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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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보 투쟁은 1960년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 운동으로,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 사건이다. 이 조약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으로, 개정 과정에서 국내 시위 진압 허용, 미군의 일본 방어 의무 부재 등의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한국전쟁과 U-2 격추 사건 등은 안보에 대한 일본 내 우려를 키웠고, 학생, 시민 단체들은 '안보 투쟁'이라는 이름 아래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60년 5월 중의원에서의 조약 강행 처리, 해저티 사건, 간바 미치코 사망 사건 등 시위 격화 속에서 조약은 발효되었고, 기시 내각은 퇴진했다. 이 투쟁은 이후 일본 정치의 경제 성장 중심 전환, 학생 운동의 침체, 신좌파 세력의 부상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에도 미일안전보장조약 자동 연장을 앞두고 유사한 투쟁이 벌어졌으나, 60년 안보 투쟁만큼의 사회적 파급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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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투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안보 투쟁 |
로마자 표기 | Anpo tōsō |
주요 정보 | |
위치 | 일본 |
기간 | 1959년–1960년, 1970년 |
원인 |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및 국내 미국 기지에 대한 반대 |
목표 | 1959–1960년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비준 방지 기시 노부스케 총리 사임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일본 방문 취소 1970년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폐지 |
결과 | 기시 노부스케 총리 사임 (1960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일본 방문 취소 (1960년) 오키나와 일본 반환 (1972년) |
관련된 조약 |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
관련 세력 | |
반대 시위대 | 반조약 시위대 일본 정부 (반조약 파벌) |
지지 시위대 | 일본 정부 (찬성 파벌) 미국 정부 찬성 시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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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함께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은 일본의 주권 회복과 동시에 주일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 내에서 불평등 조약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개정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조약 내용 중에는 미군에 의한 일본 내 내란 진압 허용,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 부재 등의 불평등한 내용이 있어 일본 내에서 개정 요구가 점차 거세졌다.[2][3]
일본 정부는 1952년 초부터 조약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스나가와 투쟁(1955년~1957년)과 같이 일본에서 미군 기지 반대 운동이 고조되자 개정 요구에 저항했다.
1957년 미군 병사 윌리엄 S. 지라드가 주둔 기지 근처에서 고철을 수집하던 주부에게 빈 수류탄 껍질을 쏘아 죽인 지라드 사건 발생 이후 일본 내의 반미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현상 유지에 대한 반감이 더욱 명확해졌다.
미국은 개정에 동의했고, 1958년에 협상이 시작되어 1960년 1월 19일 워싱턴 D.C.에서 아이젠하워와 기시 노부스케에 의해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2. 1. 한국전쟁과 일본의 안보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47개국과 일본 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조약에 포함된 특약(제6조 a항 단서: 양자협정에 의한 특정 국가 군대만의 주둔 허용)에 기초한 "일본국과 미국간의 안전보장조약"(구 미일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하였다.[8] 이 조약으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군은 "주일미군"이 되어 계속해서 일본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냉전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 대치하던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 국가들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반대하며 조약 체결국 49개국에 포함되지 않았고, 자국을 사실상 가상 적국(소련 위협론)으로 한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하였다.
3. 1960년 안보 투쟁 (60년 안보)
1951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 이후, 1958년부터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조약 개정 협상을 추진했다. 1960년 1월, 기시 총리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 후 신 안보 조약에 조인했다.
새 안보조약은 미일 공동 방위 의무를 명문화하는 등 기존 조약보다 평등하게 개정되었다. (일본국과 미국합중국과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 참조)
그러나 "일본이 전쟁에 휘말릴 위험 증가" 우려와 주일 미군 범죄 면책 특권 비판 등으로 조약 체결 전부터 반대 운동이 있었다.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등 혁신 세력은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는 파업을 벌였다.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으나, 총평은 이에 비판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고, 태평양 전쟁 주도 기시 노부스케 총리에 대한 반감, "미일 조약은 일본을 미국 전쟁에 참전시키는 것"이라는 반미 감정이 안보 조약 반대 여론을 강화했다.
소련 공산당 이반 코발렌코는 저서에서 미하일 수슬로프 지도 아래 소련 공산당이 일본 좌익 세력에 "상당한 원조"를 제공, 안보투쟁에 깊이 관여했음을 밝혔다.[9]
1959년 말~1960년 초, 냉전 긴장 고조 속 새 조약이 일본을 위험한 갈등에 묶을 것이란 우려로 항의 운동이 커졌다. 1960년 4월, 한국 4·19 혁명은 일본 시위대에 영감을 주었다.
5월 1일, U-2 격추 사건으로 미소 우호 "캠프 데이비드 정신"은 붕괴, 소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취소, 냉전 해빙은 끝났다. U-2 정찰기 일부가 일본 미군 기지에 배치된 사실은 핵전쟁 시 일본 표적 가능성 우려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0년 안보 투쟁이 전개되었다.
3. 1. 조약 개정의 주요 내용
신안보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란 조항 삭제: 기존 조약에 있던 미군의 일본 내 내란 진압 허용 조항이 삭제되었다.[50]
- 일미 공동 방위 명문화: 일본 방위에 대한 미국의 의무가 명시되었다. (자위대와 주일미군이 공동으로 방위 행동 수행)[50]
- 사전 협의 제도 설치: 주일 미군의 배치 및 장비에 대해 양국 정부가 사전에 협의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50]
이러한 개정을 통해 안보조약은 단순히 미국군에게 기지를 제공하는 조약에서, 미일 공동 방위를 의무화한 보다 평등한 조약으로 변화하였다.
3. 2. 중의원 통과와 시위 격화
1960년 5월 19일, 자민당은 중의원 미일안전보장조약 특별위원회에서 일본사회당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 조약안을 강행 처리했다. 자민당은 건장한 청년들을 동원해 연좌 농성을 벌이는 사회당 의원들을 회의장에서 몰아냈으며,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다음 날인 5월 20일, 조약안은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49]
이러한 자민당의 강행 처리는 6월 19일로 예정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전까지 조약을 자동 발효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 파괴"라는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일반 시민들까지 조약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연일 국회의사당 주변을 시위대가 에워쌌고, 반정부, 반미 투쟁의 성격이 강화되었다.[49]
시위가 장기화되자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경찰과 우익 단체만으로는 시위대를 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 야쿠자를 포함한 폭력 조직에까지 협력을 요청했다. 고다마 요시오 주도로 자민당 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환영실행위원회"를 만들고,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를 책임자로 내세웠다. 여러 폭력 조직들이 기시 총리와 만나 시위대 제압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49]
하지만 이러한 강경 대응은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이시바시 단잔 등 전직 총리 3명이 기시 총리에게 사퇴를 촉구하는 등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49]
3. 3. 해저티 사건과 간바 미치코의 죽음
1960년 6월 10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 협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제임스 해저티 백악관 대변인이 하네다 공항에서 시위대에 포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해저티 사건'''(ハガチー事件|하가치 사건일본어)으로 불리며, 주일 미국 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2세가 의도적으로 시위대 쪽으로 차량을 몰고 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에워싸고 창문을 부수는 등 1시간 이상 격렬한 항의를 했고, 결국 해저티 대변인은 미 해병대 헬리콥터로 구출되어야 했다.[49]

6월 15일에는 국회 앞 시위 중 도쿄 대학 학생 간바 미치코가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은 '''6·15 사건'''(六・一五事件|로쿠이치고 지켄일본어)으로 불린다. 이 사건은 시위대의 분노를 더욱 키웠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취소와 사임을 발표하게 되었다.[49]
3. 4. 조약 발효와 기시 내각 퇴진
1960년 6월 19일, 참의원 의결 없이 조약이 자동 발효되었다. 제임스 해저티 백악관 대변인이 시위대에 습격당한 후, 미국 정부는 일본 내 반미 감정이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연기했다(사실상 취소).[17]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혼란을 수습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새 안보 조약 비준서 교환일인 6월 23일에 총사퇴를 표명했다.[17]3. 5. 이케다 내각의 등장과 소득 배증 계획
이케다 내각은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며 경제 성장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4. 안보 투쟁의 의의 및 영향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안보 투쟁으로 인해 퇴진 압박을 받았고, 자민당 정권은 국정 운영 방향을 경제 발전 정책 중심으로 전환해야 했다.[4] 그러나 안보 투쟁과 도쿄대 사건 등의 과격한 학생 운동 이후, 일본 사회 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했다. 이는 시민들이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면서 장기적인 사회 변화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냉전 시기, 일본 좌파 인사들과 일부 우파 인사들은 중립적인 노선을 추구하며 안보 조약과 미일 동맹의 완전 폐지를 희망했다.[4] 이들은 개정된 조약이 이전 조약보다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준에 반대했다.[4]
기시 노부스케는 시위 발생을 예상하여 1958년 가을, 경찰에게 영장 없는 수색 및 체포 권한을 부여하는 "경찰 임무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권위주의를 연상시켜 대중적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철회되었다. 이 사건으로 시위대는 더욱 힘을 얻었고, 반 경찰법안 연합은 개정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1959년 봄, "안보 조약 개정 저지 국민회의"로 이름을 바꾼 이 연합은 전국적인 시위 활동을 조직했다.[5]
4. 1. 한국과의 관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한국의 상황은 일본 내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켜 안보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좌파 세력은 4.19 혁명을 지지하며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통해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5. 70년 안보 투쟁
197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자동 연장을 앞두고 다시 한번 안보 투쟁이 전개되었다. 1968년부터 1969년에 걸쳐 전학공투회의(전공투)와 신좌익 여러 파의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해졌으며, 도쿄대학 투쟁, 니혼대학 투쟁을 시작으로 전국의 주요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에서는 바리케이드 봉쇄가 이루어졌고, “70년 안보 분쇄”를 슬로건으로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37]
1968년-1969년 일본 대학생 시위 여파로 여러 학생 단체, 시민 단체, 그리고 반전 단체인 베헤이렌 등이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 행진을 벌였다.[37] 거리 투쟁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신좌익 각 파는 1967년(쇼와 42년) 10월과 11월의 하네다 투쟁, 1968년(쇼와 43년) 1월의 사세보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 투쟁, 4월의 오키나와의 날 투쟁, 10월의 신주쿠 소란 사건(소란죄 적용), 1969년(쇼와 44년) 4월의 오키나와의 날 투쟁, 10월의 국제반전데이 투쟁, 11월의 사토 수상 방미 저지 투쟁 등 일련의 투쟁을 “70년 안보 투쟁의 전초전”으로 삼고, “헬멧과 게바르토봉” 스타일로 무장하고, 투석과 화염병을 사용하여 기동대와 싸웠다.
1970년 6월 14일, 국회 앞에서 시위가 이루어졌고, 전국 236곳에서 사회당, 공산당 등에 의한 시위가 이루어졌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전과 반안보의 6·14 대공동행동”이라는 제목으로 시민단체와 신좌익 여러 파는 7만 2천 명을 동원했다. 그러나 신좌익 여러 파는 사토 정권의 철저한 단속과 탄압, 내분으로 이미 피폐해 있었다. 70년 안보 기간 중 경찰이 증거로 압수한 투석은 전국에서 241톤, 독극물 954개, 폭발물 1,911개, 화염병 18,104개, 각재 20,428개, 철파이프 640개에 달했다.[38]
같은 해 6월 23일, 조약은 자동 연장되었다. 당일, 메이지 신궁에서는 전공투·전국반전 주최의 집회가 열리고, 히비야 공원을 향해 시위가 이루어졌지만 도중에 일부가 폭도화되었다. 중핵파 등 약 50명은 아자부 경찰서에 몰려들어 화염병을 투척하여 창문을 깼다. 또한, 아오야마 3초메와 아오야마 묘지 근처, 니시아자부에서도 화염병 투척과 투석을 하여 기동대와 소규모 충돌을 일으켰다. 이러한 충돌을 통해 약 100개의 화염병이 사용되었고, 경찰관 152명이 부상했으며, 학생 약 400명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6월 26일에는 중핵파의 거점이었던 호세이 대학 등 10곳에 가택 수색이 이루어졌다.[39]
70년 안보 투쟁은 베트남 반전 운동, 나리타 공항 문제 등과 연결되어 일정한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었지만, 60년 안보에 비해 전공투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의 색채가 짙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의 혁신 세력은 “70년 안보 투쟁”을 오키나와 반환 운동과 세트인 “국민 운동”으로 위치짓고, 70년의 “자동 연장” 그 자체에는 60년 안보 투쟁만큼의 역량을 할당하지 않았다.
“안보 연장 반대”라는 여론과 운동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공투와 공산당 계열의 민청이나, 신좌익 당파 간의 내분이 격화되어 많은 국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 갔다. 결국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조약 자동 연장을 강행했고, 이는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약화와 55년 체제의 장기화를 초래했다. 1969년(쇼와 44년) 12월의 총선거에서는 당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지지하는 자민당은 국회에서 의석을 늘리는 한편, “안보 연장”에 반대한 사회당은 약 50석을 줄여 대패했고, 사토 장기 정권은 1972년(쇼와 47년)까지 계속되었다.
6. 평가 및 비판
신안보조약은 2022년 현재까지 반세기 이상 유지되며 일본의 정치 및 군사 체제의 기초로 자리 잡았다.[1] 냉전 종식 후에는 중국, 북한에 대한 군사동맹 및 미국의 군사적 존재감 유지를 위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안보 투쟁 당시 제기되었던 "전쟁에 휘말릴 위험"에 대한 우려는 현재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미일 안보 유지"를 언급했고,[1] 2009년 민주당 연립정권에서도 사회민주당 당수가 안보 조약에 대한 명확한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는 등, 좌익 진영 내에서도 안보 조약을 용인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미군의 오스프리 운용, 헨노코 기지 이전,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에 대해서는 좌익 진영에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60년 당시 언론은 미일 안보에 비판적이었으나,[20] 현재는 대체로 미일 안보 자체를 용인한다. 다만, 미일 안보 강화나 주일미군 정책에 대해서는 언론사별로 입장이 나뉜다.
언론사 | 입장 |
---|---|
요미우리 신문, 산케이 신문 | 미일 안보 강화 및 주일미군 정책에 긍정적[21][22] |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츄니치 신문(도쿄 신문) | 미일 안보 강화 및 주일미군 정책에 비판적[23][24][25] |
언론사 |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
요미우리 신문, 산케이 신문 | 헨노코 이전안 지지[26][27] |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츄니치 신문 | 헨노코 이전 신중, 현외 이전 요구[28][29][30] |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언론사별로 의견이 엇갈린다.[31]
교도 통신의 영향을 받는 대부분의 지방지는 미일 안보 강화 및 주일미군 정책에 비판적이다.[32][33] 오키나와현 지역 신문(류큐 신보, 오키나와 타임스)은 특히 비판적이다.[34][35] 그러나 일부 보수 성향 지방지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다.
타케우치 요시는 안보 투쟁을 "민주냐 독재냐"의 문제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옹호를 위한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 시미즈 이쿠타로는 안보 투쟁 이후 지식인들이 경제 성장에 대한 비판 대신 "소외"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비판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고 풍자했다.[1]
6.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조약 개정을 추진하여 일본 민주주의에 심각한 도전을 초래했다.[4] 그는 1958년 경찰에게 영장 없는 수색 및 체포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권위주의를 연상시켜 대중의 분노를 샀다.[5] 1960년 5월 19일, 기시는 국회 회기를 무리하게 연장하고 야당 의원들을 강제 퇴거시킨 후 조약을 통과시키는 등 반민주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는 "5.19 사건"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일본 자위대와 야쿠자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내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반면, 일본사회당의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0년 가을 텔레비전 토론 중 극우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안보 투쟁은 일본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자민당은 강경 대응과 야쿠자 동원 시도로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60년 6월 15일, 전학련(全学連, Zengakuren) 시위 도중 도쿄대학교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사건은 안보 투쟁의 비극성을 상징한다.
미일안전보장조약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패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일본을 미국의 군사 전략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U-2 격추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핵전쟁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는 한국의 안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7. 전개 일지
연도 | 사건 |
---|---|
1959년 | |
1960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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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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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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党のあゆみ 第3代 岸 信介 岸総裁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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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측 경시청 엇갈리는 데모 인원수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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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웹사이트
일미안보조약 및 하시마·에토로 반환의 조건에 관한 정보국장 담화 (외무성 정보문화국장·콘도 신이치)
https://worldjpn.net[...]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다나카 아키히코 연구실)
[19]
뉴스
【안보개정의 진실(4)】암약하는 소련의 KGB 서약인양자를 통해 각계에서 반미공작 기시내각을 “핵”으로 협박
https://web.archive.[...]
2015-05-16
[20]
논문
신문보도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국민이 중요한 판단을 촉구받는 사건을 신문은 어떻게 보도했는가~
https://mass-ronbun.[...]
호세이대학 강사
[21]
웹사이트
오스프레이의 후텐마 기지 배치 산케이신문 「찬성」
http://mediawatchjap[...]
[22]
웹사이트
오스프레이의 후텐마 기지 배치 요미우리신문 「찬성」
http://mediawatchjap[...]
[23]
웹사이트
오스프레이의 후텐마 기지 배치 아사히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24]
웹사이트
오스프레이의 후텐마 기지 배치 마이니치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25]
웹사이트
오스프레이의 후텐마 기지 배치 주니치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26]
웹사이트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산케이신문 「찬성」
http://mediawatchjap[...]
[27]
웹사이트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요미우리신문 「찬성」
http://mediawatchjap[...]
[28]
웹사이트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아사히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29]
웹사이트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마이니치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30]
웹사이트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주니치신문 「반대」
http://mediawatchjap[...]
[31]
뉴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용인을 환영=미정부
http://jp.wsj.com/ar[...]
월스트리트 저널
[32]
웹사이트
공통통신의 지국·지사는 지방신문사의 본사내에 있는 경우가 많다 (도쿄지사는 공통통신사 본사내, 하코다테·아사히카와·쿠시로지국은 홋카이도신문사의 각 지사내에 있다)
2015-02-25
[33]
웹사이트
독자가 모르는 공통통신의 강대한 영향력
http://ironna.jp/art[...]
산케이신문 기자·「정론」편집부원
[34]
웹사이트
6월 3일자 집단적 자위권 용인에 찬반, 헌법기념일의 각지 사설 ~재경지 이분, 반대 눈에 띄는 지방지~
http://www.pressnet.[...]
일본신문협회
[35]
블로그
블록지, 지방지는 「민의 존중」이 압도적―오키나와 지사선의 사설
https://news-worker.[...]
[36]
웹사이트
SEALDsの「仮面」を剥ぐ
http://ironna.jp/the[...]
2022-10
[37]
뉴스
安保で紛争校急増し47校に
朝日新聞
1970-06-17
[38]
서적
私の後藤田正晴
講談社
[39]
뉴스
法大など10ヵ所捜索 火炎ビン・投石事件
朝日新聞
1970-06-26
[40]
서적
第一章 “80年安保”とその裏面
https://inumimi.papy[...]
이스트 프레스
[41]
웹사이트
青いムーブメント(5) (ファシズムへの誘惑・ブログ)
http://www.warewared[...]
[42]
뉴스
SEALDsの敗北とは何だったのか 15年安保に感じた「甘さ」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43]
웹사이트
【昭和のことば】60年安保闘争の挫折体験を描いた青春小説「されどわれらが日々」(昭和39年)
https://www.zakzak.c[...]
2022-11-16
[44]
웹사이트
書籍詳細:小説 自衛隊放射線学生
https://www.bungeish[...]
[45]
웹사이트
日本の夜と霧 : 作品情報
https://eiga.com/mov[...]
[46]
웹사이트
映画『ANPO』公式サイト
https://www.uplink.c[...]
[47]
웹사이트
マンガ安保闘争―日本人なら知っておきたい「日米安保」の真実
https://www.kinokuni[...]
[48]
웹사이트
恋とゲバルト(漫画)
https://mangapedia.c[...]
[49]
웹사이트
デモは安倍首相のナルシシズムをくすぐる
http://yoshinori-kob[...]
[50]
뉴스
【安保改定の真実(7)】先鋭化する社会党「米帝は日中の敵!」 5・19強行採決で事態一転…牧歌的デモじわり過激化 そして犠牲者が
http://www.sankei.co[...]
201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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