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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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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멘데는 1916년 슐레지엔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 후 법학을 공부하고 정치학 강사로 활동하며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다. 1960년 FDP 당수가 되었으며, 1963년 부총리 겸 전독일문제장관을 역임했다. 1970년 동방 정책에 반대하여 FDP를 탈당하고 기독교민주연합(CDU)에 입당하여 1972년부터 1980년까지 CDU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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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멘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1년 에리히 멘데
1961년 멘데
정치 경력
직위서독 부총리
임기 시작1963년 10월 17일
임기 종료1966년 10월 28일
대통령하인리히 뤼프케
총리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전임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후임한스-크리스토프 제봄
직위2전독일 문제 담당 연방 장관
임기 시작21963년 10월 17일
임기 종료21966년 10월 28일
총리2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전임2라이너 바르첼
후임2요한 바프티스트 그라들
직위3연방의회 의원
임기 시작31949년 9월 7일
임기 종료31980년 11월 4일
개인 정보
출생일1916년 10월 28일
출생지그로스 슈트렐리츠,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98년 5월 6일
사망지, 독일
소속 정당FDP
CDU (1970년부터)
학력쾰른 대학교, 본 대학교
직업군인, 정치인
기타 정보
훈장철십자 훈장 기사 철십자장

2. 생애

에리히 멘데는 1916년 실레시아 지방의 그로스슈트렐리치(지금의 스트셸체오폴스키에)에서 태어났다. 쾰른 대학교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9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정치학 강사로 활동했다. 전후 자유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 1949년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1957년부터 자민당 원내대표를 맡았고 1960년에는 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콘라트 아데나워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직에 오르자, 에르하르트는 멘데를 부총리 겸 전독일문제장관으로 지명했다. 1966년 에르하르트 내각이 붕괴되면서 멘데는 부총리 및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내각의 동방 정책에 반발해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기민련에 입당했다. 1980년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1998년 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에리히 멘데는 1916년 10월 28일 실레지아 지방의 그로스슈트렐리치(지금의 스트셸체오폴스키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독일 중앙당 소속으로 시의원을 지냈다. 멘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실레지아 봉기와 연합군 군사 통제 위원회의 통치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1936년 그로스 스트렐리츠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멘데는 직업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베르마흐트에 입대했다. 그는 제84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이 부대는 당시 글라이비츠에 주둔하고 있던 제8 예거 사단 소속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소령까지 진급했으며, 제102보병연대장 대행을 역임했다. 종전 직전에는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전후에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착용했다. 영국군의 포로가 된 후, 독일인 추방의 결과 루르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2. 2. 전후 학업 및 정계 입문

쾰른 대학교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9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정치학 강사로 활동했다. 전후 자유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 1949년 총선에서 자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57년부터 자민당 원내대표를 맡았고 1960년에는 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했지만, 원래는 기민련을 지지했다.[2] 같은 해 2월 FDP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무총장에 취임했다.[2] 1947년 7월, 당 청년단 조직 대표로 집행부에 들어가 영국군 점령 지구 FDP 대표로 선출되었다.[2] 1948년 옵플라덴 시의원에 당선되어 1950년까지 활동했다.[2] 1949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 처음 당선되었고,[2] 같은 해 당 연방 집행부에 들어가 원내 총무가 되었다.[2] 1953년 당 의원단 부단장에 취임했다.[2] 같은 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당 지구 부대표에 지구 대표의 의향에 반해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2] 1956년에는 동 주에서 기민련에서 사민당으로 연립 상대를 재편성하는 것에 찬성한, 이른바 "청년 터키 당" 그룹의 일원이 되어 FDP 분열을 초래했다.[2]

멘데는 의원으로서 전직 군인, 장기 억류 후 석방된 사람들(Spätheimkehrer), 전쟁 범죄자로 비난받은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1] 그는 새로운 연방군의 구조와 훈련 방식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다.[1]

2. 3. 부총리 겸 전독일문제장관

1963년 콘라트 아데나워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직에 오르자, 에르하르트는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 의장인 멘데를 부총리 겸 전독일문제장관으로 지명했다. 멘데는 자민당 원내대표직을 크누트 폰퀼만슈툼에게 넘겨주었다. 멘데는 당시 서독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공산주의 동독, 즉 독일 민주 공화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재임 기간 동안 서베를린 시민들이 1963년 12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방문을 위해 베를린 장벽을 넘을 수 있었고, 1964년부터는 동독 고령자들이 서독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1]

멘데는 특히 호프 근처의 아우토반 건설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여 서베를린과의 소통을 개선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동독 감옥에 수감된 4,000명 이상의 정치범들이 서독에 의해 "매수"되어 석방되기도 했다.[1]

1966년 에르하르트 내각이 붕괴되면서 멘데는 부총리 및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 4. FDP 탈당 및 CDU 입당

1970년 빌리 브란트 내각이 동방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자유민주당(FDP)을 탈당하고 기민련(CDU)에 입당했다.[3] 멘데의 탈당은 연립이나 자유민주당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 그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 CDU 의원으로 다시 연방 의회에서 활동했지만, 기독교 민주 연합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3]

2. 5. 사망

에리히 멘데는 1998년 6월 5일 에서 사망했다.

3. 정치 경력

에리히 멘데는 1946년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했지만, 원래는 기독교민주연합(CDU)를 지지했다. 같은 해 2월 FDP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무총장을 지냈고, 1947년 7월 당 청년단 조직 대표로 집행부에 들어가 영국군 점령 지구 FDP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년 옵플라덴 시의원(1950년까지), 1949년 독일 연방 의회 의원이 되었고, 같은 해 당 연방 집행부, 원내 총무를 맡았다. 1953년 당 의원단 부단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당 지구 부대표에 당선되었다.

1956년 멘데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의 연립 상대 재편성에 찬성한 "청년 터키 당" 그룹의 일원으로 FDP 분열을 초래했다. 1957년 연방 의원단장, 1960년 FDP 당수가 되었다.

1961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 후, FDP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유임에 반대했으나, 결국 CDU와 연립을 유지했다. 멘데는 아데나워 내각에 입각하지 않고 의원단장직을 유지했다. 1963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에서 부총리 겸 전 독일 문제 장관을 지냈으나, 1966년 연립 붕괴로 사임했다. 이후 해외 투자 기업 독일 지사 지배인, 투자 회사 경제 문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8년 당수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발터 셰엘이 후임 당수가 되었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내각의 동방 외교에 반대하여 FDP를 탈당하고 CDU에 입당, 1980년 정계 은퇴했다. 멘데는 1949년 제1회 독일 연방 의회 선거 이래 25년 이상 연속으로 의석을 유지한 10명 중 한 명이다.

3. 1. 자유민주당 (FDP) 활동

1945년 자유민주당(FDP) 창당을 도왔다.[1] 그의 정당은 독일 3대 주요 정당 중 가장 자유 시장 지향적인 정당이었다.[1] 멘데는 1949년 독일 연방의회에 선출되었으며 당내에서 빠르게 승진했다.[1] 1960년 FDP 전국 의장이 되었으며, 1968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1]

의원으로서 멘데는 전직 군인, 장기간 억류 후 석방된 사람들(Spätheimkehrer), 전쟁 범죄자로 비난받은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1] 그는 새로운 독일군인 연방군의 구조와 훈련 방식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다.[1]

1971년의 멘데


멘데는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다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1] 아데나워의 기독교 민주 연합(CDU)은 FDP가 연립한 주요 정부 정당이었다.[1]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FDP가 1961년 9월에 득표율을 늘리자 멘데는 그의 정당에 아데나워와 다시 연립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1] FDP는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1] 그는 직책을 맡기를 거부했으며, 루트비히 에르하르트1963년에 아데나워를 총리로 교체한 후에야 입장을 바꿨다.[1]

1946년 FDP에 입당했지만, 원래는 CDU를 지지했다.[4] 같은 해 2월 FDP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무총장에 취임했다.[4] 1947년 7월, 당 청년단 조직 대표로 집행부에 들어가, 영국군 점령 지구 FDP 대표로 선출되었다.[4] 1948년 옵플라덴 시 시의원이 되었다(1950년까지).[4] 1949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 첫 당선되었다.[4] 같은 해 당 연방 집행부에 들어가, 당의 원내 총무가 되었다.[4] 1953년 당 의원단 부단장에 취임했다.[4] 같은 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당 지구 부대표에 지구 대표 의향에 반하여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4] 1956년 동 주에서 CDU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연립 상대 재편성에 찬성한 "청년 터키 당" 그룹 일원이 되어, FDP 분열을 초래했다.[4] 1957년 연방 의원단장에 취임했다.[4] 1960년 FDP 당수에 취임했다.[4]

1961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 후, FDP는 CDU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유임에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4] 결국 FDP는 앞선 발언을 뒤집고 CDU와 연립을 유지했지만, 멘데는 앞선 발언대로 아데나워 내각에 입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원단장직에 머물렀다.[4]

3. 2. 기독교민주연합 (CDU) 활동



멘데는 1970년 10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과 오데르-나이세 선 인정에 반대하여 자유민주당(FDP)을 탈당하고 기독교민주연합(CDU)에 입당했다.[1] 그의 탈당은 연립이나 FDP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

1972년부터 1980년까지 CDU 의원으로 다시 독일 연방의회에서 활동했지만, CDU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1]

4. 가족 관계

에리히 멘데는 두 번 결혼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고 한센은 젊은 전쟁 미망인으로, 1947년 자유민주당(FDP) 회의에서 만났다. 그들은 1년 후 결혼했으며, 마고 멘데는 남편의 경력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멘데의 아들 발터 멘데는 1944년 7월 14일 올스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레버쿠젠시장을 역임했다.

멘데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장남 발터는 사회민주당의 정치인이 되었으며, 1994년부터 4년간 레버쿠젠 시장을 역임했다.

5. 수상 내역


  • 1942년 5월 30일: 금색 독일 십자 훈장 (제84 보병 연대 10중대 상위 중위 계급)[6]
  • 1945년 2월 28일: 철십자 기사 철십자 훈장 (소령 계급 및 제216 척탄병 연대 지휘관)[7][8]
  • 연방 공로 훈장 (Great Cross of Merit)

참조

[1] 서적 Mende 1999
[2] 서적 Mende 1999
[3] 서적 Mende 1999
[4] 서적 Mende 1999
[5] 웹사이트 Biography at Friedrich Naumann Stiftung http://www.politik-f[...] 2009-09-27
[6] 서적 Patzwall & Scherzer 2001
[7] 서적 Scherzer 2007
[8] 서적 Fellgiebel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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