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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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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부인(1706-1749)은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였다. 그녀는 당대 여성에게 드물게 허용된 교육을 받았으며, 수학, 과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뒤 샤틀레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프랑스 과학계에 뉴턴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운동 에너지 개념 연구를 통해 과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볼테르와의 교류를 통해 계몽주의 사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물리학 입문》, 《행복론》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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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의 초상화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의 초상화
본명가브리엘 에밀리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유, 샤틀레 후작부인
출생1706년 12월 17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1749년 9월 10일 (42세)
사망지프랑스 왕국 뤼네빌
자녀프랑수아즈 가브리엘 폴린
루이 마리 플로랑
빅토르-에스프리
스타니슬라스-아델라이드 뒤 샤틀레
연인볼테르 (1733–1749)
국적프랑스
민족프랑스인
학문 분야
분야물리학
자연철학
수학
알려진 업적총 에너지 보존 개념
상대성이론
주요 저서 "물리학의 기초" (1740년, 1742년)
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랑스어 번역
뉴턴 물리학과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을 결합한 자연 철학
뉴턴 물리학 옹호
서명
참고

2. 생애

에밀리 뒤 샤틀레는 1706년 12월 17일 파리에서 6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이 니콜라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유(1648–1728)였으며, 작은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뒤 샤틀레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루이 14세 국왕의 주요 비서이자 대사 소개 담당관이었고, 매주 목요일마다 존경받는 작가와 과학자들을 초대하여 살롱을 열었다.[41] 어머니는 가브리엘 안 드 프롤레이(1670–1740)로, 브르퇴유 남작 부인이자 군인 샤를 드 프롤레이|Charles de Froullay프랑스어(1601–1671)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세 명의 오빠, 르네-알렉상드르(1698년 출생), 샤를-오귀스트(1701년 출생), 엘리자베스-테오도르(1710년 출생)가 있었다. 맏오빠 르네-알렉상드르는 1720년에, 둘째 오빠 샤를-오귀스트는 1731년에 사망했다. 막내 동생 엘리자베스-테오도르는 성직자가 되어 주교까지 되었다. 그 외 두 형제는 어려서 사망했다. 뒤 샤틀레에게는 1686년에 태어난 이복 여동생 미셸도 있었다.

1725년 18세에 샤틀레 후작부인은 머스킷 총병이었던 샤틀레 후작이자 로몽 백작인 플로랑 클로드(Florent-Claude프랑스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56] 1726년에 딸, 1727년에 아들을 낳았다. 세 아이를 낳은 후, 남편에게 부부 관계를 유지한 채 별거하는 것을 승낙받았다.

스물여덟 살 때 볼테르를 처음 만난 후 약 10여 년간 연인 관계를 맺었으며, 죽을 때까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6] 시레에서 볼테르와 함께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과학 논문과 번역물을 발표했다.[18]

1748년 5월, 시인 장 프랑수아 드 생-랑베르와 관계를 맺고 임신했다. 1749년 9월 4일 밤, 딸 스타니슬라스-아델라이드를 낳았으나, 1749년 9월 10일 뤼네빌 성에서 [23]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22] 향년 42세였다.

2. 1. 성장 과정

뒤 샤틀레의 초상화


에밀리 뒤 샤틀레는 1706년 12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이 니콜라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유(Louis Nicolas le Tonnelier de Breteuil프랑스어)였는데, 교육열이 매우 높아 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에밀리는 당대 여성들이 받기 힘들었던 수학, 문학, 과학 교육을 받았다. 또한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를 배웠다.[41]

에밀리는 펜싱승마도 배웠는데, 펜싱 실력이 뛰어나 궁정에서 유명한 왕실 근위대장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어머니 가브리엘 안느는 딸이 과학, 철학, 신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것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딸을 지지했다.[41]

어린 시절, 아버지는 퐁트넬을 불러 에밀리에게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했다.[41] 12세에 라틴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훗날 그리스와 라틴 극 및 철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십 대 시절에는 책 살 돈이 부족하여 수학적 기술을 활용해 도박에서 성공적인 전략을 고안하기도 했다.[41]

2. 2. 결혼 및 연애

1725년 18세의 샤틀레 후작부인은 머스킷 총병이었던 샤틀레 후작이자 로몽 백작인 플로랑 클로드(Florent-Claude프랑스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56] 플로랑 클로드는 부르고뉴 지방 세뮈르의 통치자였다.[57] 남편은 주둔 병사를 감독하느라 바빴으며, 아내가 공부하는 것을 존중해주었다. 결혼과 출산 이후 과학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었던 그녀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샤틀레 후작부인은 루이 14세의 대자이자 바람둥이로 이름 높았던 리슐리외 공작과 연애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피에르루이 모페르튀를 만났다.[57] 그는 한때 근위대원이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등수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모페르튀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뉴턴의 학설을 지지했고, 뉴턴이 예측했던 사항을 확인하러 북극 탐사를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에밀리는 모페르튀에게 수학적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모페르튀는 에밀리의 저서인 《물리학 입문》을 수학적 측면에서 비판한다. 후에 에밀리는 독일의 수학자 사무엘 쾨니히(Samuel Königde)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1725년 6월 20일에는 11살 연상의 플로랑 클로드 뒤 샤틀레 후작과 결혼하여 샤틀레 후작 부인이 되었다. 이것은 귀족 사회에서 흔한 정략결혼으로, 부부의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귀족 사회의 관습이었다. 1726년에 딸이, 1727년에 아들이 태어났다. 세 명의 아이를 낳은 후, 그녀는 남편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부부 관계를 유지한 채 별거하는 것을 남편에게 승낙받았다.

2. 3. 볼테르와의 관계

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부인은 스물여덟 살 때 볼테르를 처음 만난 후 약 10여 년간 연인 관계였으며, 죽을 때까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6] 볼테르는 정부와 성직자 계급을 주로 비판했기에 위험에 처할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루이 15세와 볼테르를 화해시키기도 하고, 볼테르가 《철학 서간(Lettres philosophiques프랑스어)》 때문에 도피하였을 때 자신의 성을 빌려주거나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를 도왔다.[6] 볼테르 역시 샤틀레를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지식인 모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6] 귀족인 에밀리와 미천한 가문 출신인 볼테르와의 관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부정적이었지만, 볼테르가 적지 않은 재정 자원을 들여 시레이 성을 꾸미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볼테르와 그녀의 남편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6] 또한 귀부인들의 연애가 자유로웠던 당시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6]

볼테르는 영국으로 망명했던 시절, 아이작 뉴턴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볼테르가 뉴턴의 명저를 읽게 된 데에는 에밀리 뒤 샤틀레의 영향도 있었다.[6] 1737년까지 에밀리는 볼테르와 같이 왕립 과학아카데미 안에서 데카르트 학파와 대립하던 국내 뉴턴 학파를 지지하였다.[6] 후에 볼테르는 프랑스로 귀국해 명작 캉디드를 남기게 되는데 에밀리의 도움을 받았다.[6]

두 사람의 관계는 몇 년 후 시들해졌는데, 뉴턴을 최고로 생각하던 볼테르는 에밀리의 관심사가 뉴턴에서 라이프니츠로 이동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6] 또한 에밀리는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대왕과 친분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6]

1736년에 볼테르와 공동으로 《뉴턴 철학원론(Élemens de la philosophie de Neuton프랑스어)》을 완성했다.[6] 1738년에는 볼테르와 공동으로 《뉴턴 철학의 기본 요소들(E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프랑스어)》을 썼는데, 볼테르는 데카르트에 너무나 심취한 과학원을 겨냥하여 뉴턴에 대한 책을 냈다.[6]

뒤 샤틀레는 시레에서 볼테르와 함께 살면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과학 논문과 번역물을 발표했다.[18] 볼테르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서로의 작업에 대한 평론을 보면, 그들은 서로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며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16] 과학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인물이었던 볼테르는 1738년 저서 『뉴턴 철학의 요소들』에 대한 그녀의 기여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16] 이는 책의 시작 부분에 그녀에게 헌정된 시와 서문에서 볼테르가 그녀의 연구와 기여를 칭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6] 광학에 관한 책의 챕터는 그녀의 『광학 에세이(Essai sur l'optique)』와 매우 유사하다.[17]

과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면서 볼테르와 뒤 샤틀레는 과학적으로 협력했다.[18] 그들은 로렌에 있는 뒤 샤틀레의 집에 실험실을 세웠다.[18] 건전한 경쟁 속에서 그들은 모두 1738년 파리 아카데미의 불의 본질에 대한 상 경연에 참가했다.[19] 비록 둘 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두 에세이 모두 명예로운 언급을 받았고 출판되었다.[19]

볼테르는 친구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밀리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유일한 결점은 여자였다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는데, 당시의 세상을 감안하면 대단한 칭찬이었다.[51][52]

2. 4. 시레이 성에서의 연구

에밀리의 남편은 시레에 오래된 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이 곳을 두 사람의 연구실 및 주거공간으로 개조했다. 2년여의 공사를 거친 끝에 탄생한 시레이 성은 파리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견줄 만한 도서관과 런던에서 수입해온 최신 실험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18]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객실용 방들과 세미나실도 있었다. 공동 서재와 함께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 서재에는 학문 연구를 위해 항상 커튼을 내려 동트기 전후의 조명 상태를 유지하였다. 점차 시레이 성에는 유럽의 최고 과학자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10년 이상 시레이 성에서 함께 살았다. 볼테르는 종종 에밀리의 작업실에 방문해서 뉴턴의 라틴 원문을 네덜란드어 주석과 비교하는데 도움을 받았다.[6]

외국의 많은 신진 학자들이 이곳에 머물다 갔다. 쾨니히베르누이 같은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묵기도 하였다. 에밀리 뒤 샤틀레와 볼테르는 유럽 과학자들과의 협력으로 뉴턴 연구의 기초가 확립되는 것에 만족했다.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에 관한 연구로 시레이는 몇 안되는 진정한 독립 연구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시레이 성은 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둘은 파리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에밀리는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며 뉴턴 학문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여러 저작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과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면서 볼테르와 뒤 샤틀레는 과학적으로 협력했다. 그들은 로렌에 있는 뒤 샤틀레의 집에 실험실을 세웠다.[18] 건전한 경쟁 속에서, 1738년 파리 아카데미의 불의 본질에 대한 상 경연에 참가했다. 뒤 샤틀레가 볼테르의 에세이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둘 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두 에세이 모두 명예로운 언급을 받았고 출판되었다.[19] 그리하여 그녀는 아카데미에 의해 과학 논문을 발표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2. 5. 사망

볼테르와 관계가 소원해진 시기에 에밀리 역시 젊은 시인과 만나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고,[58] 출산 예정일인 9월에 맞추어 일생의 연구를 마감해야 했다. 매일 3~4시간씩만 수면을 취하고 모든 시간을 뉴턴의 프린키피아 연구에 바쳤다. 1749년 9월 1일 샤틀레는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뉴턴에 대해 연구해온 주요 해석들의 원고를 동봉한 서류 꾸러미를 보냈다. 3일 뒤 진통이 시작되었고, 아이를 출산하고 감염으로 인해 일주일 뒤 사망했다.

뤼네빌 성


1748년 5월, 뒤 샤틀레는 시인 장 프랑수아 드 생-랑베르와 관계를 맺고 임신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신 중 살아남지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털어놓았다. 1749년 9월 4일 밤, 그녀는 딸 스타니슬라스-아델라이드를 낳았다. 뒤 샤틀레는 1749년 9월 10일 뤼네빌 성에서 [23]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22] 향년 42세였다. 그녀의 갓난딸은 20개월 후에 사망했다.[24]

3. 업적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은 베르나르 드 망데빌, 아이작 뉴턴 등의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철학 에세이, 서신, 책 등을 저술하며 독자적인 철학자로 활동했다. 그녀의 사상은 개인의 권한 부여부터 사회 계약 문제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1]

최근 역사학자들은 뒤 샤틀레의 작품이 1730년대와 1740년대의 철학적, 과학적 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에게 존경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1] 프란체스코 알가로티는 시레에서 뒤 샤틀레와 볼테르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일 뉴토니안니즈모 페르 레 다메''를 쓰기도 했다.[2]

뒤 샤틀레는 미적분학 초기 개발자인 요한 II 베르누이,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에게 지도를 받았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녀를 존경하여 크리스티안 볼프의 작품을 보내 라이프니츠 철학을 소개했고, 뒤 샤틀레는 자신의 저서 ''Institutions'' 사본을 보냈다.

그녀의 작품은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출판 및 재출판되었고,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메모아 드 트레부'', ''저널 데 사반'', ''괴팅겐 젤레르테 자첸'' 등 주요 학술 저널에서 논의되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디드로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뒤 샤틀레는 존 로크의 철학을 비판하며, 보편적 원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버나드 맨더빌의 《벌들의 우화》에 대한 논평에서 인간 지식과 행동의 전제 조건이 되는 보편적 원리가 생득적이라고 주장했다.

1737년 ''Dissertation sur la nature et la propagation du feu''(자연 및 불의 전파에 관한 논고)를 출판하여 적외선을 예언하고 빛의 본질을 논의했다. 이 논문은 파리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되어 가작으로 게재되었으며, 뒤 샤틀레의 학문적 명성을 높였다.

1740년 『물리학 강의』(''Institutions de Physique'')를 출판하여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결합한 새로운 물리학을 프랑스 과학계에 소개했다. 이 책에서 뒤 샤틀레는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 에너지질량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E \propto mv^2) 것을 정확히 제시했다.

1749년 뉴턴의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프랑스어로 완역하고 주석을 추가했다. 이 번역본은 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에너지 보존 법칙 개념을 도출하는 등 단순한 번역을 넘어선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번역과 주석은 프랑스에서 과학 혁명을 완성하고 유럽에서 뉴턴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1.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에 관한 연구

에밀리 뒤 샤틀레는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 즉 현대의 운동 에너지 개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59] 당시 아이작 뉴턴은 이 힘을 단순히 mv로 정의했지만,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mv^2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뉴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정의 문제를 넘어 뉴턴의 신학과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 대립하는 지점이었다.

뉴턴은 mv에서 신의 존재 이유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뉴턴의 관점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속력으로 움직이던 물체가 충돌하면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되고, 외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유입되어야 했다. 뉴턴은 우주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신의 보살핌의 증거라고 보았고, 이를 복잡한 기하학과 미적분으로 증명했다.

하지만 샤틀레는 라이프니츠의 반론을 연구하며 뉴턴 접근법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라이프니츠는 충돌하는 두 물체의 에너지가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해져 다른 현상들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샤틀레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고, 네덜란드 과학자 스흐라베잔데의 실험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샤틀레는 스흐라베잔데의 실험 결과를 라이프니츠 이론을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영어권 과학자들은 뉴턴을, 독일어권 과학자들은 라이프니츠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샤틀레의 연구 발표로 이 논쟁은 해결되었다.

''마르키즈 뒤 샤틀레 부인의 답변'', 1741


1741년, 뒤 샤틀레는 ''마르키즈 뒤 샤틀레 부인의, 드 메이랑 씨의 편지에 대한 답변''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드 메이랑은 과학 아카데미 사무총장이었는데, 뒤 샤틀레는 그의 주장에 대한 조목조목 반박을 제시했고, 드 메이랑은 논쟁에서 물러났다.[30]

이마누엘 칸트는 1747년 '생명력의 진정한 평가에 대한 고찰'에서 뒤 샤틀레의 소책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칸트의 반대자인 요한 아우구스트 에버하르트는 칸트가 뒤 샤틀레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비난했다.[31] 그러나 칸트는 뒤 샤틀레를 포함한 당대 학식 있는 여성들을 인신 공격적이고 성차별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32]

18세기 초, 힘과 운동량 개념은 오랫동안 이해되었지만, 에너지 전달 개념은 초기 단계였고 19세기에야 정립되었다. 현재는 총 역학적 운동량이 보존되며 마찰로 손실되지 않는다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20세기 에미 뇌터는 초기 상태가 일반화된 좌표에서 대칭인 모든 문제에 대해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뒤 샤틀레는 운동량과 구별되는 총 에너지 보존 가설을 제시하여 에너지 개념을 명확히 하고,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질량과 속도와의 관계를 정량화했다. 스흐라베잔데의 실험을 반복, 공개하여 각 공의 운동 에너지속도의 제곱에 비례함을 보였다. 그녀는 두 공이 질량을 제외하고 동일하다면, 각 공에 대해 mv^2 (당시 ''활력(vis viva)'')의 양이 동일할 경우 점토에 동일한 크기의 자국을 낼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33]

레온하르트 오일러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뒤 샤틀레의 연구 결과를 사용하여 역학에 대한 보다 공식적인 틀을 확립했다.[34][35]

1737년 에밀리는 ''Dissertation sur la nature et la propagation du feu''(자연 및 불의 전파에 관한 논고)를 출판하여 적외선을 예언하고 빛의 본질을 논의했다.

3. 2. 불의 성질에 관한 연구

1737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그해의 주제를 열, 빛, 불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공표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이 논문 공모 소식을 듣고 연구를 진행했다. 에밀리는 볼테르의 연구를 도왔고, 독자적으로도 연구를 진행했다.[60] 빛은 태양에서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9분도 채 걸리지 않으며,[61] 그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 정도라는 것을 에밀리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태양빛 안에 고형 입자가 있고, 그 안에 무게가 있다면 빛과 부딪히는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인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빛에 무게가 있다면, 빛이 어떻게 태양에서 끊임없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반면 빛에 무게가 없다면, 빛의 여러 성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 에밀리는 논문에서 빛 속에 지구 전체에 열을 공급할 만큼의 막대한 힘을 지닌 숨은 입자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신 빛 속에 있는 여러 빛깔에 그 힘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더 나아가 빛의 색깔마다 다른 양의 열을 품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9월 1일 논문 마감일에 맞추어 "충분한 실험을 한다면 서로 다른 색깔의 빛에서 발열의 힘이 뚜렷이 구분됨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볼테르의 실험 기구를 사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순전히 사고실험으로 연구를 진행, 1737년 논문을 완성했다. 수상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1738년 과학 아카데미에서 출간되어 뒤 샤틀레 부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당대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구는 70년 후인 1800년 영국의 천문학자 허셜이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하여 적외선을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었다.

1737년 에밀리는 ''Dissertation sur la nature et la propagation du feu''(자연 및 불의 전파에 관한 논고)를 출판했다. 이 논문은 불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현재 적외선으로 알려진 것을 예언하고 빛의 본질을 논의한다. 에밀리는 빛과 열의 관계를 연구하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는 것을 추측하는 136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써서 파리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에 응모했다. 에밀리의 논문은 가작으로 기요에 게재되었고,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 등 많은 학자들이 그녀의 논문을 응모작 중 압도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는 것은 70년 후 윌리엄 허셜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3. 3.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및 주석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추가한 것은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 미적분을 토대로 복잡한 기하학을 명료하게 재해석하고 뉴턴의 핵심 정리를 밝혀내는 것을 포함했다.[62][63] 특히 뉴턴이 중력 작용과 지구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방식을 설명한 70~75번 정리를 명확히 하여, 행성이나 항성이 운동할 때 하나의 수학적 점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62][63]

또한 뒤 샤틀레 부인은 에너지 보존에 관한 정리를 정확하게 짚어내 현대 용어로 바꾸고, 불에 대한 실험과 연관시키려 했다. 13번 정리에 딸린 40번 명제[64][65]에서 그 답을 발견하고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여 후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했다.

뒤 샤틀레 부인은 알렉시 클레로의 도움을 받아 행성들이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제안을 주석에 사용하여, 지구와 다른 행성이 균질한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뉴턴의 믿음을 수정했다.[39] 또한 다니엘 베르누이의 연구를 바탕으로 조석에 대한 뉴턴의 이론을 상세히 설명하고, 삼체 문제를 통해 달의 밀도가 뉴턴이 생각했던 것보다 70배 더 높다는 것을 밝혀 만유인력의 법칙을 뒷받침했다.[39]

이처럼 방대한 주석은 그녀가 편집한 책 2권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37] 뒤 샤틀레 부인은 해석 기하학 연구, 미적분 마스터, 실험 물리학 주요 저작 탐구를 통해 철저히 준비했고, 1700년대에 이러한 고급 수학을 이해하고 다른 작품에 적용할 수 있었던 약 20명 중 한 명이었다.[38]

1749년에 원고를 탈고했지만, 출산 후 사망했기 때문에 출간은 그녀가 죽고 10년 뒤에 이루어졌다.[36] 이 번역본은 현재까지도 프랑스에서 쓰이는 《프린키피아》의 표준 번역본이며, 프랑스어로는 유일한 완역본이다.[36] 그녀의 번역과 주석은 프랑스에서 과학 혁명을 완성하고 유럽에서 뉴턴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36]

3. 4. 철학적 기여

베르나르 드 망데빌과 아이작 뉴턴과 같은 작가의 저명한 번역 외에도 뒤 샤틀레는 당시에 잘 알려진 수많은 중요한 철학 에세이, 서신, 책을 저술했다.[1] 뒤 샤틀레는 독자적으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였다. 그녀의 작품은 개인의 권한 부여에서 사회 계약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녀는 평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한 볼테르와의 유명한 협력 관계와 로맨틱한 관계로 인해 유명한 지적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알려져 왔다. 그녀의 주목할 만한 업적과 지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은 종종 볼테르의 업적에 가려져 왔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그녀는 종종 초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의 삶과 작품의 맥락에서만 언급된다.

하지만 최근 전문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뒤 샤틀레의 평판을 바꾸어 놓았다. 역사적 증거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은 1730년대와 1740년대의 철학적, 과학적 대화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에게 유명하고 존경받았다.[1] 프란체스코 알가로티는 뒤 샤틀레와 볼테르가 시레에서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일 뉴토니안니즈모 페르 레 다메''의 대화를 구성했다.[2]

뒤 샤틀레는 미적분학의 초기 개발자인 요한 II 베르누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또한 베르누이의 영재 학생인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와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의 지도를 받았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에 과학 아카데미를 재건했고, 그녀를 매우 존경했으며, 볼테르와 뒤 샤틀레 모두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그녀에게 크리스티안 볼프의 작품을 보내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소개했으며, 뒤 샤틀레는 그에게 그녀의 ''Institutions'' 사본을 보냈다.

그녀의 작품은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 및 재출판되었고,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으며, ''메모아 드 트레부'', ''저널 데 사반'', ''괴팅겐 젤레르테 자첸'' 등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학술 저널에서 논의되었다. 그녀의 많은 아이디어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의 여러 섹션에 표현되었으며, ''백과전서''의 일부 기사가 그녀의 작품을 직접 복사했다([http://projectvox.library.duke.edu/content/du-ch%C3%A2telet-1706-1749 프로젝트 복스]에서 확인 가능).

뒤 샤틀레는 자신의 저작에서 존 로크의 철학을 비판했다. 그녀는 경험을 통한 지식 검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고하는 물질의 가능성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 난해하다"고 말했다.[25] 로크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버나드 맨더빌의 저서 《벌들의 우화》에 대한 그녀의 논평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전제 조건이 되는 보편적 원리를 단호하게 선호했고, 이러한 종류의 법칙이 생득적이라고 주장했다. 뒤 샤틀레는 보편적 전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 만약 그런 시작점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뒤 샤틀레는 생득 관념과 선행 원리에 대한 로크의 혐오를 거부했다. 그녀는 또한 《개요》에서 자신의 방법론적 고찰의 기초가 될 모순율에 대한 로크의 부정을 뒤집었다. 반대로 그녀는 선행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다. "만약 선행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2 더하기 2는 4가 될 수도 있지만 6이 될 수도 있다."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이와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가 운동, 자유 의지, '사고하는 물질', 숫자, 그리고 형이상학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한 뒤 샤틀레의 심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녀의 고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녀는 수학적 법칙을 사용하여 진리를 찾는 주장을 반박하고, 모페르튀이에 반대했다.[26]

그녀의 저서 《물리학 강의》(''Institutions de Physique'')[29]

제1장에서 뒤 샤틀레는 데카르트의 모순율과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추론 규칙에 대한 설명을 포함시켰다. 제2장에서는 이러한 추론 규칙을 형이상학에 적용하여 신, 공간, 시간, 물질을 논했다. 제3장에서 제6장까지 뒤 샤틀레는 신의 역할과 창조물과의 관계에 대해 계속 논했다. 제7장에서 그녀는 물질의 개념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감각적 지각에 사용 가능한 거시적 물질, 그 거시적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그리고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더 작은 구성 단위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으로 얼마나 많은 수준이 존재하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신중하게 덧붙였다.

《물리학 강의》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더 많은 형이상학 및 고전 역학을 다루었다. 뒤 샤틀레는 당대의 동시대인들보다 현대 상대성 이론과 더 일치하는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논했다. 그녀는 공간과 시간을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공존하는 물체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여기에는 "절대적" 장소는 이상화된 것이고 "상대적" 장소만이 유일하게 실제적이고 측정 가능한 양이라는 인정이 포함되었다. 뒤 샤틀레는 또한 뉴턴의 운동 법칙과 지구에서의 작용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제시했다.

뒤 샤틀레는 성경 전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저술했다. 그녀의 창세기에 대한 언급을 종합한 내용은 1967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라 O. 웨이드가 그의 저서 『볼테르와 뒤 샤틀레 부인: 시레에서의 지적 활동에 관한 에세이』에서 영어로 출판되었으며, 그녀의 완전한 노트는 2011년 베르트람 유진 슈바르츠바흐가 편집하고 주석을 달아 프랑스어 원본으로 출판되었다.

뒤 샤틀레 부인은 자유로운 각색으로 벌들의 우화를 번역했다. 그녀는 또한 광학, 합리 언어학, 그리고 자유 의지의 본질에 관한 저술을 했다.

4. 후세에 끼친 영향

에밀리 뒤 샤틀레의 분석과 연구는 이후 과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업적이 된다. 에밀리가 확립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양적 개념인 mv^2은 19세기에 이르러 패러데이와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모든 에너지의 보존 가능성 개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채택되었다.[43] 이는 아인슈타인E = mc^2 공식의 '제곱'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에밀리와 볼테르가 시레이 성에서 보여주었던 전통을 타파하는 독자적인 삶의 방식에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불합리한 관습과 전통에 의문을 품었고, 다음 세대 계몽주의 사상의 선조 격 역할을 했다.

그녀의 첫 번째 독립 저작인 뒤 샤틀레 부인의 『벌의 우화』 번역 서문에서, 그녀는 여성 교육, 특히 프랑스 콜레주에서 젊은 남성들에게 제공되는 수준의 강력한 중등 교육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녀는 여성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사회가 여성들이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저명해지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했다.[43]

뒤 샤틀레는 뉴턴의 역사적인 저작을 시의적절하고 정확하며 통찰력 있는 프랑스어 번역으로 만들어 접근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과학적 기여를 했으며, 그녀 자신의 독창적인 에너지 보존 개념을 더했다.

소행성과 금성의 크레이터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녀는 세 편의 연극의 주제가 되었다: 카렌 자카리아스의 ''빛의 유산''(Legacy of Light), 로렌 건더슨의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부인이 오늘 밤 그녀의 삶을 변호하다''(Émilie: La Marquise Du Châtelet Defends Her Life Tonight), 그리고 Jyl Bonaguro의 ''우라니아: 에밀리 뒤 샤틀레의 삶''(Urania: the Life of Émilie du Châtelet). 카이야 사리아호의 오페라 ''에밀리''(Émilie)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것이다.

뒤 샤틀레는 종종 분할기 한 쌍이나 기하학적 계산 페이지를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수학적 도상으로 초상화에 묘사된다. 19세기 초, 유명한 여성에 관한 프랑스 팸플릿(''Femmes célèbres'')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마도 외전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인이 나무 분할기를 인형으로 꾸며 그녀에게 인형을 만들어주었으나, 뒤 샤틀레는 분할기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원래 목적을 직감하여 그것들로 원을 그렸다고 한다.

2006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에밀리 뒤 샤틀레 연구소(Institut Émilie du Châtelet)는 "여성, 성, 젠더에 대한 연구의 발전과 확산을" 지원한다.

2016년부터 프랑스 물리학회(la Société Française de Physique)는 물리학 분야의 탁월함을 위해 물리학자 또는 연구팀에게 에밀리 뒤 샤틀레 상을 수여해왔다.

듀크 대학교는 또한 "대학원생 또는 젊은 학자가 물리학 철학에 대해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 연구"를 위해 매년 뒤 샤틀레 물리학 철학 상을 수여한다.

2021년 12월 17일, 구글 두들은 뒤 샤틀레를 기렸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다큐 드라마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아이디어''(Einstein's Big Idea)에서 배우 엘렌 드 푸게롤이 연기했다. 1970년대까지는 과학적 공헌보다는 볼테르와의 관계에 주목받았다.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나타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² (여기서 c광속을 나타낸다)에 대해, 그녀가 150년 전에 발견한 관계식 E \sim mv^2 를 관련짓는 논의도 보인다.[53][54] 물론 그녀의 식은 고전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의 올바른 추정치이지만 (계수 1/2는 제외), 물리학적으로는 아인슈타인에 의한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55]

5. 일화


  • 아버지가 재정적으로 지원을 충분히 해줄 수 없게 되자, 책을 사기 위해 도박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녀가 도박에 능했던 이유는 해석기하학에 능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41][42]
  • 뒤 샤틀레 부인은 폰텐블로 궁전에서 열린 도박판에서 하룻밤 만에 당시 상당한 금액인 84000FRF을 잃었는데, 일부는 사기꾼에게 빌린 돈이었다.[41][42] 빚을 갚기 위해 현대의 파생 상품과 유사한 독창적인 금융 방식을 고안했는데, 세금 징수원에게 미래 소득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해 비교적 적은 금액을 지불하고(그들은 국왕을 위해 징수한 세금의 일부를 보관할 수 있었다), 법정 도박꾼들에게 이 미래 소득의 일부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41]
  • 여가 시간에는 미적분 실력을 연마하여 어렵고 긴 계산을 쉽게 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 자신의 글에서 "내가 왕이라면, 여자에게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갖게 해줄 텐데. 특히 이성에 관련된 모든 권리를."라고 밝히며 당시 여성의 교육 부족을 지적했다.
  • 베르누이, 프리드리히 대왕, 볼링브룩(Viscount Bolingbroke영어, 영국 작가이자 정치인), 조너선 스위프트와 같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생각을 교환했다.
  • 보수적인 모국 프랑스 아카데미의 정회원은 되지 못했으나, 이탈리아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 볼테르는 그녀의 죽음을 알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슬퍼했으며, "나의 반쪽을 잃었노라!"라고 외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 대화할 때 말이 매우 빠르기로 유명했지만, 연구 이론에 관해서는 훨씬 여유를 갖고 조리 있게 말했다.
  •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각본을 쓰고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오페라에 직접 출연하여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기도 하고, 대본 없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 소행성과 금성의 크레이터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뒤 샤틀레는 종종 분할기 한 쌍이나 기하학적 계산 페이지를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수학적 도상으로 초상화에 묘사된다. 19세기 초, 유명한 여성에 관한 프랑스 팸플릿(''Femmes célèbres'')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마도 외전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인이 나무 분할기를 인형으로 꾸며 그녀에게 인형을 만들어주었으나 뒤 샤틀레는 분할기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원래 목적을 직감하여 그것들로 원을 그렸다.
  • 2006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에밀리 뒤 샤틀레 연구소(Institut Émilie du Châtelet)는 "여성, 성, 젠더에 대한 연구의 발전과 확산을" 지원한다.
  • 2016년부터 프랑스 물리학회(la Société Française de Physique)는 물리학 분야의 탁월함을 위해 물리학자 또는 연구팀에게 에밀리 뒤 샤틀레 상을 수여해왔다.
  • 듀크 대학교는 또한 "대학원생 또는 젊은 학자가 물리학 철학에 대해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 연구"를 위해 매년 뒤 샤틀레 물리학 철학 상을 수여한다.
  • 2021년 12월 17일, 구글 두들은 뒤 샤틀레를 기렸다.
  • 에밀리 뒤 샤틀레는 다큐 드라마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아이디어''(Einstein's Big Idea)에서 배우 엘렌 드 푸게롤이 연기했다.

6. 저서

wikitext


  • 1738년, 《뉴턴 철학의 기본 요소들(E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프랑스어)》
  • 1739년, 《불의 성질에 관하여(Dissertation sur la nature du feu프랑스어)》 (2판: 1744년)
  • 1740년, 《물리학 입문(Institutions de physique프랑스어)》 (2판: 1742년)
  • 1756년, 《뒤 샤틀레 부인에 의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es mathematique de la philosophie naturelle par feue Madame la Marquise du Chatelet프랑스어)》 (2판: 1759년)
  • 《창세기에 대한 검토(Examen de la Genese프랑스어)》
  • 《신약성서에 대한 검토(Examen des Livres du Nouveau Testament프랑스어)》
  • 1779년, 《행복론(Discours sur le bonheur프랑스어)》: 에피쿠로스주의적 성격이 있는 이 책은 그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행복의 방법론을 논한 최초의 책으로 6번 재발행된 베스트셀러였다. 1746년에 쓰여졌고 1779년에 출판되었다.


'''과학 저술'''

  • 《불의 본질과 전파에 관한 논문》(1판: 1739년, 2판: 1744년)
  • 《물리학 입문》(1판: 1740년, 2판: 1742년)
  • 《고 마르키 드 샤틀레 부인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판: 1756년, 2판: 1759년)


'''기타 저술'''

  • 《창세기에 대한 고찰》
  • 《신약성서에 대한 고찰》
  • 《행복론》

참조

[1] 논문 Review of Candles in the Dark: Émilie du Châtelet and Mary Somerville 2013
[2] 문서 La vie privée du roi de Prusse von Voltaire, p. 3 https://resolver.kb.[...]
[3] 문서 Zinsser, pp. 19, 21, 22
[4] 문서 Zinsser, pp. 16–17; for a quite different account, see Bodanis, pp. 131–134
[5] 서적 Émilie du Châtelet http://plato.stanfor[...]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4-01-01
[6] 문서 Zinsser
[7] 문서 Zinsser (2006: 26–29)
[8] 문서 Hamel (1910: 5)
[9] 문서 The ''Lomont'' suffix indicates the branch of the ''du Chastellet'' family; another such branch was the ''du Chastellet-Clemont''
[10] 서적 Patrons of enlightenment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1] 문서 Zinsser, pp. 39 and 58
[12] 문서 Zinsser, pp. 40 and 93
[13] 문서 Smith, D. W. "Nouveaux regards sur la brève rencontre entre Mme Du Châtelet et Saint-Lambert." In ''The Enterprise of Enlightenment. A Tribute to David Williams from his friends''. Terry Pratt and David McCallam (eds.). Oxford, Berne, etc.: Peter Lang, 2004, pp. 329-343. See also Anne Soprani, ed., Mme Du Châtelet, Lettres d'amour au marquis de Saint-Lambert, Paris, 1997
[14] 웹사이트 Émilie, Marquise du Châtelet-Laumont (1706-1749) from OSU Dept. of Philosophy (archived) http://oregonstate.e[...]
[15] 서적 Forgotten Women Octopus Books
[16] 서적 Women's History as Scientists: A Guide to the Debates ABC-CLIO
[17] 웹사이트 Voltaire http://plato.stanfo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18] 서적 The Philosophers' Quarrel: Rousseau, Hume, and the Limits of Human Understanding Yale University Press
[19] 웹사이트 Émilie du Châtelet http://plato.stanfo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4-06-07
[20] 웹사이트 Emilie Du Châtelet - http://www.projectco[...] 2016-03-31
[21] 서적 Emilie Du Chatelet: Daring Genius of the Enlightenment Penguin
[22] AV media Einstein's Big Idea WGBH Boston 2005
[23] 문서 La vie privée du roi de Prusse by Voltaire, p. 58
[24] 문서 Zinsser (2006: 278)
[25] 문서 quoted in Ruth Hagengruber, "Emilie du Châtelet Between Leibniz and Newton: The Transformation of Metaphysics", in ''Emilie du Châtelet between Leibniz and Newton'' (ed. Ruth Hagengruber), Springer. p. 12
[26] 문서 Hagengruber (2011: 8–12,24,53,54)
[27] 서적 Women in Their Element: Selected Women's Contributions To The Periodic System World Scientific 2019
[28] 서적 Institutions de physique chez Prault fils
[29] 웹사이트 Du Châtelet (1706-1749) https://projectvox.o[...] 2023-10-20
[30] 서적 Extraordinary Women in Science & Medicine: Four Centuries of Achievement The Grolier Club
[31] 문서 Hagengruber, Ruth: "Émilie du Châtelet between Leibniz and Newton: The Transformation of Metaphysics", in: Hagengruber, Ruth 2011: ''Émilie du Châtelet between Leibniz and Newton'', Springer 1-59, pp. 1 and 23, footnote 4 and 113
[32] 서적 Immanuel Kant: observations on the feeling of the beautiful and sublime and other writings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33] 논문 The Leibnizian-Newtonian Debates: Natural Philosophy and Social Psychology https://www.cambridg[...] 1973-12
[34] 문서 Hagengruber (2011)
[35] 문서 Arianrhod (2012)
[36] 서적 Essential Calculus Early Transcendental Functions Richard Stratton
[37] 논문 Translating Newton's 'Principia': The Marquise du Châtelet's Revisions and Additions for a French Audience https://www.jstor.or[...] 2001
[38] 서적 Selected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Writings http://dx.doi.org/10[...]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39] 논문 La dame d'esprit, a biography of the marquise du chatelet by Judith P. Zinsser http://dx.doi.org/10[...] 2007-07
[40] 논문 Émilie Du Châtelet on Illusions https://www.cambridg[...] 2021
[41] 문서 Bodanis
[42] 문서 Hamel (1910: 286)
[43] 문서 Zinsser, pp. 25–26
[44] 웹사이트 Urania, Historical Play by Local Artist, Debuts with Free Gallery Shows https://www.dnainfo.[...]
[45] 웹사이트 Libretto of Émilie http://www.opera-lyo[...]
[46] 문서 Zinsser, p. 13
[47] 웹사이트 Accueil https://www.institut[...] 2023-02-23
[48] 웹사이트 Du Châtelet Prize {{!}} Department of Philosophy https://philosophy.d[...] 2020-09-01
[49] 웹사이트 Google Doodle honors French mathematician Émilie du Châtelet https://www.cnet.com[...] 2021-12-17
[50] 서적 An Eighteenth Century Marquise: A Study of Émilie Du Châtelet and Her Times. Stanley Paul and Company 1910
[51] 서적 Passionate Minds: The Great Love Affair of the Enlightenment Crown 2006-10-10
[52] 문서 Hamel (1910) p 370
[53] 서적 La Dame d'Esprit: A Biography of Marquise Du Chatelet Viking 2006
[54] 웹사이트 Ancestors of E=mc² http://www.pbs.org/w[...] Public Broadcast Service, Arlington, VA
[55] 서적 Science and Technology in World History: An Introducti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6
[56] 문서 로크는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런던의 지식인 모임에 영입될 수 있었고,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비호와 격려 속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57] 문서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의 제자이다. 베르누이는 수학자 [[오일러]]의 스승이기도 하다.
[58] 문서 당시에는 나이 들어 출산했을 경우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그 시대의 의사들은 위생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59] 문서 정확히는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는 :E = {1 \over 2}mv^2인데 계수 {1 \over 2}은 제외하고
[60] 문서 "나는 실험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내가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테르에게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61] 문서 에밀리가 1736년 볼테르를 도와 뉴턴에 관한 책을 집필할 때 이 계산을 도맡아 했다.
[62] 문서 30번 정리. 70번 명제: 만일에 구형 물체의 그 구면상의 모든 점들을 향하여, 그것들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한다면 그 면의 내부에 놓인 한 입자는 그것들에 의하여 전혀 끌리지 않을 것이다.
31번 정리. 71번 명제: 이전과 같은 것을 가정하면 구면 밖에 놓인 한 입자는 구의 중심으로 향하여 그 중심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린다.
32번 정리. 72번 명제: 만일에 구의 각 점을 향하여 그 점들로부터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하고, 또한 구의 밀도 및 구의 지름과 그 중심서부터 입자의 거리와의 비가 함께 주어진다면 입자가 끌리는 그 힘은 구의 반지름에 비례한다.
33번 정리. 73번 명제: 만일에 주어진 하나의 구의 각점으로 향하여 그 점들로부터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되면 그 구의 내부에 놓여진 입자는 중심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힘으로 끌릴 것이다.
34번 정리. 74번 명제: 이와 같은 일들이 가정된다고 하면 구의 밖에 자리 잡은 한 입자는 중심서부터의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써 끌릴 것이다.
35번 정리. 75번 명제: 만일에 어떤 주어진 하나의 구의 각 점을 향하여 그 점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비로 감소하는 같은 구심력이 작용된다면 또하나의 닮은 구는 그것에 의하여 중심(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릴 것이다.

[63] 문서 조경철 옮김, 프린시피아 1권, p.349~357
[64] 문서 만일에 어떤 구심력이 작용되는 물체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며, 딴 한 물체가 한 직선상을 상승 또는 하강하며, 또한 그 속도들이 고도가 같은 경우에는 서로 같다고 하면, 그 속도들은, 다른 모든 같은 고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가 같을 것이다.
[65] 문서 같은 책, p.23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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