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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올로 페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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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오토네 오르세올로와 헝가리 공주의 아들로, 1038년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친독일 정책과 과도한 세금 부과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 1041년 폐위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1044년 재위했다. 그러나 이교도 봉기로 인해 다시 폐위되었고, 언드라시 1세에게 붙잡혀 실명된 후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헝가리 초기 역사에서 기독교와 이교 간의 갈등,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왕위 계승 문제 등 정치적 혼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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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올로 페테르
기본 정보
연대기 그림 속 페테르
연대기 그림에서
헝가리어Velencei Péter (벨렌체이 페테르)
통치
작위헝가리 국왕
통치 시작1038년 8월 15일
통치 종료1041년 9월
대관식1038년, 세케슈페헤르바르
이전 통치자이슈트반 1세
계승자사무엘
통치 시작 21044년 7월 5일
통치 종료 21046년 8월 30일
이전 통치자 2사무엘
계승자 2언드라시 1세
가문
왕가오르세올로 가문
왕조아르파드 왕조
개인 정보
출생1011년
출생지베네치아
사망1046년 8월 30일 또는 1059년 (35세 또는 48세)
사망지세케슈페헤르바르, 헝가리
매장지페치 성 베드로-바울로 대성당
부친오토네 오르세올로
모친헝가리의 그리멜다
배우자코스마스 프라켸스키에 따르면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1055년–1058년 결혼)
종교칼케돈 기독교

2. 생애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베네치아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와 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1] 1026년 아버지 오토 오르세올로가 베네치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을 때, 페테르는 헝가리로 피신하여 이슈트반 1세의 왕실군 사령관이 되었다.[1]

1031년 이슈트반 1세의 외아들 임레가 사고로 사망하자, 이슈트반 1세는 페테르를 후계자로 삼았다.[3] 그러나 이교를 추종한다는 의혹을 받던 바줄(Vazul)이 왕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바줄은 두 눈이 뽑히고 귀에 뜨거운 납이 부어지는 형벌을 받았다.[3] 바줄의 아들들은 헝가리를 떠났다.[3]

1038년 이슈트반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페테르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1] 1039년1040년에는 바이에른을 약탈했고, 1040년에는 보헤미아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에 대항했다.[1] 그러나 1041년 이슈트반 1세의 왕비였던 기젤러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사 폐위되었고,[1]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아달베르트 변경백의 보호를 받았다.[1]

104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돌아온 페테르는 멘푀 전투에서 어버 샤무엘을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했다.[7] 그러나 1046년 이교도 평민들이 일으킨 버터 반란으로 인해 다시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8]

페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언드라시의 사절들에게 체포되어 저머리의 요새에 갇혔다. 결국 그는 사흘 만에 붙잡혀 실명되었고,[8] 페치 대성당에 묻혔다.[7]

페테르의 실명, ''채색 연대기''에 묘사됨

2. 1. 초기 생애 (1038년 이전)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도제) 오토네 오르세올로와 헝가리 공주(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이름은 불명) 사이에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1]

1026년, 반란으로 아버지가 도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페테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페테르는 아버지처럼 동로마 제국 궁정에 머물지 않고 헝가리로 향했고, 삼촌 이슈트반 1세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1세는 그를 왕실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1031년 9월 2일, 이슈트반 1세의 외아들 임레가 사냥 중 멧돼지에게 살해당했다.[3] 이슈트반 1세는 이교를 추종한다는 의혹을 받던 왕의 나이 많은 사촌 바줄(Vazul)이 왕 암살 음모에 가담한 사실을 밝혀냈다.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바줄은 벌로 두 눈을 잃고, 뜨겁게 녹인 납을 양쪽 귀에 부었다.[3] 바줄의 아들 르벤테, 언드라시, 벨라는 국외로 망명했다.[3] 이슈트반 1세는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테르는 즉위 후 이슈트반 1세의 왕비 기젤라의 영지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했다.[3]

2. 2. 첫 번째 통치 (1038년 ~ 1041년)

1038년 이슈트반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페테르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는데, 1039년1040년에는 바이에른을 약탈했고, 1040년에는 보헤미아브르제티슬라프 1세 공작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 황제에 대항했다.[1]

헝가리 연대기에는 페테르가 독일인("야수처럼 포효하는 자들")과 이탈리아인("제비처럼 재잘거리는 자들")을 선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고, 교회 수입을 압수했으며,[1] 두 명의 주교를 폐위시켰다.[1]

페테르는 이슈트반 1세의 왕비였던 기젤러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녀를 구금했다.[1] 기젤라 왕비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귀족들은 페테르의 측근 중 한 명(부도)을 국왕의 악행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하여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1] 국왕이 이를 거부하자 귀족들은 그의 고문관을 체포하여 살해했고,[1] 1041년 페테르를 폐위시켰다.[1] 귀족들은 새로운 왕으로 어버 샤무엘을 선출했는데, 그는 이슈트반 1세의 매제[1] 혹은 조카였다.[1]

페테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아달베르트 변경백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

2. 3. 망명 (1041년 ~ 1044년)

1041년 이슈트반 1세의 왕비였던 기젤러(Gizella)가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들은 페테르를 폐위시키고 이슈트반 1세의 조카였던 어버 샤무엘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페테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면서 아달베르트 변경백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3]

페테르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아달베르트의 보호를 받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어버 샤무엘에 대항하여 복위를 요청했다.[3] 1042년 2월, 헝가리 국왕 어버 샤무엘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지만, 아달베르트는 어버 샤무엘의 군대를 격파했다.[3]

하인리히 3세는 1042년 초에 헝가리에 대한 첫 번째 원정을 시작했다.[3] 그의 군대는 도나우강 북쪽으로 진격하여 가람 강(슬로바키아 흐론)까지 이르렀다.[3] 황제는 페테르를 복위시키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3] 이에 따라 황제는 헝가리 왕가의 다른 일원[3]을 그 지역을 통치하도록 임명했다.

헤르만 폰 라이헤나우는 그의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을에 하인리히 왕 또한 헝가리를 침공하여 하인부르크와 프레스부르크를 파괴하고, 도나우강 북부 지역을 흐론강(그란)까지 휩쓸거나 항복을 받아냈다. 강과 늪이 남부 지역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군대의 일부는 두 번이나 공격하는 헝가리인과 맞닥뜨려 큰 학살을 저질렀다. 그 지역의 헝가리인들을 정복한 후, 그들은 페테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에, 그는 당시 보헤미아에서 망명 중이던 그들 중 한 명을 그들을 위한 공작으로 임명했다.

1044년 초여름, 황제는 헝가리로 돌아왔고, 많은 헝가리 영주들이 그의 진격에 합류했다.[3]

2. 4. 두 번째 통치 (1044년 ~ 1046년)

1044년 7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의 지원을 받은 페테르는 죄르 근교에서 일어난 멘푀 전투에서 어버 샤무엘 지지 세력을 물리치고 헝가리의 국왕으로 복위하게 된다.[7] 이 때부터 헝가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 영지가 되었다. 1046년 이교도 평민들이 일으킨 버터 반란으로 인해 국외로 망명하고 만다.[8]

사무엘 아바의 죽음 이후, 황제 하인리히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하여 페테르를 복위시켰다. 페테르는 자신의 왕국에 바이에른 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헝가리가 제국 봉토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1045년 성령 강림절에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왕실 창을 종주에게 넘겨주었다.[7] 페테르를 전복하려는 여러 음모는 그가 여전히 인기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국왕 이슈트반 1세의 외가 사촌 두 명(볼야와 보니하)이 1045년에 페테르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지만, 국왕은 그들을 체포하고 고문하여 처형했다. 차나드의 게레르트 주교는 바줄의 망명한 아들들을 헝가리로 초대했다. 바타 이교도 봉기는 1046년에 페테르의 두 번째 통치를 끝냈다.[8]

1044년 6월, 황제군이 다시 헝가리를 공격하여 7월 5일 멘푀 전투에서 샤무엘 왕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샤무엘은 전장에서 간신히 도망쳤고, 곧 사망했다. 라이벌이었던 샤무엘의 죽음 이후, 페테르가 복위했지만, 그와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황제에게 종속되었다.

다음 해 1045년, 하인리히 3세는 헝가리로 돌아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5월 26일에 페테르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러나 페테르는 왕국에서의 자신의 통치를 강화할 수 없었다. 1045년에는 일부 헝가리 귀족의 음모를 진압했지만, 다음 해 1046년에는 성직자들의 지지를 잃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 왕비 기젤라를 헝가리에서 쫓아낸 탓이었다. 주교 샤그레드 게랄드가 이끄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은 처형된 바줄 공의 아들이자 키예프에서 생존해 있던 안드라시와 벨라를 불러들였다. 1046년 여름, 이교도 헝가리인 바타가 이끈 반란이 확대되었고, 페테르는 왕국의 서부에서 국외로 도망쳤다. 그 사이에, 안드라시와 벨라는 귀국하여 이교도 폭도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페테르는 자모리(페이예르 주의 마을) 근처에서 붙잡혔다. 그는 폭도들에게 양쪽 눈을 잃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2. 5. 죽음

페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다시 도망갈 계획을 세웠지만, 헝가리로 돌아온 바줄의 아들 언드라시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 그러나 페테르는 언드라시의 사절들이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7] 그는 저머리의 요새화된 영지로 피신했으나, 반대자들의 지지자들이 사흘 만에 그곳을 점령하고 페테르를 사로잡았다.[8] 14세기 헝가리 연대기들은 페테르가 실명되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 페테르는 페치 대성당에 묻혔으며, 그의 원래 무덤은 2019년 6월에 발굴되었다.[7]

3. 유산

페테르의 통치는 초기 헝가리 왕국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기독교와 이교도 세력 간의 갈등,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왕위 계승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의 생애는 헝가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4. 가족

오토 오르세올로(베네치아 공화국도제)와 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9] 그의 배우자는 독일 출신으로 추정되는 여성이었으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9] 역사학자들은 페테르가 과부였던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와 재혼했다는 기록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9]

오르세올로 페테르 가계도[9]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토 오르세올로베네치아 공화국도제
어머니헝가리의 그리멜다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첫 번째 부인이름 미상독일 출신으로 추정[9]
두 번째 부인 (논란 있음)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과부였다는 기록이 있음[9]


참조

[1]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2] 서적 Simon of Kéza: The Deeds of the Hungarians
[3] 서적 Herman of Reichenau: Chronicle
[4] 서적 Herman of Reichenau: Chronicle 1042
[5] 서적 Cosmas of Prague: The Chronicle of the Czechs
[6] 웹사이트 Szenzáció: Árpád-házi király sírját találták meg Pécsett! https://www.pecsma.h[...] PécsMa 2019-07-10
[7] 서적 Herman of Reichenau: Chronicle 1046
[8]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9] 서적 Cosmas of Prague: The Chronicle of the Czechs
[10] 서적 Chronica Hungarorum
[11] 서적 Annales Altahenses mai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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