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프랑스의 요리사이자 요식업계의 거장으로, 근대 프랑스 요리를 체계화하고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65년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시작하여, 군 복무 중 통조림 기술을 연구했으며, 세자르 리츠와 협력하여 몬테카를로, 런던 등지의 호텔 주방을 운영하며 멜바 피치, 멜바 토스트 등 다양한 요리를 개발했다. 1903년에는 프랑스 요리의 지식과 기술을 집대성한 저서 『요리의 안내』를 출판하여 프랑스 요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28년에는 세계 요리사 협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35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요리사 - 알랭 뒤카스
프랑스 요리사 알랭 뒤카스는 1980년부터 셰프로 활동하며 세계 각지에 고급 레스토랑을 개점, 미슐랭 스타를 다수 획득하고 요리 학교 운영 및 저술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업가이다. - 프랑스의 요리사 - 기 사부아
프랑스의 유명 셰프 기 사부아는 파리에 위치한 대표 레스토랑으로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하고, 프랑스 음식 문화 및 유산 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며 프랑스 미식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1846년 출생 - 찰스 스튜어트 파넬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국민주의 지도자였으며, 아일랜드 의회에서 토지 개혁과 자치 운동을 이끌었으나, 피곳 사건과 오셰이 부인과의 불륜으로 인해 정치적 몰락을 겪었다. - 1846년 출생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는 폴란드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역사소설 삼부작과 《쿠오 바디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폴란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35년 사망 - 김철주 (군인)
김철주는 김형직과 강반석의 아들이자 김일성의 동생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유격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1935년 전사한 항일운동가이다. - 1935년 사망 - 윌 로저스
윌 로저스는 1879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한 체로키족 혈통의 미국의 배우, 유머 작가, 칼럼니스트, 사회 평론가로, 로프 기술을 시작으로 영화, 라디오,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며 미국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사회와 정치 문제를 풍자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
원어 이름 | Georges Auguste Escoffier |
출생일 | 1846년 10월 28일 |
출생지 | 빌뇌브루베, 프랑스 |
사망일 | 1935년 2월 12일 |
사망지 | 몬테카를로, 모나코 |
직업 | 셰프, 레스토랑 경영자, 작가 |
자녀 | 폴, 다니엘, 제르멘 |
![]() | |
서명 | |
![]() | |
훈장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오피시에 |
기타 | |
일본 에스코피에 협회 | 회장: 호텔 오쿠라 명예 총주방장 겐모치 쓰네오 관련 보도: "국내 프랑스 요리계가 영예 칭호, 이시다 셰프 37년째 감개무량" (요미우리 신문, 2005년 6월 21일 도쿄 조간 아키타판 34쪽) "기타큐슈의 셰프 2명에게 영예 칭호, 일본 에스코피에=기타큐슈" (요미우리 신문, 2006년 7월 19일 서부 조간 기타큐슈판 32쪽) |
2. 생애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1846년 10월 28일, 프랑스 니스 근처의 작은 마을 빌뇌브루베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니스에 있는 삼촌의 레스토랑에서 요리 견습을 시작하며 요리사의 길에 들어섰다.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던 중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라인 군의 주방장으로 복무했다. 이 군 복무 경험은 그가 식품 보존, 특히 통조림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후 칸에서 잠시 자신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의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은 1884년 몬테카를로의 그랜드 호텔에서 호텔리어 세자르 리츠를 만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 수십 년간 파트너로서 호텔 및 요식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함께 스위스 루체른의 그랜드 호텔 내셔널을 거쳐, 1890년 런던의 사보이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에스코피에는 사보이 호텔의 주방을 총괄하며 현대적인 주방 시스템을 도입하고, 넬리 멜바를 위해 만든 멜바 피치와 멜바 토스트 등 유명 요리를 창조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897년 말, 에스코피에와 리츠는 식자재 납품 비리 등 재정적인 문제로 사보이 호텔에서 해고되는 스캔들을 겪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미 설립한 '리츠 호텔 개발 회사'를 통해 1898년 파리에 리츠 파리, 1899년 런던에 칼튼 호텔을 성공적으로 개장하며 재기했다. 특히 칼튼 호텔에서 에스코피에는 처음으로 단품 메뉴(à la carte)를 도입하는 등 혁신을 이어갔다.
1913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의 여객선 SS 임페라토르호에 승선했을 때, 에스코피에는 황제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고, 이에 감명받은 황제로부터 "요리사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별칭은 그의 명성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되었다.
리츠가 건강 문제로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에스코피에는 1920년 은퇴할 때까지 칼튼 호텔을 지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막내아들을 전쟁으로 잃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아키야마 도쿠조, 호찌민 등 여러 제자를 길러냈으며, 1928년에는 세계 요리사 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에스코피에는 1935년 2월 12일, 아내 델핀 다피스가 사망한 지 엿새 만에 몬테카를로에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고향 빌뇌브루베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견습
에스코피에는 오늘날 알프마리팀주에 있는, 니스 근처의 빌뇌브루베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재단이 운영하는 뮤제 드 랄 퀼리네르(Musée de l'Art Culinaire)이다. 어린 시절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12세에 그를 학교에서 그만두게 하고 니스에 있는 삼촌의 레스토랑, 르 레스토랑 프랑세(Le Restaurant Français)의 부엌에서 견습을 시작하게 했다. 견습생으로서 오귀스트는 삼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매를 맞았으며, 작은 키 때문에 더욱 표적이 되었다. 그는 오븐 문을 안전하게 열 수 없을 정도로 키가 작아 결국 굽이 높은 부츠를 신게 되었다.[3]에스코피에는 요리와 주방 관리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보여 근처의 오텔 벨뷰(Hôtel Bellevue)에 고용되었고, 그곳에서 세련된 파리 레스토랑인 르 쁘띠 뮬랭 루주(Le Petit Moulin Rouge)의 주인이 그에게 1865년 19세의 나이에 꼬미-로티쇠르(commis-rôtisseur, 견습 구이 요리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에스코피에는 현역 군 복무 명령을 받고 군 요리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에스코피에는 거의 7년 동안 군에서 복무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전역의 여러 병영(니스에 있는 그의 오래된 집에서 불과 5km도 떨어지지 않은 빌프랑슈쉬르메르에서 5개월 포함)에 배치되었고,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후에는 라인 군의 셰프 드 퀴진(chef de cuisine, 주방장)으로 메츠에서 복무했다. 그의 군 복무 경험은 그가 식품 통조림 기술을 연구하게 했다.
1878년 이전 언젠가 그는 칸에 르 페장 도르(Le Faisan d'Or, 황금 꿩)라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2. 2. 군 복무와 통조림 연구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에 징집되어 군 참모본부 제2부 소속 요리사로 복무했다. 이 시기 에스코피에는 군대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부족한 식재료를 가지고도 요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유명세를 얻은 뒤, 프랑스 정부에 통조림 공장 건설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전쟁 중 식량 보급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3. 세자르 리츠와의 만남과 협력

1884년, 에스코피에는 아내와 함께 몬테카를로로 이주하여 새로 문을 연 그랜드 호텔의 주방을 맡게 되었다. 이곳에서 호텔 지배인인 세자르 리츠를 만나 협력 관계를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리비에라는 겨울 휴양지였으므로, 여름에는 리츠가 관리하는 스위스 루체른의 그랜드 호텔 내셔널(Grand Hôtel National)에서 주방을 운영했다.[5][4]
1890년, 에스코피에는 리츠와 함께 리처드 도일리 카트의 초청을 받아 런던에 새로 개장한 사보이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총지배인 루이 에케나르(Louis Echenard)도 이 팀에 합류했다.[5] 리츠는 이들을 "런던 정복을 위한 작은 호텔맨 군대"라고 칭했으며, 에스코피에는 프랑스 출신 요리사들을 영입하여 주방 시스템을 혁신했다. 사보이 호텔은 개장과 동시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웨일스 공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이 주요 고객이 되었다. 이전까지 공공장소에서의 식사를 꺼리던 귀족 여성들도 사보이 호텔의 식당에는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5]
에스코피에는 사보이 호텔 재직 시절 여러 유명한 요리를 창조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6][7]
연도 | 요리 이름 | 설명 | 비고 |
---|---|---|---|
1893년 | 멜바 피치 (Pêche Melba) | 복숭아, 바닐라 아이스크림, 라즈베리 소스로 만든 디저트 | 오스트레일리아 가수 넬리 멜바 기념 |
1897년 | 멜바 토스트 (Melba Toast) | 얇고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 넬리 멜바 기념 |
- | 봄브 네로 (Bombe Néro) | 불 붙인 아이스크림 디저트 | |
- | 프레즈 알라 사라 베르나르 (Fraises à la Sarah Bernhardt) | 파인애플과 퀴라소 셔벗을 곁들인 딸기 요리 | 배우 사라 베르나르 기념 |
- | 베이저 드 비에르주 (Baisers de Vierge) | 바닐라 크림과 설탕에 절인 흰 장미, 제비꽃 꽃잎을 곁들인 머랭 | |
- | 수프림 드 볼라유 자네트 (Suprêmes de volaille Jeannette) | 푸아그라를 곁들인 차가운 젤리 형태의 닭가슴살 요리 | |
- | 샐러드 레잔 (Salad Réjane) | 배우 가브리엘 레잔 기념 | |
- | 투르네도 로시니 (Tournedos Rossini) | 푸아그라와 트러플을 곁들인 소 안심 스테이크 |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 기념 (에스코피에 창작 여부 논란 있음)[8] |
그러나 1897년, 에스코피에와 리츠는 사보이 호텔을 떠나야 했다. 주방에서 발생한 막대한 양의 와인 분실 사건과 에스코피에가 외부 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았다는 의혹 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에스코피에와 리츠는 1898년 프랑스 파리에 리츠 파리(Hôtel Ritz Paris)를 열었고, 이듬해인 1899년에는 런던에 칼튼 호텔(Carlton Hotel)을 개업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칼튼 호텔에서는 에스코피에가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단품 메뉴(à la carte)를 도입하여 현대적인 식사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901년, 세자르 리츠가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에스코피에는 리츠 사후인 1919년까지 리츠 런던(Ritz London)과 칼튼 호텔 운영에 관여했다. 이 시기 칼튼 호텔 주방에서는 훗날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젊은 호찌민(Hô Chí Minh)이 페이스트리 셰프 수습생으로 일하며 에스코피에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에스코피에와 리츠의 파트너십은 로마의 그랜드 호텔을 비롯하여 전 세계 여러 리츠호텔(Hôtel Ritz) 설립으로 이어지며 호텔 및 요식업계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2. 4. 사보이 호텔에서의 스캔들과 독립
1897년, 사보이 호텔 이사회는 사업이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회사 수익이 감소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에 이사회는 비밀리에 회계 감사 회사를 고용했고, 이 회사는 다시 사립 탐정 회사를 고용하여 리츠, 에케나르, 에스코피에의 행적을 조사했다. 6개월간의 조사 끝에, 이들은 상당한 규모의 부정 행위 증거를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를 이사회에 제출했다.[3]1898년 3월 8일, 리츠, 에케나르, 에스코피에는 이사회에 출석하여 "...중대한 과실과 의무 위반 및 부실 경영"이라는 이유로 사보이 호텔에서 해고되었다. 그들은 그날 즉시 호텔을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리츠와 에스코피에에게 충성하던 주방 및 호텔 직원 대부분이 동요했고, 사보이 호텔 주방에서 벌어진 소란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사보이 호텔의 주방 반란"과 같은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8] 스타 신문은 "세 명의 매니저가 해고되었고, 16명의 격렬한 프랑스와 스위스 요리사들(그중 일부는 긴 칼을 들고 반항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이 강력한 런던경찰청 경찰의 도움으로 쫓겨났다"고 보도했다.[9][10] 분쟁의 진짜 내용은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았으며, 리츠와 그의 동료들은 부당 해고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준비까지 했다.[3]
결국 양측은 비공개 합의에 이르렀다. 1900년 1월 3일, 리츠, 에케나르, 에스코피에는 "서명된 자백서"를 작성했지만, 이 자백서는 "사용되거나 공개되지 않기로" 약속되었다.[11] 에스코피에의 자백 내용은 특히 심각했는데, 그는 사보이 호텔의 식자재 공급업체로부터 구매액의 최대 5%에 달하는 뇌물(뒷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12][3] 예를 들어, 에스코피에가 공급업체에 달걀 600개를 주문하면, 공급업체는 에스코피에에게 뇌물을 지불하고 그의 묵인 하에 실제로는 450개만 납품하는 방식으로 차액을 챙기는 수법이었다. 이로 인해 사보이 호텔이 입은 손실액은 1.6만파운드를 넘었으며, 에스코피에는 8천파운드를 변제해야 했지만, 당시 그의 전 재산이 500GBP밖에 되지 않아 이 금액으로 채무를 정산할 수 있었다.[3] 리츠는 4173GBP를 지불했지만, 자신은 어떠한 불법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다만 그는 선호하는 손님과 직원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선물을 제공하고, 호텔 비용으로 자신의 집 식사와 세탁비를 처리하는 등의 규정 위반 사실은 인정했다.[3]
2. 5. 요리계의 황제
1890년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 주방장으로 세자르 리츠(César Ritz)와 함께 일하게 된 에스코피에는 여러 유명 요리를 개발했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가수 넬리 멜바(Nellie Melba)를 위해 1893년 만든 디저트 피치 멜바(Peach Melba)와 미식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의 이름을 딴 투르느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가 있다.그러나 1897년, 주방에서 대량의 와인이 사라지고 에스코피에가 개인적으로 수수료를 받고 조수를 고용한 사실 등이 문제가 되어 리츠와 함께 사보이 호텔을 떠나게 되었다.[5] 이때 두 사람과 동료들은 이미 리츠 호텔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적인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스코피에는 1898년 파리에 리츠 파리(Hôtel Ritz Paris)를, 이듬해인 1899년에는 런던에 칼튼 호텔(Carlton Hotel)을 열고 주방을 총괄하며 요리사들을 모집했다. 특히 런던 칼튼 호텔은 사보이 호텔의 상류층 고객들을 대거 유치하며 성공을 거두었다.[5] 에스코피에는 이때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코스 메뉴를 도입하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의 고급 요리 외에도 리츠 호텔의 애프터눈 티는 파리와 런던에서 유행했지만, 에스코피에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잼, 케이크, 페이스트리를 먹고 한두 시간 뒤에 어떻게 저녁 식사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겠는가?"라며 음식과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는 우려를 표했다.[13]
1913년, 에스코피에는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의 대형 여객선 SS 임페라토르호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만났다. 여객선의 요리는 리츠가 감독했고, 레스토랑은 에스코피에의 런던 칼튼 레스토랑을 모델로 했다. 에스코피에는 황제의 프랑스 방문 기간 동안 배의 주방을 책임졌다. 그는 146명의 독일 고위 인사들에게 성대한 오찬을 제공했고, 저녁 만찬에는 황제가 좋아하는 딸기 푸딩을 특별히 만들어 '프레즈 임페라토르'(Fraise Impératrice)라고 이름 붙였다. 이에 감명받은 빌헬름 2세는 다음 날 아침 에스코피에를 만나 "나는 독일의 황제이지만, 당신은 요리사의 황제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언론에 널리 퍼지며 에스코피에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14]
리츠는 1901년 신경쇠약으로 쓰러진 뒤[13] 1906년 런던 리츠 호텔 개장 이후 점차 은퇴했고, 에스코피에는 1920년 은퇴할 때까지 칼튼 호텔의 핵심 인물로 남았다.[5]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주방을 지켰으나, 이 기간에 막내아들을 전쟁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5] 당시 칼튼 호텔에서의 그의 요리에 대해 더 타임스는 "에스코피에에게 색깔은 매우 중요했다. 흰색과 분홍색 장미, 은빛 잎사귀로 장식된 테이블에서 열린 연회가 기억나는데, 이는 흰색과 분홍색으로 통일된 만찬의 배경이 되었다. 보르시치가 가장 진한 색이었고, 파프리카 치킨 필레가 그다음, 송아지 고기 요리가 가장 밝은 색이었다"고 회상했다.[15]
에스코피에는 여러 유명 인물을 제자로 두었다. 파리 리츠 호텔에서는 훗날 일본 황실 요리사가 된 아키야마 도쿠조를 가르쳤고,[16] 칼튼 호텔에서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가 된 호찌민(Hô Chí Minh)이 페이스트리 셰프 수습으로 그의 지도를 받았다.
1928년, 에스코피에는 세계 요리사 협회(World Association of Chefs' Societies) 창설에 기여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2. 6. 제1차 세계 대전과 은퇴
리츠는 1906년 런던 리츠 호텔을 개장한 후 점차 활동에서 물러났고, 에스코피에는 1920년 은퇴할 때까지 칼튼 호텔의 간판으로 남았다.[5]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도 칼튼 호텔 주방을 계속 운영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막내아들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5] 전쟁 중에도 그의 요리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더 타임스는 당시 칼튼 호텔에서 열린 연회를 회상하며 "에스코피에에게 색깔은 매우 중요했고, 테이블 장식은 흰색과 분홍색 장미와 은빛 잎사귀였으며, 흰색과 분홍색으로 통일된 만찬의 배경이 되었다. 보르시치가 가장 진한 색을 띠었고, 파프리카 치킨 필레가 그다음이었으며, 송아지 고기 요리가 가장 밝은 색이었다"고 보도하며 그의 세심함을 전했다.[15]1928년, 그는 세계 요리사 협회 설립에 기여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2. 7. 사망
에스코피에는 1878년 8월 28일 델핀 다피스(Delphine Daffis)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1935년 2월 6일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14] 아내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5년 2월 12일, 에스코피에는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빌뇌브루베의 가족 납골당에 안장되었다.3. 업적과 유산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현대 프랑스 요리의 기틀을 마련하고 체계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세자르 리츠와 협력하여 런던의 사보이 호텔, 파리의 리츠 파리, 런던의 칼튼 호텔 등 세계적인 호텔의 주방을 이끌며 명성을 얻었다.[5][4] 특히 칼튼 호텔에서는 처음으로 코스 메뉴를 도입하여 현대적인 식사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903년에 출간한 기념비적인 저서 『요리의 안내』(Le Guide Culinaire프랑스어)이다. 이 책은 5,000가지 이상의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프랑스 요리의 표준을 제시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요리사들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넬리 멜바를 위한 멜바 피치나 조아키노 로시니의 이름을 딴 투르네도 로시니와 같이 유명 인사들을 기리는 창의적인 요리들을 개발하여 프랑스 요리의 지평을 넓혔다.[6][7][8]
에스코피에는 단순히 요리 기술을 발전시킨 것을 넘어, 요리사라는 직업의 위상을 높이고 전문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과 교육에 대한 열정은 후대 요리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요리의 황제'라는 명성을 얻게 된 배경이 되었다.
3. 1. 프랑스 요리의 체계화와 현대화
에스코피에는 1903년 그의 첫 저서인 『요리의 안내』(Le Guide Culinaire프랑스어)를 출판하며 프랑스 요리의 체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은 근대 프랑스 요리의 지식과 기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5,000가지가 넘는 요리법을 담고 있다. 에스코피에가 살아있는 동안 세 차례의 대규모 개정이 이루어졌고, 최종판인 제4판은 1921년에 출판되었다. 『요리의 안내』는 출판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 교과서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책이다.또한, 1906년에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방선이 운항하는 여객선 '아메리카호'의 레스토랑 고문을 맡아 메뉴 개발에 참여했다. '아메리카호'의 첫 항해 전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배를 방문하여 에스코피에의 요리를 맛본 후 "나는 독일 황제지만, 당신은 요리의 황제입니다"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3. 2. 요리책 저술과 교육

에스코피에는 리츠 호텔에서의 활동 외에도 요리책 저술을 통해 프랑스 요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03년 그는 첫 저서인 ''르 기드 퀴리네르'' (Le Guide Culinaire|르 기드 퀼리네르fra, 요리 안내)를 출판했다. 이 책은 근대 프랑스 요리의 지식과 기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5,000가지가 넘는 방대한 양의 레시피를 수록하고 있다. 에스코피에 생존 중 세 차례의 대규모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마지막 개정판인 제4판은 1921년에 출판되었다. ''르 기드 퀴리네르''는 출판된 지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 교과서로 여겨지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1906년, 에스코피에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해운사가 운항하는 여객선 '아메리카호'의 선내 레스토랑 고문이 되어 메뉴를 고안했다. '아메리카호'의 처녀 항해 전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배를 방문하여 에스코피에의 요리를 맛보고 "나는 독일 황제지만, 당신은 요리의 황제입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에스코피에가 저술한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Le Traité sur L'art de Travailler les Fleurs en Cire|르 트레떼 쉬르 랄 드 트라바이예 레 플뢰르 앙 시르fra'' (밀랍꽃 제작 예술에 관한 논문) (1886)
- ''르 기드 퀴리네르'' (Le Guide Culinaire|르 기드 퀼리네르fra) (1903)
- ''Les Fleurs en Cire|레 플뢰르 앙 시르fra'' (개정판, 1910)
- ''Le Carnet d'Épicure|르 카르네 데피퀴르fra'' (미식가의 노트),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발행된 월간지
- ''Le Livre des Menus|르 리브르 데 메뉘fra'' (레시피 북) (1912)
- ''L'Aide-memoire Culinaire|레드 메무아르 퀴리네르fra'' (1919)
- ''Le Riz|르 리즈fra'' (쌀) (1927)
- ''La Morue|라 모뤼fra'' (대구) (1929)
- ''Ma Cuisine|마 퀴진fra'' (나의 요리) (1934)
- ''A Guide to Modern Cookery|어 가이드 투 모던 쿠커리eng'' (1907, 제네시스 하이메 번역, ''르 기드 퀴리네르'' 영어 번역)
- ''2000 French Recipes|2000 프렌치 레시피스eng'' (1965, 마리온 하웰스 영어 번역)
- ''Memories of My Life|메모리즈 오브 마이 라이프eng'' (1996, ''Souvenirs inédits: 75 ans au service de l'art culinaire|수베니르 이네디: 75 앙 오 서비스 드 랄 퀼리네르fra'' (1985)에서 번역)
- ''Les Trésors Culinaires de la France|레 트레조르 퀼리네르 드 라 프랑스fra'' (2002, 원본 카르네 데피퀴르에서 L. 에스코피에가 수집)
3. 3. 다양한 요리 개발
1884년, 에스코피에는 아내와 함께 몬테카를로로 이주하여 새로 문을 연 그랜드 호텔의 주방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호텔 지배인인 세자르 리츠 밑에서 일했으며, 당시 프랑스 리비에라는 겨울 휴양지였기에 여름에는 리츠가 관리하는 스위스 루체른의 그랜드 호텔 내셔널(Grand Hôtel National) 주방을 운영하며 리츠와의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5][4]
1890년, 리츠와 에스코피에는 리처드 도일리 카트의 초청을 받아 총지배인 루이 에케나르(Louis Echenard)와 함께 런던에 새로 지어진 사보이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5] 리츠는 자신이 "런던 정복을 위한 작은 호텔맨 군대"라고 묘사한 팀을 구성했고, 에스코피에는 프랑스 요리사들을 모집하여 주방을 재정비했다. 사보이 호텔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웨일스 공을 필두로 유명하고 부유한 고객들을 끌어들였다. 그전까지는 공개적으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귀족 여성들이 이제 "사보이 호텔의 식당과 저녁 식사 장소에서 화려한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5]
에스코피에는 사보이 호텔에서 그의 대표적인 요리들을 다수 개발했다.
- 멜바 피치: 1893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가수 넬리 멜바를 기리기 위해 만든 복숭아 디저트.[6][7]
- 멜바 토스트: 1897년 넬리 멜바를 위해 만든 얇고 바삭한 토스트.[6][7]
- 봄브 네로(Bombe Néro|봄브 네로fra): 불 붙인 아이스크림 디저트.[6][7]
- 프레즈 알라 사라 베르나르(Fraises à la Sarah Bernhardt|프레즈 알라 사라 베르나르fra):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만든, 파인애플과 퀴라소 셔벗을 곁들인 딸기 요리.[6][7]
- 베제 드 비에르주(Baisers de Vierge|베제 드 비에르주fra): 바닐라 크림과 설탕에 절인 흰 장미 및 제비꽃잎을 곁들인 머랭.[6][7]
- 수프렘 드 볼라유 자네트(Suprêmes de volaille Jeannette|수프렘 드 볼라유 자네트fra): 푸아그라를 곁들인 차가운 닭가슴살 젤리 요리.[6][7]
- 살라드 레잔(Salade Réjane|살라드 레잔fra): 배우 가브리엘 레잔을 기념하여 만든 샐러드.[8]
- 투르네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투르네도 로시니fra): 미식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의 이름을 딴 소 안심 스테이크 요리. 다만 이 요리의 창작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8]
그러나 1897년, 주방 내의 막대한 양의 와인 분실 문제와 에스코피에가 수수료를 받고 개인적으로 정원 외의 조수를 고용한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에스코피에는 리츠와 함께 사보이 호텔을 그만두었다.
이후 에스코피에와 리츠는 1898년 파리에 리츠 파리를, 이듬해에는 런던에 칼튼 호텔을 열었다. 칼튼 호텔에서 에스코피에는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코스 메뉴를 도입했다. 리츠는 1901년 신경쇠약으로 쓰러져 쇠약해졌으나, 에스코피에는 리츠 사후 1919년까지 리츠 런던과 칼튼 호텔 운영에 참여했다. 이 시기 칼튼 호텔 주방에서는 훗날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이 파티시에 수습생으로 일하며 에스코피에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4. 저서
- ''르 트레떼 쉬르 랄 드 트라바이예 레 플뢰르 앙 시르'' (밀랍꽃 제작 예술에 관한 논문) (1886)
- ''르 기드 퀴리네르'' (1903)
- * ''현대 요리 안내'' (1903, 제네시스 하이메 번역, ''르 기드 퀴리네르'' 영어 번역)
- ''레 플뢰르 앙 시르'' (개정판, 1910)
- ''르 카르네 데피퀴르'' (미식가의 노트),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발행된 월간지
- ''르 리브르 데 메뉘'' (레시피 북) (1912)
- ''레드 메무아르 퀴리네르'' (1919)
- ''르 리즈'' (쌀) (1927)
- ''라 무뤼'' (대구) (1929)
- ''마 퀴진'' (1934)
- ''2000 프랑스 레시피'' (1965, 마리온 하웰스 영어 번역)
- ''나의 삶의 기억'' (1996, ''수베니르 이네디: 75 앙 오 서비스 드 랄'' (1985)에서 번역)
- ''레 트레조르 퀴리네르 드 라 프랑스'' (2002, 원본 카르네 데피퀴르에서 L. 에스코피에가 수집)
-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카쿠타 아키라 역, 「에스코피에 프랑스 요리」 시바타 쇼텐 (대저)
-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오오키 요시호 역, 「에스코피에 자전: 프랑스 요리의 완성자」 주오코론신샤 (주코분코 BIBLIO), 2005년, 원판은 동붕사 출판, 1992년
-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츠지 시즈오 편역, 「에스코피에와 함께 일 년을: 요리장의 수첩」 목이사 1980년
- 미셸 갈, 카나야마 후미 역, 「미각의 거장 에스코피에」 하쿠스이사, 2004년
- 츠지 시즈오, 「에스코피에: 위대한 요리사의 생애」 동붕사 출판, 1989년, 신판 「츠지 시즈오 저작집」 신초샤 전 1권, 1995년
참조
[1]
서적
Classic French Cooking
[2]
서적
European Gastronomy into the 21st Century
[3]
서적
Ritz and Escoffier: The Hotelier, the Chef, and the Rise of the Leisure Class
Clarkson Potter
[4]
웹사이트
Ritz, César Jean (1850–1918)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09-09-18
[5]
웹사이트
Escoffier, Georges Auguste (1846–1935)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09-09-17
[6]
뉴스
The Times
1935-02-13
[7]
서적
A Guide to Modern Cookery
[8]
웹사이트
The Most Famous Hotels in the World: The Savoy
http://www.4hotelier[...]
2013-09-04
[9]
웹사이트
The Most Famous Hotels in the World: The Savoy
http://www.4hotelier[...]
1898-03-08
[10]
웹사이트
Kitchen Revolt at The Savoy: 16 fiery cooks took their long knives
http://www.famoushot[...]
2020-04-10
[11]
블로그
Should Gordon Ramsay behave more like Escoffier?
https://www.theguard[...]
2009-03-07
[12]
뉴스
The master chef who cooked the books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12-06-09
[13]
뉴스
The Times
1935-02-13
[14]
서적
Escoffier: The King of Chefs
https://books.google[...]
A&C Black
[15]
뉴스
The Times
1935-02-16
[16]
웹사이트
AKIYAMA Tokuzo, Master Chef to the Emperor
http://www.ndl.go.jp[...]
National Diet Library, Japan
2016-09-17
[17]
서적
Memories of My Life
Van Nostrand Reinhold
[18]
웹사이트
築地精養軒と洋食文化:料理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19-05-04
[19]
뉴스
読売新聞
2005-06-21
[20]
서적
歴史、食材、調理法、郷土料理まで フランス料理図鑑
日本文芸社
[21]
서적
二度目のパリ 歴史歩き
ディスカヴァー・トゥエンティワン
[22]
웹사이트
フランス料理シェフの高い帽子はオーギュスト・エスコフィエの背が低いコンプレックスから!
https://xn--h9jua5ez[...]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