Postwar Film Theory and Its After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4] 웹사이트 Citizen Kane, André Bazin and the "Holy Moment" | Decent Films – SDG Reviews http://decentfilms.c[...]
[15] 웹사이트 television-as-a-medium-of-culture https://www.sabzian.[...]
[16] 웹사이트 André Bazin https://www2.bfi.org[...] 2016-10-09
[17] 웹사이트 Cosmic Babble: Waking Life | Richard Linklater https://www.filmcomm[...]
[1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focusfeat[...] 201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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