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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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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 하이드는 제임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이자 잉글랜드의 메리 2세와 앤 여왕의 어머니이다. 1637년 윈저에서 태어난 그녀는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네덜란드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요크 공작 제임스를 만나 결혼했다. 제임스와 결혼 후 요크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남편의 가톨릭 개종에 영향을 미쳤다. 1671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으며, 두 딸 메리와 앤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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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하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앤 하이드, 요크 공작부인, 1662년, 릴리 그림.
피터 릴리 그림, 1665년경. "앤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만지는 모습은 왕실 배우자의 주요 역할인 출산을 암시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배우자제임스, 요크 공작 및 올버니 공작 (1660년 결혼)
아버지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
어머니프랜시스 아일즈버리
출생일1637년 3월 12일/22일
출생지윈저, 버크셔주, 잉글랜드
사망일1671년 3월 31일
사망지세인트 제임스 궁전, 웨스트민스터, 미들섹스, 잉글랜드
매장일1671년 4월 5일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로마 가톨릭
이전: 성공회
앤 하이드 서명
앤 하이드 서명
작위
작위명요크 공작 부인 및 올버니 공작 부인
자녀
자녀찰스, 케임브리지 공작
메리 2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
케임브리지 공작 제임스
앤,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여왕
켄달 공작 찰스
케임브리지 공작 에드가

2. 유년기와 청년기

1629년 에드워드 하이드는 첫 번째 부인 앤 에일리프와 결혼했으나, 6개월 후 앤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3년 후, 하이드는 프랜시스 아일스버리와 결혼했다. 1637년 하이드와 프랜시스 사이에서 첫 딸 앤 하이드가 윈저에서 태어났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첫 부인의 이름을 따 딸의 이름을 지었다.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앤 하이드의 가족은 네덜란드로 도피하여 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가 제공한 브레다의 집에 거주했다. 메리는 앤을 명예가정부로 지명했는데, 이는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행위였다.

앤은 헤이그나 오라녜 공비의 궁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었으며 스타일에 일가견이 있어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반했다. 앤과 사랑에 빠진 남자 중에는 노스햄프턴 백작의 아들 스펜서 컴튼이 있었으나, 앤은 곧 헨리 저민과 사랑에 빠졌다. 이후 앤은 죽은 찰스 1세의 아들 요크 공작 제임스와 사랑에 빠지자 헨리 저민을 찼다. 1659년 둘이 만난 지 2년에서 3년이 지난 후 제임스는 앤과 결혼을 약속했다. 제임스의 형이었던 찰스는 앤의 강한 성격이 의지가 약한 남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2. 1. 초기 생애 (1637년 ~ 1660년)

1629년, 에드워드 하이드는 앤 에일라이프와 결혼했으나, 결혼 6개월 만에 앤은 천연두에 걸려 유산하고 사망했다.[1] 3년 후, 하이드는 프랜시스 에일즈버리와 결혼했다. 1637년 윈저의 크랜본 로지에서 이들 부부의 장녀 앤 하이드가 태어났다.[2] 에드워드 하이드는 첫 번째 부인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었다.

1649년, 폐위된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앤 하이드의 가족은 네덜란드로 도피했다.[3] 잉글랜드 내전 동안 앤의 아버지 에드워드 하이드는 찰스 1세의 주요 고문이었으며, 1646년에는 그의 아들 찰스 2세와 함께 망명했다. 많은 난민들처럼, 이들은 브레다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오렌지 공주 메리는 많은 영국 망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4] 메리는 앤을 시녀로 임명했는데, 이는 하이드를 혐오했던 그녀의 어머니 앙리에타 마리아의 바람과는 반대였다.[5]

앤은 헤이그나 오렌지 공주의 테일링겐 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세련되었으며,[6]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앤과 사랑에 빠진 첫 번째 남자 중 한 명은 노샘프턴 백작의 아들인 스펜서 컴프턴이었다.[7] 그러나 앤은 헨리 저민과 빠르게 사랑에 빠졌고, 저민도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앤은 폐위된 왕의 아들인 요크 공작 제임스를 만나자마자 저민을 즉시 잊었다.[8] 1659년 11월 24일, 그녀가 제임스를 처음 만난 지 2년[9] 또는 3년 후에, 제임스는 앤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5]

1658년, 요크 공 제임스는 헤이그에 있던 누나 메리 헨리에타 스튜어트 (오라녜공 빌럼 2세비,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의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누나의 시녀로 일하던 앤을 만났다. 제임스는 앤이 평민이었기 때문에 애인이 되라고 요구했지만, 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앤을 곁에 두고 싶었던 제임스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는 잉글랜드 왕정복고 후에 잉글랜드의 법률에 의해 적자로 인정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녀를 얻었다.

1660년 4월, 앤의 임신이 밝혀졌지만, 제임스는 정식 결혼을 망설였다. 초조해한 것은, 여자에게 손 빠르기로는 동생을 훨씬 능가했던 찰스 2세로, "약속한 이상은 그걸 지켜라!"라며 제임스를 책망했다.

2. 2. 요크 공작 제임스와의 만남

앤은 헤이그나 오렌지 공주의 테일링겐 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세련되었으며,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앤과 사랑에 빠진 첫 번째 남자 중 한 명은 노샘프턴 백작의 아들인 스펜서 컴프턴이었다. 그러나 앤은 헨리 저민과 빠르게 사랑에 빠졌고, 저민도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앤은 폐위된 왕의 아들인 요크 공작 제임스를 만나자마자 저민을 즉시 잊었다.

1658년, 요크 공 제임스는 헤이그에 있던 누나 메리 헨리에타 스튜어트 (오라녜공 빌럼 2세비,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의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누나의 시녀로 일하던 앤을 만났다. 제임스는 앤이 평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에드워드 하이드는 형 찰스 2세의 망명 정권의 국무 대신일 뿐, 작위도 영지도 없었다) 애인이 되라고 요구했지만, 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앤을 곁에 두고 싶었던 제임스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는 잉글랜드 왕정복고 후에 잉글랜드의 법률에 의해 적자로 인정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녀를 얻었다.

1659년 11월 24일, 그녀가 제임스를 처음 만난 지 2년[3] 또는 3년[2] 후에, 제임스는 많은 반대, 특히 그녀를 방에 가두고 찰스에게 그녀를 처형하라고 촉구했다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앤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4] 찰스는 이 조언을 거부하고 앤의 강한 성격이 의지가 약한 그의 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제안했다.[9]

3. 요크 공작 부인 시절 (1660년 ~ 1671년)

1637년 버크셔에서 태어난 앤 하이드는 1658년 헤이그에서 누나 메리 헨리에타 스튜어트의 시녀로 일하던 중 요크 공 제임스를 만났다. 제임스는 앤에게 애인이 되라고 요구했지만, 앤은 평민 신분이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앤을 곁에 두고 싶었던 제임스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를 잉글랜드 왕정복고 이후 잉글랜드 법률에 따라 적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하고서야 앤을 얻을 수 있었다.

1660년 4월, 앤의 임신이 밝혀지자 제임스는 정식 결혼을 망설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약속한 이상은 그걸 지켜라!"라며 제임스를 설득했다. 왕정복고 4개월 후,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10월, 앤은 장남 찰스를 출산했지만, 찰스는 1세에 천연두로 요절했다. 앤은 궁정에서 인기가 없었지만, 찰스 2세에게는 호감을 샀다. 제임스는 결혼 생활 내내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그중에는 버윅 공작의 어머니인 아라벨라 처칠도 있었다.[2]

1670년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앤은 남편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8] 1671년 2월, 앤은 여덟째 아이 캐서린을 출산했지만, 캐서린은 그해 12월에 요절했다. 앤은 캐서린을 출산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3. 1. 결혼

앤, 제임스, 그리고 그들의 두 딸, 메리 여왕과 앤 여왕의 초상화 (이 초상화는 앤과 제임스의 초기 초상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1660년 4월, 앤의 임신이 밝혀지자, 제임스와 앤은 결혼을 해야 했다.[4] 왕정 복고가 1660년 5월에 이루어진 후, 1660년 9월 3일 런던에서 공식적이지만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밤 11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스트랜드에 있는 앤의 아버지 에드워드 하이드의 집인 우스터 하우스에서 열렸고, 제임스의 채플린인 조셉 크라우더 박사가 집례했다.[4] 프랑스 대사는 앤을 "왕족의 혈통에 걸맞은 용기, 지략, 활력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부부의 첫 아이인 찰스는 그 해 10월에 태어났지만, 7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 후 메리(1662–1694), 제임스 (1663–1667), 앤 (1665–1714), 찰스 (1666–1667), 에드가 (1667–1671), 헨리에타 (1669–1669), 캐서린 (1671–1671) 등 7명의 자녀가 더 태어났다. 그들의 아들들과 두 딸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일부 관찰자들은 왕자인 제임스가 앤과 결혼한 것을 비난했다.[4] 새뮤얼 피프스는 결혼에 대해 "... 요크 공작이 그녀와 결혼한 것은 왕국을 망쳤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을 재상이 너무 커져서 다른 사람들이 다룰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4] 앤이 사망한 후, 왕실은 제임스의 새로운 아내를 찾으려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아내는 낮은 신분이어선 안 되었다. 피프스가 제임스를 좋은 아버지로 묘사했지만, 그는 앤과 제임스가 장남의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이상하게 진술했다.[3] 피프스는 또한 앤을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여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묘사했다.[4] 제임스의 조카(후에 앤의 사위가 됨)인 윌리엄 3세와 그녀의 남편의 사촌인 하노버의 소피아의 마음속에도 하이드 가문의 낮은 신분에 대한 낙인이 남아있었다.

3. 2. 궁정 생활과 갈등

앤은 궁정에서 인기가 없었지만, 형님 찰스 2세에게는 호감을 샀다.[1] "그 시대 가장 경계심 없는 바람둥이"로 여겨진 제임스는 결혼 생활 내내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다.[2] 이 중에는 사생아 아들인 버윅 공작의 어머니인 아라벨라 처칠이 있었다. 버윅은 프랑스 군대에서 매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으며, 제임스는 아라벨라의 형제인 존 처칠에게 일련의 직책을 보장했다.[3]

앤은 남편의 외도에 무관심하지 않았으며, 새뮤얼 핍스는 그녀가 질투심을 느끼고 제임스를 나무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핍스는 이 부부가 공개적으로 애정을 과시하고, 서로에게 키스하고 기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 핍스는 제임스가 체스터필드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앤이 찰스에게 끈질기게 불만을 제기하여 체스터필드 부인이 시골로 물러나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고 썼다.[4][5]

역사학자 존 캘로는 앤이 제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6] 성공회 고교회 전통에서 자란 앤은 1669년에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중단했는데, 이는 가톨릭의 형식과 관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제임스도 같은 시기에 개종했지만 찰스의 요청에 따라 1673년까지 개종 발표를 미루었다.[7] 찰스는 나중에 죽기 직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동생의 자녀들은 개신교 신자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메리와 앤 모두 잉글랜드 교회 신자였다.[8]

1670년, 앤은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 어린 시절에 프로테스탄트로 자란 제임스가 후에 가톨릭 신자가 된 원인 중 하나는 앤의 개종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3. 3. 가톨릭 개종과 영향력

앤은 성공회 고교회 전통에서 자랐지만, 1669년에 성공회 예배 참석을 중단했다. 이는 가톨릭의 형식 및 관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4] 역사학자 존 캘로는 앤이 남편 제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3] 제임스도 비슷한 시기에 개종했지만, 형 찰스 2세의 요청에 따라 1673년까지 개종 발표를 미루었다.[4] 찰스 2세는 나중에 죽기 직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동생의 자녀들은 개신교 신자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메리와 앤 모두 잉글랜드 교회 신자였다.[5] 1670년, 앤은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8] 어린 시절에 프로테스탄트로 자란 제임스가 후에 가톨릭 신자가 된 원인 중 하나는 앤의 개종에 있었다고 전해진다.[8]

4. 사망과 유산

앤은 막내 아들 에드거를 낳은 후 15개월 동안 병을 앓았다. 1669년에 헨리에타를, 1671년에 캐서린을 낳았는데, 캐서린을 낳은 후 회복하지 못했다. 유방암으로 앓던 그녀는 1671년 3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오빠인 헨리와 로렌스가 성공회 사제를 불러 성찬례를 받게 하려 했지만 앤은 거절했고 가톨릭 교회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죽은 지 이틀 후, 방부 처리된 그녀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예배당에 있는 메리 1세의 묘소에 안치되었다. 1671년 6월, 앤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에드거가 자연사했고, 12월에는 캐서린도 사망하여 메리와 앤만이 요크 공작의 상속녀로 남게 되었다.

앤 하이드가 죽은 후, 훗날 메리 2세가 빌럼 비싱이 그린 앤의 초상화를 의뢰했다.[1] 이 초상화는 윈저 성의 가든 하우스 여왕의 응접실 문 위에 걸려 있었다.[1] 제임스는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한 지 2년 후, 가톨릭 공주인 모데나의 메리와 결혼했다.[1] 메리는 제임스의 유일한 성인 생존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를 낳았다.[1] 제임스는 1685년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1688년 명예 혁명 동안 폐위되었다.[1] 그 후 잉글랜드 의회는 왕위를 앤의 장녀 메리와 그녀의 남편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에게 제안했다.[1] 1694년 메리가 사망하고 1702년 윌리엄이 사망한 후, 앤 하이드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앤이 세 왕국의 여왕이 되었고, 1707년에는 통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1]

5.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케임브리지 공작 찰스1660년 10월 22일1661년 5월 5일부모의 법적 결혼 두 달 후에 태어났으며, 천연두로 7개월 만에 사망[4]
메리 2세1662년 4월 30일1694년 12월 28일1677년 사촌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와 결혼. 그녀와 남편은 아버지의 퇴위 후 1689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손 없음[5]
케임브리지 공작 제임스1663년 7월 12일1667년 6월 20일흑사병으로 사망[6]
1665년 2월 6일1714년 8월 1일1683년 덴마크의 조지와 결혼. 1702년 형부이자 사촌의 뒤를 이었다. 1707년 연합법에 따른 최초의 대영 제국 군주. 후손 없음[8]
켄달 공작 찰스1666년 7월 4일1667년 5월 22일경련으로 사망[7]
케임브리지 공작 에드거1667년 9월 14일1671년 6월 8일어린 시절 사망[9]
헨리에타1669년 1월 13일1669년 11월 15일유아기에 사망
캐서린1671년 2월 9일1671년 12월 5일유아기에 사망


6. 미디어 묘사

2003년 미니시리즈 ''찰스 2세: 권력과 열정''(또는 ''마지막 왕'')에서 앤 하이드는 타비타 웨이디가 연기했다.[8]

7. 스튜어트 왕가의 가계도

스튜어트 왕가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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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왕잉글랜드 왕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아일랜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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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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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Portrait of the Duchess of York http://www.historica[...] Philip Mould Ltd. 2015-09-05
[2] DNB
[3] 웹사이트 The Diary of Samuel Pepys http://www.pepysdiar[...] 1661-05-06
[4] 웹사이트 The Diary of Samuel Pepys http://www.pepysdiar[...] 1667-06-24
[5] Royal Collection James, Duke of Cambridge (1663–7)
[6] 웹사이트 The Diary of Samuel Pepys http://www.pepysdiar[...] 1667-04-30
[7] 웹사이트 The Diary of Samuel Pepys http://www.pepysdiar[...] 1667-05-14
[8] 웹사이트 The Last King: full cast and crew https://www.imdb.com[...]
[9] D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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