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미 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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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미 위성은 1970년 2월 11일 일본이 자체 기술로 발사한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이 위성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연구를 통해 개발되었으며, L-4S 로켓을 사용하여 가고시마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오스미는 소련,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국가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무유도 로켓 기술을 통해 군사적 목적이 아닌 순수한 민간 기술로 개발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오스미는 지구 궤도에서 33년 동안 운용되었으며, 2003년 대기권 재진입으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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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미 위성 | |
---|---|
기본 정보 | |
![]() | |
임무 유형 | 지구과학 |
운영 기관 | 도쿄 대학교 우주항공연구소 (현재의 JAXA) |
COSPAR ID | 1970-011A |
임무 기간 | 1970년 2월 11일 04시 25분 ~ 2003년 8월 2일 |
발사 질량 | 24.0 kg |
전력 | 10.3 와트 |
발사 정보 | |
발사일 | 1970년 2월 11일 04시 25분 (UTC) |
발사 로켓 | 람다-4S |
발사 장소 | 가고시마 LA-L |
발사 계약자 | ISAS |
궤도 정보 | |
마지막 교신 | 1970년 2월 12일 |
소멸일 | 2003년 8월 2일 |
궤도 기준점 | 1970년 2월 10일 23시 25분 00초 UTC |
궤도 기준 좌표계 | 지구 중심 |
궤도 영역 | 중지구 |
궤도 근지점 | 350 km |
궤도 원지점 | 5140 km |
궤도 경사 | 31.0 도 |
궤도 이심률 | 0.262379 |
궤도 주기 | 144.0 분 |
궤도 apsis | gee |
추가 정보 | |
명칭 (일본어) | おおすみ |
2. 역사적 배경
1950년대부터 이토카와 히데오가 이끌었던 도쿄 대학 연구진은 소형 로켓 실험을 해왔다.[11] 1955년 4월, 도쿄 대학 생산기술연구소는 길이 23cm의 펜슬 로켓 발사 실험을 실시했으며, 이는 우주항공연구소의 기원이 되었다.[12] 이를 통해 정부 지원을 받게 되었고, 1960년대에는 로켓이 700km 고도에 도달했다.[11] 일본은 국제 지구 관측년 행사에 참여하여 K-6형 로켓으로 고층 대기와 우주선을 관측했다.[12] 이는 가고시마 우주 센터 설립과 1962년 발사 기지 개설로 이어졌다.[12] 같은 해 일본은 5년 안에 30kg 위성 발사 목표를 세웠고,[9] 1962년 람다 로켓 실험을 시작, 개량형이 오스미 발사에 사용되었다.[9]
1966년부터 L-3H형 로켓에 보조 부스터, 자세 제어 장치, 4단 구형 로켓을 추가한 L-4S 로켓으로 발사 실험을 시작, 1969년 L-4T형(L-4S와 동일하나 4단 능력 감소로 위성 발사 방법 확인은 가능해도 궤도 진입 능력은 없음) 1기 발사를 포함, 총 5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일본은 소비에트 연방(당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 인공위성 발사국이 되었다.[18][19] 중화인민공화국은 2개월 뒤 둥팡훙 1호 발사에 성공했다. 많은 국가가 탄도 미사일 개발 부산물로 인공위성 발사 기술을 얻었지만, 일본은 대학 연구소가 '''순수 민생 기술로 연구, 비군사적 목적의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했고, 국내에서 군사 기술로 전용되지 않아 국제적으로 특이하다.
2.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이토카와 히데오가 이끌었던 도쿄 대학 연구진은 1950년대부터 소형 로켓 실험을 해왔다.[11] 1955년 4월, 도쿄 대학 생산기술연구소는 길이 23cm의 펜슬 로켓 발사 실험을 실시했으며, 이는 우주항공연구소의 기원이 되었다.[12] 이러한 노력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어져 1960년대에는 로켓이 700km 고도에 도달했다.[11] 일본은 국제 지구 관측년 행사에 참여, K-6형 로켓을 통해 고층 대기와 우주선 관측을 수행했다.[12] 이는 가고시마 우주 센터 설립과 1962년 본격적인 발사 기지 개설로 이어졌다.[12] 같은 해, 일본은 5년 안에 30kg의 위성을 발사하는 목표를 세웠다.[9] 1962년, 람다 로켓 실험을 시작, 개량된 람다 로켓이 오스미 발사에 사용되었다.[9]1966년부터 L-3H형 관측 로켓을 개량한 L-4S 로켓으로 발사 실험을 시작, 1969년 L-4T형 1기 발사를 포함, 총 5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이 결과, 일본은 소비에트 연방(당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 인공위성 발사국이 되었다.[18][19] 중화인민공화국은 2개월 뒤 둥팡훙 1호 발사에 성공했다. 많은 국가가 탄도 미사일 개발의 부산물로 인공위성 발사 기술을 습득했지만, 일본은 대학 연구소가 '''순수한 민생 기술로 연구, 비군사적 목적의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했고, 국내에서 군사 기술로 전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특이하다.
3. 기술적 설계
오스미 위성은 외접 반지름 75cm, 길이 1,000mm, 최대 직경 480mm의 정26각형 프리즘 형태였다.[7][10] 람다 4S-5 로켓으로 발사된 이 위성은 무게가 24kg(4단 모터 연소 후)이었다.[7]
오스미에는 두 개의 갈고리형 안테나와 네 개의 베릴륨-구리 채찍형 안테나가 장착되었다.[7] 위성 본체에는 5,184개의 태양 전지가 부착되어 전력을 공급했으며, 평균 전력 소비량은 10.3W였다.[10] 전원 공급 장치로는 5AH 용량의 산화은-아연 배터리가 설치되었다.[7]
오스미에는 종방향 정밀 가속도계, 종방향 가속도계, 스트레인 게이지형 온도계, 원격 측정 송신기, 비콘 송신기, 파일럿 송신기가 탑재되었다.[7] 위성 추적 및 목록 작성에 사용되는 오스미의 설계 코드는 1970-011A이다.[7]
오스미는 L-4S 로켓의 최상단(4단)인 지름 48cm의 구형 고체 모터(로켓, 로켓 엔진)에 원뿔대 모양의 계측부를 부착한 것으로, 전체 길이 약 1m, 질량은 4단(연소 후 질량) 14.9kg과 계측부 8.9kg을 합한 23.8kg의 작은 인공위성이었다. 계측부에는 축 방향 가속도계, 온도계, 텔레미터 송신기(295.6MHz), 비콘 송신기(136MHz 대역), 파일럿 신호 송신기(296.7MHz) 등이 탑재되었다. 전원은 용량 5AH의 산화은과 아연을 전극으로 하는 1차 전지였으며, 설계 수명은 전지 용량으로 약 30시간이었다.
당초 목표 궤도는 원지점 2900km, 근지점 530km였다. 그러나 1단이 바람에 밀려가고 4단의 추력이 과도하여, 실제로는 원지점 5151km, 근지점 337km의 타원 궤도에 투입되었다. 로켓 모터와의 단열이 불충분하여 기체가 예상보다 고온이 되어 전지가 빨리 소모되었고, 약 15시간 만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면서 위성으로부터의 전파 발신도 종료되었다. 오스미의 전파 운용은 중단되었지만, 이후 광학 관측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었다.
발사 후 약 33년간 지구 궤도에 머물렀으나, 지구 상층 대기의 저항으로 감속되어 고도가 낮아지다가 2003년 8월 2일 오전 5시 45분에 북위 30.3도, 동경 25.0도(이집트·리비아 국경 부근) 상공에서 대기권 재진입하여 소실되었다.
3. 1. L-4S 로켓
"오스미"는 L-4S 로켓의 최종 단 그 자체이며, 위성의 목적도 인공위성 발사 로켓의 기술 개발이었다. 따라서 오스미를 이야기할 때 L-4S 로켓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L-4S 로켓은 유도 제어 장치가 없는, 세계 최초의 무유도 인공위성 발사 로켓이었다. 유도 장치는 미사일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군사 기술로 전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야당인 일본 사회당 등에서 제기되어 개발 착수 시기가 늦어졌기 때문이다.[22][23][24]
지구 궤도에 진입하려면 로켓을 수평으로 방향을 바꿔야 하므로, 무유도 방식(중력 턴 방식#무유도 중력 턴)으로 궤도에 투입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복잡한 발사 방식이다.
- 제1단과 제2단은 꼬리 날개에 의한 공기역학적 효과로, 제2단과 제3단은 스핀 모터를 통해 기체를 회전시켜 안정성을 유지한다.
- 제3단 연소 종료 및 분리 후, 제3단이 제4단에 충돌하지 않도록 레트로 모터로 비행 경로를 뒤로 떨어뜨린다.[25]
- 제4단은 디스핀 모터로 스핀을 정지시키고, 자세 제어 장치로 제4단을 수평 자세로 제어한다.[26]
- 수평 자세로 제어한 후, 리스핀 모터로 다시 스핀을 걸어 포물선의 꼭대기에서 제4단의 연소를 시작한다.
디스핀 모터는 일단 점화하면 연소를 중단할 수 없는 고체 로켓으로 로켓 본체의 스핀을 멈추기 위해 스핀 방향과 반스핀 방향 모두에 노즐을 가지고 있다. 디스핀 모터는 연소 직후에는 반스핀 방향 노즐에만 연소 경로를 열어 스핀 정지를 위한 분사를 하지만, 스핀 정지를 감지하면 스핀 방향 노즐에도 연소 경로를 열어 상대 추력을 0으로 만든다. 이 기술은 이후 우주연 위성 발사 로켓에 채용되는 롤 제어 모터 "SMRC"로 이어졌다.
4. 발사
오스미 위성은 1950년대부터 소형 로켓 실험을 해온 이토카와 히데오가 이전에 이끌었던 도쿄 대학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었다.[11] 1962년, 일본은 람다 로켓 실험을 시작했으며, 이후 개량된 람다 로켓이 결국 오스미를 발사하는 데 사용되었다.[9]
오스미 위성은 1970년 2월 11일 04:25 UTC (협정 세계시)에 일본 가고시마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이 센터는 일본 오스미 반도에 위치해 있다.[6] 발사체는 도쿄 대학 ISAS에서 개발한 람다 4S-5 로켓이었다.[7] 이 임무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한 최초의 사례로, 소련, 미국, 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 국가가 되었다.[8]
이 위성은 원지점 약 5150km, 근지점 335km의 타원 궤도에 진입하여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할 수 있었다.[13] 람다 4S 계열의 이전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사의 성공은 일본의 우주 탐사 능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미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13][7]
5. 임무
오스미 위성의 주요 임무는 일본의 위성 발사 기술 시험을 통해 지구 궤도에 위성을 배치하는 로켓 발사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13] 발사 시험 과정에서 개발된 주요 발사 계획은 "중력 턴" 기동이었으며, 이는 임무의 최종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1970년 2월 11일 발사 2시간 반 후, 우치노우라의 연구팀은 오스미로부터 지구 궤도 완료를 확인하는 첫 번째 신호를 수신했다.[13]
위성에는 이온층 측정을 위한 장비가 탑재되어 궤도 상에서 태양 방출, 온도 및 밀도와 같은 데이터를 수집했다.[10] 그러나 위성의 7번째 궤도인 2월 12일에 전력 손실로 인해 무선 신호가 끊기면서 실시간 운용이 종료되었다.[15]
1966년부터 L-4S 로켓으로 발사 실험을 시작하여 총 5번의 시도 끝에 발사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은 소비에트 연방(당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18][19]
오스미는 L-4S 로켓의 최상단에 해당하는 구형 고체 모터(로켓 로켓 엔진)에 원뿔대 모양의 계측부를 부착한 것으로, 전체 길이 약 1m, 질량 23.8kg의 작은 인공위성이었다. 계측부에는 가속도계, 온도계, 텔레미터 송신기(295.6 MHz), 비콘 송신기(136 MHz 대역) 등이 탑재되었다. 전원은 산화은과 아연을 전극으로 한 1차 전지를 사용했으며, 설계 수명은 약 30시간이었다.
목표 궤도는 원지점 2900km, 근지점 530km였으나, 실제로는 원지점 5151km, 근지점 337km의 타원 궤도에 진입했다. 로켓 모터와의 단열 문제로 기체가 예상보다 고온이 되어 전지 소모가 빨라져 약 15시간 만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위성으로부터의 전파 발신도 종료되었으나, 이후 광학 관측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었다.
발사 후 약 33년 동안 지구 궤도에 머물다가 2003년 8월 2일 이집트·리비아 국경 부근 상공에서 대기권 재진입하여 소실되었다.
6. 결과
오스미의 발사 성공으로 일본은 소련,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독자적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6][8] 당초 계획했던 500km 원형 궤도와는 달리, 타원 궤도를 확보했다.[10] 오스미는 궤도상에서 높은 온도를 겪으면서 발사 후 약 14~15시간 만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다.[15] 그러나 2003년 8월 2일에 지구 대기권 재진입하여 북아프리카 상공에서 소실되기까지 33년 동안 궤도를 유지했다.[15][16][7]
오스미는 L-4S 로켓의 최상단(4단)인 지름 48cm의 구형 고체 모터(로켓 로켓 엔진)에 원뿔대 모양의 계측부를 부착한 것으로, 전체 길이 약 1m, 질량은 4단(연소 후 질량) 14.9kg과 계측부 8.9kg을 합한 23.8kg의 작은 인공위성이다. 계측부에는 축 방향 가속도계, 온도계, 텔레미터 송신기(295.6 MHz), 비콘 송신기(136 MHz 대역), 파일럿 신호 송신기(296.7 MHz) 등을 탑재했다. 전원은 용량 5AH의 산화은과 아연을 전극으로 한 1차 전지로, 설계 수명은 전지 용량으로 약 30시간이었다.
목표 궤도는 원지점 2900km, 근지점 530km였다. 그러나 제1단이 바람에 밀려간 것과 제4단의 추력이 과도했기 때문에, 실제 투입된 궤도는 원지점 5151km, 근지점 337km의 타원 궤도였다. 로켓 모터와의 단열이 불충분하여 기체가 예상보다 고온이 되어 전지의 소모가 심해져 약 15시간 정도 만에 전력 공급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위성으로부터의 전파 발신도 종료되었다. 오스미의 전파 운용은 중단되었지만, 이후 광학 관측으로 존재가 확인되었다.
발사 후 약 33년 동안 지구 궤도에 있었지만, 지구 상층 대기의 저항으로 감속되어 점차 고도가 낮아져, JAXA 통합을 10월에 앞둔 2003년 8월 2일 오전 5시 45분에 북위 30.3도, 동경 25.0도(이집트·리비아 국경 부근) 상공에서 대기권 재진입하여 소실되었다.
7. 영향 및 유산
오스미의 성공은 일본의 우주 탐사 시대를 열었으며, 하쿠초, X선 위성, 그리고 소행성 샘플을 수집한 최초의 우주선인 하야부사와 같은 이후 위성 발사 및 개발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데 사용된 데이터를 과학자들에게 제공했다.[9][17] 또한 오스미의 성공적인 중력 턴 기동은 고체 연료 뮤 운반 로켓을 이용한 과학 위성 발사에 이 기동을 사용하게 했다.[9]
1969년에 발사된 L-4T형 1기의 발사를 포함하여 총 5번의 시행착오 끝에 발사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은 소비에트 연방(당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 인공위성 발사국이 되었다.[18][19] 2개월 뒤, 중화인민공화국은 둥팡훙 1호의 발사에 성공했다.
다만, 중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는 탄도 미사일 개발의 부산물로서 인공위성 발사 기술을 습득한 데 반해, 일본은 대학의 부속 연구소가 '''순수한 민생 기술로서 연구를 진행하여 비군사 목적으로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했고, 게다가 일본 국내에서는 직접적인 군사 기술로의 전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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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産衛星 反響さまざま「純国産がうれしい」「ただ国威発揚だ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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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の丸衛星“おおすみ”地球を回る 世界第四の人工衛星国に 6周まで確認 電波弱まり追跡中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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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960年4月14日第34回参議院内閣委員会第19号 社会党の[[矢嶋三義]]がロケット研究の軍事転用の可能性について懸念を表明
[23]
문서
1961年4月18日第38回衆議院科学技術振興対策特別委員会第11号 糸川英夫がラムダへ誘導装置を搭載することを示唆
[24]
문서
1965年2月17日第48回衆議院科学技術振興対策特別委員会第5号 社会党の田中武夫からラムダのIRBM転用可能性について質問
[25]
문서
이 때, 제3단과 제4단은 관성 비행을 하고 있으므로, 그대로라면 제3단의 잔류 추력으로 제3단이 제4단에 충돌한다.
[26]
문서
이 때, 로켓은 연소하지 않으므로 "유도"가 아닌 "자세 제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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