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강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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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덕-강구 전투는 한국 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덕-강구 지역에서 벌인 전투이다. 1950년 7월, 국군은 전력 보강 및 방어선 재편을 통해 영덕-강구선에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특히 포항 방어의 마지막 요새인 영덕-강구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미군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전투를 수행했다. 7월 26일, 국군 제22연대는 181고지와 207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목표를 달성했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북한군 제5사단에 큰 피해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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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강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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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7월 22일 ~ 8월 9일 |
장소 | 경상북도 영덕군의 영덕읍-강구면 일대 |
결과 | 대한민국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영국 미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이준식 제3사단장 준장 (7월 10일부터) 강태민 제22연대장 중령 황명 제1대대장 소령 장인걸 제2대대장 대위 염정태 제3대대장 소령 김종원 제23연대장 중령 (7월 31일까지) 박재열 제1대대장 소령 백기천 제2대대장 소령 허형호 제3대대장 소령 김종 독립 제1대대장 중령 박기석 공병대대장 소령 윤명운 강원도 경찰대대장 경무관 노재현 포병 제11대대장 소령 |
지휘관 2 | 김광협 제2군단장 소장 김무정 제2군단장 중장 (7월 10일부터)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오진우 제766부대장 총좌 |
병력 규모 | |
병력 1 | 알 수 없음 |
병력 2 | 알 수 없음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2. 배경
7월 4일, 평해에서 철수한 제23연대를 영해로 수용한 사단은 신병으로 울진 이래의 병력손실을 보충하는 한편, 제22연대의 조속한 복귀를 육군본부에 요청하고 영등포학원을 독립 제1대대에 배속시켜 전력 충원에 힘썼다.
전선이 영덕으로 가까워짐에 따라, 동해상에 출동 중인 미 해군 제7함대 일부 함정의 함포 지원과 미 제5공군의 출격이 점차 증가하여, 사단은 이 강력한 지원 화력을 수시로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10일 사단장이 바뀌면서, 사단은 재편한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로 북한군 제5사단의 압박을 막고, 영해-영덕 지역에서 종심 깊은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는 등 방어 개념을 새롭게 하였다.
7월 9일 육군본부는 수원-음성 방면으로 철수 중인 제22연대에 신속한 원대 복귀를 명령하고, 전 사단장 류승열 대령을 경남 편성관구사령관으로, 육군 사관학교장 및 혼성 제3사단장이던 이준식 준장을 신임 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포항을 지키기 위해 영덕-강구 선에서 적군의 남진을 막으려는 긴급 조치였다.
한편, 미 제8군 사령부는 동해안 전선의 상황을 깊은 우려로 주시하고 있었는데, 포항의 항만과 영일 비행장의 존폐가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포항의 항만은 부산과 함께 전 전선에 대한 병참 물자의 주요 보급항이었고, 영일 비행장은 미 제40전투비행대대의 기지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그곳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영덕-강구는 포항 방어의 마지막 관문으로서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작전참모 앨런 D. 맥클린(Allen D. Maclean) 중령에게 해 전선에 대한 화력 지원 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긴급 지시하였다.
2. 1. 작전 계획
영덕 전선은 동해안의 최대 병참기지인 포항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최후의 보루와 다름없었는데, 포항까지 45km 지점에 병력의 열세를 천연의 지형으로 보강하며 지연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평균 하폭이 50~60m인 오십천변을 방어에 이용함으로써, 유일한 도보교인 강구교를 중심으로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유리했다. 영덕에서 강구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오십천 변을 따라 남하하는데, 영덕 동쪽의 지맥은 태부동(영덕 동쪽 4km)-좌곡동을 저변으로 하여 역삼각형으로 좁아지면서 강구(강구교)를 정점으로 하고 있어, 국군으로서는 밀집방어에 유리했다.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이 해선의 고수를 엄명한 것도 이 때문인데, 이준식 제3사단장은 208고지(영덕 서쪽 1.4km, 오십천의 대안)의 독립 제1대대로 적의 측방 진출을 견제하고, 제23연대로 태부동-좌곡동 선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김종원 제23연대장은 제3대대를 181고지에, 제2대대를 207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태부동-좌곡동 선을 방어하게 하고, 제1대대를 173고지(강구 북쪽 3.3km)에 예비로 배치하여 중심을 편성하였는데, 전황의 급박에 따라 공방의 초점은 181고지로 집중되었다. 이 고지는 역삼각형의 저변 중간에 위치하여 적의 접근로를 감제할 뿐만 아니라, 그 남쪽에 대하여도 방어의 이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1고지의 득실은 곧 전선에서의 진퇴를 뜻하는 것이어서, 사단은 7월 21일 영덕을 다시 상실함에 따라, 제23연대의 주력을 181고지-207고지 선으로 수습함과 동시에 제22연대의 내도와 더불어 영덕 탈환의 반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3. 전투 과정
7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영덕-강구 전투에서 181고지를 중심으로 국군 제23연대와 북한군 제5사단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국군은 미군의 함포 및 항공 지원을 받으며 고지를 여러 차례 탈환하고 빼앗기는 접전을 반복했다. 7월 24일 대구에서 재편성을 마친 제22연대가 증원되면서 국군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제22연대는 181고지와 207고지를 탈환하고, 제23연대는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며 영덕 탈환 작전을 지원했다.
3. 1. 181고지 및 207고지 전투
허형호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는 연일 계속된 전투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7월 24일 새벽, 정명환 중위가 이끄는 제9중대 전초조가 방심한 틈을 타 북한군 2개 중대 규모의 병력이 침투하여 주진지가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박종병 대위가 지휘하는 제10중대가 즉각 역습을 감행하여 북한군 1개 중대를 격퇴하고 금호동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207고지를 담당하던 백기천 소령의 제2대대 역시 북한군 1개 대대 규모의 압박으로 인해 상금호(207고지 남쪽 1.1km) 능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7월 25일,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박재열 소령이 이끄는 제1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실시, 181고지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역습은 강구 앞바다에 있던 해군의 함포 지원 사격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7월 24일, 대구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제22연대가 강구 지역에 증원되었다. 사단장 이준식 준장은 제22연대를 150고지(강구 북쪽 1.5km)에 배치하여 대기시켰다. 당초 사단장은 제22연대로 하여금 207고지를 넘어 7월 26일에 영덕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7월 25일 야간에 북한군의 기습으로 181고지를 다시 상실하게 되면서 부득이하게 181고지 역습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7월 26일 당시, 사단은 제22연대를 150고지에 예비대로 배치한 상태에서 제23연대의 주력을 181고지 및 207고지에서 철수시켜 북한군의 진출을 부자동-상금호선에서 저지하도록 했다. 제23연대는 제1대대를 172고지에 예비대로 배치하고, 제3대대를 속칭 을지마의 야산에, 제2대대를 상금호동의 능선에 각각 집결시켜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제22연대의 역습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준식 준장은 181고지와 207고지의 북한군이 진지를 보강하기 전에 역습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작전명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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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명령은 미 고문관 롤린스 S. 엠메리치 중령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함포 및 공군 지원의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북한군 제5사단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이에 제22연대장 강태민 중령은 7월 26일 07:00에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통해 제2 및 제3대대에 역습 임무를 부여했다.
작전명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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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염정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를 우측에, 장인걸 대위가 이끄는 제2대대를 좌측에 배치하여 역습을 개시했다. 공격 개시 시간을 13:00로 정한 것은 함포 및 공중 지원의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12:00부터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고, 제3대대는 양성식 대위의 제10중대와 문용기 중위의 제11중대를 전개하여 13:00 정각에 공격을 개시했다. 181고지(환산)는 둥근 만두 모양으로 정상에서 완만한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지세는 험하지 않지만, 사방에 대한 조망이 용이하여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적의 집중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밤 10시경, 1개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했으나, 김경진 소위와 이대식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들의 맹렬한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계곡에서 패퇴하였다.
207고지를 담당한 제2대대장 장인걸 대위는 제5중대장 이영제 중위를 선두에, 제6중대장 황한준 중위를 후속시켜 공격을 진행했다. 207고지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영덕 남쪽의 우곡리로 바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제6중대의 진출은 북한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제5중대는 큰 저항 없이 207고지를 탈환하고, 영덕 시가지를 감시하며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7월 26일 14:20) 이영제 중위는 지형 및 적정을 분석한 결과, 북한군이 영덕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207고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강력한 역습을 시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장인걸 대위에게 1개 중대의 증원을 요청했다. 대대장은 이은하 중위가 이끄는 제7중대를 즉시 증원하고, 제6중대는 207고지 서쪽의 움푹 들어간 지역에서 대기하도록 조치했다.
제5중대는 정상 북동면에 조원종 소위와 정치갑 소위의 소대를, 제7중대는 북서쪽 사면에 임광섭 소위와 이창룡 소위의 소대를 배치했다. 정상에는 제5중대 신정수 소위와 제7중대 손기목 소위의 소대가 주 진지를 구축했다.
사단 고문관 엠메리치 중령은 영덕 시가지 주변이 잘 보이는 207고지에 미군 관측 장교가 이끄는 관측반을 파견하여 함포 및 항공 지원을 유도하도록 했다. 제2대대는 일몰 시간까지 방어 진지 구축 작업을 서둘렀고, 북한군 진지에 함포 포탄이 집중될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7월 26일 22:00, 북한군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고지는 맹렬한 포화에 휩싸였다. 야포는 물론, SU-76 자주포로 추정되는 직사포까지 동원된 북한군의 공격 준비 사격은 주로 정상 주변에 집중되었다. 181고지에 대한 역습과 동시에 시작된 이 화력 집중은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전 화력이 동원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km의 방어 정면에 나타난 북한군은 자동화기로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에 불과했다. 북한군은 고지 정상 북쪽으로 1.3km 이어진 능선의 북단에서 접근하기 시작하여 다음날인 7월 27일 새벽까지 진격을 늦추는 사격만 하다가 물러갔다.
이는 181고지에 대한 주공을 엄호하기 위해 207고지의 방어 화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분석되었다. 즉, 181고지에 대한 주공이 성공하면 하금호선까지 단숨에 진출하여 207고지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제2대대의 피해를 강요하려는 의도하에 207고지에 대한 역습을 의도적으로 늦춘 것으로 보인다.
제22연대장 강태민 중령은 7월 27일 북한군의 재공격을 예상하고 제2 및 제3대대에 진지 보강을 명령하는 한편, 사단에 보급 지원을 긴급 요청하여 181고지-207고지 방어선을 굳건히 유지했다.
4. 결과 및 영향
7월 29일 김무정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2군단은 제12사단으로 하여금 포항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7월 26일 당시 영주선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로써 영덕-강구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유엔군과 국군은 반격 작전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군 제5사단은 함포 및 공군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어 7월 30일 기준 병력의 40%를 보충 중이었다. 7월 29일 15시, 제23연대 제2, 3대대의 반격에 궤멸하여 활인산과 삼화동(활인산 서쪽 2.9km) 사이 계곡으로 주력을 철수시킨 채 8월 4일까지 경미한 저항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동해안 전선의 제3사단은 8월 9일 강구의 오십천교를 폭파하여 주력이 오십천을 도하 철수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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