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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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엔다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중남미에서 나타난 대규모 토지 소유 형태를 가리킨다. 레콩키스타 시대에 기원하여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발전했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고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반봉건적 성격을 띠었다. 멕시코에서는 16세기 초부터 엘리트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인디오 공유지 흡수 등을 통해 전형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 아시엔다는 사탕수수, 밀, 가축 등을 생산하며 지역 및 국제 시장과 연결되었으며, 소유주인 아시엔다도는 멕시코 시티 등 도시에 거주하고 유급 관리자를 통해 농장을 운영했다. 칠레,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토지 개혁을 통해 해체되었으며, 필리핀에서는 "아시엔다" 시스템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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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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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시엔다의 기원과 발전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토지나 미개척지를 정복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복자들은 신대륙에서 왕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거나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매입하는 합법적인 방법에서부터 왕실 소유인 미개간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거나 원주민의 땅을 약탈하는 비합법적인 방법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땅을 획득했다. 이들의 소유지에는 자연스레 대규모 농장이 형성되었는데,[65] 이 농장들을 아시엔다라고 불렀다. 아시엔다는 처음엔 정복자들의 손에서 상인에게, 다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팔려나갔다.
아시엔다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커피나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등을 재배했고, 아시엔다에서 생산된 물품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고가에 팔려 나갔다. 이 때문에 아시엔다를 경영하면 누구나 거부가 될 수 있었고, 이는 대항해시대를 촉발시킨 한 힘이 되기도 했다.
16세기 말 이래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아시엔다는 더욱 발전하여 중남미의 대표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인디오 공유지의 흡수·합병, 교회 소유지의 구입, 공유지의 불하정책 등으로 중남미의 전형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3]
2. 1.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와 아시엔다
'아시엔다'(Hacienda)는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시대에 기원했다. 국왕은 군사적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귀족, 용병, 종교적 군사 기사단에 정복한 땅을 광대하게 하사할 수 있었다. 안달루시아의 '아시엔다'는 와인, 곡물, 기름, 가축을 생산했으며, 스페인 아메리카의 아시엔다보다 순수하게 농업적이었다.[3]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화 동안, '아시엔다' 모델은 신세계로 수출되어 '레콩키스타'의 패턴을 이어갔다. 스페인인들이 정복한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실은 인근에 작은 토지를 분배했고,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정복자들에게 하시엔다와 에스탄시아가 된 광대한 토지 보조금을 할당했다.[3] 하시엔다는 지역 또는 국제 시장과 연결된 영리 기업으로 발전했다. 농장들은 히스패닉 부문을 목표로 하는 시장 경제에 통합되었으며 사탕수수, 밀, 과일, 채소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육류, 모직, 가죽, 우지와 같은 동물성 제품을 생산했다.[4][5]
멕시코에서 이 시스템은 1529년 스페인 왕실이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오아하카 계곡의 후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현재의 모렐로스 주 전체와 광대한 엔코미엔다 노동 보조금도 포함되었다. 아시엔다는 엘리트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평범한 스페인인들도 왕실에 토지 보조금을 청원할 수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부분의 지역 경제가 광업에서 농업과 축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곳에서 새로운 아시엔다가 형성되었다.[6]
토지 분배는 엔코미엔다 시스템 하에서 원주민을 강제 노동에 할당하는 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7] 아시엔다는 엔코미엔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많은 스페인 엔코미엔다 소유자들은 토지를 획득하거나 강제 노동을 고용하기 위한 기업을 개발하여 두 가지를 수익성 있게 결합했다. 왕실이 엔코미엔다 노동을 없애려 하자 스페인인들은 사유지를 통합하고 영구적 또는 임시적으로 노동력을 모집했다. 결국 아시엔다는 식민지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존속된 안전한 사유 재산이 되었다.
정복 초기에 원주민 인구는 조밀했고, 스페인인이 토지를 사려고 해도 팔지 않았으며, 엔코미엔다 제도로 물납되는 농산물로 도시 시장은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스페인인이 시장용 농업을 해도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63] 그러나 16세기 중반에는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고 공납이 줄어 농산물 가격이 상승했다.[63] 스페인인은 원주민 마을에 늘어난 빈 땅을 사들여 도시나 광산용 농업, 목축 경영을 시작했다.[63] 이 시기에 스페인 당국이 식민자에게 토지를 은사지로 증여한 것이 아시엔다의 시작으로, 16세기 말에는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었다.[61] 아시엔다는 본래 "재산"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지가 상승과 함께 부동산으로서 "토지"의 의미로 바뀌었다.[61] 토지가 극단적으로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에 아시엔다의 면적은 대체로 넓었고, 최소 수백 헥타르, 과소 지역의 에스탄시아(목축 아시엔다)는 수만 헥타르 규모였다.[63]
18세기가 되자 원주민 인구는 회복 추세에 접어들었지만, 원주민을 노동력으로 확보하려는 아센다도들은 토지를 원주민에게 되팔지 않았다.[63] 아시엔다의 광대한 토지 바로 옆에 원주민의 토지는 세분화되고, 경영은 영세화되었다.[63] 이 대토지 경영과 영세 경영이 병존하는 구조는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농업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63]
2. 2.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식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토지나 미개척지를 정복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복자들은 신대륙에서 왕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거나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매입하는 합법적인 방법에서부터 왕실 소유인 미개간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거나 원주민의 땅을 약탈하는 비합법적인 방법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땅을 획득했다. 이들의 소유지에는 자연스레 대규모의 농장이 형성되었는데,[65] 이 농장들을 아시엔다라고 불렀다. 아시엔다는 처음엔 정복자들의 손에서 상인에게, 다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팔려나갔다.아시엔다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커피나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등을 재배했고, 아시엔다에서 생산된 물품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고가에 팔려 나갔다. 이 때문에 아시엔다를 경영하면 누구나 거부가 될 수 있었고, 이는 대항해시대를 촉발시킨 한 힘이 되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화 동안, ''아시엔다'' 모델은 신세계로 수출되어 레콩키스타의 패턴을 이어갔다. 스페인인들이 정복한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실은 인근에 작은 토지를 분배했고,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정복자들에게 하시엔다와 에스탄시아가 된 광대한 토지 보조금을 할당했다.[3] 하시엔다는 지역 또는 국제 시장과 연결된 영리 기업으로 개발되었다. 농장들은 히스패닉 부문을 목표로 하는 시장 경제에 통합되었으며 사탕수수, 밀, 과일과 채소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육류, 모직, 가죽, 우지와 같은 동물성 제품을 생산했다.[4][5]
멕시코의 이 시스템은 스페인 왕실이 1529년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오아하카 계곡의 후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 때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며, 여기에는 현재의 모렐로스 주 전체와 광대한 엔코미엔다 노동 보조금도 포함되었다. 아시엔다는 엘리트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평범한 스페인인들도 왕실에 토지 보조금을 청원할 수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부분의 지역 경제가 광업에서 농업과 축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아시엔다가 많은 곳에서 형성되었다.[6]
토지 분배는 엔코미엔다 시스템 하에서 원주민을 강제 노동에 할당하는 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7] 아시엔다는 엔코미엔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많은 스페인 엔코미엔다 소유자들은 토지를 획득하거나 강제 노동을 고용하기 위한 기업을 개발하여 두 가지를 수익성 있게 결합했다. 왕실이 엔코미엔다 노동을 없애려 하자 스페인인들은 사유지를 통합하고 영구적 또는 임시적으로 노동력을 모집했다. 결국 아시엔다는 식민지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존속된 안전한 사유 재산이 되었다.
정복 초기에 원주민의 인구는 조밀했고, 스페인인이 토지를 사려고 해도 팔지 않았으며, 엔코미엔다 제도로 물납되는 농산물로 도시 시장은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스페인인이 시장용 농업을 해도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63] 그러나 16세기 중반에는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하고, 공납이 줄어 농산품 가격이 상승했다.[63] 원주민의 마을에 늘어난 빈 땅을 스페인인이 사들여 도시나 광산용 농업, 목축 경영을 시작했다.[63] 이 시기에 스페인 당국이 식민자에게 토지를 은사지로 증여한 것이 아시엔다의 시작으로, 16세기 말에는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었다.[61] 아시엔다는 본래 "재산"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지가 상승과 함께 부동산으로서 "토지"의 의미로 바뀌었다.[61] 토지가 극단적으로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에 아시엔다의 면적은 대체로 넓었고, 최소 수백 헥타르, 과소 지역의 에스탄시아(목축 아시엔다)는 수만 헥타르 규모였다.[63]
18세기가 되자 원주민 인구는 회복 추세에 접어들었지만, 원주민을 노동력으로 확보하려는 아센다도들은 토지를 원주민에게 되팔지 않았다.[63] 이렇게 아시엔다의 광대한 토지 바로 옆에 원주민의 토지는 세분화되고, 경영은 영세화된다.[63] 이 대토지 경영과 영세 경영이 병존하는 구조는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농업까지 항존화되었다.[63]
2. 3. 19세기 이후의 발전
16세기 말 이래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아시엔다는 더욱 발전하여 중남미의 대표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인디오 공유지의 흡수·합병, 교회 소유지의 구입, 공유지의 불하정책 등으로 중남미의 전형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3]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화 동안, ''아시엔다'' 모델은 신세계로 수출되어 ''레콩키스타''의 패턴을 이어갔다. 스페인인들이 정복한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실은 인근에 작은 토지를 분배했고,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정복자들에게 하시엔다와 에스탄시아가 된 광대한 토지 보조금을 할당했다.[3] 하시엔다는 지역 또는 국제 시장과 연결된 영리 기업으로 개발되었다. 농장들은 히스패닉 부문을 목표로 하는 시장 경제에 통합되었으며 사탕수수, 밀, 과일과 채소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육류, 모직, 가죽, 우지와 같은 동물성 제품을 생산했다.[4][5]
멕시코의 이 시스템은 스페인 왕실이 1529년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오아하카 계곡의 후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 때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며, 여기에는 현재의 모렐로스 주 전체와 광대한 엔코미엔다 노동 보조금도 포함되었다. 아시엔다는 엘리트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평범한 스페인인들도 왕실에 토지 보조금을 청원할 수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부분의 지역 경제가 광업에서 농업과 축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아시엔다가 많은 곳에서 형성되었다.[6]
토지 분배는 엔코미엔다 시스템 하에서 원주민을 강제 노동에 할당하는 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7] 아시엔다는 엔코미엔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많은 스페인 엔코미엔다 소유자들은 토지를 획득하거나 강제 노동을 고용하기 위한 기업을 개발하여 두 가지를 수익성 있게 결합했다. 왕실이 엔코미엔다 노동을 없애려 하자 스페인인들은 사유지를 통합하고 영구적 또는 임시적으로 노동력을 모집했다. 결국 아시엔다는 식민지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존속된 안전한 사유 재산이 되었다.
3. 아시엔다의 경영과 노동력
아시엔다 농장은 자급자족경제를 지향했으며, 노동력은 주로 노예에 의존하는 등 반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시엔다가 발전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들여 판매하는 노예 무역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66]
16세기 말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아시엔다는 더욱 발전하여 중남미의 대표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인디오 공유지를 흡수·합병하고, 교회 소유지를 구입하며, 공유지를 불하하는 정책 등으로 중남미의 전형적인 토지 소유 형태가 되었다.
아시엔다의 노동력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 미타요스(강제 노역을 하는 원주민), 야나코나스(선대로부터 자식에게로 계승되는 예속된 직능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었다.[66] 이들은 농장 주인에게 짐승처럼 취급받기 일쑤였다.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 아시엔다 소유주는 '아시엔다도' 또는 '파트론'이라고 불렸다.
카리브해의 아시엔다는 주로 설탕 농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아프리카인의 노동과 노예에 의존했다.[12] 푸에르토리코에서는 1873년 3월 22일 노예 제도의 폐지로 이 시스템이 종료되었다.[13]
3. 1. 아시엔다의 경영 구조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 아시엔다의 소유주는 ''아시엔다도'' 또는 ''파트론''이라고 불렸다. 대규모 아시엔다 소유자들은 대부분 스페인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멕시코에서는 가장 부유한 소유자들이 멕시코 시티에 거주하며 가끔 아시엔다를 방문했다.[8] 농촌 영지의 현장 관리는 유급 관리자인 ''마요르도모''에게 맡겨졌는데, 이들은 고정된 고용 기간 동안 급여와 때로는 영지 수익의 일부를 받았다. 일부 관리자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 주변의 토지를 취득하기도 했다.[9]아시엔다의 노동력은 아시엔다의 유형과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멕시코 중부에서는 토착민 공동체에서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모집했다.[5] 영구 및 임시 아시엔다 직원들은 ''파트론''의 토지에서 일했으며, 지역 노동 감독관의 감독을 받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규모 경작자(''캄페시노'')가 아시엔다도에 속한 작은 토지를 경작했으며, 작물의 일부를 빚졌다.
가축 사육은 목축 아시엔다의 핵심이었으며, 멕시코 북부와 같이 토착 인구가 밀집되지 않은 지역에 대규모 아시엔다가 있었다. 콜럼버스 교환으로 스페인에서 수입된 가축은 생태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양은 과도한 방목으로 환경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11] ''바케로''와 ''가우초'' 등 말 탄 목장 일꾼들이 목축 아시엔다에서 일했다.
아시엔다가 광산을 포함하는 경우, ''파트론''은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멕시코 시티 근처의 예수회 ''아시엔다'' 산타 루시아는 특히 크고 수익성이 좋았으며, 멕시코의 아시엔다 시스템, 노동력, 토지 보유 시스템 및 멕시코의 더 큰 히스패닉 사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가톨릭 교회와 수도회, 특히 예수회는 방대한 ''아시엔다'' 소유지를 획득하거나 아시엔다도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아시엔다 소유자의 모기지 보유자로서 교회의 이해관계는 토지 소유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다. 멕시코 및 기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역사에서 대중은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으며, 독립 이후에는 교회의 아시엔다를 몰수하거나 제한했다.
카리브해의 아시엔다는 주로 설탕 농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아프리카인 노예 노동에 의존했다.[12] 푸에르토리코에서는 1873년 3월 22일 노예 제도의 폐지로 이 시스템이 종료되었다.[13]
아시엔다는 지주의 가부장적 지배에 의한 작은 사회를 형성하여 소작지와 지주 직영지로 나뉘었다.[61] 소작지는 고용 소작(콜로노, 잉킬리노, 와시푼게로), 분익 소작(야나코나, 아팔세로, 메디에로), 임대 소작(아렌다타리오)으로 구분되었고, 직영지에서는 농업 노동자(가냔, 페온, 아후에리노, 볼룬타리오) 등이 저임금 노동을 했다.[61]
개인 경영의 아시엔다의 경우, 지주의 대부분은 농장 내에 거주하지 않고 주요 도시나 외국에 거주하며, 농목장의 경영은 감리인(아드미니스트라돌)이나, 더 하위의 중간 감리인인 마요르도모에게 맡겨졌다.[64] 아시엔다 경영은 19세기 초의 독립 혁명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주의 개혁과 19세기 말의 자본주의 형성기를 거치면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두드러졌다.[61] 19세기 말 농민으로부터의 대규모 토지 수탈은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61] 멕시코에서는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서 비로소 실질적인 토지 분배가 실시되었다.[61] 소득 격차와 빈곤의 큰 요인이었던 이러한 농지의 개혁이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61]
3. 2. 아시엔다의 노동력
아시엔다 농장은 자급자족경제를 지향하고 노동력은 주로 노예에 의존하는 등 반봉건적·전근대적 성격이 강했다. 아시엔다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들여 판매하는 노예무역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66]아시엔다의 노동력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이나 미타요스(mitayos, 강제 노역을 하는 원주민), 야나코나스(yanaconas, 선대로부터 자식에게로 계승되는 예속된 직능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66] 이들은 농장주인 밑에서 짐승처럼 취급받기 일쑤였다. 농장주인은 대부분 예수회 사제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들의 열매, 초콜릿》에서는 예수회 사제들이 농장의 노예들을 짐승처럼 대우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만 명의 원주민들은 교단이 정한 지역으로 강제 이동되어 생활과 노동 모두 통제를 받았다. 이들의 노동으로 얻은 담배, 가죽, 면화로 교단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의 생활을 대단히 엄격하게 통제 하였는데 심지어 매일 밤 종을 울려 남자들로 하여금 아내들에게 중요한 의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행한 이 ‘파블로브의 개’와 같은 이런 실험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67]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 아시엔다의 소유주는 ''아시엔다도'' 또는 ''파트론''이라고 불렸다. 농촌 영지의 현장 관리는 유급 관리자 또는 경영자가 수행했는데, 이들은 종종 고정된 고용 기간 동안 고용되었으며, 급여와 때로는 영지의 수익 일부를 받았다. 일부 관리자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 주변의 토지를 취득하기도 했다.[9]
아시엔다의 노동력은 아시엔다의 유형과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멕시코 중부에서는 종종 아시엔다에 거주하는 소규모의 영구 노동력이 있었고, 파종 및 수확 기간과 같이 필요에 따라 인근 토착민 공동체에서 노동력을 모집했다.[5] 영구 및 임시 아시엔다 직원들은 ''파트론''의 토지에서 일했으며, 지역 노동 감독관의 감독을 받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규모 경작자 또는 ''캄페시노''가 아시엔다도에 속한 작은 토지를 경작했으며, 작물의 일부를 그에게 빚졌다.
가축 사육은 목축 아시엔다의 핵심이었으며, 바케로와 가우초(남부 원뿔에서)를 비롯한 다양한 용어로 불리는 말 탄 목장 일꾼들이 목축 아시엔다에서 일했다.
카리브해의 아시엔다는 주로 설탕 농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아프리카인의 노동과 노예에 의존했다.[12] 푸에르토리코에서는 1873년 3월 22일 노예 제도의 폐지로 이 시스템이 종료되었다.[13]
아시엔다는 지주의 가부장적 지배에 의한 작은 사회를 형성하여 소작지와 지주 직영지로 나뉘었다.[61] 소작지는 고용 소작(콜로노, 잉킬리노, 와시푼게로), 분익 소작(야나코나, 아팔세로, 메디에로), 임대 소작(아렌다타리오)으로 구분되었고, 직영지에서는 농업 노동자(가냔, 페온, 아후에리노, 볼룬타리오) 등이 저임금 노동을 했다.[61] 개인 경영의 아시엔다의 경우, 지주의 대부분은 농장 내에 거주하지 않고 주요 도시나 외국에 거주하며, 농목장의 경영은 감리인(아드미니스트라돌)이나, 더 하위의 중간 감리인인 마요르도모에게 맡겨졌다.[64]
3. 3. 예수회와 아시엔다
예수회는 아시엔다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아시엔다의 노동력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 미타요스(강제 노역을 하는 원주민), 야나코나스(선대로부터 자식에게로 계승되는 예속된 직능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66] 이들은 농장주인에게 짐승처럼 취급받았는데, 농장주인은 대부분 예수회 사제들이었다.《신들의 열매, 초콜릿》에서는 예수회 사제들이 농장의 노예들을 짐승처럼 대우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만 명의 원주민들은 교단이 정한 지역으로 강제 이동되어 생활과 노동 모두 통제를 받았다. 이들의 노동으로 얻은 담배, 가죽, 면화로 교단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의 생활을 대단히 엄격하게 통제 하였는데 심지어 매일 밤 종을 울려 남자들로 하여금 아내들에게 중요한 의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행한 이 ‘파블로브의 개’와 같은 이런 실험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67]
1576년 멕시코 시티 근처에 설립되어 1767년 추방될 때까지 존속했던 예수회 ''아시엔다'' 산타 루시아는 특히 크고 수익성이 좋았다. 헤르만 콘라드는 기록 보관 자료를 통해 이 아시엔다의 운영 방식을 재구성했는데, 이를 통해 멕시코 아시엔다 시스템, 노동력, 토지 보유 시스템, 그리고 멕시코의 더 큰 히스패닉 사회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와 수도회, 특히 예수회는 방대한 ''아시엔다'' 소유지를 획득하거나 아시엔다도에게 우선적으로 돈을 빌려주었다. 아시엔다 소유자의 모기지 보유자로서 교회의 이해관계는 토지 소유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다. 멕시코 및 기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역사에서 대중은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으며, 독립을 얻거나 특정 정치 운동 중에 사람들은 교회의 아시엔다를 몰수하거나 제한했다.
4. 아시엔다의 유형
아시엔다는 누에바에스파냐 중부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고, 건조한 환경에서 필수적인 식수 및 농업용수 확보가 입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엔다는 내부 경제 활동의 종류에 따라 곡물, 가축, 광산, 아네킨 아시엔다 등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된다.[68]
라틴 아메리카에서 전통적인 아시엔다는 다음과 같이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64]
- 브라질 북동부(노르데스테)나 카리브해 제도에서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사탕수수 농장
-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가우초 노동력에 의존한 에스탄시아(목축 아시엔다)
-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안데스 지역, 일부 카리브해 제도에서 볼 수 있었던, 원주민 노동에 의존한 것
19세기 후반, 구미 제국의 투자로 플랜테이션 농업이 라틴 아메리카에 도입되었다.[64] 이러한 농장은 재배 가공의 신기술, 임금 노동의 대량 고용 등 자본주의적 경영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래의 반농노적 노동 제도를 최대한 이용했다는 점에서 아시엔다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64]
5. 아시엔다의 해체와 토지개혁
남아메리카에서 "아시엔다"는 19세기 초 국가들이 스페인 제국에서 독립한 후에도 남아 있었다. 도미니카 공화국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장 소유지를 수많은 소규모 자작농 소유지로 분할하려는 농업 혁명이 있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의 1952년 혁명을 통해 광범위한 토지 분배 프로그램이 시행되기 전까지 아시엔다가 널리 퍼져 있었다. 페루 역시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의 토지 개혁(1969) 전까지 아시엔다가 존재했는데, 이때 아시엔다 소유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했다.
칠레 최초의 아시엔다는 16세기의 칠레 정복 시대에 형성되었다.[7]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아시엔다는 칠레의 강도질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23] 20세기 칠레 아시엔다는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24]과 경제의 후진적인 부분으로 두드러진다.[25][26] 칠레 농업의 상당 부분을 특징짓는 아시엔다와 잉킬리나헤 제도는 칠레 토지 개혁 (1962–1973)에 의해 폐지되었다.[27]
아시엔다는 지주의 가부장적 지배에 의한 작은 사회를 형성하여 소작지와 지주 직영지로 나뉘었다.[61] 소작지는 고용 소작(콜로노, 잉킬리노, 와시푼게로), 분익 소작(야나코나, 아팔세로, 메디에로), 임대 소작(아렌다타리오)으로 구분되었고, 직영지에서는 농업 노동자(가냔, 페온, 아후에리노, 볼룬타리오) 등이 저임금 노동을 했다.[61]
아시엔다 경영은 19세기 초의 독립 혁명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주의 개혁과 19세기 말의 자본주의 형성기를 거치면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두드러졌다.[61] 그 결과, 19세기 말의 농민으로부터의 대규모 토지 수탈이 1911년의 멕시코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61] 멕시코에서는 카르데나스 정권 하에서 비로소 실질적인 토지 분배가 실시되었다.[61] 소득 격차와 빈곤의 큰 요인이었던 이러한 농지의 개혁이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61]
6. 아시엔다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현대에 스페인의 ''Ministro de Hacienda|재무부es''(Ministerio de Hacienda)는 금융과 세금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이며, 멕시코의 ''Secretaría de Hacienda y Crédito Público (México)|재무 및 공공 신용부es''(Secretaría de Hacienda y Crédito Público)와 같고, 미국 재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the Treasury) 또는 영국 재무부(HM Treasury)와 동일하다.
6. 1. 필리핀의 아시엔다
필리핀에서 "아시엔다" 시스템과 생활 방식은 300년 이상 멕시코를 통해 발생한 스페인 식민지화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영국 제국의 도시 일로일로의 부영사이자 영국인 사업가인 니콜라스 로니[28]의 요청에 따라 185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알프레드 W. 맥코이[29]에 따르면 로니의 목표는 체계적인 산업 철폐였다.[28][30] 이 산업 철폐는 카스티야인의 도착보다 앞선 기원을 가진 일로일로 지방의 섬유 산업(habol Ilonggo|하볼 일롱고hil)에서 노동력과 자본을 인접한 네그로스 섬의 설탕 생산으로 전환하여 달성되었다.[32][33] 일로일로 항구 또한 저렴한 가격의 영국산 섬유의 유입에 개방되었다.[28][29][32] 이러한 변화는 일로일로 섬유 산업을 희생시키면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섬유 산업을 강화하고 증가하는 유럽의 설탕 수요를 충족시키는 이중 효과를 냈다.[34]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토지 개혁 법을 통해 이 나라의 "아시엔다" 시스템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35][36] 로렐-랭글리 협정의 만료와 그에 따른 네그로스 설탕 산업의 붕괴는 페르디난드 E. E.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아시엔다" 소유주들이 국가 정치에서 스스로 임명한 킹 메이커 역할을 박탈할 기회를 제공했다.[37] 그러나 아시엔다 루이시타[38]를 둘러싼 시위와 네그로스 지방에서의 학살 및 표적 암살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면서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39][40][41][42] 이전에 생겼던 기회는 낭비되었고, 어떠한 중요한 성과도 사산되었다.[40][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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