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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러니처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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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러니처퍼트는 1950년대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칭하는 용어로, 푸스카스를 중심으로 한 뛰어난 선수들과 혁신적인 전술로 유명했다.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현대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핵심 선수들의 해외 망명과 함께 해체되었다. 이들은 1952년 올림픽 금메달, 1953년 중앙 유럽 인터내셔널 컵 우승, 1953년 잉글랜드 원정 승리, 1954년 FIFA 월드컵 준우승 등의 주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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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러니처퍼트
기본 정보
1953년의 황금 팀
1953년의 황금 팀
팀 명칭
한국어매직 마자르
헝가리어어러니처퍼트 (Aranycsapat)
로마자 표기Aranycsapat
IPA (헝가리어)ˈɒrɒɲˈt͡ʃɒpɒt
주요 대회 성적
올림픽1952년 헬싱키 금메달
월드컵1954년 스위스 은메달
중앙 유럽 국제 컵1948–53 중앙 유럽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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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마자르 스쿼드
골키퍼그로시치 줄러
수비수부잔스키 예뇌
로란트 줄러
런토시 미하이
미드필더보지크 요제프
저커리아시 요제프
공격수부더이 라슬로
코치시 샨도르
히데그쿠티 난도르
푸슈카시 페렌츠
치보르 졸탄
감독셰베시 구스타브

2. 핵심 선수 및 감독

팀이 사용한 유명한 2-3-3-2 포메이션


이 팀은 6명의 핵심 선수, 즉 푸스카스, 코치시, 히데그쿠티, 치보르, 보지크, 그로시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팀의 감독은 세베시였는데,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노동조합 조직가였고, 전쟁 전에는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체육부 차관으로부터 팀을 운영할 수 있는 정치적 자격을 부여받았다.

세베시는 세 가지 주요 혁신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첫째, 그는 선수들에게 체력 관리 방식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훈련 세션을 장려하기 위해 국제 수준에서 클럽과 같은 정책을 시행했다.

둘째, 그는 딥 라잉 센터 포워드라는 전술적 개념을 정립했다. 당시 대부분의 축구팀은 센터 포워드가 3명의 공격수와 2명의 윙어로 구성된 공격 라인을 이끄는 WM 포메이션을 채택했다. 세베시의 전술은 센터 포워드를 미드필드로 후퇴시키고, 필요에 따라 윙어들도 미드필드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유연한 3-2-3-2 포메이션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팀이 공격과 수비를 빠르게 전환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이 전술은 수비수를 자극했는데, 센터 포워드를 맨 마킹하던 센터 하프는 딥 라잉 센터 포워드를 따라 미드필드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셋째, 세베시는 선수들에게 다재다능함을 장려했다. 그의 선수들은 어떤 포지션에서도 뛸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은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특정 포지션에서만 뛰는 것에 익숙했다. 이는 토탈 풋볼의 초기 형태였다. 푸스카스는 "우리가 공격할 때는 모두가 공격했고, 수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토탈 풋볼의 프로토타입이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지미 호건이 세베시와 팀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당시 헝가리 축구 협회 회장이었던 샨도르 바르치는 "지미 호건은 우리에게 축구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라고 말했고, 세베시 자신도 호건에 대해 "우리는 지미 호건이 가르친 대로 축구를 했다. 우리의 축구 역사가 기록될 때 그의 이름은 금색 글자로 쓰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기 수와 득점은 모두 대표팀에서의 기록이다. 선수는 잉글랜드와의 경기 선발 출전 선수이다.

  • 푸스카스 페렌츠 (FW: 왼쪽 인너/실제로는 중앙 공격수 위치를 맡음) 85경기 84득점
  • 코치시 샨도르 (FW: 오른쪽 인너/실제로는 중앙 공격수 위치를 맡음) 68경기 75득점
  • 치보르 졸탄 (FW: 왼쪽 윙) 43경기 17득점
  • 부다이 라슬로 (FW: 오른쪽 윙) 39경기 10득점
  • 히데그쿠티 난도르 (FW: 중앙 공격수/실제로는 처진 위치에서 톱하프 위치를 맡음) 68경기 39득점
  • 보지크 요제프 (MF: 오른쪽 하프) 100경기 11득점
  • 란토시 미하이 (DF: 왼쪽 백) 52경기 5득점
  • 자카리아시 요제프 (MF: 왼쪽 하프/실제로는 왼쪽 센터백 위치를 맡음) 35경기
  • 롤란트 줄러 (MF: 센터 하프/실제로는 오른쪽 센터백 위치를 맡음) 37경기 0득점
  • 부잔스키 죄뢰 (DF: 오른쪽 백) 48경기 0득점
  • 그로시치 줄러 (GK) 86경기

  • 세베시 구스타브 (감독)

2. 1. 주요 선수



어러니처퍼트는 푸스카스, 코치시, 히데그쿠티, 치보르, 보지크, 그로시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 푸스카스 페렌츠 (FW): 왼발의 마법사로 불렸으며, 헝가리 대표팀에서 85경기 84골을 기록하며 헝가리 축구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헝가리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활약은 헝가리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 코치시 샨도르 (FW): 헤딩의 명수로 불렸으며, 헝가리 대표팀에서 68경기 75골을 기록했다.
  • 히데그쿠티 난도르 (FW): 딥 라잉 센터 포워드 역할을 맡아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활약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 68경기 39득점을 기록했다.
  • 치보르 졸탄 (FW): 빠른 스피드와 돌파력을 갖춘 왼쪽 윙어였다. 헝가리 대표팀에서 43경기 17득점을 기록했다.
  • 부다이 라슬로 (FW): 헝가리 대표팀에서 39경기 10득점을 기록했다.
  • 보지크 요제프 (MF): 뛰어난 패스 능력과 경기 조율 능력을 바탕으로 팀의 중원을 책임졌다. 헝가리 대표팀에서 100경기 11득점을 기록했다.
  • 자카리아시 요제프 (MF): 헝가리 대표팀에서 35경기에 출전했다.
  • 롤란트 줄러 (MF): 헝가리 대표팀에서 37경기에 출전했다.
  • 란토시 미하이 (DF): 헝가리 대표팀에서 52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 부잔스키 죄뢰 (DF): 헝가리 대표팀에서 48경기에 출전했다.
  • 그로시치 줄러 (GK): 헝가리 대표팀에서 86경기에 출전했다.


2. 2. 지미 호건의 영향

지미 호건은 헝가리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헝가리 축구 협회 회장이었던 샨도르 바르치는 "지미 호건은 우리에게 축구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라고 말했으며, 세베시 감독 역시 "우리는 지미 호건이 가르친 대로 축구를 했다. 우리의 축구 역사가 기록될 때 그의 이름은 금색 글자로 쓰여야 한다."라며 그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3. 전술

매직 마자르는 딥 라잉 센터 포워드(Deep Lying Centre Forward) 전술을 활용하여 당시 주류였던 WM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팀들을 상대로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센터 포워드였던 히데그쿠티 난도르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활용하고, 윙어들도 중앙으로 이동하여 공격과 수비에 모두 가담하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전술은 선수들의 포지션 변경을 통해 상대 수비의 맨 마킹을 무력화하고, 공간을 창출하여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훗날 토털 풋볼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으며, 현대 축구 전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서는 이 전술을 'MM 시스템'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는 포지션 체인지 후의 선수 배열 형태가 MM 형태를 띠었기 때문이다.

4. 역사

매직 마자르는 1950년 6월부터 1954년 FIFA 월드컵 결승전까지 32경기 무패(28승 4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강호들을 상대로 4연승, 총 18득점 1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3년 11월에는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6-3으로 승리했다.[15] 이는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 대표팀이 영국 4개 협회와 아일랜드를 제외한 팀에게 홈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경기('''세기의 대결''', ''Match of the Century'')로 역사에 남았다. 헝가리의 유려한 축구에 매료된 10만 명의 잉글랜드 서포터들은 마지막에는 박수를 보내 경의를 표했다.[15] 이 경기는 당시 텔레비전 방송이 보급되지 않았던 헝가리 국내에서는 라디오 방송으로만 중계되었으며, 영상은 며칠 뒤 20분 정도의 하이라이트가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을 뿐이었다.[15] 그러나 경기 후 43년이 지난 1996년 크리스마스에 이 경기의 권리를 가진 BBC와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호의로 처음으로 풀타임 경기 영상이 국영 방송 MTV를 통해 방영되었다.[15] 잉글랜드와는 다음 해 월드컵 직전인 1954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재대결을 펼쳐, 이때도 7-1이라는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1954년 7월 4일,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서독에 2-3으로 패배하면서 무패 기록이 4년 만에 끊어졌다. 이 패배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 주장 푸스카시는 1차 리그 2차전 서독전에서 베르너 리브리히에게 반칙에 가까운 태클을 받아 발목을 다쳐 결승 토너먼트 8강 및 4강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승전에 복귀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 헝가리는 8강전에서 브라질과 맞붙었는데, 폭우 속에서 치러진 이 경기는 후세에 '베른 전투'라고 불리는 난투극으로 인한 퇴장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거친 경기가 되었다. 경기 후 탈의실에서도 난투극이 이어졌으며, 경기에 결장한 푸스카시도 이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어진 4강 우루과이전도 우천 속에 연장전으로 치러져 선수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 결승전의 그라운드 컨디션이 좋지 않아 헝가리 선수들이 넘어지는 장면이 눈에 띄는 가운데, 서독은 선수 전원이 아디다스제 스터드(축구화 징) 교환식 신발을 착용하고, 긴 스터드로 교체하여 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플레이할 수 있었다.
  • 헝가리가 위에서 언급한 브라질이나 우루과이 (1950년 월드컵 브라질 대회 우승국)와 같은 강호들과 결승 토너먼트에서 맞붙게 된 배경에는 서독 감독 제프 헤르베르거의 깊은 뜻이 있었다. 이 대회에서는 현재와 같은 토너먼트 대진이 이루어지지 않고, 4개 조로 나뉜 1차 리그의 각 조 1위끼리, 2위끼리 8강에서 맞붙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1차 리그 2조를 1위로 통과하면 1조를 1위로 통과할 브라질과 맞붙게 되므로, 제프 헤르베르거는 1차 리그 2차전 헝가리전에서 일부러 멤버를 교체하여 패배하고, 2위로 통과하여 결승 토너먼트에서 강호와의 대결을 피했다. 그의 계획은 적중하여, 헝가리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만신창이가 된 것에 비해 서독은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 4강에서 오스트리아를 각각 90분 만에 승리하여 여유를 가지고 결승에 임했다.
  • 경기 종료 직전에 푸스카시가 동점골을 넣은 것으로 보였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다. 결승전을 판정했던 심판은 잉글랜드 출신이었으며, 직전 잉글랜드와의 두 번의 승리로 잉글랜드의 자존심을 꺾은 것이 그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 1.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헝가리는 2년 동안 무패 행진을 하며 1952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예선 라운드에서 손쉽게 상대를 제압하고, 준결승에서 1948년 올림픽 챔피언인 스웨덴을 6-0으로 완파했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결승전에서는 푸스카스와 치보르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강호들을 상대로 4연승, 총 18득점 1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4. 2. 1953년 중앙 유럽 인터내셔널 컵

헝가리는 1948-53 중앙 유럽 국제컵에 참가했는데, 이 대회는 중앙 유럽 팀들을 위한 국가컵으로, 유럽 선수권 대회의 전신이었다. 참가 팀에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위스가 포함되었다. 헝가리는 1953년 5월 17일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난도르 히데그쿠티의 1골과 푸슈카시의 2골로 3-0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4. 3. 1953년 "세기의 경기" (잉글랜드 대 헝가리)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105,0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잉글랜드와 헝가리의 친선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는 "세기의 경기"로 불리며 큰 관심을 받았다.[6][7] 당시 잉글랜드는 홈에서 무패를 기록하고 있었고(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에게 패배)[6], 헝가리는 세계 최강팀으로 평가받았다.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으로서 자국 선수들이 기술적, 전술적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했지만, 헝가리는 경기 시작 1분 만에 득점하고 27분 만에 4-1로 앞서 나갔다. 최종 점수는 6-3으로 헝가리가 승리했으며, 히데구티가 해트트릭, 푸스카스가 두 골, 보지크가 한 골을 넣었다.[6]

이 경기는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게 홈 첫 패배를 안겨주며 잉글랜드 축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15] 잉글랜드 클럽들은 이 경기를 통해 현대적인 코칭과 전술을 채택하게 되었다.[6] 헝가리의 유려한 축구에 매료된 10만 명의 잉글랜드 서포터들은 경기 후 박수를 보내 경의를 표했다.[15] 헝가리에서는 당시 텔레비전 방송이 보급되지 않아 라디오로만 중계되었고, 며칠 뒤 20분 정도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15] 1996년 크리스마스에 BBC와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호의로 경기 풀타임 영상이 MTV를 통해 처음으로 방영되었다.[15]

4. 4. 1954년 헝가리 7-1 잉글랜드

잉글랜드가 역사상 가장 큰 패배(1-7)를 당한 후 환호하는 헝가리 관중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의 패배에 대한 설욕을 갈망했고, 1954년 월드컵이 시작되기 3주 전인 1954년 5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재경기가 열렸다. 웸블리 경기에서의 패배가 일시적인 현상이었기를 바랐던 기대는 헝가리가 7-1로 승리하며 즉시 무너졌고,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큰 패배로 기록되어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6] 헝가리는 1953년 11월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6-3으로 승리한 이후,[15] 1954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재대결에서도 7-1이라는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4. 5. 1954년 FIFA 월드컵

1954년 결승전의 유명한 사진이 스타드 드 스위스의 후속 경기장인 반크도르프 스타디움 앞에 설치되어 있다.


결승전에는 세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서독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9] 헝가리 골키퍼 그로시치는 서독의 두 번째 골에서 반칙을 당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푸슈카시는 89분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경기 종료 직전 코치시에게 페널티 구역에서 파울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에서는 잉글랜드 출신 심판이 결승전을 판정했다는 점, 푸스카시의 부상, 경기장 상태 등 여러 요인이 헝가리의 패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잉글랜드는 헝가리와의 두 번의 경기에서 패배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잉글랜드 출신 심판의 판정이 헝가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4. 5. 1. 1954년 FIFA 월드컵 결승전 논란



결승전에는 세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 있었다. 모두 서독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헝가리 골키퍼 그로시치는 서독의 두 번째 골에서 반칙을 당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푸슈카시는 89분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경기 종료 직전 코치시에게 페널티 구역에서 파울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다.[9]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서는 심판이 잉글랜드 출신이었던 점, 푸스카스의 부상, 경기장 상태 등 여러 요인이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4. 6. 1956년 소련 1-0 헝가리

1956년 9월 23일, 소련은 모스크바의 레닌 중앙 경기장에서 102,000명의 관중 앞에서 헝가리와 친선 경기를 치렀다.[12] 당시 소련은 홈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헝가리에 이어 세계 최고의 축구팀으로 평가받았다.[12] 또한 소련 선수들은 공산주의 고위 당국자들에게 사회주의 원칙의 이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동구권의 맹주인 소련의 낙승이 예상되었다.[12] 그러나 졸탄 치보르의 단 한 골로 헝가리가 1-0으로 승리하며 소련의 홈 무패 기록은 깨졌다.[12] 이 경기는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촉발한 애국심 고취의 작은 요인으로 작용했다.[12]

5. 몰락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푸스카스, 코치시 등 핵심 선수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매직 마자르는 사실상 해체되었다.[13] 1956년10월 23일 발생한 헝가리 혁명으로 해외 원정 중이던 선수들이 잇따라 망명하며, 정치와 국가에 의해 "유럽 최강"으로 불리던 대표팀은 해체되었다.[13] 이는 1930년대 초반 '''분데스팀'''이라고 불렸던 오스트리아 대표팀1938년 나치 독일병합되어 소멸된 것과 유사하다.

세게드에 있는 11명을 기리는 기념비


세베시 감독은 1956년 6월에 해고되었고, 마르톤 부코비가 그의 뒤를 이었다.[13] 그럼에도 세베스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헝가리 올림픽 위원회 회장, 1954년부터 1960년까지 UEFA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혁명 이후, 코치시와 치보르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바르셀로나에서 뛰었고,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다.[13] 히데구티는 선수로 헝가리로 돌아와 MTK 부다페스트 FC의 감독이 되었고, 보지크 또한 헝가리로 돌아와 여러 헝가리 팀의 감독이 되었다.[13] 세베스 역시 1960년대에 여러 헝가리 클럽을 이끌었다.[13]

이후 알베르트 플로리안 등의 선수들이 등장하여 1960년대 올림픽에서 2번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헝가리 대표팀은 명문 팀으로서의 지위를 일시 회복했지만, 월드컵에서는 8강 진출에 그치면서 1950년대 초반과 같은 압도적인 위상을 되찾지는 못했다.[13]

6. 역사적 의의

매직 마자르는 새로운 전술 도입, 팀으로서 경기에 익숙한 핵심 선수들을 활용하는 개념, 선수들의 다재다능함 등을 통해 현대 축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구스타브 세베스가 도입한 딥 라잉 센터 포워드(Deep Lying Centre Forward) 전술은 당시 축구계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헝가리의 3-2-3-2 포메이션은 4-2-4 포메이션으로 진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구스타브 세베스는 최고의 팀이 아닌 최고의 선수를 뽑는 기존의 국가대표팀 선발 방식과 달리, 클럽에서 서로의 강점에 익숙한 선수들을 활용하여 국가대표팀에서도 연속성을 유지했다. 이는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이 1960년대 유럽 수준에서 성공적으로 채택했고, 잉글랜드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중심으로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지미 호건의 이론을 바탕으로, 구스타브 세베스는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역할과 포지션을 바꾸는 전술을 구현했다. 이는 1970년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토탈 풋볼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는다.

오부다에 있는 푸스카스 페렌츠의 동상.


매직 마자르는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 헝가리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헝가리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7. 주요 기록



1954년 월드컵 헝가리 깃발


어러니처퍼트는 1950년 6월 4일부터 1956년 2월 19일까지 42승 7무 1패(91.0% 승률)를 기록했다. 1950년 6월 4일부터 1954년 7월 3일까지는 32경기 무패 기록을 세웠다. 1949년 4월 10일부터 1957년 6월 16일까지 73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1950년 6월 4일부터 1954년 7월 4일까지 4년 1개월간 무패 기록은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최장 기간이다.

1954년 6월 30일, 국가대표팀 엘로 레이팅 시스템 역사상 최고 평점인 2230점을 기록했다. 헝가리 감독 구스타브 세베스는 30경기 이상에서 82.58% (49승, 11무, 6패)로 경기당 승리율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20세기 기록이다. 페렌츠 푸스카스는 84골로 20세기 최다 국제 골을 기록했다.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단일 월드컵 최다 득점(27골), 최고 경기당 득점(5.4골), 최다 골득실(+17)을 기록했다. 샨도르 코치시는 단일 월드컵에서 개인 득점 평균 2.2골(5경기 11골)을 기록했다. 또한, 1954년 7월 17일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9-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결승 토너먼트 경기에서 기록된 최고 승리 차를 기록했다.

1954년 FIFA 월드컵 준결승에서 우루과이를 4-2로 꺾으며, 월드컵 결승 토너먼트에서 2회 우승국이자 당시 챔피언인 우루과이를 처음으로 꺾은 국가대표팀이 되었다. 샨도르 코치시1954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전(8-3)과 대한민국전(9-0)에서 두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결승 토너먼트에서 두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50년 9월 23일 알바니아를 12-0으로 꺾으며 헝가리 국가대표팀 최고 승리 차를 기록했다. 1953년 11월 25일 잉글랜드를 홈에서 6-3으로 꺾으며, 1863년 축구의 법 제정 이후 90년 만에 영국 제도 외부의 국가대표팀으로서는 최초로 잉글랜드를 홈에서 꺾은 팀이 되었다. 1년 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가 잉글랜드를 7-1로 꺾은 것은 여전히 잉글랜드의 최다 패배 기록이다.

1956년 9월 23일 소련을 홈에서 1-0으로 꺾으며 소련을 홈에서 꺾은 최초의 국가대표팀이 되었다. 1955년 5월 11일부터 1956년 10월 14일까지 페렌츠 푸스카스(84골)와 샨도르 코치시(75골)가 국제 경기 최다 득점 기록 1위와 2위를 동시에 보유한 역사상 최초의 국가대표팀이었다.

8. 수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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