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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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수청은 19세기 중국 태평천국 운동의 주요 인물로, 초기 봉기에 참여하여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천부하범'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홍수전의 권위에 도전하며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홍수전의 밀명을 받은 위창휘에게 살해당하는 '천경사변'을 겪었다. 그의 죽음은 태평천국의 세력 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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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은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기독교적 사상을 받아들여 태평천국을 건국하고 천왕으로 즉위하여 토지 개혁과 사회 개혁을 시도했지만, 내부 갈등과 청나라의 공격으로 사망하며 태평천국을 멸망시킨 중국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다.
양수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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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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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양수청 (楊秀清) |
본명 | 양사룡 (楊嗣龍) |
작위 | 동왕 (東王) |
추대 | 천국의 동왕 (자칭) |
재위 기간 | 1851년 – 1856년 |
섭정 | 홍수전 |
섭정 유형 | 천왕 |
계승자 | 홍천우 (洪天佑) |
휘호 | 진천명태평천국전천부상주황상제진신진성지권위사성신상제지풍뢰화내사속병주좌보정군사후사전중군겸우군동왕구천세 (真天命太平天囯傳天父上主皇上帝真神真聖旨勸慰師聖神上帝之風雷禾乃師贖病主左輔正軍師後師殿中軍兼右軍東王九千歲) |
출생일 | 1821년 9월 23일 |
출생지 | 청나라 광시 구이핑 신촌 |
사망일 | 1856년 9월 2일 |
사망지 | 태평천국 톈징 (현재의 중국 장쑤성 난징) |
아버지 | 양아기 (楊亞齊) |
어머니 | 고씨 (古氏) |
종교 | 배상제회 |
군사 경력 | |
소속 | 태평천국 |
복무 기간 | 알 수 없음 |
참전 전투 | 태평천국의 난 난징 전투 (1853) 천경사변 |
기타 정보 | |
중국어 간체 | 杨秀清 |
중국어 정체 | 楊秀清 |
병음 | Yáng Xiùqīng |
웨이드-자일스 | Yang Hsiu-Ch'ing |
2. 초기 생애와 배경
광서성(廣西省) 계평 출신의 객가인(客家人) 양수청은 어려서 숯을 팔았지만, 일찍부터 홍수전이 창시한 기독교 비밀결사 배상제회(拜上帝會)에 가입했다.[1] 1848년, 배상제회 간부였던 풍운산이 청나라 관리에게 체포되자, 홍수전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광저우로 갔다. 이 때문에 교도들이 동요하자, 양수청은 독단으로 야훼의 신탁이라고 주장하는 ‘천부하범(天父下凡)’을 행했고, 그 결과 사람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풍운산이 석방된 후 광서성으로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하고 그를 수뇌부로 삼았다.
2. 1. 출신 배경
광서성계평 출신의 객가인이다. 어려서 숯을 팔았지만, 일찍부터 홍수전이 창시한 기독교 비밀결사 배상제회에 가입했다.[2] 양수청의 가족은 광시성 진톈 근처 신춘의 농부였으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1] 황제의 보고에 따르면 양수청은 약간의 교육을 받은 숯 굽는 사람이었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과하는 상인들의 물품을 산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호송 시스템을 조직했다.[2] 그의 형제 양푸칭 또한 나중에 태평천국의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3]2. 2. 배상제회 가입
1848년, 배상제회 간부였던 풍운산이 청나라 관헌에게 체포되자, 홍수전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광저우로 갔다. 이 때문에 교도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양수청은 독단으로 야훼의 신탁이라고 주장하는 ‘천부하범(天父下凡)’을 행했고, 그 결과 사람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4][5][6][7] 풍운산이 석방되자 광서성에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하고 양수청을 수뇌부로 삼았다.[8]2. 3. 천부하범과 권력 장악
광서성(廣西省) 계평 출신의 객가인(客家人)인 양수청은 어릴 때 숯을 팔았지만, 일찍부터 홍수전이 만든 기독교 비밀결사인 배상제회(拜上帝會)에 가입했다. 1848년, 배상제회 간부였던 풍운산이 청나라 관리에게 잡혀가자, 홍수전은 그를 구하기 위해 광저우에 갔다. 이 때문에 교도들이 크게 동요하자, 양수청은 야훼의 신탁이라고 주장하는 ‘천부하범’(天父下凡)을 독단적으로 행하여 사람들의 동요를 진정시켰다.[4][5][6][7] 풍운산이 석방되어 광서성으로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하고 그를 수뇌부로 삼았다.[8]1851년 금전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군사와 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네 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도 양수청이었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그 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북벌군은 전멸했고, 서정군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군의 주력을 궤멸시키지는 못했다.
이때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의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었다. 양수청은 종종 ‘천부하범’을 내세워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결국 양수청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고, 홍수전과 다른 여러 왕들과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 · 완전판》에 따르면[21], ‘천부하범’으로 인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엎드려 몽둥이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6년, 양수청은 백성들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하라는 내용의 ‘천부하범’을 행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태평천국은 홍수전에게만 ‘만세’라고 칭했고, 양수청은 ‘9천세’, 그 다음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 순이었다. 홍수전은 양수청의 성장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을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위창휘는 9월 1일에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그의 군사 2만 명을 살해했다. 이때 여성 참모이자 양수청의 비서였던 부선상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천경사변이라고 한다. 이 혼란으로 태평천국의 세력은 쇠퇴했고, 결국 청나라와의 형세는 역전되었다.
3. 태평천국 운동에서의 역할
1851년 금전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군사 및 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네 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도 양수청이었다.[12]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천경(天京)으로 개칭, 수도로 삼았다. 이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으나, 북벌은 괴멸되었고 서정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지배하고 있었다.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었다. 양수청은 종종 ‘천부하범’을 내세워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양수청의 전횡이 심해지자, 홍수전 및 다른 왕들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 · 완전판》에 따르면[21], 천부하범(天父下凡)으로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엎드려 몽둥이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6년, 양수청은 백성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하라는 내용의 ‘천부하범’을 발했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었으므로, 태평천국은 홍수전에게만 ‘만세’라고 칭했고, 양수청은 ‘9천세’, 다른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홍수전은 양수청의 성장을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 토벌 밀명을 내렸다. 위창휘는 9월 1일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동왕부를 습격, 양수청 일족과 군사 2만 명을 살해했다. 이때 양수청의 비서였던 부선상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천경사변’이라 한다. 이 혼란으로 태평천국은 쇠퇴, 청과의 형세가 역전되었다.
양수청은 유교 및 성상 파괴에 대한 견해를 놓고 홍수전과 충돌했다. 양수는 유교적 도덕이 본질적으로 긍정적이며, 유교의 기본 교리가 반란의 기독교 해석과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용의 이미지가 신성 모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홍수전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유교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용은 악마를 상징한다고 믿었다.
3. 1. 금전봉기와 초기 지도부
광서성계평현 출신의 객가인이다. 숯 장수를 하다가 일찍이 홍수전이 창시한 기독교비밀결사인 배상제회에 가입했다. 1848년, 배상제회 간부인 풍운산이 청 관헌에게 체포되자, 홍수전은 구출을 위해 광주로 갔다. 이로 인해 회원들의 동요가 커지자, 양수청은 독단적으로 야훼의 신탁(천부하범)을 행했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풍운산이 석방된 후 광서로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했고, 양수청은 간부의 일원이 되었다.[21]1851년 금전 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정군사·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사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도 양수청이었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시키고 천경으로 개칭했다. 이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전자는 괴멸되었고, 후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나라 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21]
3. 2. 난징 점령과 통치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양수청은 도시를 장악한 후 초기의 폭력과 학살을 멈추고 군대를 징계하며, 사저에 들어가는 장교는 누구든 처형하겠다고 선언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일터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녀는 따로 살아야 했으며, 함께 걷거나 서로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남녀 군대는 계속 존재했다).[14]이때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의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지배하고 있었다.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양수청은 종종 ‘천부하범’을 내세워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홍수전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후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자, 양수청을 천국의 총리로 임명했다. 양수청이 통치하던 이 시기에 많은 기본 법률과 규정이 발표되었다.[14]
결국, 양수청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고, 홍수전과 다른 여러 왕들과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 · 완전판》에 따르면[21], 천부하범(天父下凡)에 의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엎드려 몽둥이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6년 8월, 양수청은 난징을 포위한 정부군을 격파했다. 그는 먼저 정부군이 다른 도시로 지원 병력을 보내도록 강요하여 병력을 분산시킨 다음, 자신의 모든 군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자만심은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15]
양수청은 민중에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 대해서도 ‘만세’라고 칭하라는 내용의 ‘천부하범’을 할 때까지 되었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태평천국은 홍수전에게만 ‘만세’라고 칭했고, 양수청은 ‘9천세’, 그 다음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3. 3. 권력 집중과 전횡
1851년, 금전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군사와 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네 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하고 있었던 것도 양수청이었다.[12]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그 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전자는 괴멸되고, 후자는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청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이때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의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지배하고 있었다.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양수청은 종종 ‘천부하범’을 내세워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14] 결국, 양수청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고, 홍수전과 다른 여러 왕들과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 · 완전판》에 따르면[21], 천부하범(天父下凡)에 의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엎드려 몽둥이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6년, 양수청은 민중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하라는 내용의 ‘천부하범’을 할 때까지 되었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태평천국은 홍수전에게만 ‘만세’라고 주창, 양수청은 ‘구천세’였고, 다른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4. 천경사변과 죽음
1848년, 배상제회 간부였던 풍운산이 청나라 관리에 잡혀가자, 홍수전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광저우에 다녀왔다. 이로 인해 교도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양수청은 독단으로 야훼의 신탁이라고 주장하는 ‘천부하범’(天父下凡)을 행했고, 그 결과 사람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풍운산이 석방되자 광서성에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하고 양수청을 수뇌부로 삼았다.
1856년, 홍수전은 양수청의 성장을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 토벌 밀명을 내렸다. 위창휘는 9월 1일에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그의 군사 2만 명을 살해했다.[17] 이 사건을 ‘천경사변’이라고 한다. 이 혼란을 계기로 태평천국의 세력은 쇠퇴하고 결국 청나라와의 형세는 역전되었다.[20]
4. 1. 홍수전과의 갈등 심화
1851년, 금전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군사와 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네 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하고 있었던 것도 양수청이었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천경(天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그 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전자는 괴멸되고, 후자는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청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 못했다.이때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의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지배하고 있었다.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양수청은 종종 ‘천부하범’을 내세워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결국, 양수청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고, 홍수전과 다른 여러 왕들과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 · 완전판》에 따르면[21], 천부하범(天父下凡)에 의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엎드려 몽둥이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6년, 양수청은 민중에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 대해서도 ‘만세’라고 칭하라는 내용의 ‘천부하범’을 하였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태평천국은 홍수전에게만 ‘만세’라고 주창했고, 양수청은 ‘9천세’였으며 다른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4. 2. 천경사변 발발
1856년, 양수청은 백성들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할 것을 요구하는 '천부하범'을 행했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었으며, 태평천국에서는 홍수전만이 '만세'로 불렸고, 양수청은 '구천세', 그 이하의 왕들은 팔천세, 칠천세 등으로 불렸다.[21] 홍수전은 양수청의 이러한 횡포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을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16] 위창휘는 9월 1일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함께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부하 병사 2만 명을 살해했다.[17] 이때 양수청의 비서였던 부선상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천경사변"이라고 한다. 이 혼란으로 인해 태평천국의 세력은 쇠퇴했고, 결국 청나라와의 형세가 역전되었다.[19][20]4. 3. 여성 참모 부산상의 죽음
1856년 9월 1일, 위창휘는 홍수전의 밀명을 받고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진일강과 함께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그의 군사 2만 명을 살해했다.[17] 이때 양수청의 비서였던 여성 참모 부선상도 함께 죽은 것으로 보인다.[21]5. 평가와 영향
양수청은 배상제회에서 활동하면서 종교적인 권위(야훼의 신탁, "천부하범")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초기에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긍정적인 역할도 했지만, 점차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았다.[1]
천경 사변은 양수청의 전횡과 그로 인한 태평천국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
5. 1. 부정적 평가
1851년 금전 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정군사 겸 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왕들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과 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도 양수청이었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남경을 함락시키고 천경으로 개칭했다. 이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북벌은 실패했고, 서정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나라 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1]당시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실권을 쥐고 있었고,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었다. 양수청은 자주 "천부하범"을 통해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양수청의 전횡은 점차 심해졌고, 홍수전 및 다른 제왕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완전판』에 따르면, "천부하범"으로 인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평복하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1]
1856년, 양수청은 민중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부하범"을 발했다. 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었으며, 태평천국에서는 홍수전만이 "만세"로 불렸고, 양수청은 "구천세"로, 이하의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 등으로 불렸다. 홍수전은 양수청의 횡포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을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9월 1일 위창휘는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함께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부하 병사 2만 명을 살해했다. 이때 여성 장원 출신으로 양수청의 비서였던 부선상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천경 사변"이라고 한다. 이 혼란을 계기로, 태평천국의 세력은 쇠퇴했고, 마침내 청나라와의 형세는 역전되었다.[1]
5. 2. 태평천국에 미친 영향
1848년, 배상제회 간부 풍운산이 청나라 관헌에게 체포되자, 홍수전은 구출을 위해 광주로 갔다. 이로 인해 회원들의 동요가 커지자, 양수청은 독단적으로 야훼의 신탁("천부하범")을 행했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풍운산의 석방으로 광서로 돌아온 홍수전은 양수청의 "천부하범"을 인정했고, 양수청은 간부의 일원이 되었다.[1]1851년, 금전 봉기 이후, 홍수전은 양수청을 정군사·동왕에 임명하여 다른 사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남왕 풍운산·서왕 소조귀가 전사하면서 권력은 양수청에게 집중되었다. 태평천국군의 진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도 양수청이었다. 1853년에 태평천국군은 남경을 함락시키고 천경으로 개칭했다. 그 후 북벌과 서정을 결정했지만, 전자는 괴멸하고, 후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청나라 군의 주력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1]
이때,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 각 왕 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수청이 실권을 쥐고 있었고, 양수청의 결정에 홍수전은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양수청은 자주 "천부하범"을 통해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이윽고 양수청의 전횡은 심해졌고, 홍수전 및 다른 제왕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중국의 대도적·완전판』에 따르면, "천부하범"으로 인해 홍수전이 천왕부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수청에게 평복하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1]
1856년, 양수청은 민중에게 홍수전과 동등하게 자신에게도 "만세"라고 칭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부하범"을 발했다(당시 "만세"는 황제에게만 허용되었으며, 태평천국에서는 홍수전만이 "만세"로 불렸고, 양수청은 "구천세"로, 이하의 제왕은 팔천세, 칠천세로 불렸다). 홍수전은 이 지경에 이르러 더 이상 양수청의 횡포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 마침내 북왕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에게 양수청을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위창휘는 9월 1일에 천경에 들어가 다음 날 연왕 진일강과 함께 동왕부를 습격하여 양수청 일족과 부하 병사 2만 명을 살해했다. 이때 여성 장원 출신으로 양수청의 비서였던 부선상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천경 사변"이라고 한다. 이 혼란을 계기로, 태평천국의 세력은 쇠퇴했고, 마침내 청나라와의 형세는 역전되었다.[1]
참조
[1]
논문
The Taiping Rebellion
1966
[2]
논문
The Taiping Rebellion
1966
[3]
서적
Taiping Rebellion
https://books.google[...]
M.E. Sharp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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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p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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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p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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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p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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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p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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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minent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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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minent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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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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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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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s Chinese Son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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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minent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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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国の大盗賊・完全版
200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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