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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엔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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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디 엔드레는 187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태어난 헝가리의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칼뱅교 귀족 출신으로,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법학을 중퇴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1908년 문예지 뉘가트(Nyugat)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자로 활동했고, 1912년에는 "아 홀납" 문학 서클을 창립했다. 그의 작품은 상징주의 기법을 사용하며, 헝가리의 정체성, 사회의 모순 등을 다루었다. 그는 레다와의 만남을 통해 문학적 영감을 얻었고, 1915년 보르타 본차와 결혼했다. 1919년 부다페스트에서 매독으로 사망했으며, 헝가리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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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엔드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디 엔드레
원어 이름Ady Endre
출생일1877년 11월 22일
출생지에르민드센트(현재 루마니아의 아디 엔드레)
사망일1919년 1월 27일
사망지부다페스트
묘지피우메 거리 공동묘지(케레페시 공동묘지), 부다페스트
직업시인, 언론인

2. 생애

에르민드센트(Érmindszent), 실라지 현에 있는 아디 엔드레의 생가


1908년의 아디 엔드레


아디 엔드레는 1877년 11월 22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실라지 현 에르민드센트(Érmindszent)에서 가난한 칼뱅교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2] (현재 에르민드센트는 루마니아 사투마레 현 커우아시 코뮌에 속해 있으며, 헝가리어로는 아디팔바(Adyfalva), 루마니아어로는 아디 엔드레(Ady Endre)라고 불린다.) 그는 세 자녀 중 둘째였으며, 작가이자 시인인 마리스카 아디(Mariska Ady)는 그의 조카였다.

잘러우에서 학교를 다닌 후 데브레첸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퇴하고 언론인이 되었다. 1899년 첫 시집 『Versek|시hun』를 출간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너지바러드로 이주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 비판적인 글을 썼고, 1903년 파리에서 온 아델 브륄 디오시(Adél Brüll Diósy, 시 속 이름 '레다')와의 만남은 그의 문학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파리 방문과 레다와의 관계는 그의 시적 재능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발표한 시집 『Új versek|우이 베르셰크hun』(새로운 시)는 현대 헝가리 시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이어 발표한 『Vér és arany|베르 에시 어러니hun』(피와 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하며 급진적 지식인 그룹 '후사디크 사자드'(Huszadik Század, 20세기)에 참여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8년에는 중요한 문학 저널인 뉘가트(Nyugat, 서쪽) 창간에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나지바라드에서는 문학 서클 '아 홀납'(A Holnap, 내일)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뉘가트》 등을 통해 당시 헝가리 사회와 정치 상황을 비판했으며, 기성 정치권의 민족주의사회민주주의의 반민족주의 모두를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1909년경부터 매독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1912년 레다와 헤어졌다. 1914년 봉차 베르타(Berta Boncza, 시 속 이름 '친스카')를 만나 1915년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전쟁에 열광하는 분위기와 달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며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1918년 마지막 시집을 발표했으나 이미 병세가 깊어졌고, 1919년 1월 27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디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실라지 현 에르민드센트(Érmindszent, 현재 루마니아 사투마레 현 커우아시 코뮌 아디 엔드레 마을)에서 가난한 칼뱅교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누나 일로나(Ilona)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작가이자 시인인 마리스카 아디(Mariska Ady, 1888-1977)는 그의 조카이다.

1892년부터 1896년까지 현재의 잘러우에 위치한 실바니아 국립 칼뱅교 칼리지(National College Silvania)에서 공부했다. 1896년 3월 22일에는 잘러우 지역 신문인 ''실라지(Szilágy)''에 첫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데브레첸 개혁 칼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899년 첫 시집인 『Versek|시hu』를 출간했다. 아디는 곧 데브레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보다 풍부한 문화적 환경을 찾아 너지바러드(Nagyvárad, 현재 루마니아오라데아)로 이주했다.

2. 2. 언론인 및 초기 작품 활동

개혁 칼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퇴한 후 기자가 되었다.[2] 그는 1899년 ''베르세크''(Versek,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처음 출판했다. 그러나 이 첫 시집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아디는 곧 데브레첸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 도시는 나중에 그의 시에서 뒤떨어짐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더 풍부한 문화적 생활을 찾아 나지바러드 (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로 이주했다. 나지바러드에서 그는 현지 신문 ''나지바러디 너플로''(Nagyváradi Napló)의 기자로 활동하며 당시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다. 예를 들어 베셀레니이 기념비 제막식을 언급하며 "베셀레니이와 가난한 농부! 아마도 무심코, 대가 파드루스는 풍자를 조각했다."라고 쓰기도 했다.[3][4] 기자로 일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의 시야는 넓어졌지만, 1903년에 새로운 시집을 출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무명에 가까웠다.

2. 3. 레다와의 만남과 파리 시절



나지바러드(Nagyvárad, 현재 루마니아오라데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아디의 시야는 넓어졌다. 1903년 새로운 시집을 출판했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1903년 8월, 아디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파리에 살고 있었지만 나지바러드를 방문 중이던 부유한 기혼 유대인 여성 Adél Brüll Diósy|아델 브륄 디오시hun를 만난 것이다. 아디는 그녀를 에서 Léda|레다hun라고 불렀으며, 그녀는 아디의 뮤즈가 되었다. 레다에 대한 사랑과 파리 방문은 아디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1904년부터 1911년까지 총 일곱 차례 파리를 방문했다.

1년간의 첫 파리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아디는 부다페스트로 이주하여 신문 Budapesti Napló|부다페스티 너플로hun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500편 이상의 기사와 많은 를 발표했다.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급진 그룹 Huszadik Század|후사디크 사자드hun (20세기)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1906년에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Új versek|우이 베르세크hun (새로운 시)를 출판했는데, 이는 헝가리 문학사의 중요한 이정표이자 현대 헝가리 시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발표된 네 번째 시집 Vér és arany|베르 에스 아라니hun (피와 금)는 그에게 큰 성공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안겨주었다.

1906년 아디는 다시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했으며, 1907년에는 Budapesti Napló|부다페스티 너플로hun에서의 직업을 그만두었다.

2. 4. 뉘가트(Nyugat)와 문학적 성취

1906년, 아디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Új versek|우이 베르셰크hun(새로운 시)를 출판했다. 이 시집은 헝가리 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이정표로 평가받으며, 헝가리 근대시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다만, 진정한 성공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안겨준 것은 이듬해 발표된 네 번째 시집 Vér és arany|베르 에시 어러니hun(피와 금)이었다.

1908년은 아디의 문학 활동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해였다. 그는 헝가리 문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문예지 뉘가트(Nyugat, '서쪽'이라는 의미)의 창간에 참여했으며, 창간호에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아디는 이후 평생 동안 이 잡지에 깊이 관여했으며, 1912년부터는 편집자로도 활동하며 잡지의 발전에 기여했다. 《뉘가트》는 헝가리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아디는 단순한 기고자를 넘어 이 잡지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1908년, 아디는 나지바라드에서 홀나프(Holnap, '내일'이라는 의미)라는 문학 서클을 결성했다. 이 서클에서는 아디를 비롯해 바비치 미하이, 유하스 귈라, 벌러주 베러 등 당시 젊은 작가들의 시를 모은 선집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 선집은 발표 당시 세상의 이해를 얻지 못하고 비난을 받게 된다. 일부 비평가들은 시에 나타난 관능적인 표현을 문제 삼았으며, 특히 아디의 시에 대해서는 서구적인 문화 동경과 헝가리 농촌 현실 사이의 대조를 강조한 점을 들어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2. 5. 정치적 참여와 사회 비판

아디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세기' (Huszadik Század)라는 급진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1] 1908년 창간된 문예지 뉘가트(Nyugat)는 정치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기에, 아디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문 등 다른 매체에 기고하며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1]

그는 당시 정권 정당들이 내세우는 민족주의를 비판했으며, 동시에 사회민주당의 반민족주의적 경향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1] 이는 아디가 헝가리가 다른 선진 서구 국가들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서구 사회가 가진 문제점들 역시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단순한 민족주의 비판이나 서구 추종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이었다.

1906년에는 자신이 근무하던 부다페스트 일보가 특정 정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나 파리로 가기도 했으며, 1907년 해당 신문사를 퇴사하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행동으로 보이기도 했다.[1] 1909년 무렵에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생하는 등 국내 정치의 위기 상황 속에서 혁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기도 했다.[1]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예견했을 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열광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1]

2. 6. 친스카와의 결혼과 말년

아디 엔드레는 점차 유명해지면서 레다(Léda)와의 관계에 변화를 겪었다. 과거 레다가 주도했던 관계는 아디에게 점차 부담이 되었고, 결국 1912년 4월 두 사람은 헤어졌다.

1914년, 아디는 스무 살의 봉차 베르타(Berta Boncza)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11년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1915년, 베르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디는 자신의 시에서 베르타를 '친스카(Csinszk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같은 해인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아디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직감했다. 주변 사람들은 전쟁 분위기에 열광했지만, 그는 홀로 미래에 대한 깊은 우려와 고독감을 느꼈다.

1918년, 아디는 마지막 시집을 발표했다. 마지막 시 Üdvözlet a győzőnek|위드뵈즐레트 어 죄죄네크hu(승리자에게 보내는 인사)를 쓸 무렵, 그는 이미 매독으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매독 합병증으로 대동맥이 약해져 언제든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는 현대 작가들의 모임인 베레슈마르티 미하이 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개회사를 하지는 못했다.

결국 아디 엔드레는 1919년 1월 27일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케레페시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20세기 초 헝가리 시인들은 산도르 페퇴피의 민족적인 스타일을 따르려 했지만, 그의 비전과 재능에는 미치지 못했고 스타일은 정체되어 있었다. 아디는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스타일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외롭고 오해받는 혁명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시대 시인들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다.

그의 첫 두 시집인 《Versek|시집hun》(1899)과 《Még egyszer|다시 한 번hun》(1903)은 아직 페퇴피나 야노스 바이다와 같은 19세기 시인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디 고유의 스타일은 시보다는 그의 평론이나 에세이 등 산문에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디는 샤를 보들레르와 폴 베를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상징주의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그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주제는 신, 헝가리인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 투쟁이다. 이 외에도 돈, 삶과 죽음, 레다(Lédahun) 및 친스카(Csinszkahun)와의 관계 등 그의 삶의 특정 시기와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들이 작품의 주제로 다루어졌다.

3. 1. 주요 작품


  • Versek|hun (시집, 1899년)
  • Még egyszer|hun (다시 한 번, 1903년)
  • Új versek|hun (새로운 시, 1906년)
  • Vér és arany|hun (피와 금, 1907년)
  • Az Illés szekerén|hun (엘리야의 전차에, 1909년)
  • Szeretném, ha szeretnének|hun (사랑받고 싶어, 1910년)
  • Minden-Titkok versei|hun (모든 비밀의 시, 1911년)
  • Menekülő Élet|hun (도망치는 삶, 1912년)
  • Margita élni akar|hun (마르기타는 살고 싶어, 1912년)
  • A magunk szerelme|hun (우리 자신의 사랑, 1913년)
  • Ki látott engem?|hun (누가 나를 보았는가?, 1914년)
  • A halottak élén|hun (죽은 자들을 이끌며, 1918년)
  • Az utolsó hajók|hun (마지막 배, 1923년)

4. 유산 및 평가

1947년 3월 15일 헝가리에서는 헝가리 독립 투사 시리즈의 하나로 아디의 초상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었다.[5] 루마니아 역시 1957년 12월 5일, 그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9]

헝가리에서는 그의 서거 50주년인 1969년 1월 27일에 기념 우표를 추가로 발행했으며,[6] 1977년 11월 22일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소형 시트와 함께 우표를 발행했다.[7][8] 또한, 1969년부터 1990년까지는 500HUF 포린트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게자 초르바가 조각한 아디의 흉상이 캐나다 토론토의 이니스 칼리지 안뜰에 설치되었다.[10]

참조

[1] 서적 The Oxford Hungarian Review: Edited for the Oxford League for Hungarian Self-Determination, Volumes 1-2 Basil Blackwell 1922
[2] 서적 Béla Bartók and Turn-of-the-century Budapes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3] 웹사이트 105. WESSELÉNYI http://www.mek.iif.h[...]
[4] 웹사이트 WESSELÉNYI http://bilet.go.ro/a[...]
[5] 간행물 Michel HU 979 Yvert et Tellier
[6] 웹사이트 Endre Ady 1877-1919 poet-Anniversaries - Events VII-Hungary https://colnect.com/[...] Michel
[7] 웹사이트 Endre Ady Hungarian poet-People-Hungary http://colnect.com/e[...] Michel
[8] 웹사이트 Endre Ady Hungarian poet-People-Hungary http://colnect.com/e[...] Michel
[9] 웹사이트 Mi:RO 1683, Sn:RO 1191, Yt:RO 1547, Sg:RO 2549 http://colnect.com/e[...] Yvert et Tellier
[10] 웹사이트 Bust of Endre Day https://hungarianher[...]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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