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소제 (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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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 소제는 기원전 87년 무제의 막내아들로 8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곽광, 김일제 등이 섭정하며 초기에는 섭정 체제로 운영되었고, 곽광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상관걸 일파의 모반 사건 이후 곽광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소제 시대에는 염철 전매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으며, 흉노와의 관계에서 고차에서 한나라 사신 암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원전 74년 2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후사 없이 유하가 잠시 황제로 즉위했다 폐위된 후 무제의 증손 유병이가 선제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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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소제 (8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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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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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유불릉 |
묘호 | 중종 (中宗, Zhōngzōng) |
시호 (약칭) | 소제 (昭帝, Zhāo Dì) |
시호 (전칭) | 효소황제 (孝昭皇帝, Xiàozhāo Huángdì) |
생년 | 기원전 94년 |
몰년 | 기원전 74년 6월 5일 |
출생지 | 장안, 한나라 |
사망지 | 장안, 한나라 |
매장지 | 평릉 (平陵) |
부황 | 무제 |
모후 | 조 첩여 |
배우자 | 효소황후 |
자녀 | 없음 |
정치 | |
정치 체제 | 황제 |
재위 기간 | 기원전 87년 3월 30일 ~ 기원전 74년 6월 5일 |
연호 | 시원 (始元) : 기원전 86년 ~ 기원전 80년 원봉 (元鳳) : 기원전 80년 ~ 기원전 75년 원평 (元平) : 기원전 74년 |
전임 황제 | 무제 |
후임 황제 | 유하 |
왕조 | |
왕조 | 한나라 (서한) |
2. 즉위 과정
기원전 94년, 소제는 무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첩여(구익부인)에게서 태어났다. 무제는 6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매우 기뻐했고, 조부인이 14개월 동안 임신했다는 점을 들어 요 임금의 탄생 설화와 연결 짓기도 했다.[3]
후원 2년 7월, 근친상간과 무고(巫蠱) 혐의로 제북왕 유관을 소환해 강제로 자살하게 하고, 제북국을 폐지해 태산군에 편입했다.[6][5] 같은 해 역종근, 상구성, 유서광 등도 무고에 연루돼 주살됐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화로 인해 황태자 유거와 그 일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무제는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다가, 연왕 유단과 광릉왕 유서 등을 제치고 막내아들 유불릉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무제는 어린 아들이 즉위한 후 외척 세력의 발호를 우려하여 구익부인을 자결하게 하고, 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전천추 등을 후견인으로 지명했다.[4]
기원전 87년 2월 2일, 무제가 병이 들자 유불릉은 태자로 책봉되었고, 다음날 무제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6] 소제의 누나 악읍공주가 궁궐에서 소제를 양육했으며, 죽은 어머니 구익부인은 황태후로 추존되었다.
3. 치세
시원 4년, 상관걸의 손녀가 황후가 되었다.[6]
원봉 원년 9월, 악읍장공주, 연왕 유단, 상관걸 부자, 상홍양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모두 주살되었다.[6]
소제 시대에는 무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매제를 약화시키고 국력 회복에 힘썼다. 곽광의 의향에 따라 전매제 폐지를 주장하는 유학자와 전매제 유지를 주장하는 상홍양 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염철론』이다.
원평 원년, 소제는 21세의 나이로 급병으로 쓰러져 한 달 정도 병상에 있다가 사망했다.
3. 1. 초기 (섭정 정치)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소제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연왕 유단은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반란을 모의했다.[6][7] 그는 종실인 유장, 유택과 공모하여, 유택이 청주에서, 유단이 연나라에서 각각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소제가 무제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려 했다.[6]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유택 등 관련자들은 처형되었으나, 연왕은 처벌받지 않았다.[6][7]
같은 해 9월, 섭정단의 일원이었던 김일제가 사망했다.[6] 이로써 곽광과 상관걸의 공동 섭정 체제가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의 권력 다툼이 점차 심화되었다.
소제의 초기 통치는 곽광, 김일제, 상관걸의 공동 섭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곽광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3. 2. 중기 (상관걸 일파의 몰락)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곽광과 상관걸(上官桀)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상관걸은 자신의 손녀를 소제의 황후로 세우고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상관황후는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했다.[6] 상관 일가는 곽광을 제거하기 위해 악읍장공주, 연왕 유단, 상홍양 등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다.[6]
음모자들은 곽광이 황제의 권한을 부당하게 행사한다고 소제에게 보고서를 보냈지만, 14세의 소제는 곽광의 무죄를 선언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곽광이 고발된 행위들은 매우 최근에 일어난 일이므로, 멀리 떨어진 연나라에 있던 유단이 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 보고서는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6]
그해 말, 음모자들은 악읍장공주가 곽광을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하고 소제를 폐위시킨 뒤, 연왕 유단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음모는 악읍장공주의 하인에 의해 발각되었고, 음모자들은 체포되어 일족 전체가 처형되었다. 악읍장공주와 연왕 유단은 자결했다.[6] 그러나 상관황후는 어린 나이와 곽광의 외손녀라는 신분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다.[6] 이 사건 이후 곽광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조정은 곽광의 독주 체제로 운영되었다.
3. 3. 정책 변화 (염철론)
鹽鐵論|염철론중국어은 한나라 소제 시대에 무제 시대의 정책에 대한 조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특히, 소금과 철의 전매제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기원전 81년, 염철 회의가 개최되어 전매제 존폐 여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이 논쟁은 훗날 『염철론』으로 정리되었다.[6] 논쟁 결과, 술과 철에 대한 전매제가 폐지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다소 완화되었다.[6] 이는 무제 시대의 확장 정책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3. 4. 흉노와의 관계
기원전 77년, 서역(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구 소련 중앙아시아)의 고차(타클라마칸 사막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에서 논란이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몇 년 전, 고차의 왕이 죽었고, 흉노의 지원을 받아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안귀(安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안귀는 흉노와 친분을 맺고 한나라에 저항하는 정책을 시작했다.[6] 고차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나라가 고차에게 황실 사신을 호송하도록 명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신들은 고차 관리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곽광은 황실 사신인 부개자(傅介子)를 보내 안귀를 암살했다. 부개자는 서역의 왕들에게 보석과 기타 귀중품을 주겠다고 속여 안귀를 암살했다. 그는 안귀와 단독 면담을 갖고 그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더 이상의 행동은 대규모 중국 군대를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여, 고차 귀족들이 복종하도록 하고, 안귀의 형제인 위도기(尉屠耆)를 왕으로 만들었다. 위도기는 한나라에 우호적이었다. 고차는 선선(鄯善)으로 개명되었다.[6] 이 사건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외국 왕의 암살이 정당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히 보석을 미끼로 사용한 방법에 있어 중국 역사에서 논란이 되었다.[6] 다른 역사학자들은 안귀가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었다.[6]
3. 5. 행정 구역 개편
시원 5년(기원전 82년), 담이(진번[8]) 2군을 폐지했다.[6]
시원 6년(기원전 81년), 강족을 방비하기 위해 천수·농서·장액군에서 두 현씩 내어 금성군을 신설했다.[6]
원봉 5년(기원전 76년), 상군(象郡)을 폐지하고 그 영역은 장가·울림 2군에 편입했다.[6]
4. 사망과 후계
漢昭帝|한 소제중국어는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21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소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창읍왕이 잠시 황제가 되었다가 폐위된 후, 소제의 종손이자 전 태자 거의 손자인 유병이(劉病已)가 황제로 즉위하여 선제가 되었다.
5. 가족 관계
6. 연호
7. 등장 작품
- 한무대제(2004년, 중국, 연: 쑨신위)
- 운중가 〜사랑을 노래하다〜(2013년, 중국, 연: 루이)
참조
[1]
서적
wuchen day of the 2nd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Hou'yuan era, per Emperor Zhao's biography in Book of Han
[2]
서적
guiwei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uan'ping era, per Emperor Zhao's biography in Book of Han
[3]
서적
Columbia Chronologies of Asian History and Culture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한서 권66 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 중 전천추
[5]
서적
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
https://zh.wikisourc[...]
[6]
서적
한서 권7 소제기제7
[7]
서적
한서 권63 무오자전제33 중 연날왕 단
[8]
문서
안사고의 음주에 따르면 진반군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관습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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