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히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히도는 멕시코에서 식민지 시대부터 존재해 온 원주민 공동체 토지 소유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공동체 토지 소유를 보장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19세기 멕시코 독립 이후 자유주의 개혁 과정에서 폐지될 위기를 겪었지만, 이후 멕시코 혁명과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의 토지 개혁을 통해 에히도 제도가 도입되어 멕시코 토지 개혁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1992년에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일환으로 에히도 토지의 사유화가 허용되었고, 이는 치아파스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에히도 시스템은 생산성, 부패, 생태적 파괴, 농촌 빈곤 등 다양한 문제로 비판받기도 했으며, 1992년 이후의 변화는 멕시코의 농업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멕시코의 농업 - 커피나무
커피나무는 꼭두서니과 커피속의 상록 활엽 관목으로,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는 주요 품종이며, 아프리카 동아프리카가 원산지로 남북회귀선 사이 여러 나라에서 재배되지만 기후 변화와 산림 벌채로 야생종이 멸종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 멕시코의 경제 - 멕시코 증권거래소
멕시코 증권거래소는 1894년 국립 증권거래소로 시작하여 멕시코의 주요 증권 거래소로 발전했으며,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을 거래하고 IPC를 포함한 다양한 주가 지수를 산출한다. - 멕시코의 경제 - 멕시코 페소
멕시코 페소는 스페인 아메리카의 은화에서 기원하여 1993년 화폐 개혁을 거친 멕시코의 통화로, 동전과 지폐로 구성되어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디자인과 위조 방지 기술이 적용되었다.
에히도 | |
---|---|
개요 | |
유형 | 공동 농업 토지 |
국가 | 멕시코 |
관련 법률 | 멕시코 헌법 27조 |
역사 | |
기원 | 아즈텍의 칼풀리 |
제도화 | 멕시코 혁명 이후 |
주요 목적 | 토지 재분배 및 농민 지원 |
특징 | |
토지 소유 | 공동 소유 (개인 경작 가능) |
운영 방식 | 에히도 총회에서 결정 |
구성원 | 에히도 권리 소유자 (ejidatarios) |
정부 지원 | 종종 정부 지원 및 혜택 제공 |
현황 | |
규모 | 멕시코 토지의 상당 부분 차지 |
역할 | 농촌 경제 및 사회에 중요한 역할 |
논란 | 사유화 및 토지 이용 변화 논쟁 |
관련 기관 | |
기관명 | 국가 농업 등록소 |
참고 자료 | |
도서 | The End of Agrarian Reform in Mexico: Reforming Ejido Land Tenure and Rural Development Ejido Organizations in Mexico's Agricultural Sector: The Potential and Constraints of Economic Democratization |
2. 식민지 시대의 원주민 공동체 토지
아즈텍 제국 정복(1519-1521) 이후에도 멕시코 중부에서는 원주민 공동체의 토지 소유권이 대체로 온전하게 유지되었다.[5] 스페인 왕실은 원주민 공동체가 통제하는 토지, 즉 멕시코의 푸도 레갈/fundo legales을 보장했다.[5][20] 또한 일반 인디언 법원을 설립하여 개인 원주민과 원주민 공동체가 스페인의 침해에 맞서 권리를 방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5][20]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 공동체 토지에 자신들만의 용어를 적용하여 식민지 시대 초기에 이를 에히도(ejido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21] 에히도는 원래 스페인에서 마을의 공유지를 가리키는 말로, 라틴어의 exitus(출발, 출구)에서 유래되었으며, 집락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9]
2. 1. 아즈텍 제국과 스페인의 통치
아즈텍 제국 정복(1519-1521) 이후에도 멕시코 중부에서는 원주민 공동체의 토지 소유권이 대체로 온전하게 유지되었다.[5] 스페인 왕실은 원주민 공동체가 통제하는 토지, 즉 멕시코의 푸도 레갈/fundo legales을 보장했다.[5] 또한 일반 인디언 법원을 설립하여 개인 원주민과 원주민 공동체가 스페인의 침해에 맞서 권리를 방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5]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 공동체 토지에 자신들만의 용어를 적용하여 식민지 시대 초기에 이를 에히도(ejido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 에히도는 원래 스페인에서 마을의 공유지를 가리키는 말로, 라틴어의 exitus(출발, 출구)에서 유래되었으며, 집락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9]3. 19세기: 독립과 자유주의 개혁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로운 주권 국가는 원주민과 토착 공동체에 대한 왕실의 보호를 폐지하고 그들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었다.[7] 독립의 결과 중 하나는 일반 원주민 법원(인디오 종합 재판소)의 소멸이었다.[7][22] 그러나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대규모 토지 소유지가 생산 확대를 위해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착 공동체는 대체로 토지 소유를 유지했다.[7][22]
19세기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에게 원주민과 토착 마을이 멕시코 국가로부터 계속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인디언 문제"로 여겨졌고, 공동 토지 소유의 해체는 인디언을 멕시코 국가에 통합하는 핵심으로 인식되었다.[7][22] 185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토착 공동체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기업 토지의 몰수 및 매각을 포함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7][22] 자유주의 개혁은 먼저 레르도 법을 시행하여 기업 토지 소유를 종식시키도록 요구한 다음 그 법을 1857년 헌법에 포함시켰다.[7][22] 따라서 에히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많은 에히도가 계속 생존했다.[7] 멕시코는 내분, 내전, 프랑스의 외세 침략에 빠졌고, 1867년 프랑스가 축출되고 자유주의적 통제하에 멕시코 공화국이 재건된 후에야 토지 개혁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7][22] 1876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자유주의 장군 포르피리오 디아스 치하에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즉 "질서와 진보"를 촉진하는 정책은 대규모 아시엔다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많은 마을이 토지를 잃어 소작농이 토지 없이 남게 되었다.[7][22]
3. 1. 멕시코 독립과 원주민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로운 주권 국가는 원주민과 토착 공동체에 대한 왕실의 보호를 폐지하고 그들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었다.[7] 독립의 결과 중 하나는 일반 원주민 법원(인디오 종합 재판소)의 소멸이었다.[7][22] 그러나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대규모 토지 소유지가 생산 확대를 위해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착 공동체는 대체로 토지 소유를 유지했다.[7][22]19세기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에게 원주민과 토착 마을이 멕시코 국가로부터 계속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인디언 문제"로 여겨졌고, 공동 토지 소유의 해체는 인디언을 멕시코 국가에 통합하는 핵심으로 인식되었다.[7][22] 185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토착 공동체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기업 토지의 몰수 및 매각을 포함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7][22] 자유주의 개혁은 먼저 레르도 법을 시행하여 기업 토지 소유를 종식시키도록 요구한 다음 그 법을 1857년 헌법에 포함시켰다.[7][22] 따라서 에히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많은 에히도가 계속 생존했다.[7] 멕시코는 내분, 내전, 프랑스의 외세 침략에 빠졌고, 1867년 프랑스가 축출되고 자유주의적 통제하에 멕시코 공화국이 재건된 후에야 토지 개혁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7][22] 1876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자유주의 장군 포르피리오 디아스 치하에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즉 "질서와 진보"를 촉진하는 정책은 대규모 아시엔다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많은 마을이 토지를 잃어 소작농이 토지 없이 남게 되었다.[7][22]
3. 2. 자유주의 개혁과 '인디언 문제'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원주민과 토착 공동체에 대한 왕실의 보호를 폐지하고,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었다.[7] 독립의 결과 일반 원주민 법원이 소멸되었다.[7] 19세기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에게 원주민과 토착 마을이 멕시코 국가로부터 분리된 것은 "인디언 문제"로 여겨졌고, 공동 토지 소유의 해체는 인디언을 멕시코 국가에 통합하는 핵심으로 인식되었다.[7]1855년 집권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토착 공동체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기업 토지의 몰수 및 매각을 추진했다.[7] 이들은 먼저 레르도 법을 시행하여 기업 토지 소유를 종식시키도록 요구한 다음, 그 법을 1857년 헌법에 포함시켰다.[7] 이로 인해 에히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많은 에히도가 계속 생존했다.[7][22]
멕시코 내분, 내전, 프랑스의 외세 침략으로 인해 토지 개혁은 1867년 프랑스 축출 및 자유주의 통제하의 멕시코 공화국 재건 후에야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7] 1876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즉 "질서와 진보"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아시엔다가 확장되고 많은 마을이 토지를 잃었다.
3. 3.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대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보호를 철폐했다. 독립 초기에는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침체로 인해 토착 공동체는 토지 소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7]19세기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은 원주민과 토착 마을의 분리를 "인디언 문제"로 간주하고, 공동 토지 소유 해체를 멕시코 국가 통합의 핵심으로 보았다.[7] 1855년 집권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레르도 법을 시행하여 기업 토지 소유를 종식시키고, 이를 1857년 헌법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해 에히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많은 에히도가 존속했다.[7][22]
이후 멕시코는 내전과 프랑스의 침략을 겪었고, 1867년 프랑스 축출 후 자유주의 통제하에 멕시코 공화국이 재건되면서 토지 개혁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질서와 진보" 정책[7]을 추진하여 대규모 아시엔다가 확장되었고, 많은 마을이 토지를 잃고 농민들은 토지 없는 소작농이 되었다.[7]
4. 20세기: 멕시코 혁명과 에히도
멕시코 혁명에 참여한 많은 농민들은 빼앗긴 토지가 회복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세력 하에 있던 모렐로스 주의 농민들은 부유한 지주 출신인 프란시스코 마데로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그리고 반동적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에 반대하여 싸웠다.[23] 1917년 새로운 헌법에는 정부가 사유 재산을 징용할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농민들은 헌법 제27조에 의해 거대한 아시엔다가 해체되고, 농민 공동체에 토지가 반환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카란사 대통령은 아시엔다 수용에 저항했고, 실제로 많은 토지를 혁명파에 의해 점령당했던 지주에게 반환했다.[8]
1934년에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규모 토지 재분배가 시작되었다. 멕시코의 토지 개혁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에히도제가 도입되었다.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서 토지 개혁은 "전면적이고, 신속하며, 어떤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혁신적이었다." 그는 상업적 농장의 수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집단적인 에히도(종래에는 드문 단체였다)를 장려했다.[8][23]
에히도 설립의 전형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 부유한 지주로부터 토지를 임차한 소작농들이 연방 정부에 대해 에히도 설립을 청구한다.
# 연방 정부가 지주와 상담한다.
# 정부가 에히도 설립을 승인한 경우, 토지는 지주로부터 매수된다.
# 에히도가 설립되면, 청구자들은 에히도 구성원(에히다타리오)으로서 경작·사용권을 얻는다.
에히도 구성원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으며, 할당된 구획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된다. 2년을 초과하여 토지를 사용하지 않는 일이 없는 한 무기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권리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8]
통계에 따르면, 1930년에 에히도 수는 4,189개, 면적 834만 헥타르, 구성원 53만 명이었으나, 1960년에는 에히도 수 18,699개, 면적 4,449만 헥타르, 152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할당지가 좁고 불량지가 많아, 구성원의 대부분은 영세농·빈농이다.[24]
4. 1. 멕시코 혁명과 농민 운동
멕시코 혁명 당시 많은 농민들은 마을의 토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혁명에 참여했다.[8] 특히 모렐로스 주의 농민들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지도 아래,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등과 같은 부유한 지주 출신 권력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했다.[8][23]1917년, 멕시코 헌법이 제정되면서 정부의 사유 재산 수용 권한이 포함되었고, 많은 농민들은 헌법 제27조를 통해 대규모 농장(아시엔다)이 해체되고 농민 공동체에 토지가 반환될 것을 기대했다.[8][23] 그러나 카란사 대통령은 농장 수용에 반대하며 혁명군이 점유했던 많은 농장을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했다.[8]
1934년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 취임 이후에야 대규모 토지 분배가 시작되었다. 카르데나스 정부는 멕시코의 토지 개혁의 일환으로 에히도 제도를 도입, 집단 에히도를 장려하여 대규모 상업 농장의 수용을 정당화했다.[8][23]
에히도 설립 절차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 토지가 없는 농부들이 연방 정부에 에히도 설립을 청원한다.
# 연방 정부는 지주와 협의를 거친다.
# 정부가 에히도 설립을 승인하면 토지를 수용한다.
# 에히도가 설립되면 청원자들은 '에히다타리오'로 지정되어 특정 경작/사용 권한을 갖는다.
에히다타리오는 토지를 소유하지는 않지만, 2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할당된 토지를 무기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권리를 자녀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8]
통계에 따르면, 에히도 수는 1930년 4,189개에서 1960년 18,699개로, 면적은 834만 헥타르에서 4,449만 헥타르로, 구성원 수는 53만 명에서 152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할당지가 좁고 불량지가 많아 구성원 대부분은 영세농이나 빈농으로 남아있었다.[24]
4. 2. 카르데나스 정부의 토지 개혁
멕시코 혁명에 참여한 많은 농민들은 마을의 토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지도 아래 모렐로스 주의 농민들은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8] 1917년, 사유 자원을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많은 농민들은 헌법 제27조가 대규모 농장(아시엔다)을 해체하고 농민 공동체에 토지를 돌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카란사는 농장의 수용에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실제로 혁명가들이 점유했던 많은 농장을 소유주에게 반환했다.[8]라사로 카르데나스가 1934년 대통령이 되면서 대규모 토지 분배가 시작되었다. '에히도' 제도는 멕시코의 토지 개혁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도입되었다. 카르데나스 치하에서 토지 개혁은 "광범위하고, 신속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구조적으로 혁신적이었다... 그는 대규모 상업 농장의 수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집단 에히도(이전에는 드문 제도)를 장려했다."[8][23]
에히도를 설립하는 일반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 부유한 지주로부터 토지를 임대했던 토지 없는 농부들이 그들의 일반적인 지역에 에히도 설립을 위해 연방 정부에 청원한다.
# 연방 정부는 지주와 협의한다.
# 정부가 에히도를 승인하면 토지는 지주로부터 수용된다.
# 에히도가 설립되고 최초 청원자들이 특정 경작/사용 권한을 가진 '에히다타리오'로 지정된다.
에히다타리오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지만 2년 이상 토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할당된 토지를 무기한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권리를 자녀에게 양도할 수 있다.[8]
통계에 따르면, 1930년에 에히도 수는 4,189개, 면적 834만 헥타르, 구성원 53만 명이었으나, 1960년에는 에히도 수 18,699개, 면적 4,449만 헥타르, 152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할당지가 좁고 불량지가 많아, 구성원의 대부분은 영세농·빈농이다.[24]
4. 3. 에히도 설립 절차
멕시코 혁명에 참여한 많은 농민들은 빼앗긴 토지가 회복되기를 기대했다.[23] 특히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세력 하에 있던 모렐로스 주의 농민들은 부유한 지주 출신인 프란시스코 마데로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그리고 반동적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에 반대하여 싸웠다.[23] 1917년 새로운 헌법에는 정부가 사유 재산을 징용할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다.[23] 많은 농민들은 헌법 제27조에 의해 거대한 아시엔다가 해체되고, 농민 공동체에 토지가 반환되기를 기대했다.[8] 그러나 카란사 대통령은 아시엔다 수용에 저항했고, 실제로 많은 토지를 혁명파에 의해 점령당했던 지주에게 반환했다.[23]1934년에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규모 토지 재분배가 시작되었다.[23] 멕시코의 토지 개혁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에히도제가 도입되었다.[23]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서 토지 개혁은 "전면적이고, 신속하며, 어떤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혁신적이었다."[23] 그는 상업적 농장의 수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집단적인 에히도(종래에는 드문 단체였다)를 장려했다.[8]
에히도 설립의 전형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23]
# 부유한 지주로부터 토지를 임차한 소작농들이 연방 정부에 대해 에히도 설립을 청구한다.[23]
# 연방 정부가 지주와 상담한다.[23]
# 정부가 에히도 설립을 승인한 경우, 토지는 지주로부터 매수된다.[23]
# 에히도가 설립되면, 청구자들은 에히도 구성원(ejidatarios)으로서 경작·사용권을 얻는다.[23]
에히다타리오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지만, 할당된 구획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된다.[23] 2년을 초과하여 토지를 사용하지 않는 일이 없는 한 무기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권리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23]
통계에 따르면, 1930년에 에히도 수는 4,189개, 면적 834만 헥타르, 구성원 53만 명이었으나, 1960년에는 에히도 수 18,699개, 면적 4,449만 헥타르, 152만 명으로 증가했다.[24] 그러나 할당지가 좁고 불량지가 많아, 구성원의 대부분은 영세농·빈농이다.[24]
5. 에히도 제도에 대한 비판과 옹호
에히도 시스템의 반대론자들은 에히도 농민들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주요 기관인 국립 농업 신용 은행(Banrural) 내의 만연한 부패, 에히도 토지의 불법 판매 및 양도, 생태적 파괴,[9] 그리고 낮은 생산성을 이 시스템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로 지적했다. 지지자들은 카르데나스 행정부 이후 모든 행정부가 에히도에 무관심하거나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에히도에 할당된 토지가 종종 사유지보다 품질이 낮고 본질적으로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주장에 반박했다. 또한, 대부분의 농업 연구와 지원은 대규모 상업 기업에 편향되어 있었다. Banrural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정치인들은 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생산성과 관계없이 자급자족 생산은 많은 소작농들에게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
에히도 시스템 옹호론자들은 카르데나스 행정부 이후 모든 행정부가 에히도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고, 에히도에 할당된 토지가 종종 사유지보다 품질이 낮아 본질적으로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적한다.[9] 또한, 대부분의 농업 연구와 지원은 대규모 상업 기업에 편향되어 있었다.[9] 국립 농업 신용 은행(Banrural)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정치인들은 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생산성과 관계없이 자급자족 생산은 많은 소작농들에게 중요한 생존 전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9]
5. 1. 비판론
에히도 시스템의 반대론자들은 에히도 농민들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주요 기관인 국립 농업 신용 은행(Banrural) 내의 만연한 부패, 에히도 토지의 불법 판매 및 양도, 생태적 파괴,[9] 그리고 낮은 생산성을 이 시스템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로 지적했다. 지지자들은 카르데나스 행정부 이후 모든 행정부가 에히도에 무관심하거나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에히도에 할당된 토지가 종종 사유지보다 품질이 낮고 본질적으로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주장에 반박했다. 또한, 대부분의 농업 연구와 지원은 대규모 상업 기업에 편향되어 있었다. Banrural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정치인들은 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생산성과 관계없이 자급자족 생산은 많은 소작농들에게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9]5. 2. 옹호론
에히도 시스템 옹호론자들은 카르데나스 행정부 이후 모든 행정부가 에히도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고, 에히도에 할당된 토지가 종종 사유지보다 품질이 낮아 본질적으로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적한다.[9] 또한, 대부분의 농업 연구와 지원은 대규모 상업 기업에 편향되어 있었다.[9] 국립 농업 신용 은행(Banrural)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정치인들은 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생산성과 관계없이 자급자족 생산은 많은 소작농들에게 중요한 생존 전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9]6. 1992년 이후의 변화: 신자유주의 개혁과 NAFTA
1992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조정 및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 협상 진행의 일환으로 연방 의회를 통해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수정하여 에히도 토지의 사유화와 매각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0][25] 이는 치아파스 분쟁(사파티스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에히도 시스템의 변화는 에히도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대체로 실패했으며, 농촌 빈곤 심화, 강제 이주를 악화시키고, 옥수수 원산지인 멕시코가 옥수수 및 전체 식량 순 수입국으로 전환되는 데 기여한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11][26]
대다수의 소작농은 에히도 시스템의 일부였으며, 남성이 가구의 가장이었다. 에히도 토지에서는 일자리 기회가 제한되어 남성이 가정을 부양하고 토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했다.[12] 멕시코 이민자를 위한 미국의 일자리 기회는 농업 부문을 포함하여 에히도 토지의 추가 개발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에히도 토지에 살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농촌을 떠나는 경향이 더 컸다. 이러한 남성들이 가정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은 아내와 남편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계 의사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13]
6. 1. 헌법 개정과 에히도 사유화
1992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조정 및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 협상 진행의 일환으로 연방 의회를 통해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수정하여 에히도 토지의 사유화와 매각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0][25] 이는 치아파스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에히도 시스템의 변화는 에히도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대체로 실패했으며, 농촌 빈곤 심화, 강제 이주를 악화시키고, 옥수수 원산지인 멕시코가 옥수수 및 전체 식량 순 수입국으로 전환되는 데 기여한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11][26]대다수의 소작농은 에히도 시스템의 일부였으며, 남성이 가구의 가장이었다. 에히도 토지에서는 일자리 기회가 제한되어 남성이 가정을 부양하고 토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했다.[12] 멕시코 이민자를 위한 미국의 일자리 기회는 농업 부문을 포함하여 에히도 토지의 추가 개발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에히도 토지에 살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농촌을 떠나는 경향이 더 컸다. 이러한 남성들이 가정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은 아내와 남편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계 의사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13]
6. 2. 신자유주의 개혁의 영향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1992년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에히도와 기타 소규모 농업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고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 협상을 진행했다.[10] 그는 연방 의회를 통해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수정하여 에히도 토지의 사유화와 매각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0][25] 이는 치아파스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0][25]에히도 시스템의 변화는 에히도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대체로 실패했으며, 농촌 빈곤 심화, 강제 이주, 그리고 옥수수 재배가 시작된 멕시코가 옥수수 및 전체 식량 순 수입국으로 전환되는 데 기여한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11][26]
대다수의 소작농은 에히도 시스템의 일부였으며, 남성이 가구의 가장이었다. 에히도 토지에서는 일자리 기회가 제한되어 남성이 가정을 부양하고 토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했다. 멕시코 이민자를 위한 미국의 일자리 기회는 에히도 토지의 추가 개발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농업 부문을 포함했다.[12] 에히도 토지에 살지만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농촌을 떠나는 경향이 더 컸다. 이러한 남성들이 가정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은 아내와 남편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계 의사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13]
7. 한국과의 비교
7. 1. 한국의 농지 제도
7. 2. 멕시코와 한국의 농업 정책 비교
7. 3. 진보적 관점에서의 비교와 제언
참조
[1]
서적
Ejido
Fitzroy and Dearborn
[2]
서적
Ejidos
Charles Scribner's Sons
[3]
서적
Is Geography Destiny? Lessons from Latin Ameri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and the Limits of Agrarian Reform, 1915-1946
Lynne Rienner Publishers
[5]
서적
Justice by Insurance: The General Indian Court of Colonial Mexico and the Legal Aides of the Half-Rea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7]
서적
Ejidos
[8]
논문
Cardenismo: Juggernaut or Jalopy?
1994-02
[9]
웹사이트
In Mexico, Xalapa’s chronic water scarcity reflects a deepening national crisis
https://news.mongaba[...]
2024-01-23
[10]
간행물
Ejidos, Land Sales, and Free Trade in Northwest Mexico: Will Globalization Affect the Commons?
https://journals.ku.[...]
University of Kansas Libraries
2000
[11]
서적
The Food Wars
https://archive.org/[...]
Verso
2009
[12]
간행물
Male Transnational Migration and its Linkages to Land-Use Change in a Southern Campeche Ejido
http://muse.jhu.edu/[...]
2008
[13]
간행물
Migration and Gender: The Case of a Farming Ejido in Calakmul, Mexico
http://muse.jhu.edu/[...]
2009
[14]
서적
Ejido
Fitzroy and Dearborn
[15]
서적
Ejidos
Charles Scribner's Sons
[16]
서적
Is Geography Destiny? Lessons from Latin Ameri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17]
웹사이트
Registro Agrario Nacional
https://www.gob.mx/r[...]
Gobierno de México
[18]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and the Limits of Agrarian Reform, 1915-1946
Lynne Rienner Publishers
[19]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
서적
Justice by Insurance: The General Indian Court of Colonial Mexico and the Legal Aides of the Half-Rea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1]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22]
서적
Ejidos
[23]
논문
Cardenismo: Juggernaut or Jalopy?
1994-02
[24]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5]
간행물
Ejidos, Land Sales, and Free Trade in Northwest Mexico: Will Globalization Affect the Commons?
https://journals.ku.[...]
University of Kansas Libraries
2000
[26]
서적
The Food Wars
https://archive.org/[...]
Verso
2009
[27]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and the Limits of Agrarian Reform, 1915-1946
Lynne Rienner Publisher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