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우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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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37년 노샘프턴셔에서 태어난 영국의 왕족으로, 1464년 에드워드 4세와 비밀리에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랭커스터 왕조의 시녀 출신으로, 에드워드 4세와의 결혼으로 왕비가 되었으나, 평민 출신이라는 점과 우드빌 가문의 급부상으로 인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에드워드 4세 사후,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삼촌 리처드 3세에 의해 폐위되고, 그녀는 헨리 7세와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통해 튜더 왕조의 성립에 기여했다. 그녀는 미모와 정치적 영향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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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우드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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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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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잉글랜드 왕비 |
재위 기간 | 1464년 5월 1일 – 1470년 10월 3일 1471년 4월 11일 – 1483년 4월 9일 |
대관식 | 1465년 5월 26일 |
배우자 | 서 존 그레이(약 1452년 결혼; 1461년 사망) 에드워드 4세(1464년 결혼; 1483년 사망) |
자녀 | 토머스 그레이 리처드 그레이 엘리자베스, 잉글랜드 여왕 세실리, 웨일스 자작 부인 에드워드 5세 리처드, 요크 공작 앤, 하워드 부인 캐서린 브리짓 |
자녀 목록 | 더보기... |
아버지 | 리처드 우드빌 |
어머니 | 자케타 드 뤽상부르 |
출생일 | 1437년경 |
출생지 | 그래프턴 레지스, 노샘프턴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492년 6월 8일 (54–55세) |
사망지 | 버몬지 수도원, 서리, 잉글랜드 |
매장일 | 1492년 6월 12일 |
매장지 | 세인트 조지 예배당, 윈저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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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가문 | 우드빌 가문 |
2. 생애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랭커스터 왕조의 국왕 헨리 6세의 숙부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결혼했던 인연으로, 1450년경부터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 오브 앙주를 시중드는 시녀로 일했다. 1452년 랭커스터파의 존 그레이 오브 그로비 경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나, 1461년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남편이 전사했다.[45][46]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는 생활이 어려워져 어머니의 고향인 노샘프턴셔에서 은둔하며 살았다. 그러나 랭커스터파를 무찌르고 헨리 6세를 폐위시킨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파 귀족과 기사들의 영지를 몰수하면서 더욱 빈곤해졌다. 마침내 노샘프턴셔를 방문한 에드워드 4세에게 접근하여 남편의 영지 반환을 청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눈에 들어 제인 쇼어를 비롯한 많은 정부들을 제치고 총애를 받게 되었다.
1464년 5월 1일,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4세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정권의 실세이자 에드워드 4세의 외가 사촌이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여동생 보나 디 사보이아와 에드워드 4세의 혼담을 중재하고 있었으므로, 결혼이 파탄나면서 망신을 당한 워릭 백작은 결혼에 반대하여 에드워드 4세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와 많은 남매들이 에드워드 4세의 우대 정책으로 귀족 작위를 받거나 귀족과 정략 결혼을 하면서 우드빌 가문이 외척으로 급부상한 것도 원래부터 외척이었던 워릭 백작을 비롯한 네빌 가문과 기존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47][48]
1469년, 반란을 일으킨 워릭 백작의 군대가 에지코트 무어 전투에서 왕실군을 물리치고 에드워드 4세가 유폐되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리버스 백작과 동생 존 우드빌이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잠시 후 석방되어 워릭 백작과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이듬해인 1470년 워릭 백작의 재차 반란으로 대륙으로 망명했고, 헨리 6세가 복위되었다. 의지할 곳 없는 엘리자베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피신하여 보호를 받으며 아들 에드워드 5세를 낳았지만, 힘들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1471년, 에드워드 4세의 역습으로 헨리 6세가 폐위되고, 워릭 백작이 바넷 전투에서 전사하자 엘리자베스는 왕비로 복귀했다. 에드워드 4세는 국내를 평정한 후, 우드빌 가문 중용을 계속하여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리버스 백작과 첫 남편의 아들인 도싯 백작이 궁정에서 발탁되었으나, 우드빌 가문과 다른 귀족들의 대립도 이어지는 가운데,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했다.[49][50]
에드워드 5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윌리엄 헤이스팅스 남작과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엘리자베스의 여동생 캐서린의 남편이었지만 반 우드빌파였다)와 결탁하여 왕위 찬탈을 도모했다. 글로스터 공작파의 의회 공작으로 에드워드 5세는 대관식 전에 왕위 계승이 무효라고 선언되어 런던 타워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이 중혼으로 간주되어 불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4세가 이전에 엘레오노어 탈봇과 결혼했고, 엘레오노어가 엘리자베스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태어날 무렵까지 살아 있었으며, 에드워드 4세는 그 후에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합법화할 방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리처드 3세는 스스로 즉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도 한다.
리처드 3세에 의해 리버스 백작과 도싯 백작의 동생 리처드 등 우드빌 가문이 처형되고, 도싯 백작은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헤이스팅스 남작도 처형당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차남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등 가족과 함께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죄책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엘리자베스가 가진 보석들을 가지고 틀어박혀 아무리 설득해도 나오지 않았다고도 한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차남을 넘겨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에드워드 5세와 함께 행방불명되었고, 엘리자베스도 다시 불안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마거릿 보퍼트로부터 장녀 엘리자베스와 마가렛의 아들 헨리 7세의 결혼을 제안받고 랭커스터파와 요크파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였다.[51][52]
1485년 리처드 3세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헨리 7세가 에드워드 4세와 엘레오노어 탈봇의 결혼 증거를 모두 파기하고(해외에는 남았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왕비의 권리를 되찾았다. 또한, 예전부터 약속했던 대로 장녀 엘리자베스가 헨리 7세의 왕비가 되어, 두 사람의 자손을 통해 이후의 잉글랜드 국왕과 여왕은 모두 엘리자베스의 자손이 된다. 왕의 미망인으로서의 연금도 부활되었고, 말년의 엘리자베스는 버몬지 수도원에 은퇴하여 평온하게 살았다. 그러나 이는 램버트 심넬의 반란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헨리 7세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53] 또한 궁정의 주도권을 엘리자베스에게 쥐어주고 싶지 않았던 마가렛의 의향도 작용했다고 한다.[54][55]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37년 노샘프턴셔에서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사이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은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4세의 아들 베드퍼드 공작 존의 시종 무관의 아들이자 기사로 평민 신분이었지만, 어머니 자퀘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를 배출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베드퍼드 공작의 미망인이었다.[5] 자퀘타는 베드포드 공작 사후 왕실 허락 없이 리처드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했으나, 1437년 10월 24일 사면받았다.[5][6]1452년경, 엘리자베스는 랭커스터 왕가를 지지하던 그로비의 존 그레이 경과 결혼하여 두 아들(토마스 그레이, 리처드 그레이)을 낳았다.[45][46] 그러나 존 그레이는 1461년 세인트 올번스 제2차 전투에서 전사했다.[45][46] 엘리자베스는 "영국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릴 만큼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7]
2. 2. 에드워드 4세와의 결혼과 왕비 시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61년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가 편에 서서 싸우다 전사한 존 그레이 경의 미망인이었다.[45][46]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파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생활이 어려워져 1464년 노샘프턴셔를 방문한 에드워드 4세에게 남편의 영지 반환을 청원했다. 이 만남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1464년 5월 1일 비밀리에 결혼하였다.[57] 이 결혼은 에드워드 4세의 통치 기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드 4세는 1464년 9월 29일에 리딩 수도원에서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소개했고,[9][10] 1465년 5월 26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비로 즉위하였다.[57] 1466년 2월 11일 첫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낳았고, 이후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다.[6]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왕비 등극은 영국 정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평민 출신이자 랭커스터 가문 지지자였다는 점이 반발의 주된 이유였다.[58] 특히,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프랑스와의 혼인 동맹을 추진 중이었기에 에드워드 4세의 비밀 결혼에 분노하여 그와 관계가 악화되었다.[47][48] 추밀원 역시 엘리자베스가 왕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발했다.[11]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친척들이 잉글랜드 정계에서 부상하자, 워릭 백작은 클라렌스 공작 조지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2] 워릭 백작은 앙주의 마거릿과 연합하여 1470년 헨리 6세를 복위시켰으나,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다시 복위하면서 워릭 백작은 바넷 전투에서 전사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남편이 권력을 잃은 동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피신하여 1470년 11월 2일 아들 에드워드 5세를 낳았다.[6]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퀸스 칼리지를 후원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성 에라스무스 예배당을 설립하는 등 그리스도교적 경건 활동에 참여했다.[13]
2. 3. 왕대비 시절과 튜더 왕조 개창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폐렴으로 급사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왕대비가 되었다.[14] 장남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런던 탑에서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와 함께 행방불명되었고, 호국경이었던 에드워드 5세의 삼촌 글로스터 공작이 1483년 6월 25일 리처드 3세로 즉위하였다.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마녀 행위를 한 여인으로 공표하고,[59] 에드워드 4세와의 혼인을 무효화하여 자녀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60] 혼인 무효의 근거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혼인하기 전 엘리노어 버틀러와 이미 혼인 약속을 한 상태였으므로 중혼(重婚)으로 불법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동생 앤서니 우드빌, 전 남편과의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여 요크의 폰테프락트 성에서 처형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다시 성소로 도피하였다. 랭커스터 왕가의 왕위 계승 후보자인 헨리 튜더와 그의 생모 마거릿 보퍼트와 서신을 주고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브르타뉴에서 망명중이던 헨리 튜더가 영국으로 돌아와 리처드 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를 경우 그와 자신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겠다는 비밀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반역 모의는 실패하였고, 마거릿 보퍼트는 사권박탈을 당하였다.1484년 에드워드 4세에게 받은 왕비 영지를 박탈당하고 왕비 칭호를 금지당했으며 헨리 튜더와의 모의가 발각되어 감금되었으나, 이후 리처드 3세의 처분은 관대해졌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들은 런던 탑에 구금하지 않을 것이며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리처드 3세의 맹세에 의해 성소에서 나와 궁정에 복귀하였다. 리처드 3세의 왕비 앤 네빌이 사망하자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리처드 3세의 새 신붓감으로 언급되기도 하였으나, 리처드 3세는 이 소문을 부정하였다.
1485년 헨리 튜더는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키고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가를 열었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 무효는 취소되었고,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헨리 7세와 결혼하면서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전 왕비의 칭호와 연금을 되찾았다. 그러나 1487년 2월 12일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버몬지 사원으로 은퇴하였고, 5년 뒤인 1492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손녀인 마거릿 튜더와 헨리 8세의 탄생 당시 궁정을 방문하는 등 왕실 행사에 참여했으나, 사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버몬지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왕의 미망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왕족에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였고, 헨리7세로부터 400파운드의 연금과 선물을 받았다. 장녀인 왕비 엘리자베스가 버몬지를 자주 방문했으나 다른 딸인 요크의 세실리의 방문이 더 잦았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3세의 부인이었던 덴마크의 마가렛이 1486년 사망하자,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제임스 3세와 결혼시키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제임스 3세가 1488년 살해되면서 무산되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92년 6월 8일 버몬지사원에서 사망했다. 왕비 엘리자베스와 요크의 세실리를 제외한 딸들이 윈저성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간소한 장례식은 그녀 자신이 바랐던 것이었지만, “왕비의 장례식이 좀 더 호화로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기록과, “헨리 7세가 장모를 위해 좀더 여왕에 걸맞은 장례식을 준비하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볼때 반대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2]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와 함께 윈저성의 성 조지 채플에 묻혔다.
2. 4. 말년과 죽음
1485년 헨리 튜더가 영국에 상륙하여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키고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가를 열었다.[25] 헨리 7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왕위 계승권 선언서(Titulus Regius)를 폐지하고 발견된 모든 사본을 파기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왕대비(dowager)의 칭호와 예우를 받았다.[26]학자들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마지막 5년을 버몬지 수도원에서 보낸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1487년 2월 12일에 은퇴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5년 뒤인 1492년 6월 8일 사망하였다.[6] 현대 전기 작가 데이비드 볼드윈은 헨리 7세가 그녀의 궁정 퇴거를 강요했다고 믿는 반면, 아린 오커런드는 1486년 7월부터 그녀가 이미 버먼지 수도원에서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궁정에서 은퇴할 계획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27] 또 다른 주장은 그녀의 버먼지 은퇴가 1487년 램버트 시므넬의 요크 가문 반란에 연루되었거나, 적어도 반란군의 잠재적 동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강요되었다는 것이다.[28]
버몬지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왕족에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였고, 헨리7세로부터 400파운드의 연금과 작은 선물들을 받았다.[29] 1489년 11월 손녀 마거릿의 출산과 1491년 6월 손자 헨리 8세(Henry VIII)의 출산에 참석했다.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가 가끔 버먼지를 방문했지만, 다른 딸 요크의 세실리(Cecily of York)는 더 자주 방문했다.
1486년 제임스 3세의 부인 덴마크의 마가렛이 사망하자, 헨리 7세는 장모를 제임스 3세와 결혼시키는 방안을 잠시 고려했지만,[30] 1488년 제임스 3세가 살해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1492년 6월 8일 버몬지사원에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와 요크의 세실리를 제외한 딸들이 모두 윈저성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참석한 딸들은 요크의 앤(Edward IV의 딸)(Anne of York (daughter of Edward IV)), 요크의 캐서린(Catherine of York), 요크의 브리짓(Bridget of York)이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남편 에드워드 4세와 함께 윈저성의 성 조지 채플에 묻혔다.[6] 엘리자베스의 유언에는 간소한 의식이 명시되어 있었다.[31] 1492년 6월 12일 장례식 기록에는 “왕비의 장례식이 좀 더 호화로워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발언과, “헨리 7세가 장모를 위해 좀더 여왕에 걸맞은 장례식을 준비하려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2] 2019년 발견된 1511년 런던 주재 베네치아 대사 안드레아 바도에르(Andrea Badoer)의 편지에는 그녀가 흑사병으로 사망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서둘러 치러진 장례식과 공개적인 의식의 부재를 설명할 수 있다.[32][33]
3. 자녀
- 그로비의 존 그레이 경과의 자녀
- * 토머스 그레이 : 후일 9일 여왕으로 불리는 제인 그레이는 그의 직계 증손녀이다.[34]
- * 리처드 그레이 :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과 함께 처형[34]
- 에드워드 4세와의 자녀
- * 요크의 엘리자베스 : 영국 헨리 7세의 왕비, 헨리 8세의 생모.
- * 요크의 메리 : 조졸.
- * 웰즈 자작 부인 세실리 : 마거릿 보퍼트의 이부동생 웰즈 자작 존과 결혼.
- * 에드워드 5세 : 런던 탑의 왕자들.
- * 요크의 마거릿 : 조졸.
- * 요크 공작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 런던 탑의 왕자들.
- * 하워드 영부인 앤 : 노퍽 공작의 후계자인 토머스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공작이 되기 전 사망하였다.
- * 베드퍼드 공작 조지 : 조졸.
- * 데번 백작 부인 캐서린
- * 요크의 브리짓 : 수녀

3. 1. 존 그레이 경과의 자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존 그레이 경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34]- 토마스 그레이(1455년 – 1501년 9월 20일)는 헌팅던 백작이자 도싯 후작 겸 페러스 드 그로비 남작이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앤 홀랜드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자녀 없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1474년 7월 18일 세실리 본빌과 재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제인 그레이는 이 계보의 직계 후손이다.
- 리처드 그레이(1457년 – 1483년 6월 25일)는 폰테프랙트 성에서 처형되었다.
3. 2. 에드워드 4세와의 자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 영국 헨리 7세의 왕비이자 헨리 8세의 생모이다.
- 요크의 메리 : 세인트 조지 예배당, 윈저 성에 매장되었다.
- 웰즈 자작 부인 세실리 : 마거릿 보퍼트의 이부동생 웰즈 자작 존과 결혼하였다.
- 에드워드 5세 : 런던 탑의 왕자들 중 한 명이다.
- 요크의 마거릿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 요크 공작 슈루즈버리의 리처드 : 런던 탑의 왕자들 중 한 명이다.
- 하워드 영부인 앤 : 노퍽 공의 후계자인 토마스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공작이 되기 전 사망하였다.
- 베드퍼드 공작 조지 : 세인트 조지 예배당, 윈저 성에 매장되었다.
- 데번 백작 부인 캐서린
- 요크의 브리짓 : 수녀
4. 유산과 평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대단한 미녀로, 당대에 이미 '브리튼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용과 같은 진한 쌍꺼풀을 지닌 여인(heavy-lidded eyes like those of a dragon)'[61]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에드워드 4세 역시 처음에는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의식하여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아내가 아닌 정부(情婦)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62] 그러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저는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모자라지만, 정부가 되기에는 신분이 높습니다.''라고 말하여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때 이른 궁정에서의 은퇴는 램버트 심넬의 반란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처음에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차남인 요크 공작 슈루즈버리의 리처드라고 주장했으나 이후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사칭하여 요크 왕가의 진정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천명한 램버트 심넬의 반란은 헨리 7세에게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으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은퇴 시기인 1487년 진압되었다.[63] 또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뒤 살아남은 다른 딸들이 모두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는 참석하지 않았고, 장례식 역시 왕비의 장례식으로서는 지나치게 간소했던 것을 이유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말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국왕 부부에게 외면받았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4. 1. 미모와 매력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브리튼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용과 같은 진한 쌍꺼풀을 지닌 여인(heavy-lidded eyes like those of a dragon)'[61]이라는 별칭이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아내가 아닌 정부(情婦)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는 일화가 있으나,[62]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4. 2. 정치적 영향력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당대에 이미 '브리튼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용과 같은 진한 쌍꺼풀을 지닌 여인(heavy-lidded eyes like those of a dragon)'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61]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아내가 아닌 정부(情婦)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저는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모자라지만, 정부가 되기에는 신분이 높습니다.''라고 답하여 그를 사로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62]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이른 은퇴가 램버트 심넬의 반란과 연관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램버트 심넬은 처음에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차남 요크 공작 슈루즈버리의 리처드라고 주장했다가, 이후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사칭하며 요크 왕가의 진정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주장했다. 이 반란은 헨리 7세에게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으나, 1487년 진압되었다.[63]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뒤,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장례식 역시 왕비의 장례식으로서는 지나치게 간소했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말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국왕 부부에게 외면받았다는 설도 있다.
4. 3. 문화적 유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당대에 '브리튼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61]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용과 같은 진한 쌍꺼풀을 지닌 여인"[61]이라는 묘사가 전해진다. 일설에 따르면 에드워드 4세가 처음에는 신분 차이를 이유로 정부(情婦)가 될 것을 제안했으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모자라지만, 정부가 되기에는 신분이 높습니다."[62]라고 답하여 왕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이른 은퇴는 램버트 심넬의 반란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63] 램버트 심넬은 처음에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차남을 사칭했으나, 나중에는 워릭 백작 에드워드를 사칭하며 요크 왕가의 왕위 계승권자임을 주장했다. 이 반란은 1487년 진압되었지만, 헨리 7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63] 또한,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후 장례식에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가 불참하고 장례식도 간소했던 점을 들어,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정치적 이유로 외면받았다는 설도 있다.[63]
중세 영어로 쓰인 여성 작가의 작품은 세 편뿐인데,[35] 그중 하나인 "내 마음은 정열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네"[36]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귀속된 작품으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썼다는 주장도 있다.)[36][37] 이 비너스 찬가는 복잡한 6연시[39]로, "시스티나의 변형"[40]으로 여겨진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의 《아스트로펠과 스텔라(Astrophel and Stella)》(1586년 이전 집필, 1591년 초판 발행) 소네트 75편에서는 에드워드 4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41]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3부》(1592년 집필)와 《리처드 3세(Richard III)》(약 1592년 집필)에도 등장하는데, 《헨리 6세 3부》에서는 비교적 작은 역할이지만, 《리처드 3세》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자신을 방어하고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며 리처드의 가장 영리한 반대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다룬 소설로는 에드워드 불워-리턴(Edward Bulwer-Lytton)의 《마지막 남작(The Last of the Barons)》, 마조리 보언(Marjorie Bowen)의 《딕컨(Dickon)》(1929),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의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1951), 얀 웨스트콧(Jan Westcott)의 《흰 장미(The White Rose)》(1969), 로즈마리 홀리 재먼(Rosemary Hawley Jarman)의 《왕의 회색 암말(The King's Grey Mare)》(1972), 모린 피터스(Maureen Peters)의 《우드빌 여자(The Woodville Wench)》(1972), 섀론 케이 펜먼(Sharon Kay Penman)과 진 플레이디(Jean Plaidy)의 《태양의 영광(The Sunne in Splendour/The Sun in Splendour)》(1982), 에마 다윈(Emma Darwin)의 《비밀 연금술(A Secret Alchemy)》(2009), 필리파 그레고리(Philippa Gregory)의 《흰 왕비(The White Queen)》(2009) 및 《킹메이커의 딸(The Kingmaker’s Daughter)》(2012), 앤 이스터 스미스(Anne Easter Smith)의 《왕의 은총(The King's Grace)》(2009), 레베카 가블레(Rebecca Gablé)의 《왕들의 게임(Das Spiel der Könige)》, 콘 이글든(Conn Iggulden)의 "장미 전쟁" 시리즈 《혈통(Bloodline)》(2015)과 《레이븐스퍼(Ravenspur)》(2016), 앨리슨 위어(Alison Weir)의 《마지막 흰 장미(The Last White Rose)》(2022) 등이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2020년, 비키 맨서(Vicki Manser)는 장미 전쟁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어머니의 전쟁''(A Mother's War)의 캐스트 녹음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중세 영어로 쓰인 여성 작가의 작품 세 편 중 하나인 "내 마음은 정열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네"의 저자로 추정되기도 한다.[36][37]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는 인물에게 귀속되지만,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저자였다는 주장도 있다.[36][37] 단 한 권의 사본[38]에 실린 이 비너스 찬가는 운율이 ABABBAA인 복잡한 6연시[39]로, "시스티나의 변형"[40]으로 여겨진다. 각 연의 일곱 번째 줄은 첫 번째 줄과 같고, 첫 번째 연의 여섯 개의 고유한 줄이 그 시의 여섯 연 각각의 첫 번째 줄을 구성한다.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의 《아스트로펠과 스텔라(Astrophel and Stella)》(1586년 이전 집필, 1591년 초판 발행) 소네트 75편에서는 에드워드 4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41]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6세 3부》(1592년 집필)와 《리처드 3세(Richard III)》(약 1592년 집필)에 등장한다. 《헨리 6세 3부》에서 엘리자베스는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되는 반면, 《리처드 3세》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두 아들을 포함한 가족과 지지자들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리처드의 가장 영리한 반대자 중 한 명으로 그려진다. 셰익스피어의 원본 포리오에는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그레이 부인(Lady Grey)" 또는 "왕비(Queen)"라고 불린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등장인물로 다룬 소설로는 에드워드 불워-리턴(Edward Bulwer-Lytton)의 《마지막 남작(The Last of the Barons)》, 마조리 보언(Marjorie Bowen)의 《딕컨(Dickon)》(1929),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의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1951), 얀 웨스트콧(Jan Westcott)의 《흰 장미(The White Rose)》(1969), 로즈마리 홀리 재먼(Rosemary Hawley Jarman)의 《왕의 회색 암말(The King's Grey Mare)》(1972) 등이 있다.
- 《리처드 3세》(1911)에서 바이올렛 페어브러더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12)에서 케리 리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프랑스 영화 《에드워드의 아이들》(Les enfants d'Édouard, 1914)에서 잔느 델베르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제인 쇼어》(1915)에서 모드 예이츠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런던 탑》(1939)에서 바바라 오닐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55)에서 메리 커리지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헝가리 TV 영화 《III. 리처드》(III. Richárd, 1973)에서 리타 베케시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95)에서 아네트 베닝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를 찾아서》(Looking for Richard, 1996)에서 페넬로페 앨런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2005)에서 캐롤라인 번스 쿡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2007)에서 마리아 콘치타 알론소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왕들의 시대 (An Age of Kings)》(1960)에서 제인 웬햄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1965)에서 수전 엔젤(Susan Engel)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탑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Tower)》(1972)에서 스테파니 비드미드(Stephanie Bidmead)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헨리 6세 3부》와 《리처드 3세 (The Tragedy of Richard III)》(1983)에서 로위나 쿠퍼(Rowena Cooper)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흰 여왕》(2013)에서 레베카 퍼거슨(Rebecca Ferguson)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속이 빈 왕관》, 《헨리 6세》와 《리처드 3세》(2016)에서 키일리 호스(Keeley Hawes)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흰 공주》(2017)에서 에시 데이비스(Essie Davis)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5. 1. 문학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중세 영어로 쓰인 여성 작가의 작품 세 편 중 하나인 "내 마음은 정열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네"의 저자로 추정되기도 한다.[36][37]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는 인물에게 귀속되지만,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저자였다는 주장도 있다.[36][37] 단 한 권의 사본[38]에 실린 이 비너스 찬가는 운율이 ABABBAA인 복잡한 6연시[39]로, "시스티나의 변형"[40]으로 여겨진다. 각 연의 일곱 번째 줄은 첫 번째 줄과 같고, 첫 번째 연의 여섯 개의 고유한 줄이 그 시의 여섯 연 각각의 첫 번째 줄을 구성한다.필립 시드니(Philip Sidney)의 《아스트로펠과 스텔라(Astrophel and Stella)》(1586년 이전 집필, 1591년 초판 발행) 소네트 75편에서는 에드워드 4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41]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6세 3부》(1592년 집필)와 《리처드 3세(Richard III)》(약 1592년 집필)에 등장한다. 《헨리 6세 3부》에서 엘리자베스는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되는 반면, 《리처드 3세》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두 아들을 포함한 가족과 지지자들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리처드의 가장 영리한 반대자 중 한 명으로 그려진다. 셰익스피어의 원본 포리오에는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그레이 부인(Lady Grey)" 또는 "왕비(Queen)"라고 불린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등장인물로 다룬 소설로는 에드워드 불워-리턴(Edward Bulwer-Lytton)의 《마지막 남작(The Last of the Barons)》, 마조리 보언(Marjorie Bowen)의 《딕컨(Dickon)》(1929),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의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1951), 얀 웨스트콧(Jan Westcott)의 《흰 장미(The White Rose)》(1969), 로즈마리 홀리 재먼(Rosemary Hawley Jarman)의 《왕의 회색 암말(The King's Grey Mare)》(1972) 등이 있다.
5. 2. 영화 및 드라마
- 《리처드 3세》(1911)에서 바이올렛 페어브러더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12)에서 케리 리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프랑스 영화 《에드워드의 아이들》(Les enfants d'Édouard, 1914)에서 잔느 델베르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제인 쇼어》(1915)에서 모드 예이츠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런던 탑》(1939)에서 바바라 오닐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55)에서 메리 커리지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헝가리 TV 영화 《III. 리처드》(III. Richárd, 1973)에서 리타 베케시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1995)에서 아네트 베닝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를 찾아서》(Looking for Richard, 1996)에서 페넬로페 앨런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2005)에서 캐롤라인 번스 쿡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리처드 3세》(2007)에서 마리아 콘치타 알론소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왕들의 시대 (An Age of Kings)》(1960)에서 제인 웬햄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1965)에서 수전 엔젤(Susan Engel)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탑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Tower)》(1972)에서 스테파니 비드미드(Stephanie Bidmead)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헨리 6세 3부》와 《리처드 3세 (The Tragedy of Richard III)》(1983)에서 로위나 쿠퍼(Rowena Cooper)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흰 여왕》(2013)에서 레베카 퍼거슨(Rebecca Ferguson)이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속이 빈 왕관》, 《헨리 6세》와 《리처드 3세》(2016)에서 키일리 호스(Keeley Hawes)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 《흰 공주》(2017)에서 에시 데이비스(Essie Davis)가 우드빌 역을 연기했다.
6. 기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이름을 딴 학교로는 레스터셔주 그로비의 엘리자베스 우드빌 초등학교(1971)[42]와 노스햄프턴셔주 로이드의 엘리자베스 우드빌 중등학교(2011)[43]가 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왕비로서의 문장은 영국 왕실 문장과 우드빌 가문 문장이 합쳐진 형태(합장)이다.[44] 문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4분면은 은색 바탕에 붉은색 이중꼬리 사자(룩셈부르크, 외가) 문양이다. 2/4분면은 1,4분면에 붉은색 바탕에 은색 팔각별, 2,3분면에 청색 바탕에 금색 플뢰르드리스가 흩뿌려진(보) 문양이다. 3/4분면은 은색과 청색 가로줄무늬 바탕에 붉은색 사자 문양, 4/4분면은 붉은색 바탕에 은색 세 개의 경사선, 윗부분에 금색 테두리에 붉은색 장미(오르시니) 문양이다. 5/4분면은 세 개의 다양한 색깔의 수직띠, 윗부분에 금색 바탕에 청색 다섯 갈래 라벨(샤티용) 문양이며, 6/4분면은 은색 바탕에 붉은색 가로띠와 모서리(우드빌) 문양이다. 문장 양쪽에는 각각 오른쪽에는 은색 사자, 왼쪽에는 붉은색 목걸이를 한 은색 그레이하운드가 위치한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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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Woodville'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대에는 'Wydeville', 'Widvile'로도 쓰였다. [[윈저 성]] 성 조지 성당에 위치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묘비에는 'Widvile'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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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원]]에서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 '그([[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그와 같은 군주에게 걸맞은 여인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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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마법을 부려 [[에드워드 4세]]를 홀리고 정적들을 살해하였다는 주장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역시 마녀 행위로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에게 고소를 당한 전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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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더라도 [[리처드 3세]]의 형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의 살아남은 두 자녀의 왕위 계승권이 [[리처드 3세]]보다 더 우선했으므로 계승법상 [[리처드 3세]]의 즉위는 [[에드워드 4세]]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 여부와 무관하게 왕위를 찬탈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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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의 유럽 귀족 사회에서 국왕의 정부가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지탄받았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대단한 특혜를 얻을 수 있는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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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심넬은 [[헨리 7세]]에게 사면받고 왕실 주방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을 정도로 반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이자 부르고뉴 공작 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조차 심넬을 위해 2,000여명의 병사를 보내주었을 정도로 심넬의 난은 [[요크 왕가]]의 중심 일원들을 동요시켰던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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