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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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창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곽광의 총애를 받아 대사농, 어사대부, 승상을 역임하고 안평후에 봉해졌다. 그는 상관걸의 모반 사건을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못해 열후에 봉해지지 못했으며, 창읍왕 유하 폐위에 참여하여 선제 옹립에 기여했다. 사마천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양운이 『사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후손 양진은 후한 시대에 태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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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74년 사망 - 이릉
이릉은 전한의 무장으로 이광의 손자이며 기마궁술에 능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 후 흉노의 우교왕이 되어 2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 병사했고 그의 항복은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판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옹호론이 있다. - 기원전 74년 사망 - 전한 소제 (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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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전한 무제 시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젊은 나이에 표기장군과 대사마에 오르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24세에 병사했으며, 그의 묘는 흉노를 짓밟는 말의 석상으로 유명하다. - 전한의 은택후 - 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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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중국에 관한 - 카자흐인
카자흐인은 15세기 카자흐 칸국 건국 이후 명칭이 사용된 튀르크계 중앙아시아 북부 유목민족으로, "자유로운 자"를 뜻하는 카자흐라는 명칭은 권위에 저항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카자흐 초원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유목 생활과 튀르크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여러 국가에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다.
양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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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양창 |
로마자 표기 | Yang Chang |
시대 | 전한 |
관직 | |
관직 | 승상 어사대부 |
봉작 | 안중강후 |
생애 | |
출생 | ? |
사망 | 기원전 62년 8월 |
가족 | 아버지: 양운 아들: 양융 |
2. 생애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군사마(軍司馬)로 일하였으며, 곽광의 총애를 받아 대사농으로 승진하였다.[3] 시원 6년(기원전 81년)에 대사농이 되었다.[3]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도전사자(稻田使者) 연창(燕倉)이 상관걸 등의 모반을 알아내어 양창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양창은 두려움에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대신 간대부(諫大夫) 두연년에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두연년은 소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상관걸 등이 주살된 후 연창과 두연년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창은 구경이면서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3]
원봉 4년(기원전 77년), 어사대부가 되었다.[3] 2년 후인 원봉 6년(기원전 75년)에는 왕흔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고,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다.[3]
이듬해인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이 무도하였기에 곽광과 거기장군 장안세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고, 곧 대사농 전연년을 양창에게 보내 동의를 구하였다.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하였으나, 아내가 "여기서 빨리 응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면 먼저 주살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전연년에게 허락하고 폐립에 참여했다.[3] 곧 창읍왕은 쫓겨나고, 선제가 즉위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 양창은 죽으니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양충이 이었다.[3] 서자 양운은 선제 때 광록훈을 지내다가 심기를 거슬러 파면 후 주살되었고, 이 일로 양창의 손자까지 이어지던 작위 또한 박탈되었다.[3]
양창은 사마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사마천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운이 『사기』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3]
후손 양진은 후한 때 태위에 이르렀다.[3]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군사마(軍司馬)로 일하였으며, 곽광의 총애를 받아 시원 6년(기원전 81년)에 대사농으로 승진하였다.[3]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도전사자(稻田使者) 연창(燕倉)이 상관걸 등의 모반을 알아내어 양창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양창은 두려움에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대신 간대부(諫大夫) 두연년에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두연년은 소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상관걸 등이 주살된 후 연창과 두연년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창은 구경이면서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후가 되지 못했다.[3]
원봉 4년(기원전 77년), 왕흔의 후임으로 어사대부가 되었다.[3] 2년 후에는 왕흔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고,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다.[3]
이듬해인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이 무도하였기에 곽광과 거기장군 장안세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고, 곧 대사농 전연년을 양창에게 보내 동의를 구하였다.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하였으나, 아내가 "여기서 빨리 응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면 먼저 주살당할 것입니다"라고 간언하여 자신도 모의에 가담하였다.[3] 곧 창읍왕은 쫓겨나고, 선제가 즉위하였다.
양창은 사마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사마천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운이 『사기』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3]
후손 양진은 후한 때 태위에 이르렀다.[3]
2. 2. 상관걸 모반 사건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도전사자(稻田使者) 연창(燕倉)이 상관걸 등의 모반을 알아내어 대사농 양창에게 알려주었다.[3] 하지만 양창은 두려움에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대신 간대부(諫大夫) 두연년에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3] 두연년은 소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상관걸 등이 주살된 후 연창과 두연년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창은 구경이면서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후가 되지 못했다.[3]2. 3. 어사대부와 승상 임명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군사마(軍司馬)로 일하였으며, 곽광의 총애를 받아 대사농으로 승진하였다.[3] 시원 6년(기원전 81년)에 대사농이 되었다.[3]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도전사자(稻田使者) 연창(燕倉)이 상관걸 등의 모반을 알아내어 양창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양창은 두려움에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대신 간대부(諫大夫) 두연년에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두연년은 소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상관걸 등이 주살된 후 연창과 두연년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창은 구경이면서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3]
원봉 4년(기원전 77년), 어사대부가 되었다.[3] 2년 후에는 승상이 되었고,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다.[3] 원봉 6년(기원전 75년)에 전년에 사망한 왕흔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어 안평후에 봉해졌다.[3]
이듬해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이 무도하였기에 곽광과 거기장군 장안세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고, 곧 대사농 전연년을 양창에게 보내 동의를 구하였다.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하였으나, 아내의 간언으로 자신도 모의에 가담하였다. 곧 창읍왕은 쫓겨나고, 선제가 즉위하였다.[3]
2. 4. 창읍왕 폐위와 선제 옹립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군사마(軍司馬)로 일하였으며, 곽광의 총애를 받아 대사농으로 승진하였다.[3] 시원 6년(기원전 81년)에 대사농이 되었다.[3]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도전사자(稻田使者) 연창(燕倉)이 상관걸 등의 모반을 알아내어 양창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양창은 두려움에 주변에 말하지 못하고, 대신 간대부(諫大夫) 두연년에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두연년은 소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상관걸 등이 주살된 후 연창과 두연년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양창은 구경이면서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3]
원봉 4년(기원전 77년), 어사대부가 되었다. 2년 후에는 승상이 되었고,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다.[3]
이듬해인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창읍왕이 무도하였기에 곽광과 거기장군 장안세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고, 곧 대사농 전연년을 양창에게 보내 동의를 구하였다.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하였으나, 아내의 간언으로 자신도 모의에 가담하였다. 아내가 "여기서 빨리 응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면 먼저 주살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전연년에게 허락하고 폐립에 참여했다.[3] 곧 창읍왕은 쫓겨나고, 선제가 즉위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 죽으니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양충이 이었다.[3]
2. 5. 죽음과 가문의 번영
양창은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 어사대부가 되었다.[3] 2년 후에는 승상이 되었고,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다.[3]이듬해에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이 즉위하였다.[3] 그러나 창읍왕이 무도하였기에 곽광과 거기장군 장안세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고, 곧 대사농 전연년을 양창에게 보내 동의를 구하였다.[3] 양창은 놀라고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하였으나, 아내의 간언으로 자신도 모의에 가담하였다.[3] 곧 창읍왕은 쫓겨나고, 선제가 즉위하였다.[3]
한 달 남짓 지나 양창은 죽으니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양충이 이었다.[3] 서자 양운은 선제 때 광록훈을 지내다가 심기를 거슬러 파면 후 주살되었고, 이 일로 양창의 손자까지 이어지던 작위 또한 박탈되었다.[3]
후손 양진은 후한 때 태위에 이르렀다.[3]
3. 가족 관계
4. 평가
5. 기타
참조
[1]
서적
《漢書‧卷八‧宣帝紀》
[2]
서적
《[[신당서]]》 권71하 제상세계1 下
[3]
서적
《[[후한서]]》 권54 양진열전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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