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오토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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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오토 피셔는 독일의 화학자이다. 1937년 아비투어에 합격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후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여 1949년 졸업했다. 1952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유기 금속 화학 연구를 지속했으며, 1960년대에 금속 알킬리덴 및 알킬리딘 착체를 발견하여 피셔 카벤과 피셔 카바인으로 불리게 했다. 1973년 제프리 윌킨슨과 함께 유기 금속 화합물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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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오토 피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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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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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른스트 오토 피셔 |
원어 이름 | Ernst Otto Fischer |
출생 | 1918년 11월 10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뮌헨 근교 졸른 |
사망 | 2007년 7월 23일 |
사망지 | 독일 뮌헨 |
국적 | 독일 |
학문 | |
분야 | 화학 |
연구 기관 | 뮌헨 공과대학교 |
모교 | 뮌헨 공과대학교 |
지도 교수 | 발터 히버 |
주요 업적 | 유기 금속 화합물 페로센 오스모센 샌드위치 화합물 피셔 카벤 피셔-하프너 합성 |
수상 | |
수상 | 노벨 화학상 (1973년)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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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에른스트 오토 피셔는 1918년 뮌헨 졸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뮌헨 공과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인 카를 T. 피셔와 발렌틴 단처였다. 1937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졸업했다. 2년간의 징병제 복무를 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선에 참전했다. 1941년 말 학업 휴가를 받아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45년 가을,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의해 석방되어 학업을 재개했다.[1]
1949년 뮌헨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후, 발터 히버 교수의 조교로 무기화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시작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디티오나이트 및 설폭실레이트 존재 하에서 니켈(II) 염의 일산화탄소 반응 메커니즘"이었다.[1] 1952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전이 금속의 유기금속화학 연구를 계속했으며, 교수 자격 심사 논문 "사이클로펜타디엔과 인덴의 금속 착물"을 썼다.
1955년 뮌헨 공과대학교 강사, 1957년 뮌헨 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1959년 교수가 되었다. 1964년 뮌헨 공과대학교 무기화학과 학과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69년 독일 자연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 멤버, 1972년 뮌헨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이클로펜타디엔과 인덴의 금속 착물, 6원환 방향족의 금속 π 착물, 피셔 카벤 (카벤 착물), 카빈 착물에 대한 강연을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진행했다.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 1971년 플로리다 대학교, 1973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1973년 제프리 윌킨슨과 함께 유기 금속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74년 센테나리 상을 수상했다.
200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그는 뮌헨의 자치구인 졸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뮌헨 공과대학교(TU)의 물리학 교수인 카를 T. 피셔와 발렌틴 단처였다. 1937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졸업했다. 2년간의 징병제 복무를 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선에 참전했다. 1941년 말 학업 휴가를 받아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45년 가을,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의해 석방되어 학업을 재개했다.[1]1949년 뮌헨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후, 발터 히버 교수의 조교로 무기화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시작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디티오나이트 및 설폭실레이트 존재 하에서 니켈(II) 염의 일산화탄소 반응 메커니즘"이었다.[1]
2. 2. 연구 경력
피셔는 1949년 뮌헨 공과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발터 히버 교수의 조교로 무기화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시작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디티오나이트 및 설폭실레이트 존재 하에서 니켈(II) 염의 일산화탄소 반응 메커니즘"이었다.[2]1952년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뮌헨 공과대학교에 남아 전이 금속의 유기금속화학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파우슨과 켈리가 가정한 페로센 구조에 이의를 제기했으며[2], 곧 페로센, 니켈로센, 코발토센의 구조 데이터를 발표했다.[3] 같은 시기, 크롬(III) 클로라이드와 페닐마그네슘 브로마이드의 하인 반응으로 생성된 당시 난해했던 화학에 집중하여 비스(벤젠)크로뮴을 분리해냈고, 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샌드위치 착물의 등장을 예고했다.[4][5]
1955년 뮌헨 공과대학교 강사로 부임, 1957년 뮌헨 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1959년 교수가 되었다. 1964년 뮌헨 공과대학교 무기화학과 학과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수학·자연과학 부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69년 독일 자연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 (Leopoldina)의 멤버로 임명되었으며, 1972년 뮌헨 대학교 화학·약학부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이클로펜타디엔과 인덴의 금속 착물, 6원환 방향족의 금속 π 착물, 그리고 오늘날 피셔 카벤이라고 불리는 모노, 디, 올리고 올레핀과 금속 카르보닐의 카벤 착물, 카빈 착물에 대한 강연을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진행했다.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 파이어스톤 렉처러, 1971년 플로리다 대학교 객원 교수, 1973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아서 D. 리틀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2. 3. 학문적 업적 및 수상
1955년 뮌헨 공과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고, 1957년 교수로, 1959년 C4 교수로 승진했다. 1964년에는 뮌헨 공과대학교 무기화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6]1964년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의 수학/자연과학부에 선출되었다. 1969년 독일 자연 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의 회원이 되었고, 1972년 뮌헨 대학교 화학 및 약학부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
그는 사이클로펜타디에닐, 인데닐, 아렌, 올레핀, 금속 카르보닐의 금속 착체에 대해 전 세계를 돌며 강연했다. 1960년대에 그의 연구팀은 금속 알킬리덴 및 알킬리딘 착체를 발견했는데, 이후 피셔 카벤과 피셔-카바인으로 불리게 되었다.[6] 그는 총 450편의 저널 논문을 발표했으며, 많은 박사 및 박사후 과정을 지도했고, 이들 중 다수가 주목할 만한 경력을 쌓았다. 그의 많은 해외 강연 중에는 위스콘신 대학교–매디슨의 파이어스톤 강사(1969), 플로리다 대학교의 객원 교수(1971),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아서 D. 리틀 객원 교수(1973) 등이 있었다.[6]
1973년 제프리 윌킨슨과 함께 유기금속 화합물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6]
2. 4. 말년
2007년 7월 23일 뮌헨에서 사망했다.[7] 사망 당시 피셔는 생존해 있는 독일인 노벨 화학상 수상자 중 최고령이었다. 그는 1967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만프레트 아이겐의 뒤를 이었으며, 아이겐은 피셔보다 9세 연하였다.
3. 수상 경력
참조
[1]
학술지
Ũber den Mechanismus der Kohlenoxydreaktion von Nickel(II)- und KobaIt(II)-Salzen bei Gegenwart von Dithionit
[2]
학술지
Metallverbindungen des Cyclopentadiens und des Indens
[3]
학술지
Zur Kristallstruktur der Di-Cyclopentadienyl-Verbindungen des zweiwertigen Eisens, Kobalts und Nickels
[4]
학술지
Bis(benzene)chromium. 1. Franz Hein at the University of Leipzig and Harold Zeiss and Minoru Tsutsui at Yale
[5]
학술지
Bis(benzene)chromium. 2. Its Discovery by E. O. Fischer and W. Hafner and Subsequent Work by the Research Groups of E. O. Fischer, H. H. Zeiss, F. Hein, C. Elschenbroich, and Others
[6]
학술지
On the way to carbene and carbyne complexes
[7]
뉴스
derStandard.at
http://derstandard.a[...]
derStandard.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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