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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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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엠스도르프 전투는 1760년 7월 16일 일어난 전투로, 하노버와 헤센의 보병, 엽병, 후사르, 영국 제15 경기병 연대로 구성된 연합군과 프랑스군 간의 전투였다. 영국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배하여 1,650명 이상의 포로가 발생했다. 연합군의 승리는 영국 제15 경기병 연대의 활약 덕분이었으며, 이 연대는 영국 최초의 전투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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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도르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엠스도르프 전투
일부7년 전쟁의 일부
날짜1760년 7월 16일
장소헤센 엠스도르프 (현재의 독일)
결과앵글로-하노버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하노버
헤센-카셀
교전국 2프랑스 왕국
지휘관 및 병력
지휘관 1[[파일:Wappen-HK_(1736-1804).svg|20px]] 헤센-카셀의 세자 프리드리히
지휘관 2바론 폰 글라우비츠
병력 13,000명
병력 23,000명
사상자
사상자 1186명
사상자 22,600명

2. 양측의 편성

연합군은 하노버와 헤센 보병 대대 6개, 하노버 엽병 부대, 니콜라우스 폰 루크너가 이끄는 후사르(경기병), 영국 15th The King's Hussars|제15 경기병 연대영어로 구성되었다. 프랑스군은 왕립 바비에르 연대, 살름-살름 연대 보병 대대 5개, 후사르 대대, 약간의 경부대로 구성되었다.

2. 1. 연합군 (영국, 하노버, 헤센)

연합군은 하노버와 헤센의 보병 대대 6개, 하노버의 엽병 부대, 니콜라우스 폰 루크너가 이끄는 후사르 (경기병)와 영국의 15th The King's Hussars|제15 경기병 연대영어로 구성되었다.[1]

2. 2. 프랑스군

프랑스군은 왕립 바비에르 연대[1], 살름-살름 연대[2] 보병 대대 5개, 후사르 대대와 약간의 경부대로 구성되었다.

3. 전투 경과

영국군은 야영 중으로 막 점심을 먹으려던 프랑스군을 기습했다. 프랑스군 경기병(후사르)은 즉시 도주했고, 2개 보병 대대는 진형을 형성해 싸우려 했지만, 헤센 대대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1] 라우비츠 남작은 1개 대대를 마르부르크로 돌려보내고, 남은 병력과 함께 키르히하인으로 철수하려 했지만, 루크너와 경보병에 의해 도주로의 대부분이 막혔다.[1] 철수하던 프랑스군에게 영국의 제15 경기병 연대가 돌격했고, 프랑스 병사 1,650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 결과를 낳았다.[1]

4. 전투 결과

연합군의 승리는 영국의 제15 경기병 연대의 활약 덕분이며, 연합군 사상자 186명 중 125명이 이 연대 소속이었다. 연대를 지휘한 서 윌리엄 어스킨은 전투 후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노획한 프랑스군 기 16개를 전시했다.[5] 그러나 연합군의 원래 목표였던 마르부르크 점령은 달성하지 못했다.

엠스도르프 전투에서 활약한 영국의 제15 경기병 연대는 영국 최초의 전투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이전의 전투의 전투 훈장은 그 후에 다시 수여되었다.

5. 전투의 의의 및 영향

엠스도르프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에 영국군과 하노버군 연합군이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영국군 기병대가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로 기록된다. 제15 경기병 연대는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영국군 최초로 전투 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다.[5]

5. 1. 영국군에 대한 영향

연합군의 승리는 영국의 제15 경기병 연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연합군 사상자 186명 중 125명이 이 연대 소속이었다. 연대를 지휘한 서 윌리엄 어스킨은 전투 후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노획한 프랑스군 기 16개를 전시했다.[5]

엠스도르프 전투에서 활약한 제15 경기병 연대는 영국 최초로 Battle honour을 수여받았다. 그 이전 전투들의 전투 훈장은 이후에 다시 수여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standard of France was white, sprinkled with golden fleur de lis..." 1879
[2] 서적 "Le pavillon royal était véritablement le drapeau national au dix-huitième siecle...Vue du chateau d'arrière d'un vaisseau de guerre de haut rang portant le pavillon royal (blanc, avec les armes de France)" 2011
[3] 서적 "The oriflamme and the Chape de St Martin were succeeded at the end of the 16th century, when Henry III., the last of the house of Valois, came to the throne, by the white standard powdered with fleurs-de-lis. This in turn gave place to the famous tricolour" 1911
[4] 서적 His Britannic Majesty's Army in Germany During the Seven Years War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5] 서적 His Britannic Majesty's Army in Germany During the Seven Years War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6] 간행물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11th Edition, New York 1910, Vol.X, p.460 http://www.anyflag.c[...] The American Cyclopaedia, New York 200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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