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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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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프랑스의 추기경이자 정치가로, 루이 15세의 스승이자 재상으로 활동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왕비 마리아 테레사, 루이 14세를 섬기며 정치에 입문했다. 1715년 루이 15세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1726년 부르봉 공작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다. 플뢰리는 검소한 정책으로 프랑스 재정을 안정시키고, 평화 외교를 통해 국력 회복을 이끌었지만, 얀센주의 문제와 고등법원과의 갈등을 겪었다. 그의 말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실패로 권위가 추락했고, 사후 프랑스는 30년 평화를 끝내고 영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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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
기본 정보
풀뢰리 추기경, 이아생트 리고 그림
풀뢰리 추기경, 이아생트 리고 그림, 베르사유 궁전
존칭 접두사추기경
이름앙드레-에르퀼 드 플뢰리
직함추기경, 프레주 명예 주교
관구엑스 대교구
교구프레주-툴롱 교구
임기 시작1698년 5월 18일
임기 종료1715년 5월 3일
전임자루이 다캥
후임자피에르 드 카스텔란
서임1679년
주교 서임1698년 11월 22일
주교 서임자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
추기경 서임1726년 9월 11일
추기경 서임자교황 베네딕토 13세
추기경 계급추기경 사제
출생일1653년 6월 22일
출생지로데브, 랑그도크-루시용, 프랑스
사망일1743년 1월 29일
사망지이시레물리노, 일드프랑스, 프랑스
국적프랑스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앙드레-에르퀼 드 플뢰리 서명
서명
추가 정보
국무 장관 직책수석 국무장관
임기 시작1726년 6월 11일
임기 종료1743년 1월 29일
전임자루이 앙리 드 부르봉
후임자에티엔 프랑수아 드 슈아죌 (1758년)
군주루이 15세

2. 생애와 초기 경력

그는 귀족 가문 출신 세금징수인의 아들로 로드브(Lodève), 에로(Hérault)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파리로 보내져 예수회에서 철학과 고전, 그리고 신학을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고, 봉지 추기경의 영향으로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의 왕비)의 자선 담당관이 되었고, 그녀의 죽음 이후에는 국왕 자신을 위해 일했다. 1698년 프레주스의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지방 교구에서 17년을 보낸 후 결국 궁정에서의 직책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2]

1715년 5월, 태양왕의 죽음 몇 달 전, 플뢰리는 루이의 증손자이자 상속자인 루이 15세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야심이 부족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의 사랑과 신뢰 덕분에 아이에게 결코 깨지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1723년 섭정 필리프 드 오를레앙이 죽자 루이 15세가 성년이 되었다. 이미 70세였던 플뢰리는 부르봉 공작을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늦추었다. 플뢰리는 루이 15세와 명목상의 수상 간의 모든 면담에 참석했고, 부르봉이 이 규칙을 깨려고 시도하자 플뢰리는 궁정에서 물러났다. 루이는 부르봉에게 가정교사를 다시 불러들였고, 1726년 6월 11일 플뢰리는 스스로 정무를 장악하고 부르봉과 그의 정부 프리 부인을 궁정에서 추방시켰다. 그는 수상이라는 공식 직함을 거부했지만, 1726년 추기경으로 승격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지위를 확보했다.[2]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 시대 이후, 궁정을 이끄는 것은 부르봉 공 루이 앙리였고, 플뢰리는 부르봉 공작과 국왕에 대한 영향력을 양분했다. 플뢰리는 권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르봉 공작이 실질적으로 재상이었지만, 부르봉 공작은 플뢰리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이 주선한 혼인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왕비 마리 레크진스카에게 압력을 가하여 플뢰리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국왕은 플뢰리에 대한 깊은 신뢰에 비해 부르봉 공작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1726년, 결국 국왕은 부르봉 공작과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의 애인 프리 공작 부인을 궁정에서 추방했다(부르봉 공작은 정치적 권력을 빼앗겼지만, 나중에 궁정에 참석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이로써 궁정은 플뢰리에 의해 이끌리게 되었다. 플뢰리는 공식적인 재상 임명을 완강히 사양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재상이었다. 그가 루이 15세의 추천으로 추기경이 된 것은 국왕에게 있어 재상의 지위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플뢰리가 재상이 되는 것에 대해 궁정에서 큰 반대는 없었다. 그는 궁정에서 항상 겸손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았고, 당시 그는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이었으며, 10대였던 국왕이 본격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짧은 중간 인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과는 달리 플뢰리는 이후 2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 플뢰리 추기경과 함께하는 의회

2. 1. 출생과 가문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랑그도크 지방 로데브에서 부유한 세금징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다. 플뢰리는 궁정 사제로서 왕비 마리 테레즈 드 오스트리쉬와 루이 14세를 섬기며 정치에 입문했다. 1698년 프레주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이후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2. 2. 종교 교육과 성직 임명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랑그도크 지방 로데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세금징수인이었다. 그는 파리로 보내져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플뢰리는 궁정 사제로서 왕비 마리 테레즈 드 오스트리쉬 곁에 있었고, 그녀의 죽음 후에는 루이 14세를 섬겼다. 1698년 그는 프레주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루이 14세는 어린 루이 15세의 교육자로 그를 임명했고, 플뢰리는 루이 15세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

2. 3. 프레주스 주교

플뢰리는 랑그도크 지방 로데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세금징수인이었다. 그는 일찍 파리로 보내져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플뢰리는 궁정 사제로서 왕비 마리 테레즈 드 오스트리쉬 곁에 있었고, 그녀의 죽음 후에는 루이 14세를 섬겼다. 이것이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끌었다. 1698년 그는 프레주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결국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3. 루이 15세의 스승과 재상

1715년 5월, 태양왕이 사망하기 몇 달 전, 플뢰리는 루이의 증손자이자 상속자인 루이 15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2] 그는 루이의 사랑과 신뢰 덕분에 아이에게 결코 깨지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다.[2] 1723년 섭정 필리프 드 오를레앙이 죽자 루이 15세가 성년이 되었다.[2] 이미 70세였던 플뢰리는 부르봉 공작을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늦추었다.[2] 플뢰리는 루이 15세와 명목상의 수상 간의 모든 면담에 참석했고, 부르봉이 이 규칙을 깨려고 시도하자 궁정에서 물러났다.[2] 루이는 부르봉에게 가정교사를 다시 불러들였고, 1726년 6월 11일 플뢰리는 스스로 정무를 장악하고 부르봉과 그의 정부 프리 부인을 궁정에서 추방시켰다.[2] 그는 수상이라는 공식 직함을 거부했지만, 1726년 추기경으로 승격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지위를 확보했다.[2]

3. 1. 루이 15세의 교육

플뢰리는 1737년에 루이 15세의 공주들을 수도원에서 교육받도록 보냈는데, 이는 궁정비 증가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귀족들이 공주 시녀, 경호대장 등의 허울 좋은 직책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왕비는 이에 저항했지만, 한 명밖에 곁에 두지 못했다.

3. 2. 부르봉 공작과의 갈등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재상으로서 국내 경제 및 재정 문제, 얀세니즘(Jansénisme) 문제, 고등법원과의 갈등, 그리고 영국 및 오스트리아와의 외교 및 국방 정책 등 여러 난제에 직면해야 했다.

플뢰리는 재무총감(Contrôleur général des finances) 미셸 로베르 르 페르티에 드 포르(Michel Robert Le Pelletier des Forts)와 필리베르 올리(Philibert Orry)를 등용하여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다. 이들은 지출 감소와 수입 증대를 통해 재정 수지 균형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플뢰리는 검소한 생활을 했고, 궁정 귀족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재정 수지 균형을 달성했다. 이후 프랑스는 혁명까지 만성적인 적자 재정에 시달렸다.

경제적으로도 화폐 가치와 신용을 회복하고, 국내 도로와 항만을 정비하여 상업 발전을 촉진했다.

얀세니즘 문제에 대해서는 교서 우니게니투스 승인을 고위 성직자들에게 요구하고, 반대하는 고등법원 구성원들을 추방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타협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되어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했고, 이후에도 프랑스의 중대한 국내 문제로 남았다.

플뢰리의 외교 정책은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여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과 협력하여 영국과 오랜 기간 평화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코르시카 반란에 개입하여 미래의 코르시카 획득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오스트리아의 국사 칙서 승인을 거부하며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의 결혼에 반대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Polish Succession)에서는 폴란드에 대규모 군대 파병을 거부하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에게 소규모 원군만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렌 공국을 장래 프랑스에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플뢰리는 가장 유능한 외무대신 제르맹 루이 쇼브랭(Germain Louis Chauvelin)을 대오스트리아 정책 차이로 해임했다. 쇼브랭은 대오스트리아 강경파였고, 플뢰리는 전쟁 조기 종식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플뢰리는 업무 능력과 지도력이 저하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발발 후 프랑스군은 보헤미아까지 진격했지만, 프로이센군의 조기 전선 이탈로 격퇴당했다. 플뢰리는 오스트리아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프랑스군의 후퇴에 대한 배려를 간청했고, 이는 그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3. 3. 재상 취임과 추기경 서임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재상으로서 루이 14세 시대부터 이어진 경제 및 재정 문제, 얀세니즘과 고등법원 문제,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외교 및 국방 문제에 직면했다.

플뢰리는 미셸 로베르 르 페르티에 드 포르(Michel Robert Le Pelletier des Forts), 필리베르 올리(Philibert Orry)를 재무총감(Contrôleur général des finances)에 등용하여 지출 감소와 수입 증대에 힘썼다. 궁정 경비 감축, 연금 삭감, 군사비 억제, 증세 등을 통해 재정 수지 균형을 달성했다. 1737년에는 루이 15세의 공주들을 수도원에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이는 궁정비 증대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플뢰리 시대의 재정 수지 균형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유일했으며, 이후 혁명까지 만성적인 적자 재정이 지속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화폐 가치와 신용을 회복하고, 국내 도로와 항만을 정비하고, 물품 운송 세율을 인하하여 상업 발전을 촉진했다.

얀세니즘에 대해서는 교서 우니게니투스 승인을 요구하고, 반대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파면하거나 수도원에 가두었다. 동시에 극단적 교황권주의자들의 입을 막아 논쟁을 잠재우려 했다. 고등법원의 반발에는 추방으로 대응했지만, 완전한 해결은 이루지 못했다. 종교 논쟁과 고등법원 문제는 이후에도 프랑스의 중대한 국내 문제로 남아 정치 개혁을 방해하고 혁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플뢰리의 외교 정책은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여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과 협력하여 영국과 오랜 기간 평화를 유지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얻었다. 코르시카 반란에 개입하여 제노바 공화국을 지원하고, 코르시카 획득의 발판을 마련했다. 오스트리아의 국사 칙서 승인을 거부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의 결혼에 반대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Polish Succession)에서는 폴란드에 대규모 군대 파병을 거부하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에게 소규모 원조만 제공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는 라인강과 이탈리아에서 우세했고, 로렌 공국을 장래 프랑스에 병합하는 조건으로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양도했다.

플뢰리는 대오스트리아 정책 차이로 외무대신 제르맹 루이 쇼브랭(Germain Louis Chauvelin)을 해임했다. 쇼브랭은 대오스트리아 강경파였고, 플뢰리는 전쟁 조기 종식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발발 후, 플뢰리는 개전파에 굴복했고, 전쟁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다. 바이에른 선제후 (황제 카를 7세) 지원을 명목으로 프랑스군이 보헤미아까지 진격했지만, 프로이센군의 조기 이탈로 격퇴당하고 프라하 수비대가 포위되었다. 플뢰리는 오스트리아 군사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평화 의지를 호소하고 프랑스군 후퇴에 대한 배려를 간청했으나, 편지가 공개되면서 권위가 추락했다.

루이 15세는 플뢰리를 경질하지 않았고, 플뢰리는 죽을 때까지 재상 지위에 있었다. 플뢰리 사망 직전, 월폴이 사퇴하고 영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섭정 시대부터 이어진 영불 평화는 끝났다.

4. 플뢰리 정부의 정책

플뢰리는 섭정 시대에

플뢰리의 긴축 정책은 재정 총감독 필리베르 오리를 통해 시행되었다.[2] 농민들에게 강제 노역(징세](corvée)])을 부과하여 프랑스의 도로를 개선했지만, 이는 나중에

4. 1. 경제 및 재정 안정

플뢰리는 섭정 시대에

플뢰리의 긴축 정책은 재정 총감독 필리베르 오리를 통해 시행되었다.[2] 농민들에게 강제 노역(미셸 로베르 르 페르티에 드 포르와 필리베르 올리(Philibert Orry)를 등용하여 지출 감소와 수입 증대에 힘썼다. 궁정 경비 감축과 연금 삭감, 군사비 억제와 함께 증세를 포함한 다양한 수단으로 수입을 늘려 재정 수지 균형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1737년에 플뢰리의 생각으로 루이 15세의 공주들이 수도원에서 교육받도록 차례로 보내졌는데, 이 또한 궁정비 증대를 우려해서였다고 전해진다. 귀족들이 공주 시녀, 경호대장 등의 허울 좋은 직책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왕비는 이에 저항했지만, 한 명밖에 곁에 두지 못했다.

플뢰리는 사생활에서도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긴축 노선에 불만을 가진 궁정 귀족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재정 수지 균형은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플뢰리 시대에만 달성되었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혁명까지 만성적인 적자 재정이 지속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올리 등에 의해 화폐의 가치와 신용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동시에 국내 도로와 항만을 정비하고, 물품 운송에 대한 세율을 인하하여 유통을 자극함으로써 상업 발전을 촉진했다.

4. 2. 얀센주의 논쟁과 고등법원과의 관계

플뢰리는 얀센주의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2] 그는 클레멘트 11세의 교황령 ''우니게니투스(Unigenitus)''를 발표한 소수의 프랑스 주교 중 한 명이었으며,[2]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제들을 투옥했다.[2] 파리 의회의 얀세니스트 반대에 대해서는 의원 40명을 파리 근교의 "황금 새장"에 유배시키기도 했다.[2]

플뢰리는 극단적 교황권주의(Ultramontanisme)자들의 입을 막아 논쟁의 불씨를 잠재우려 했다. 또한 얀세니즘 시행을 방해하는 프랑스 고등법원(Parlement de Paris) 구성원들을 여러 번 추방하여 법을 강제로 등기시켰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결론으로 마무리해야 했고,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종교 논쟁과 고등법원은 이후에도 계속 프랑스의 중대한 국내 문제가 되어 정치의 발목을 잡았고, 국가에 진정으로 필요한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체력과 시간을 정부로부터 빼앗아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3. 평화 외교 정책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재임 기간 동안 평화 유지를 위한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영국의 로버트 월폴 경과 공유하는 관심사였다.[2] 두 숙적은 플뢰리의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을 삼갔다.[2]

플뢰리는 스페인의 엘리자베스 파르네제의 이탈리아에 대한 야심찬 계획을 지지하여 1729년 파르마와 토스카나 공국 계승을 돈 카를로스에게 보장했다.[2] 그러나 프랑스의 외교력은 군사력을 잃고 있었다. 플뢰리는 지아친토 파올리(Giacinto Paoli) 휘하 코르시카 혁명가들과 은밀한 이중 게임을 펼치며 섬에 무기를 밀반입하면서 제노바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보장했다. 이러한 조작을 통해 1768년 코르시카가 프랑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플뢰리는 궁정 여론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2세 사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후보자에 맞서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폴란드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해야 했다.[2] 그러나 단치히로 파견된 프랑스 원정대는 굴욕으로 끝났다. 플뢰리는 그의 고문 제르맹 루이 쇼블랭의 압력을 받아 더욱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긴밀한 동맹을 맺고 두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파병했다.[2] 라인강과 이탈리아에서의 군사적 성공은 비엔나 조약(1735-1738)의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2] 프랑스는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1713년 실질적 계승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했다.[2] 그러나 외교적인 술책을 통해 플뢰리는 1740년 카를 6세 사망을 구실로 전쟁 당이 왕의 조언에서 우세한 것을 발견하자 약속을 파기했다.[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 당시 보헤미아 전역의 재난 이후 그는 합스부르크 장군 도미니크 폰 쾨니히제크-로텐펠스에게 비밀리에 겸손한 편지를 썼고, 쾨니히제크는 즉시 그것을 공개했다.[2] 플뢰리는 자신의 편지를 부인했고, 1월 20일 프랑스군이 프라하에서 철수한 지 며칠 후 이시레무리노에서 사망했다.[2]

플뢰리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바다에서 프랑스-영국 간의 충돌이 격화되어 1744년 3월 영국과의 전쟁 선포로 이어졌고, 이는 그가 오랫동안 피해 온 전쟁이며, 1713년부터 1744년까지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 때때로 두보이스 추기경과 오를레앙 공작이 주요 설계자였던 "30년 평화"를 실질적으로 종식시켰다.

플뢰리의 외교 정책은 평화를 최우선으로 했고, 이 점에서 로버트 월폴과 일치하여 영국과 상당히 오랜 기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프랑스는 피해 입은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코르시카섬의 반란에 고심하는 제노바 공화국에 지원을 제공하고, 코르시카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여 미래의 코르시카 획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한편 오스트리아가 요구하는 국사 칙서의 승인을 거부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의 결혼에 반대하여 이를 견제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플뢰리는 멀리 떨어진 폴란드 왕국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는 것을 거부하고, 왕비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 대해서는 원조금과 소수의 원군으로 잠재웠다. 한편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는 라인강 지역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모두 우세했고, 로렌 공국을 장래 프랑스에 병합한다는 전제하에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양도하는 데 성공했다.

플뢰리도 말년이 되자 업무 능력과 지도력의 저하가 현저해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플뢰리는 개전파의 기세에 굴복했고, 전쟁을 강력하게 지휘할 수도 없었다. 바이에른 선제후(황제 카를 7세) 지원을 명목으로 프랑스군은 보헤미아까지 진격하여 상황은 매우 유리해 보였지만, 프로이센 왕국군의 조기 전선 이탈로 프랑스군은 격퇴되었고, 프라하 수비대는 고립되어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되는 상황이 되었다. 당황한 플뢰리는 오스트리아의 군사 장관 로타르 요제프 도미니크 폰 케니히제크-로텐펠스(외교관으로 프랑스에 주재한 경험이 있음)에게 편지를 써서, 항상 평화를 원했던 자신에게는 이 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프랑스군의 후퇴에 관해 배려해 줄 것을 간청했다. 오스트리아는 즉시 이 편지를 공표했고, 플뢰리의 권위는 추락했다.

4. 4.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플뢰리는 군대와 해군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경제 정책을 펼쳤고,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프랑스에 강요되었을 때 국가는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2] 그는 궁정 여론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2세 사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후보자에 맞서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폴란드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해야 했다. 그러나 단치히로 파견된 프랑스 원정대는 굴욕으로 끝났다.[2] 플뢰리는 그의 고문 제르맹 루이 쇼블랭의 압력을 받아 더욱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긴밀한 동맹을 맺고 두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파병했다.[2] 라인강과 이탈리아에서의 군사적 성공은 비엔나 조약(1735-1738)의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프랑스는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1713년 실질적 계승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했다.[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플뢰리는 멀리 떨어진 폴란드 왕국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는 것을 거부하고, 왕비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 대해서는 원조금과 소수의 원군으로 잠재웠다. 한편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는 라인강 지역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모두 우세했고, 로렌 공국을 장래 프랑스에 병합한다는 전제하에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양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 플뢰리 휘하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았던 외무대신 제르맹 루이 쇼블랭을 대오스트리아 정책의 차이로 해임했다. 쇼브랭은 대오스트리아 강경파였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것을 우선하는 플뢰리에게는 쇼브랭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브랭은 궁정에서 플뢰리 후계자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기 때문에, 플뢰리가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그를 미리 제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4. 5.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말년

플뢰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 당시 보헤미아 전역의 재난 이후 합스부르크 장군 쾨니히제크에게 비밀리에 겸손한 편지를 썼으나, 쾨니히제크는 즉시 이를 공개했다.[2] 플뢰리는 자신의 편지를 부인했고, 1월 20일 프랑스군이 프라하에서 철수한 지 며칠 후 이시레무리노에서 사망했다.[2]

플뢰리는 군대와 해군에서도 경제 정책을 펼쳤고,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프랑스에 강요되었을 때 국가는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2] 그는 궁정 여론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2세 사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후보자에 맞서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폴란드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해야 했다. 그러나 단치히로 파견된 프랑스 원정대는 굴욕으로 끝났다. 플뢰리는 그의 고문 제르맹 루이 쇼블랭의 압력을 받아 더욱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긴밀한 동맹을 맺고 두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라인강과 이탈리아에서의 군사적 성공은 비엔나 조약(1735-1738)의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프랑스는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1713년 실질적 계승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했다.[2] 그러나 외교적인 술책을 통해 플뢰리는 1740년 카를 6세 사망을 구실로 전쟁 당이 왕의 조언에서 우세한 것을 발견하자 약속을 파기했다.[2]

플뢰리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바다에서 프랑스-영국 간의 충돌이 격화되어 1744년 3월 영국과의 전쟁 선포로 이어졌고, 이는 그가 오랫동안 피해 온 전쟁이며, 1713년부터 1744년까지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 때때로 두보이스 추기경과 오를레앙 공작이 주요 설계자였던 "30년 평화"를 실질적으로 종식시켰다.

5. 평가와 유산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를 피를 뽑아 약하게 했고, 마자랭 추기경은 프랑스를 설사약으로 괴롭혔으며, 플뢰리는 프랑스를 엄격한 식이요법에 들게 했다. 플뢰리 시대는 역사가들에게는 휴식기, 복구기로 불리며, 프랑스는 이 기간에 소강 상태를 누리며 국력을 회복했다. 그를 리슐리외나 마자랭과 나란히 놓는 사람은 없지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낮지 않다.

당대 사람들로부터 플뢰리는 종종 부당할 정도로 나쁘게 평가받았다. 국민들은 왕이 전혀 정치 실권을 쥐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플뢰리가 국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조종한다고 비난했다. 르네-루이 드 르장송의 플뢰리 비판은 유명하다. 플뢰리가 사망한 후, 국왕이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 기대되었지만, 국왕은 이를 행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는 지도자 부재의 상황에 빠졌다. 이 틈을 타 국왕의 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수년 후에는 궁정의 중심을 퐁파두르 부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5. 1. 당대의 평가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를 피를 뽑아 약하게 했고, 마자랭 추기경은 프랑스를 설사약으로 괴롭혔으며, 플뢰리는 프랑스를 엄격한 식이요법에 들게 했다. 플뢰리 시대는 역사가들에게는 휴식기, 복구기로 불리며, 프랑스는 이 기간에 소강 상태를 누리며 국력을 회복했다. 그를 리슐리외나 마자랭과 나란히 놓는 사람은 없지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낮지 않다.

당대 사람들로부터 플뢰리는 종종 부당할 정도로 나쁘게 평가받았다. 국민들은 왕이 전혀 정치 실권을 쥐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플뢰리가 국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조종한다고 비난했다. 르네-루이 드 르장송의 플뢰리 비판은 유명하다. 플뢰리가 사망한 후, 국왕이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 기대되었지만, 국왕은 이를 행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는 지도자 부재의 상황에 빠졌다. 이 틈을 타 국왕의 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수년 후에는 궁정의 중심을 퐁파두르 부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5. 2. 현대의 평가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를 피를 뽑아 약하게 했고, 마자랭 추기경은 프랑스를 설사약으로 괴롭혔으며, 플뢰리는 프랑스를 엄격한 식이요법에 들게 했다.(d'Argenson) 플뢰리 시대는 역사가들에게는 휴식기, 복구기로 불리며, 프랑스는 이 기간에 소강 상태를 누리며 국력을 회복했다. 그를 리슐리외나 마자랭과 나란히 놓는 사람은 없지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낮지 않다.

당대 사람들로부터 플뢰리는 종종 부당할 정도로 나쁘게 평가받았다. 국민들은 왕이 전혀 정치 실권을 쥐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플뢰리가 국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조종한다고 비난했다. 르네-루이 드 르장송의 플뢰리 비판은 유명하다. 플뢰리가 사망한 후, 국왕이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 기대되었지만, 국왕은 이를 행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는 지도자 부재의 상황에 빠졌다. 이 틈을 타 국왕의 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수년 후에는 궁정의 중심을 퐁파두르 부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5. 3. 더불어민주당 관점

플뢰리 시대는 역사가들에게 휴식기, 복구기로 불리며, 프랑스는 이 기간에 소강 상태를 누리며 국력을 회복했다.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리슐리외나 마자랭과 나란히 놓일 정도는 아니지만, 낮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당대 사람들로부터 플뢰리는 종종 부당할 정도로 나쁘게 평가받았다. 국민들은 왕이 전혀 정치 실권을 쥐려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플뢰리가 국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조종한다고 비난했다. 르네-루이 드 르장송의 플뢰리 비판은 유명하다. 플뢰리가 사망한 후, 국왕이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 기대되었지만, 국왕은 이를 행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는 지도자 부재의 상황에 빠졌다. 이 틈을 타 국왕의 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수년 후에는 궁정의 중심을 퐁파두르 부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Great Nation Penguin Books
[2] 백과사전 Fleury, André Hercule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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