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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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잉글랜드는 18세기 초 활동한 해적으로, 아일랜드 출신으로 추정된다. 사략선으로 활동하다 해적이 되었으며, 찰스 베인의 부관을 거쳐 자신의 배를 이끌었다. 아프리카와 인도양에서 활동하며 여러 선박을 나포했으나, 관대한 성격으로 인해 선원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선장 자리에서 물러나 모리셔스에 버려졌다. 이후 마다가스카르로 건너갔으며, 오늘날에는 인도적인 해적 선장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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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보니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활동한 아일랜드계 여성 해적으로, 캘리코 잭 랙험과 함께 해적 활동을 했으며 메리 리드와 용맹을 떨쳤고, 사형 선고 후 행적이 묘연하여 대중문화에서 여성 해적의 상징으로 재해석된다. - 아일랜드의 해적 - 그라너 니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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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시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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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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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네드 |
유형 | 해적, 전직 사략선 선원 |
출생지 | 아일랜드 왕국 |
사망 | 1720/21년 (약 36세) |
사망지 | 베이 오브 세인트 오거스틴, 메리나 왕국 |
소속 | 영국 왕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활동 근거지 | 남아프리카 |
계급 | 선장 |
지휘 함선 | 여러 척의 함선, 가장 유명한 것은 로열 제임스호와 팬시호. |
전투 | 캐산드라호와의 전투로 인해 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일부 포로를 살려준 것에 대해 그를 유기함. |
재산 | R 10,000,000 |
활동 기간 | 1716년–1720년 |
함선 | |
지휘 함선 | 로열 제임스 호 팬시 호 |
2. 초기 생애
에드워드 시거는 1685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3] 가톨릭 신자로 자랐을 가능성이 높고,[4] 교육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5] 시거는 해적이 되면서 성을 잉글랜드로 바꿨다.[4] 일부 자료에서는 "시거"가 잉글랜드의 본명이 아니라, 잉글랜드 휘하에서 활동한 다른 해적 (재스퍼 시거)이었다고 주장한다.[6][7] 잉글랜드는 자메이카로 건너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사략선으로 활동했다.[8] 그는 해적 선장 크리스토퍼 윈터에게 붙잡혀 그의 선원에 합류하게 되었다.[14] 윈터는 잉글랜드를 바하마 나소의 해적 기지로 데려갔다.[14] 잉글랜드는 헨리 제닝스가 플로리다의 팔마 데 아이즈에 있는 스페인 구조 캠프를 공격하여 금과 은 87,000파운드를 훔치는 데 참여했다.[9] 잉글랜드는 1718년 3월에 찰스 베인의 병참장교로 기록된다.[10] 베인의 슬루프선인 ''라크''는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되었지만, 잉글랜드와 나머지 선원들은 나소의 다른 해적들이 국왕의 사면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석방되었다.[10]
에드워드 시거는 1685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가톨릭교 신자로 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20]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자메이카로 건너간 후 사략선 항해사를 맡았으나, 해적 크리스토퍼 윈터에게 붙잡히면서 해적 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20] 아마 이 시기에 시거라는 성을 버리고 잉글랜드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3. 해적 경력
1716년, 잉글랜드는 헨리 제닝스의 부하가 되어 플로리다 만에서 난파된 스페인 갤리온선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공격에 참여했다. 1718년에는 찰스 베인의 조타수가 되었다. 베인의 슬루프선 라크 호는 영국 해군의 피닉스 호에 붙잡혔지만, 나중에 풀려났다.[21]
1718년 중반, 잉글랜드는 자신의 배의 선장 직을 부여받았다. 잉글랜드는 반 등과 함께 국왕의 사면을 거부하고 우즈 로저스가 도착한 후 아프리카 해안으로 항해를 시작했다.[22]
항해 중, 잉글랜드와 선원들은 여러 척의 배를 나포했다. 그 중 브리스톨 출신의 ''캐도간'' 호는 스키너라는 선장이 지휘했는데, 잉글랜드 선원 중 일부는 과거 스키너에게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했던 경험 때문에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찰스 존슨에 따르면, 선원들은 "아! 스키너 선장, 당신이군요, 당신에게 빚진 게 많은데, 이제 당신 방식대로 갚아주겠소."라고 말했다.[23] 해적들은 선장을 윈들래스에 묶고 빈 병을 던졌으며, 플린트락 권총으로 머리를 쏴 죽였다.[24]
''캐도간'' 호의 선원 중 해적 규약 서명을 거부한 하웰 데이비스는 해적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지만, 잉글랜드는 그를 죽이는 대신 나포한 배의 지휘를 데이비스에게 넘겼다.[25] 이는 데이비스와 바솔로뮤 로버츠를 포함한 많은 해적들의 경력의 시작점이 되었다.
얼마 후, 잉글랜드와 그의 선원들은 ''펄'' 호를 나포하고 ''로열 제임스''(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잉글랜드 또는 그의 선원들의 자코바이트주의를 암시)로 개명했다.[11] 1719년 봄, 감비아 강과 케이프 코스트 사이에서 열 척의 배를 나포하고 약탈했다. 이 중 두 척은 로버트 레인 선장과 리처드 샘플 선장에게 주어져 상선으로 유지되었고, 그들은 잉글랜드를 떠나 카리브해로 항해했다.[12][26] 잉글랜드는 존 테일러를 ''빅토리''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 정박한 잉글랜드와 선원들은 현지인들과 여성 대우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해적들은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떠났다.[28]
1720년, 잉글랜드는 인도양에 도달하여 해적 올리버 라 부스 선장을 만났다. 잉글랜드는 34문의 네덜란드 선박을 나포, 헨리 에버리를 기리기 위해 ''팬시''라 명명하고 기함으로 삼았다. 잉글랜드는 코모로 제도 근처에서 제임스 맥레이가 지휘하는 동인도 선박 ''카산드라''를 공격, 길고 격렬한 전투 끝에 두 배는 좌초되었다.[13] 맥레이와 생존자들은 탈출하여 10일 동안 섬에 숨었다가 잉글랜드의 협력선 ''빅토리''에 항복했다. ''카산드라''의 화물 가치는 75,000파운드였고, ''팬시''의 선원 90명이 ''카산드라'' 공격으로 사망했다.[14]
잉글랜드는 맥레이의 목숨을 살려주고, 해적들은 ''카산드라''를 보관하고 심하게 손상된 ''팬시''를 맥레이에게 주었다.[14] ''빅토리''의 선장이 된 잉글랜드의 선원 존 테일러는 이에 분개했고, 잉글랜드가 그를 취하게 한 후에야 동의했다. 잉글랜드는 코친 근처에서 작은 영국 선박을 나포했는데, 술에 취한 선장이 맥레이가 해적을 추격하기 위해 함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보고하여 해적들을 격분시켰고, 특히 맥레이를 죽이고 싶어했던 테일러를 더욱 격분시켰다. 테일러는 잉글랜드를 지휘에서 제거하기 위한 투표를 조직했다.[14]
새로운 선장 ''팬시'' 선원 출신인 재스퍼 시터 는 더 많은 전리품을 찾기 위해 ''카산드라''와 ''빅토리''를 북쪽으로 가져가기 전에 잉글랜드와 다른 3명을 모리셔스 해안에 고립시켰다.[15] 시터는 1721년에 사망했고, ''카산드라''는 결국 테일러에게 넘어가 카리브해로 가져갔다.[15]
코모로 제도의 앙주앙섬에서 잉글랜드 일당은 2척의 영국 선박과 1척의 오스텐데 선박과 조우, 제임스 맥레이 선장이 지휘하는 카산드라 호와 전투가 벌어져 카산드라 호와 잉글랜드의 판시 호가 좌초되었다. 전투 결과, 잉글랜드의 선원은 90명이나 사망했고, 맥레이도 다수의 부하를 잃고 자신도 부상당했다. 섬으로 도망친 맥레이는 10일 후 잉글랜드에게 항복했다. 일당은 카산드라 호에서 현재 가치로 2,000만 달러 또는 3,800만 달러의 재물을 얻었다[29]。
테일러와 그의 지지자들은 맥레이를 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옛날 맥레이 밑에서 일했던 의족을 한 남자가 그를 변호하여 맥레이는 목숨을 건졌다.[30] 잉글랜드는 맥레이에게 떠나라고 충고했다. 이 의족 해적은 소설 『보물섬』에 등장하는 의족 해적 존 실버의 모델이 되었다[30]。
잉글랜드는 자비로운 남자였고, 카산드라 호를 빼앗은 대신 손상된 판시 호를 맥레이에게 주고 달아나게 했다.[31] 그러나, 잉글랜드의 이 선택은 선원들의 불만을 샀고, 달아난 맥레이가 해적 토벌을 위해 선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빅토리 호의 선장인 테일러는 투표를 실시하여 잉글랜드를 선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잉글랜드와 그에게 충실했던 3명의 부하를 모리셔스 섬에 버려두었다.[32]
버려진 잉글랜드 일행은 널빤지로 작은 보트를 만들어 마다가스카르로 건너갔다.[32]
3. 1. 찰스 베인의 부관 (1718년)
에드워드 시거는 1685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가톨릭교 신자로 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20]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자메이카로 건너간 후 사략선 항해사를 맡았으나, 해적 크리스토퍼 윈터에게 붙잡히면서 해적 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20] 아마 이 시기에 시거라는 성을 버리고 잉글랜드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1716년, 잉글랜드는 헨리 제닝스의 부하가 되어 플로리다 만에서 난파된 스페인 갤리온선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공격에 참여했다. 1718년에는 찰스 베인의 조타수가 되었다. 베인의 슬루프선 라크 호는 영국 해군의 피닉스 호에 붙잡혔지만, 나중에 풀려났다.[21]
3. 2. 아프리카 해안 (1718년 ~ 1720년)
1718년 중반, 잉글랜드는 자신의 배의 선장 직을 부여받았다. 잉글랜드는 반 등과 함께 국왕의 사면을 거부하고 우즈 로저스가 도착한 후 아프리카 해안으로 항해를 시작했다.[22]
항해 중, 잉글랜드와 선원들은 여러 척의 배를 나포했다. 그 중 브리스톨 출신의 ''캐도간'' 호는 스키너라는 선장이 지휘했는데, 잉글랜드 선원 중 일부는 과거 스키너에게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했던 경험 때문에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찰스 존슨에 따르면, 선원들은 "아! 스키너 선장, 당신이군요, 당신에게 빚진 게 많은데, 이제 당신 방식대로 갚아주겠소."라고 말했다.[23] 해적들은 선장을 윈들래스에 묶고 빈 병을 던졌으며, 플린트락 권총으로 머리를 쏴 죽였다.[24]
''캐도간'' 호의 선원 중 해적 규약 서명을 거부한 하웰 데이비스는 해적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지만, 잉글랜드는 그를 죽이는 대신 나포한 배의 지휘를 데이비스에게 넘겼다.[25] 이는 데이비스와 바솔로뮤 로버츠를 포함한 많은 해적들의 경력의 시작점이 되었다.
얼마 후, 잉글랜드와 그의 선원들은 ''펄'' 호를 나포하고 ''로열 제임스''(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잉글랜드 또는 그의 선원들의 자코바이트주의를 암시)로 개명했다.[11] 1719년 봄, 감비아 강과 케이프 코스트 사이에서 열 척의 배를 나포하고 약탈했다. 이 중 두 척은 로버트 레인 선장과 리처드 샘플 선장에게 주어져 상선으로 유지되었고, 그들은 잉글랜드를 떠나 카리브해로 항해했다.[12][26] 잉글랜드는 존 테일러를 ''빅토리'' 호의 선장으로 임명했다.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 정박한 잉글랜드와 선원들은 현지인들과 여성 대우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해적들은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떠났다.[28]
3. 3. 인도양 (1720년)
1720년, 잉글랜드는 인도양에 도달하여 해적 올리버 라 부스 선장을 만났다. 잉글랜드는 34문의 네덜란드 선박을 나포, 헨리 에버리를 기리기 위해 ''팬시''라 명명하고 기함으로 삼았다. 잉글랜드는 코모로 제도 근처에서 제임스 맥레이가 지휘하는 동인도 선박 ''카산드라''를 공격, 길고 격렬한 전투 끝에 두 배는 좌초되었다.[13] 맥레이와 생존자들은 탈출하여 10일 동안 섬에 숨었다가 잉글랜드의 협력선 ''빅토리''에 항복했다. ''카산드라''의 화물 가치는 75,000파운드였고, ''팬시''의 선원 90명이 ''카산드라'' 공격으로 사망했다.[14]
잉글랜드는 맥레이의 목숨을 살려주고, 해적들은 ''카산드라''를 보관하고 심하게 손상된 ''팬시''를 맥레이에게 주었다.[14] ''빅토리''의 선장이 된 잉글랜드의 선원 존 테일러는 이에 분개했고, 잉글랜드가 그를 취하게 한 후에야 동의했다. 잉글랜드는 코친 근처에서 작은 영국 선박을 나포했는데, 술에 취한 선장이 맥레이가 해적을 추격하기 위해 함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보고하여 해적들을 격분시켰고, 특히 맥레이를 죽이고 싶어했던 테일러를 더욱 격분시켰다. 테일러는 잉글랜드를 지휘에서 제거하기 위한 투표를 조직했다.[14]
새로운 선장 ''팬시'' 선원 출신인 재스퍼 시터 는 더 많은 전리품을 찾기 위해 ''카산드라''와 ''빅토리''를 북쪽으로 가져가기 전에 잉글랜드와 다른 3명을 모리셔스 해안에 고립시켰다.[15] 시터는 1721년에 사망했고, ''카산드라''는 결국 테일러에게 넘어가 카리브해로 가져갔다.[15]
코모로 제도의 앙주앙섬에서 잉글랜드 일당은 2척의 영국 선박과 1척의 오스텐데 선박과 조우, 제임스 맥레이 선장이 지휘하는 카산드라 호와 전투가 벌어져 카산드라 호와 잉글랜드의 판시 호가 좌초되었다. 전투 결과, 잉글랜드의 선원은 90명이나 사망했고, 맥레이도 다수의 부하를 잃고 자신도 부상당했다. 섬으로 도망친 맥레이는 10일 후 잉글랜드에게 항복했다. 일당은 카산드라 호에서 현재 가치로 2,000만 달러 또는 3,800만 달러의 재물을 얻었다[29]。
테일러와 그의 지지자들은 맥레이를 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옛날 맥레이 밑에서 일했던 의족을 한 남자가 그를 변호하여 맥레이는 목숨을 건졌다.[30] 잉글랜드는 맥레이에게 떠나라고 충고했다. 이 의족 해적은 소설 『보물섬』에 등장하는 의족 해적 존 실버의 모델이 되었다[30]。
잉글랜드는 자비로운 남자였고, 카산드라 호를 빼앗은 대신 손상된 판시 호를 맥레이에게 주고 달아나게 했다.[31] 그러나, 잉글랜드의 이 선택은 선원들의 불만을 샀고, 달아난 맥레이가 해적 토벌을 위해 선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빅토리 호의 선장인 테일러는 투표를 실시하여 잉글랜드를 선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잉글랜드와 그에게 충실했던 3명의 부하를 모리셔스 섬에 버려두었다.[32]
버려진 잉글랜드 일행은 널빤지로 작은 보트를 만들어 마다가스카르로 건너갔다.[32]
4. 몰락과 죽음
에드워드 잉글랜드와 그의 세 동료는 적절한 식량 없이 해안에 버려졌고, 음식을 찾아야 했다.[16] 약 4개월 후, 그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 세인트 오거스틴 만의 해적 소굴인 마다가스카르로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3]
5. 평가
에드워드 잉글랜드는 오늘날 해적 황금기의 인도적인 해적 선장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4] 찰스 존슨 선장에 따르면, 잉글랜드는 "매우 훌륭한 품성을 지녔고, 용기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탐욕스럽지 않았고, 포로를 학대하는 것을 항상 싫어했다."[14]고 한다.
거친 해적들 사이에서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인물이 존경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경시하는 경우가 많았다.[35] 잉글랜드는 자신의 권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인지했고, 의견을 말할 때마다 부하들이 반항하는 상황이었다.[35] 결국 잉글랜드의 선의는 그를 선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6. 대중문화
참조
[1]
서적
Pirates of the Americas: Volume 1
2010
[2]
서적
The History of Pirate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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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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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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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rates of the Americas, Volume 1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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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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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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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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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abrizain[...]
PURNELL AND SONS
2017-06-01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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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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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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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논문
Jacobitism and the "Golden Age" of Piracy, 1715-1725
https://www.academia[...]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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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utenber[...]
T. Warner
201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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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Whatever happened to those villains of the Indian seas? The happy retirement of the Madagascar pirates, 1698–1721
International Maritime Economic History Association
2017
[16]
서적
The Pirates Own Book edited
[17]
서적
A General History of the Robberies & Murders of the Most Notorious Pirates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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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public of Pir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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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Book of Pir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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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ウッダー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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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onor Among Thieves: Captain Kidd, Henry Every, and the Pirate Democracy in the Indian Ocean
https://books.google[...]
2024-05-3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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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賊の世界史 下』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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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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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賊の世界史 下』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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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ンソン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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