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양인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양인 전투는 후한 말 동탁 토벌전 시기인 191년에 손견이 동탁군과 벌인 전투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으나 소극적인 태도와 내부 분열로 인해 동탁을 압박하는 데 실패한 가운데, 손견은 양현의 양인에 주둔하여 동탁군을 격파하고 도위 화웅을 죽이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원술의 군량 지원 부족에도 불구하고 낙양 근교까지 진군하며 동탁을 장안으로 철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삼국지연의》에서는 각색되어 관우가 화웅을 베는 호로관 전투로 묘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년 중국 - 계교 전투
    191년 후한 말, 원소와 공손찬이 기주를 차지하기 위해 반하에서 격돌한 계교 전투는 공손찬의 남하를 저지했으며, 훈련된 보병이 기병에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191년 중국 - 동탁 토벌전
    동탁 토벌전은 후한 말기 동탁의 폭정에 대항하여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 연합군이 일으킨 군사 행동으로, 연합군의 와해는 군웅할거 시대를 촉발하고 조조, 손견 같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후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도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양주의 난
    양주의 난은 184년 부패한 한나라에 저항하여 강족 세력이 양주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한나라의 통치력 약화와 삼국 시대 도래의 계기가 되었다.
양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양인의 전투
전역삼국 시대 (중국)
전투 대상양인의 전투
분쟁양인의 전투
날짜서기191년 2월
장소사례 하남윤 양현 양인(현재의 허난 성루저우 시)
결과손견(반동탁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반동탁 연합군(원소, 원술, 교모 등)
교전국 2동탁
지휘관
지휘관 1원술
손견
정보
주치
지휘관 2동탁
호진
여포
화웅
병력 규모
병력 1불명 (반동탁 연합군은 십수만)
병력 2불명
사상자
사상자 1-
사상자 2-

2. 반동탁 연합군 결성

190년 봄, 교모삼공의 문서를 위조하여 동탁에 대한 거병을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었고, 장초의 부하 장홍의 호소 등에 따라 각지의 군웅들이 군사를 일으켰다.[1] 이들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했다.[1]

원술조조원소보다 늦게 낙양을 탈출하여 남양에서 손견과 합류했고,[1] 장사태수였던 손견은 조인의 계략으로 형주자사 왕예를 살해하고 북상하여 남양태수를 살해하고 노양성에서 군사를 훈련했다.[1] 조조는 가산을 털어 5천 명의 의병을 모아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고,유표도 연합군에 참여했다.[1]

반동탁 연합군은 낙양을 동쪽에서 포위하듯이 하내, 산조, 남양 등에 주둔했다.[1] 황족인 진왕 유총은 양하에 주둔하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했다.[1] 그러나 연합군은 전군이 합류한 것은 아니었고, 각 군웅들은 하내, 남양, 산조, 영천, 업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산조에서는 회의와 술자리만 지속했다.[1]

2. 1. 연합군 명단

원소를 맹주로, 원술, 조조, 손견, 공주, 유대, 왕광, 장막, 교모, 원유, 포신, 장초, 허창, 이민, 최균 등이 참여했다.[1]

2. 2. 연합군의 한계

반동탁 연합군은 190년 원소를 맹주로 결성되었으나, 10만이라는 대군에도 불구하고 동탁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1] 조조포신은 이러한 태도에 분개하여 독자적으로 동탁군과 교전했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위자와 포도 등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각 군웅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것도 연합군의 한계로 작용했다. 190년 서영은 남양의 손견을 양의 동부에서 격파했고, 영천태수 이민은 붙잡혀 끓여 죽임을 당했다. 이때 원술에게 손견에 대한 참언을 하는 자가 있어, 원술은 손견에게 군량을 보내지 않았다. 손견은 직접 노양에 있는 원술을 만나 "제가 몸을 던지는 것은 위로는 국가를 위해, 아래로는 장군(원술)의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장군은 험담을 믿고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따졌다. 원술은 손견을 위해 즉시 군량을 마련하게 했고, 손견은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원소, 한복, 장초 등은 동탁이 옹립한 헌제에 대항하기 위해 황족 유우를 옹립하려 했으나, 유우와 원술, 조조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내분이 발생하기도 했다.

3. 양인 전투

191년, 손견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양인에서 동탁군과 맞섰다. 호진여포가 이끄는 동탁군은 내부 불화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퇴했다. 손견은 이 전투에서 동탁군의 도독 화웅을 베는 큰 공을 세웠다.[1]

3. 1. 전투 과정

호진은 출진할 때 손견을 죽여야지만 퇴각하겠다고 하여 장수들의 두려움을 샀다. 호진과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양인성에서 수십 리 떨어진 광성에 이르렀다. 당초 계획은 광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진격하여 양인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으나, 광성에 도착한 군대는 이미 피로했고 장수들은 호진을 미워하여 전쟁을 비관했다.

여포 등은 손견 등이 도주했으니 추격하자고 하여 밤중에 양인성으로 진격했으나, 양인성의 수비 태세는 견고하여 칠 수 없었다. 동탁 군은 목마르고 극히 곤비했다. 밤이 되자 진도 쌓지 못하고 갑옷을 벗고 휴식하는데, 여포가 “적이 뛰쳐나온다.”라고 하여 전부 무기를 버리고 10리를 퇴각했다. 적이 보이지 않자 동탁 군은 다시 돌아와 병기를 수습하고 성을 쳤으나, 손견이 지키는 성은 단단하여 함락할 수 없었으므로 호진과 여포는 퇴각했다. 손견은 동탁 군을 무찌르고, 동탁 군의 도독 화웅을 효수했다.

191년 2월, 호진과 여포 등은 양인에서 수십 리 떨어진 광성에 도착했지만, 날이 저물고 군은 피로에 지쳐 있었다. 여포 등은 호진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호진의 작전을 실패시키려 "손견이 도망갔으니 추격해야 합니다"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 이에 호진과 여포 등은 밤샘으로 군을 진격시켰지만, 양인성의 손견군은 굳건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어 이길 수 없었다. 그러자 호진 등이 갑옷을 벗고 쉬고 있을 때, 여포는 "손견군이 출격해 왔다"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 호진 등은 허둥지둥 도망갔지만, 적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날이 밝아 양인성의 손견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여전히 굳건한 방어 태세였기에 유효한 공격을 가할 수 없어 철수했다. 손견은 출격하여 동탁군을 크게 격파하고, 동탁군의 도위 화웅을 쳐 죽였다.[1]

3. 2. 전투 결과

양인 전투에서 손견이 승리하면서 동탁은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화웅의 죽음은 동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1] 호진여포의 내분으로 인해 동탁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했다.[1] 손견은 계속해서 동탁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고, 결국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1]

4. 반동탁 연합군의 붕괴

손견은 예주 자사였지만, 원소가 주우를 예주 자사로 파견했기 때문에 원술과 손견은 예주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1] 이로 인해 원술과 원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고, 반동탁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많은 무장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후한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전란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

유대교모의 반목, 조조의 왕광 살해 등 내부 불협화음도 두드러졌다. 『삼국지』 사마랑전에 따르면, 연합군 장군들은 협력하지 않았고, 병사들의 약탈로 많은 백성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4. 1. 연합군 붕괴의 원인

반동탁 연합군은 내부 분열과 군 기강 해이로 인해 붕괴되었다.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원소와 원술의 갈등: 손견은 예주 자사였으나, 원소가 주우를 예주 자사로 파견하면서 손견과 원술은 주우, 주흔, 주앙과 예주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1] 이로 인해 원소와 원술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연합군은 와해되었다.[1]

  • 내부 분열: 유대교모가 반목하여 유대가 교모를 살해하고, 조조가 호무반의 유족과 함께 왕광을 살해하는 등 연합군 내부의 불협화음이 두드러졌다.

  • 군 기강 해이: 『삼국지』 사마랑전에 따르면, 연합군 장군들은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고,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일삼아 많은 백성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반동탁 연합군은 붕괴되었고, 많은 무장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후한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 이는 전란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1]

5. 삼국지연의와 역사적 사실

삼국지연의에서는 양인 전투 대신 관우화웅을 베는 호로관 전투가 등장한다. 유비, 관우, 장비여포와 싸웠다는 내용은 연의의 창작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손견이 양인 전투에서 화웅을 베고 동탁군을 격파했다.[1]

5. 1. 삼국지연의의 각색

삼국지연의에서는 양인 전투 대신 관우조조의 허락을 받고 출진하여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후 여포가 관우에게 일기토를 신청하지만, 유비장비가 합세하여 3대 1로 여포와 일기토를 벌여 무승부를 거두고 여포는 후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연의의 창작이며, 실제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여포와 싸운 것이 아니라 양인 전투가 벌어졌다.[1]

호로관 전투는 《삼국지연의》에서 원소가 지휘하는 '반동탁 연합군'과 동탁 군이 낙양 교외의 호로관에서 일시적으로 충돌하는 가상의 전투이다. 초반에는 연합군이 유리했으나, 맹장으로 불리는 여포와 화웅의 분전으로 동탁 군은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연합군의 관우가 동탁 군의 화웅을 죽이는 등 연합군이 우세해지자,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한다.

한편, 관우의 주군인 유비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했다는 사료(《영웅기》)도 있지만, 정사 '선주전'에서는 참가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