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자키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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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와 2루수 포지션을 소화하며 1965년부터 1984년까지 롯데 오리온스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가시마 2세'로 불리며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고, 1969년부터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0년에는 25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74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세이부 이적 후에도 활약을 이어가며 베스트 나인 2회,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3회를 수상했으며, 1983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며, 통산 270홈런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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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히로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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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야마자키 히로유키 |
로마자 표기 | Hiroyuki Yamazaki |
출생일 | 1946년 12월 22일 |
출생지 | 사이타마현 아게오시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신장 | 176 cm |
체중 | 76 kg |
포지션 | 2루수, 유격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연도 | 1965년 |
첫 출장 | 1965년 4월 10일 |
마지막 출장 | 1984년 9월 29일 |
소속팀 | 도쿄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 (1965-1978) 세이부 라이온스 (1979-1984) |
기록 | |
타율 | 0.265 |
안타 | 2,081 |
홈런 | 270 |
타점 | 985 |
도루 | 137 |
수상 내역 | |
베스트 나인 수상 | 5회 (1969-1971, 1974, 1980) |
골든 글러브 수상 | 3회 (1977, 1980-1981) |
올스타 선정 | 11회 (1969-1970, 1972-1977, 1980-1981, 1983) |
타격왕 | 2회 (1969, 1974) |
사이클링 히트 달성 | 1971년 8월 14일 |
명구회 가입 | O |
2. 프로 입단 전
사이타마현립 아게오 고등학교에 진학 후, 1학년 때 사노 요시유키를 4번 타자로 내세운 고후 공고에 패하며 고시엔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봄의 선발 대회에 유격수 겸 백업 투수로 출전하여 2회전에서 도호고에 완봉패했지만, 이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고시엔 첫 등판을 기록했다. 여름 현 예선에서는 준결승에서 구마가야 상고에 패했다.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사이타마현 아게오시에서 화과자 가게를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15]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 뒤 양조장 젊은이에게 야구를 처음 배웠고,[15] 중학교 입학 후 야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투수였다.[15] 사이타마현립 아게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1962년 1학년 때 투수 겸 3번 타자로 여름 고시엔 예선 서관동 대회 결승에 진출했지만, 사노 요시유키를 4번 타자로 내세운 고후 공고에 아쉽게 패하며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1963년 봄의 선발 대회에 유격수 겸 백업 투수로 첫 출전하여 1회전에서 마쓰사카 상업을 꺾었지만, 2회전에서 도호고에 완봉패했다.[16] 야마자키는 이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고시엔 첫 등판을 기록했다. 1964년 여름 현 예선에서는 준결승에서 구마가야 상고에 패했다. 같은 해 9월, 아게오 시내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를 맡았다.[17] 고등학교 1년 후배로는 아이다 테루오, 에다 코이치가 있었다.
2. 2. 고등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졸업 후, 야마자키는 홈런을 칠 수 있는 능력으로 나가시마 시게오와 비교되기도 했다.[2] 야구 실력과는 별개로, 1964년 하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였다.[3]3. 선수 경력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프로 선수 생활 동안 베스트 나인 5회,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3회를 수상했지만, 개인 타격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고졸 1년 차부터 유격수로 출전했지만 프로 수준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현역 20시즌 중 14시즌에서 두 자릿수 홈런, 통산 270홈런을 기록했다. 규정 타석을 채우고 3할 타율을 기록한 것은 단 한 번뿐이며, 통산 타율은 .265이다.
통산 도루는 137개이지만 도루 실패가 많아 성공률은 55.9%에 그쳤고, 통산 희생타도 104개로 많지 않아 전형적인 리드오프나 2번 타자 유형은 아니었다. 롯데 시절에는 팀 사정에 따라 1번부터 7번까지 다양한 타순에 기용되었지만, 세이부 이적 후에는 1번이나 2번으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에는 리그 최다 사구를 기록했고, 1981년과 1983년에는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프로 입단 후 1번부터 9번까지 모든 타순에서 기용된 경험이 있다.
수비에서는 입단 초기 유격수로서 1968년에 23실책, 수비율 .957을 기록하는 등 확실성이 부족했다. 하지만 1969년부터 2루수로 전향한 후 안정감을 찾았다. 이후 오랫동안 2루수로 활약하며 다카기 모리미치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1883경기에 2루수로 출전했고, 2루수 통산 보살 3972개, 통산 자살 4840개는 모두 역대 3위의 기록이다.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은 2루수로 3번 수상했다. 현역 시절 숨겨진 공의 명수로도 알려졌다.
3. 1. 도쿄/롯데 오리온스 시절 (1965년 ~ 1978년)
1965년,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나가시마 2세'라는 평가를 받으며 오리온스 입단 당시 등번호 '''3'''번을 제시받았지만, '''2'''번을 희망했다.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고, 각 구단의 경쟁 속에 계약금 5000만엔으로 입단했다.[4]1967년에 유격수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1968년에는 규정 타석 (17위, 타율 .255)에 도달했지만, 타격 성장은 더뎠다.
1969년에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 타율 .301 (리그 5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부터 3년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0년에는 개막전에서 난카이 호크스를 상대로 1회말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을 기록했다.[18] 이 해 롯데 타선은 미사일 타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야마자키는 주로 6번 타자로 25홈런, 75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16타수 2안타로 부진했다.
1971년 8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 역대 25번째 사이클 안타를 달성했다.
1973년 올스타전 3차전에서 9회말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야스다 타케시를 상대로 사요나라 안타를 쳐 MVP를 수상했다.
1974년에는 두 번째 리그 우승을 경험,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모든 경기에 4번 타자로 출전, 최종 6차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는 등 22타수 8안타 3타점으로 활약하여 우수 선수상을 수상,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77년에는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3. 2.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79년 ~ 1984년)
1978년 오프, 야마우치 카즈히로 감독의 구상에서 벗어나 코가 마사아키, 쿠라모치 아키라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나리시게 하루오와 함께 세이부 라이온스에 이적했다.[19] 당시 야쿠르트 감독 히로오카 타츠로에게서 야쿠르트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실현되지 않았다.[19] 네모토 리쿠오 세이부 감독은 타부치 코이치, 노무라 카츠야 등 타 구단에서 실적을 쌓은 베테랑 선수를 영입했고, 야마자키는 롯데 시절과 같은 등번호 2번을 부여받아 팀 재건의 핵심 선수로 기대를 받았다.[20]1979년 부상으로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타율 .332를 기록했다.[5]
1980년에는 타율 .294(리그 16위), 25홈런으로 베스트 나인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받았다.
1982년에는 120경기 이상 출전해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3년에는 개인 최다인 82타점을 기록했고, 9월 18일 롯데전에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21]
1984년, 팀의 리그 3연패가 좌절되자 젊은 선수 위주로 기용되었고, 타격 부진으로 츠지 하히코가 2루수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에는 분카 방송, TV 도쿄에서 야구 해설자로, 닛칸 겐다이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부터 리더십과 탁월한 야구 이론을 인정받아 코치나 감독 취임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모두 고사했다.[22] 야마자키는 이에 대해 "제가 성격이 비뚤어져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지도자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23] 명구회 회원으로 클럽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13]
5. 선수로서의 특징
山崎 裕之일본어는 고등학교 시절 사이타마 현립 오미야 공원 야구장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이래로 백스크린 홈런을 칠 정도로 강타자로 명성을 떨쳐 '나가시마 2세'로 평가받았다.[24][15] 프로에서는 유격수와 2루수를 모두 소화했으며, 특히 1969년에 2루수로 보직을 변경한 후 수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같은 해부터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7년에는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1980년에는 베스트 나인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2루수로서 통산 1883경기 출전, 3972보살, 4840자살은 역대 최다 기록 중 하나이다. 통산 270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을 갖췄지만, 통산 타율은 .265로 높지 않다. 현역 시절 숨겨진 공의 명수로 알려졌다.
히로오카 타츠로는 선수로서 야마자키를 크게 신임했으며,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는 영입을 열망했을 뿐만 아니라, 세이부 감독이 된 후에는 히가시오 오사무나 타부치 코이치 등 팀의 간판 선수들도 특별 대우 없이 엄격한 태도로 대했지만, 야마자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1982년 시즌은 타율 0.246, 7홈런이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대한 기여도는 최고"라고 평가하며 이 해에는 연봉이 올랐다고 한다.
6. 개인 기록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고등학교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사이타마 현립 오미야 공원 야구장에서 백스크린 홈런을 기록하며 '나가시마 2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히로시마 카프를 제외한 11개 구단이 주목했던 유망주였으나, 야마자키는 도쿄 연고 구단을 희망하는 부모님의 뜻과 야마다 키요시 오리온즈 스카우트의 지속적인 관심에 힘입어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했다.[24][15] 당시 오리온즈가 제시한 5000만엔의 계약금은 파격적인 금액이었으며, 이러한 과열 경쟁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 도입의 계기가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25][26]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은 야마자키를 선수로서 매우 신뢰하여, 야쿠르트 감독 시절에는 영입을 원했고,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히가시오 오사무, 타부치 코이치 등 주축 선수들에게도 엄격했지만 야마자키에게는 특별한 지적을 하지 않았다. 1982년 시즌 부진에도 불구하고 "팀에 대한 기여도가 최고"라며 연봉을 인상해 주기도 했다.[27] 네모토 리쿠오 감독 또한 야마자키를 "수비와 타격이 모두 되는 선수"로 평가하며 세이부의 핵심 선수로 영입했고, 야마자키는 이적 후 뛰어난 성적으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8]
6. 1.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65년 4월 10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7번·유격수로 선발 출장[2]
- 첫 안타: 1965년 4월 11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차전(고라쿠엔 구장), 5회 초에 오자키 유키오로부터[2]
- 첫 타점: 1965년 6월 8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즈 8차전(고쿠라 구장), 10회 초에 다나카 츠토무로부터 우전 2점 적시타
- 첫 홈런: 1965년 6월 15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9차전(도쿄 스타디움), 3회 말에 다나카 쵸로부터 2점 홈런
6. 2. 기록 달성 경력
기록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100홈런 | 1973년 4월 20일 | 한큐 브레이브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74번째 |
1000경기 출장 | 1974년 5월 21일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 헤이와다이 야구장 | 역대 170번째 |
1000안타 | 1975년 7월 13일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 미야기 구장 | 역대 91번째 |
150홈런 | 1976년 8월 29일 | 한큐 브레이브스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 역대 44번째 |
1500경기 출장 | 1978년 5월 27일 | 닛폰햄 파이터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57번째 |
1500안타 | 1979년 10월 10일 | 닛폰햄 파이터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32번째 |
200홈런 | 1980년 4월 30일 | 롯데 오리온스 | 미야기 구장 | 역대 33번째 |
1000삼진 | 1980년 8월 1일 | 난카이 호크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5번째 |
300 2루타 | 1981년 8월 10일 | 롯데 오리온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18번째 |
3000루타 | 1982년 8월 10일 | 롯데 오리온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19번째 |
2000경기 출장 | 1982년 8월 17일 | 난카이 호크스 | 오사카 구장 | 역대 17번째 |
250홈런 | 1983년 4월 22일 | 한큐 브레이브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20번째 |
1000득점 | 1983년 5월 19일 | 롯데 오리온스 | 가고시마 현립 가모이케 야구장 | 역대 18번째 |
350 2루타 | 1983년 9월 6일 | 난카이 호크스 | 오사카 구장 | 역대 13번째 |
2000안타 | 1983년 9월 18일 | 롯데 오리온스 |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역대 18번째 |
6. 3. 기타 기록
- 6경기 연속 2루타(1971년 7월 29일 ~ 8월 3일) ※당시 일본 기록
- 1이닝 2홈런[34] : 2회 ※역대 8번째(여러 차례 달성은 역대 2번째)
- 1980년 8월 7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후기 7차전(닛폰 생명 구장), 7회초 무사인 상황에서 야나기다 유타카로부터 좌월 만루 홈런, 2사 후 야마구치 데쓰지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9번째
- 1983년 9월 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0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8회말 선두에서 가와하라 쇼지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 2사 후에서 가와하라 쇼지로부터 좌월 만루 홈런 ※역대 11번째
- 사이클링 히트 : 1971년 8월 14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25번째
- 올스타전 출장 : 11회(1969년, 1970년, 1972년 ~ 1977년, 1980년, 1981년, 1983년)
7. 수상 경력
8. 등번호
山崎裕之|야마자키 히로유키일본어의 등번호는 1965년부터 1984년까지 2번이었다.
9. 연도별 타격 성적
롯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