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마치 나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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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기마치 나오코는 1820년 닌코 천황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텐지가 되었으며, 1850년 준삼후가 되어 신타이켄몬인이라는 원호를 받은 인물이다. 1842년 정5위하에 올랐고, 1847년 궁에서 물러나 종3위를 받았다. 1849년 출가 후, 막부의 동의를 얻어 생존 중 여원호를 받았다. 1856년에 사망하여 교토 센뉴지 내 쓰키노와 능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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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마치 나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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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신타이켄몬인 (新待賢門院) |
이름 | 정친정 마사코 |
로마자 표기 | Ōgimachi Masako |
신분 | |
신분 | 인효 천황의 후궁, 고메이 천황의 생모, 곤노텐지, 텐지, 준삼후, 여원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교와 3년 11월 1일 (1803년 12월 14일) |
사망일 | 안세이 3년 7월 6일 (1856년 8월 6일) |
향년 | 54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인효 천황 |
자녀 | 황자 (요노미야), 고메이 천황, 요시히토 친왕, 황녀 (야쓰노미야) |
아버지 | 오기마치 사네미쓰 |
어머니 | 요쓰쓰지 지에코 |
2. 생애
1820년(분세이 3년) 닌코 천황의 후궁에 들어가 곤나이시노스케(권전시)가 되었고, 이듬해인 1821년 (분세이 4년) 텐지(전시)가 되었다.[1] 1842년 (덴포 13년) 정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듬해인 1843년 (덴포 14년)에는 도다이나곤노쓰보네(藤大納言局)라 칭했다.[1]
1847년 (고카 4년) 궁에서 물러나 종3위를 받고 친정인 오기마치가로 돌아갔다. 1849년 (가에이 2년) 출가했고, 조정에서는 여원호와 저택 부지를 주는 것을 논의했다. 막부는 닌코 천황의 정비인 다카쓰카사 요시코가 이미 사망하여 여원이 부재한 상황이었고, 이미 궁궐에서 물러나 영향력이 없다는 이유로 생존 중 여원호 증여에 동의했다.[1] 1850년 (가에이 3년) 준삼후가 되어 신타이켄몬인(新待賢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같은 원호로 고무라카미 천황의 생모 아노 렌시가 있지만, 메이지 이전의 궁정에서는 남조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시되지 않았다.)[1]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이즈미야마초 센류지 내 쓰키노와 능에 묘가 있다.[1]
2. 1. 초기 생애
1803년 오기마치가에서 태어났다. 1820년 (분세이 3년) 닌코 천황의 후궁이 되어 곤나이시노스케(권전시)가 되었다.[1] 이듬해인 1821년 (분세이 4년) 텐지(전시)가 되었다.[1]2. 2. 닌코 천황 후궁 시절
1842년(덴포 13년) 정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듬해인 1843년(덴포 14년)에는 후지다이나곤노쓰보네(藤大納言局)라 칭했다.[1] 닌코 천황의 후궁으로서 황실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3. 은퇴와 여원호 추존
1847년(고카 4년) 궁에서 물러나 종3위를 받고 친정인 오기마치가로 돌아갔다. 1849년 (가에이 2년) 출가했고, 조정에서는 여원호와 저택 부지를 주는 것을 논의했다. 막부는 닌코 천황의 정비인 다카쓰카사 요시코가 이미 사망하여 여원이 부재한 상황이었고, 이미 궁궐에서 물러나 영향력이 없다는 이유로 생존 중 여원호 증여에 동의했다.[1] 1850년 (가에이 3년) 준삼후가 되어 신타이켄몬인(新待賢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같은 원호로 고무라카미 천황의 생모 아노 렌시가 있지만, 메이지 이전의 궁정에서는 남조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시되지 않았다.)2. 4. 사후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이즈미야마초 센류지 내 쓰키노와 능에 묘가 있다.[1]3. 평가
오기마치 나오코는 닌코 천황의 후궁으로, 황실 일원으로 활동했다. 1820년(분세이 3년) 곤나이시노스케가 되었고, 이듬해인 1821년(분세이 4년) 텐지가 되었다. 1842년(덴포 13년) 정5위하에 올랐으며, 1843년(덴포 14년) 도다이나곤노츠보네(藤大納言局)라 불렸다. 1847년(고카 4년) 궁에서 물러나 종3위를 받고 친정인 오기마치가로 돌아갔다.
1849년(가에이 2년) 출가 후, 조정은 여원호와 저택지를 주는 것을 논의했다. 막부는 닌코 천황의 정비인 다카쓰카사 요시코가 이미 사망하여 여원이 부재했고, 오기마치 나오코는 이미 궁에서 물러나 영향력이 없다는 점 때문에 생존 중 여원호 증여에 동의했다. 1850년(가에이 3년) 준삼후가 되어 원호선하를 받아 신타이켄몬인(新待賢門院)이 되었다. 묘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이즈미야마초의 센류지 내 쓰키노와 능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신타이켄몬인이 황실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4. 가계
친정은 오기마치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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