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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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장경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으로, 안휘성 여강현 출신이다. 이홍장의 회군에 참여하여 태평천국, 염군 진압에 기여했으며, 1880년 절강제독으로 승진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조선을 청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84년 금주에서 병사했으며, 무장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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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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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안휘성(安徽省) 여강현(廬江縣) 출신으로, 처음에는 향용(鄕勇)을 이끌었다. 이후 이홍장(李鴻章)이 회군(淮軍)을 결성하자 합류하여 태평천국 운동과 염군(捻軍) 진압에 참여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1868년부터는 이홍장을 따라 허난성, 산둥성, 즈리성 등지에서 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으며, 1880년에는 절강제독(浙江提督)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산둥성의 군무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부하 장교로 원세개가 동행했다. 1884년 귀국하여 진저우(金州) 방어를 맡던 중 병사하였고, 사후 무장(武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
안휘성(安徽省) 여강현(廬江縣) 출신이다. 처음에는 향용(鄕勇)을 이끌고 여강현과 수청현을 지키고 있었다. 이후 이홍장(李鴻章)이 회군(淮軍)을 결성하자 그 군대에 합류하였다. 오장경의 부대는 처음에는 경자영(慶字營)이라 불렸고, 나중에 규모가 커지면서 경군(慶軍)으로 칭해졌다.1862년에는 이홍장을 따라 상하이(上海)로 가서 태평천국(太平天國)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그 공으로 유격(遊擊)으로 승진했다. 이듬해인 1863년에는 고향인 여강에서 다시 군사를 모집하던 중,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에게 포위되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그 후 상하이로 돌아와 1864년에는 용장으로 알려진 태평천국의 영왕(英王) 랴오파서우가 수비하고 있던 가흥(嘉興) 공략에 참여하였다.
2. 2. 중기 생애
1868년에 이홍장이 염군(捻軍)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자, 그를 따라 허난성, 산둥성, 즈리성 등지를 오가며 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1880년에는 절강제독(浙江提督)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긴장 관계가 높아지자 산둥성의 군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원세개를 자신의 막료로 삼았다.2. 3. 조선 파견과 임오군란 진압
1880년, 오장경은 저장제독으로 승진했으나,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산둥성의 군무를 감독하게 되었다. 이때 원세개를 막료로 두었다.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자신이 이끌던 청 군대인 경군(慶軍, 초기 명칭 경자영)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당시 그의 부하 장교였던 원세개도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 오장경의 파견 목적은 임오군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오장경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랴오둥 3성과 좌제우설(左堤右挈)하여 실로 동방의 일대 병장"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청의 동북 3성과 한반도를 함께 통제하면 동아시아에서의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청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기에, 전통적인 종속국이었던 조선마저 일본이나 러시아 등 다른 열강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장경은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조선을 신장이나 타이완처럼 청의 직접 통치 하에 두려는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성(朝鮮省)'을 설치하여 군현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며, 국제 사회를 향해 "조선은 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2. 4. 말년과 사망
1884년에 조선에서 귀국하여 진저우(金州)의 방어를 맡았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 사후 무장(武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3. 오장경과 조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당시 그의 부하 장교 중에는 훗날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원세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장경은 당시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랴오둥 3성과 좌제우설(左堤右挈)하여 실로 동방의 일대 병장"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청의 동북 3성과 한반도를 묶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선을 청의 안보를 위한 중요한 완충지대이자 방어 거점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청은 전통적인 종속국이었던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빼앗긴 상황이었다. 이에 오장경은 또 다른 종속국인 조선만큼은 일본이나 러시아 등 다른 열강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신장이나 타이완처럼 청의 정식 영토로 편입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조선성'을 설치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며, 국제 사회를 향해 "조선은 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오장경의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으로, 당시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내정에 간섭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평가
오장경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활동한 군인으로,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이홍장 휘하에서 태평천국 운동과 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군사적 공적을 쌓았고, 이를 통해 청나라 내부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상하이 방어, 가흥 공략 등에서 활약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절강제독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의 활동을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오장경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군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등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경쟁 속에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에 전통적인 종속국이었던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자 했다. 오장경은 이러한 청나라의 정책 기조에 따라 조선을 청나라의 동북 3성과 연계한 방어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며, 더 나아가 조선을 신장이나 타이완처럼 청나라의 직접 통치 하에 두어 군현제를 실시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그는 열강을 향해 "조선은 청나라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청나라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오장경은 청나라 내부의 위기를 수습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동시에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청나라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실현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조선 정책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저해하고 동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참조
[1]
서적
日本の植民地の真実
https://www.google.c[...]
扶桑社
2003-10-31
[2]
서적
韓国は日本人がつくった
ワック (メディア企業)|ワック
200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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