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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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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은 1806년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수학자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런던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형식 논리학과 대수적 논리에 기여했다. 드 모르간은 수학적 귀납법 개념을 사용하고, 드 모르간의 법칙을 정립했으며, 런던 수학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말년에는 심령주의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며, 1871년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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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82년의 드 모르간
1882년의 드 모르간
이름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출생1806년 6월 27일
출생지[[파일: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801).svg|border|25x20px|동인도 회사의 기]] 영국령 인도 마두라이
사망1871년 3월 18일
사망지영국 런던
국적영국
학문 분야
분야수학, 논리학
직장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지도 교수존 필립스 히그먼, 조지 피콕, 윌리엄 휴얼
주요 제자에드워드 라우스
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
프레더릭 거스리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제이콥 웨일리
에이다 러브레이스
월터 배젓
리처드 홀트 허턴
프랜시스 거스리
스티븐 조지프 페리
누마 에드워드 하토그
아이작 토드헌터
헨리 로스코
아서 코헨
토머스 호지킨
로버트 벨라미 클리프턴
찰스 제임스 하그레이브
조지 제셀
세들리 테일러
영향조지 불
영향을 받은 사람토머스 멘덴홀
주요 업적드 모르간의 법칙
드 모르간 대수
드 모르간 위계
관계 대수
보편 대수

2. 생애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은 1806년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군인의 아들로 인도 마두라이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1년도 안 되어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82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조지 피콕, 윌리엄 휴얼 등에게 배웠다. 당시 대학의 종교적 시험 요구에 반발하여 문학 석사 학위나 펠로우십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1828년, 종교적 차별 없이 설립된 런던 대학교(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어 약 30년간 재직했다. 그는 찰스 배비지와 친구였으며, 에이다 러브레이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드 모르간은 여러 중요한 저작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산술 개론》(Elements of Arithmetic, 1830), 《형식 논리학》(Formal Logic, 1847), 《삼각 함수론과 쌍대수》(Trigonometry and Double Algebra, 1849) 등이 있다. 1838년에는 페니 시클로피디아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으로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명확히 설명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이 붙은 드모르간의 법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overline{p\wedge q}=\bar{p}\vee\bar{q}

:\overline{p\vee q}=\bar{p}\wedge\bar{q}

이 법칙은 논리곱논리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며, 이후 수학 증명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널리 활용되었다. 드 모르간은 조지 불과 함께 현대 논리학의 기초를 다진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인도 논리학을 재평가하여 서양 논리학과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52년에는 프랜시스 거스리가 제기한 사색 문제를 수학계에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만년에는 심령주의에 관심을 보여 초심리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은 1806년 인도 마두라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던 존 드 모르간(1772–1816) 중령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스(결혼 전 성은 닷슨, 1776–1856)는 역 로그표를 계산한 수학자 제임스 닷슨의 손녀였다.[3]

드 모르간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가 생후 7개월이었을 때 가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인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드 모르간은 스스로를 잉글랜드인도, 스코틀랜드인도, 아일랜드인도 아닌 "미소속" 영국인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특정 칼리지에 소속되지 않은 학생을 부르는 용어였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2] 어머니는 열렬한 영국 성공회 신자였으나 그는 이에 반발하여 무신론자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의 수학적 재능은 14세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는데, 한 가족 친구가 그가 유클리드의 기하학 작도를 자 와 컴퍼스로 정교하게 그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 계기였다.[2] 그는 오리엘 칼리지, 옥스퍼드 출신의 파슨스 씨로부터 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수학보다는 고전 교육을 더 중시했다.

1823년, 16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 대학교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4] 그곳에서 조지 피콕, 윌리엄 휴얼, 조지 비델 에어리, 헨리 해밀턴, 존 필립스 히그만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피콕과 휴얼은 드 모르간이 대수학과 논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었다.

드 모르간은 수학 트리포스(Mathematical Tripos,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학 시험)에서 4등으로 졸업하여 문학사(Bachelor of Arts, B.A.)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당시 케임브리지에서 문학 석사(Master of Arts, M.A.) 학위를 받거나 펠로우십 자격을 얻으려면 영국 성공회 신자임을 증명하는 신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드 모르간은 이러한 종교적 시험에 강하게 반대하여 응시를 거부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그는 케임브리지 내에서 더 높은 학위나 연구직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종교적인 이유로 학문의 기회를 제한했던 배타적인 학문 풍토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링컨 법학원(Lincoln's Inn)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2. 2. 런던 대학교 교수 (1828-1831, 1836-1866)

1828년 2월 23일, 드 모르간은 21세의 나이로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4] 런던 대학교는 옥스퍼드케임브리지와 달리 종교적 시험 없이 가톨릭교도, 유대인, 비국교도 등 다양한 배경의 학생과 교직원을 받아들이는 세속적인 대학으로 1826년에 설립되었다. 대학 평의회는 찰스 배비지존 허셜 같은 유명 인사를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브루엄 경 등이 이끈 채용 위원회는 31명 이상의 후보자 중에서 젊은 드 모르간을 선택했다. 그는 박사 학위가 없는 최초의 수학 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교수로 임용된 후 드 모르간은 수학 교육에 집중했다. 그는 루이 부르동(Louis Bourdon)의 프랑스 교과서를 번역하여 ''대수학의 기초''(1828)를 출판했고,[4] 이어서 널리 사용된 교과서인 ''산술의 기초''(1830)[4]수학 교육 방법론을 다룬 ''수학의 연구와 어려움''(1831)을 저술했다.[4]

그러나 1831년, 대학 운영진과의 갈등 끝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특히 해부학 교수 그랜빌 샤프 패티슨의 해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에 대한 대학 측의 대응 방식에 반발했다. 드 모르간은 학생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교수를 해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항의하며 1831년 7월 24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조지 롱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로젠 교수도 그 뒤를 따랐다.[4][4]

1836년, 드 모르간의 후임이었던 조지 J. P. 화이트 교수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대학 측은 드 모르간에게 복귀를 설득했다. 그는 다시 수학 교수직을 수락했고, 같은 해 런던 대학교는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이름을 바꾸고 킹스 칼리지 런던과 함께 새로 설립된 런던 대학교의 소속 대학이 되었다.

복직 후 드 모르간은 30년 넘게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가르치며 매우 성공적인 수학 교사로 명성을 쌓았다. 그의 강의는 유클리드 기하학부터 변분법까지 폭넓은 내용을 다루었으며, 때로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단순한 공식 암기보다는 수학을 통한 논리적 사고력 함양을 강조했으며, 강의, 독서 과제, 문제 풀이, 개별 지도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러한 교육 철학 덕분에 제임스 조셉 실베스터, 에드워드 루스, 아이작 토드헌터와 같은 뛰어난 수학자들이 그의 제자로 배출되었다. 비수학 전공 학생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았는데, 훗날 논리학과 경제학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는 드 모르간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승으로 평가했다.

1866년, 드 모르간은 다시 한번 대학 측과의 갈등으로 교수직을 떠났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정신 철학 및 논리학 교수직이 공석이 되자, 평의회는 유니테리언 성직자라는 이유로 유력 후보였던 제임스 마티노를 거부하고 조지 크룸 로버트슨을 임명했다. 드 모르간은 이것이 대학 설립 당시의 중요한 원칙이었던 종교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결정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즉시 사임했다.

2. 3. 개인적인 삶

오거스터스는 일곱 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중 네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바스의 외과의 루이스 헨슬리와 결혼한 엘리자(1801–1836), 변호사였던 조지(1808–1890), 그리고 미들섹스 병원의 외과의였던 캠벨 그레이그(1811–1876)가 있었다.

런던으로 이사한 후, 드 모르간은 윌리엄 프렌드(1757–1841)와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종교적인 이유로 학교를 떠났으며, 보험계리사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1837년 가을, 드 모르간은 윌리엄 프렌드의 장녀인 소피아 엘리자베스 프렌드(1809–1892)와 결혼했다. 소피아는 클리블랜드 대주교 프랜시스 블랙번(1705–1787)의 손녀이기도 했다.[8]

드 모르간 부부는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자녀 중에는 동화 작가 메리 드 모르간과 유명한 도예가 윌리엄 드 모르간이 있었다. 윌리엄 드 모르간은 화가 에블린 드 모르간과 결혼했다. 차남 조지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와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

드 모르간은 독특한 개인적 특성을 지녔다. 친구인 헨리 브루엄 경이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대학 측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그는 자신에게 부적절한 명칭이라며 거절했다. 그는 라틴어 구절 Homo paucarum literarumla("문자가 적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며 수학 및 논리학 분야에서의 광범위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겸손함을 보였다.

그는 런던 외 지역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거나 동료 과학자들이 시골에서 열리는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의를 즐기는 동안에도 그는 런던의 도서관에 머무르기를 선호했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멀어질수록 행복에서 멀어진다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와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드 모르간은 왕립 학회 회원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며, 학회 회의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학자들과 공통된 관심사나 공감대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가 관찰이나 실험을 하기에는 신체적으로 허약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선거에서 투표한 적이 없었고, 영국 하원, 런던 타워,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은 영국의 주요 명소들을 방문한 적도 없었다.

엄격한 잉글랜드 교회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드 모르간은 공개적으로 비국교도임을 표방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비국교도로 남았기 때문에 케임브리지에서의 더 높은 지위를 얻을 기회를 잃었고, 교회 의식 없이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종교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행정부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으며, 결국 이 문제로 교수직을 사임하기까지 했다. 사적으로 드 모르간은 분리주의자였으며, 유니테리언 가문 출신인 아내를 통해 기독교적 이신론에 기반한 성경 해석을 받아들였다. 말년에는 더욱 이신론에 가까워져 자유 기독교 연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는 종종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를 종파주의적인 공격으로 일축했다. 드 모르간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다음과 같이 신념을 밝혔다. "나는 나의 미래를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맡깁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만, 나의 입술로는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시대에는 그러한 고백이 항상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2. 4. 은퇴와 죽음

60세가 되던 해(1866년), 드 모르간의 제자들은 그에게 연금 500GBP를 확보해주었다. 그러나 이후 불행이 잇따랐다. 2년 후 아들 조지—드 모르간이 듣는 것을 좋아했던 "젊은 베르누이"로 불린—가 사망했고, 이어서 딸도 세상을 떠났다. 1866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직에서 사임한 지 5년 후인 1871년 3월 18일, 드 모르간은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만년에는 심령주의에 관심을 보여 투시 등 초심리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이는 윌리엄 크룩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3. 주요 업적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은 수학적 논리, 특히 대수적 논리 분야의 발전에 선구적인 기여를 했으며, 추상대수학의 초기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조지 불과 함께 현대 논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847년에 출판된 저서 『형식 논리』(Formal Logiceng)이며, 이 책과 관련 연구를 통해 논리학을 수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의 이름을 딴 드 모르간의 법칙은 현대 논리학과 수학, 컴퓨터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overline{p\wedge q}=\bar{p}\vee\bar{q}

:\overline{p\vee q}=\bar{p}\wedge\bar{q}

이 법칙은 논리곱(AND)과 논리합(OR)이 부정을 통해 상호 변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수학 분야에서는 1849년 저서 『삼각법과 이중 대수』(Trigonometry and Double Algebraeng)를 통해 기호 대수학을 넘어선 "이중 대수학" 개념을 제시하며 추상 대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드 모르간은 1838년 페니 시클로피디아(Penny Cyclopaedia)에 기고한 '귀납법 (수학)' 항목에서 처음으로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백과사전에 총 712편의 글을 기고하는 등 과학과 수학 지식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그는 『산술 개론』(Elements of Arithmeticeng, 1830)을 비롯한 다수의 교육용 저서를 집필했으며, 그의 저작 목록은 매우 방대하다. 독특한 저서로는 잡지 『아테네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역설의 예산』(A Budget of Paradoxeseng)이 있다.

3. 1. 수학적 논리학

드 모르간은 수학적 논리, 특히 대수적 논리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추상대수학의 초기 발전에도 기여했다.[9] 그의 논리학에 대한 기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드 모르간 이전에는 논리학, 특히 형식 논리가 주로 철학의 영역이었으나, 그는 이를 수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둘째, 그는 관계의 계산법을 개발하여 대수적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논리를 추상화했다.

영국에서 논리학 연구는 1826년 리처드 와틀리의 『논리학 원리』 출판 이후 다시 활발해졌다. 이 책은 드 모르간과 부울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동시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윌리엄 휘웰은 논리학, 특히 와틀리가 강조한 삼단논법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과학적 추론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코틀랜드 철학자 윌리엄 해밀턴 경은 와틀리가 논리학을 단순히 "추론을 위한 문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실베스트르 프랑수아 라크루아의 저작에 영향을 받은 드 모르간은 와틀리의 논리학이 지닌 형식성, 특히 삼단논법에 대한 강조가 수학에 유용하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교육 관련 저술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과과정에 논리학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드 모르간의 첫 논리학 저작은 『논리학의 첫 번째 개념』(First Notions of Logic, 1839)으로, 유클리드의 『원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논리학 기초를 소개하기 위한 교육적 목적을 가졌다.

그의 첫 번째 본격적인 논리학 연구 논문은 1846년 케임브리지 철학회 논문집에 실린 "삼단논법의 구조에 관하여"(On the Structure of the Syllogism)이다. 이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특히 삼단논법을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는 체계를 제시했으며, 현재 드 모르간의 법칙으로 알려진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수리 논리학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라이프니츠가 한 세기 전에 유사한 아이디어를 구상했지만, 그의 저작은 190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 Gottfried Ploucquetde 등 다른 학자들의 유사한 시도들은 출판되지 못했다.

:\overline{p\wedge q}=\bar{p}\vee\bar{q}

:\overline{p\vee q}=\bar{p}\wedge\bar{q}

이 법칙은 논리곱(AND)과 논리합(OR)이 부정을 통해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후 수학적 증명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드 모르간의 논문에서 언급된 술어의 양화 문제는 철학자 윌리엄 해밀턴 경과의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해밀턴은 "수학은 논리적 습관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수학의 논리학적 유용성을 부정했다. 이 논쟁은 『아테네움』 지면과 각자의 출판물을 통해 이어졌는데, 결국 해밀턴과 그의 지지자들의 주장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음이 드러났고, 드 모르간의 수학적으로 엄밀한 설명이 타당함을 입증했다. 궁지에 몰린 해밀턴은 드 모르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9] 이 논쟁은 조지 불이 『논리의 수학적 분석』(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 1847)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드 모르간은 자신의 논문 내용을 확장하여 『형식 논리, 또는 추론의 계산, 필연적이고 가능성이 있는』(Formal Logic, or The Calculus of Inference, Necessary and Probable, 1847)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부울의 저작과 같은 주에 출판되었으나, 초기에는 부울의 업적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논리학자들은 드 모르간의 선구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C. I. 루이스는 "새로운 논리 형식 발명에서의 독창성, 재치, 명료한 예시, 그리고 글의 명확성과 생동감은 논리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9] 드 모르간은 부울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지했으며, 그의 저작 교정을 돕고 옹호했다. 부울 사후에는 그의 가족이 정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드 모르간은 이후에도 논리학 연구를 계속하여, 특히 "삼단논법에 관하여, 4호"(On the Syllogism, No. IV, 1860)와 저서 『제안된 논리 체계의 개요』(Syllabus of a Proposed System of Logic, 1860)에서 관계의 계산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삼단논법을 이용한 추론이 관계의 합성 개념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보였다. 이 연구는 찰스 샌더스 퍼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으며, 퍼스는 이를 '친족 논리'라고 칭하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현대 논리학의 많은 발전이 드 모르간의 대수적 논리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타르스키 또는 비르크호프의 동시대 작업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특히 , 드 모르간, 퍼스 및 슈뢰더와 같은 이 분야의 가장 중요한 창시자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10] 실제로 1860년 드 모르간이 제시한 정리는 이후 슈뢰더에 의해 2진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활용되었으며, 현재 슈뢰더 규칙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드 모르간은 조지 불과 함께 현대 논리학의 기초를 다진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형식 논리를 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관계 논리를 창안함으로써 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3. 2. 대수학

드 모르간은 수학적 논리와 더불어 추상 대수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조지 피콕 등이 발전시킨 기호 대수학의 초기 지지자였으나, 곧 그 한계를 느끼고 실망했다. 기호 대수학은 기호의 조작을 산술적 의미와 분리하여 추상 대수학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지만, 음수나 허수 등의 개념을 기계적으로 다룰 수는 있어도 그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드 모르간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대 인도 수학자 바스카라 2세 역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대수학 관련 저작인 루이 부르동(Louis Bourdon)의 프랑스 교과서 번역본 ''대수학의 기초''(1828)와 직접 저술한 교재 ''대수학 원론''(1835)은 주로 교육적인 목적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그의 후속 연구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1839년부터 1844년까지 드 모르간은 "대수학의 기초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케임브리지 철학회 회보에 네 편의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논문들에서 그는 자신이 "논리적" 또는 "이중" 대수학이라고 부른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기하 대수학의 초기 형태에 해당한다. 이 연구는 특히 윌리엄 로언 해밀턴 경이 사원수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논문 시리즈 중 제 II편에는 현재 라고 불리는 개념의 정의가 포함되어 있으며, 제 IV편에서는 해밀턴이 해결하지 못했던 "삼중" 대수학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드 모르간은 이 연구를 통해 완전한 추상 대수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특한 단위 기호 체계를 발명하고 서로에 대한 작용 방식을 정의하는 관계를 조사하거나 할당한다."[11]


드 모르간은 자신의 대수학 연구를 집대성하여 1849년에 ''삼각법과 이중 대수''(Trigonometry and Double Algebra)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삼각법에 대한 내용과 함께, 산술에서 기호 대수학을 거쳐 "이중" 대수학(기하 대수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복소수의 구성을 통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그의 이전 연구를 종합했다. 그는 이 책에서 대수 구조를 정의하는 여러 법칙들을 명시적으로 열거했는데, 이는 화이트헤드가 훗날 보편 대수학이라고 명명한 개념의 초기 형태 중 하나로 여겨진다. 드 모르간은 덩컨 그레고리가 제시한 결합 법칙을 명시적으로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교환 법칙과 같은 특정 법칙들의 적용 여부를 선택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후 해밀턴이 사원수를 발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또한 쌍곡선 함수를 소개하고 원형 삼각법과 쌍곡선 삼각법을 비교 분석한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3. 3. 기타 업적

드 모르간은 확률론, 미적분학, 논리학 등 다양한 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수학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권의 교과서를 저술했다. 대표적으로 ''산술의 기초''(Elements of Arithmetic영어, 1830), ''수학의 연구와 어려움''(On the Study and Difficulties of Mathematics영어, 1831), ''삼각법과 쌍대수학''(Trigonometry and Double Algebra영어, 1849), ''형식 논리''(Formal Logic영어, 1847) 등이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30년 넘게 수학 교수로 재직하며 성공적인 교육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강의는 유클리드에서 변분법까지 폭넓은 내용을 다루었으며, 기계적인 암기보다는 추론 능력 함양을 강조하는 교육 철학을 가졌다. 그의 제자 중에는 제임스 조셉 실베스터, 에드워드 루스, 아이작 토드헌터와 같은 수학자 및 교육자가 있으며,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 역시 그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제본스는 드 모르간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사로 묘사했다.

드 모르간은 과학 지식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그는 유용한 지식 보급 협회(SDUK)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학과 어려움에 대한 연구''(On the Study and Difficulties of Mathematics영어, 1831), ''미분 및 적분 미적분학의 기본 설명''(Elementary Illustrations of the Differential and Integral Calculus영어, 1832), ''미분 및 적분 미적분학''(The Differential and Integral Calculus영어, 1842) 등 다수의 책을 SDUK를 통해 출판했다. 또한, 페니 시클로피디아(Penny Cyclopaedia)에 712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1838년 이 백과사전의 '귀납법 (수학)' 항목 설명에서 처음으로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개념을 명확히 했다.

그는 보험 계리 분야에서도 활동하며 여러 생명 보험 회사에서 컨설팅 보험 계리사로 일했다. ''확률론과 생명 보험 및 보험 사무소에 대한 적용 에세이''(An Essay on Probabilities and Their Application to Life Contingencies and Insurance Offices영어, 1838)를 출판했으며, 벤자민 곰퍼츠의 사망률 법칙을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드 모르간은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저작 목록은 회고록에서 15페이지에 달한다. 그의 독특한 저서 중 하나인 ''역설의 예산''(A Budget of Paradoxes영어)은 잡지 ''아테네움''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4. 인도 수학 및 논리학 연구

1850년 드 모르간은 존 엘리엇 드링크워터 베튠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받았다. 이 책은 독학한 인도 수학자 람춘드라가 직접 저술하고 출판한 ''최대 및 최소 문제에 관한 논문''이었다. 드 모르간은 이 저작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람춘드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그는 1859년 유럽 독자들을 위해 런던에서 이 책을 다시 출판하도록 주선했다. 드 모르간은 책의 서문에서 고전 인도 수학 사상을 소개하고 현대 인도 수학의 부흥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작품을 검토하면서 나는 단순한 장려할 만한 가치뿐만 아니라 특이한 종류의 가치를 발견했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가치를 장려하는 것은 인도의 토착 정신을 회복하려는 토착 노력을 증진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편, 고전 인도 논리학이 드 모르간 자신의 논리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5] 조지 불의 아내이자 조지 에베레스트의 조카인 메리 에베레스트 불은 인도 사상, 특히 인도 논리가 드 모르간뿐만 아니라 남편 조지 불에게도 삼촌 조지 에베레스트를 통해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1830~65년의 수학적 분위기에 바베지, 드 모르간, 조지 불과 같은 세 사람의 강렬한 힌두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해 보라. 그것이 벡터 해석과 현재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데 사용되는 수학을 생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6]

5. 심령주의 연구

말년에 드 모르간은 심령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투시 현상에 흥미를 느껴 미국의 심령 현상 중개인 마리아 헤이든(Maria Hayden)과 함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의 결과는 그의 아내인 소피아 드 모르간(Sophia De Morgan)이 저술하여 익명으로 출판한 책 ''From Matter to Spirit: The Result of Ten Years' Experience in Spirit Manifestations|물질에서 정신으로: 영적 현상에 대한 10년간의 경험의 결과eng''(1863)에 기록되었다.

소피아는 심령주의를 확신했던 것으로 보이나, 드 모르간 자신은 심령 현상에 대해 확고한 신봉자도, 그렇다고 완전한 회의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이 심령 현상을 무조건 배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현상들이 아직 물리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자연력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에서 정신으로''(1863)의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주가 아무도 모르는 반쯤 되는 50만 개의 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며, 이 힘의 작은 부분, 예를 들어 5천 개가 모든 [심령주의] 현상을 생산할 수 있거나, 그들 사이에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본 물리적 설명은 쉽지만, 형편없이 불충분합니다. 심령주의 가설은 충분하지만, 무겁게 어렵습니다. 시간과 생각이 결정할 것이며, 두 번째는 첫 번째에게 더 많은 실험 결과를 요청합니다.


드 모르간은 영국에서 심령주의 연구에 관심을 보인 초기의 저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윌리엄 크룩스 역시 심령주의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6. 유산

아서 카우퍼 래니어드와 드 모르간의 아들인 조지 캠벨 드 모르간은 런던 수학회 설립을 구상했다. 이는 단순히 수학 논문을 접수하는 것을 넘어, 발표된 논문을 읽고 토론하는 새로운 방식의 학회 운영을 목표로 했다. 1865년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열린 첫 회의에서 드 모르간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아들은 초대 비서가 되었다.

드 모르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런던 수학회는 본부 건물을 드 모르간 하우스(De Morgan House영어)로 명명했으며,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 이름은 드 모르간 메달이다. 또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수학과의 학생회 이름도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학회(Augustus De Morgan Society영어)로 불린다.

그가 소장했던 방대한 양의 수학 및 과학 관련 서적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사후 새뮤얼 존스-로이드가 이를 인수하여 런던 대학교에 기증했다. 이 장서들은 현재 상원 하우스 도서관 컬렉션의 일부로 보존되어 있다.

달의 충돌구 중 하나인 드 모르간 충돌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간행물 Induction (mathematics) The Penny Cyclopedia 1838
[2] 웹사이트 Augustus de Morgan and Formal Logic http://scihi.org/aug[...] SciHi Blog 2019-06-27
[3] 웹사이트 Morgan, Augustus de (1806–1871), mathematician and historian https://www.oxforddn[...]
[4] acad
[5] 서적 Indian Logic http://dx.doi.org/10[...] 2013-02-01
[6] 서적 Indian Thought and Western Science in the Nineteenth Century http://archive.org/d[...] The Ceylon National Review 1901
[7] 웹사이트 History https://www.lms.ac.u[...]
[8] 간행물 Frend, William
[9] 서적 Survey of Symbolic Logic https://archive.org/[...] 1918
[10] 논문 Nineteenth century roots of algebraic logic and universal algebra Janos Bolyai Mathematical Society 1991
[11] 서적 Universal Algebra 1898
[12] 서적 数学基礎論入門 培風館 1979-03-10
[13]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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