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 힌 흐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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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라프 힌 흐비티는 9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바이킹 바다왕이다. 그는 820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853년경 더블린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아일랜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친족 이마르와 공동으로 통치했고, 아이슬란드 전통에 따르면 헤브리디스의 통치자의 딸인 오드 딥마인디와 결혼하여 토르스테인 레드를 두었다. 올라프는 871/2년에 알바의 왕 코스타틴 1세에게 살해된 아믈라입 콘웅과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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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힌 흐비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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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9세기 |
사망 | 9세기 |
배우자 | 아우다 케틸스도티르 |
자녀 | 토르스테인 붉은색 헬기 |
봉사 정보 | |
복무 기간 | 9세기 |
칭호 | 해왕 |
지위 | 더블린의 바이킹 지도자 |
작위 | 더블린 왕국의 왕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출생과 가계
올라프는 820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노르드의 군벌 잉야르드 헬가손이었다. 몇몇 전통적인 자료들은 올라프를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후손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에이르비갸 사가''는 올라프의 아버지의 할머니(토라)가 라그나르의 아들 시구르드 뱀의 눈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구르드가 9세기 중반에 살았던 인물이고 라그나르 자신도 860년대까지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대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연결은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아일랜드의 단편 기록들은 올라프의 아버지가 라그날의 아들인 고드프레드의 아들인 고드프레드라는 다른 계보를 제시하기도 한다.[1]아이슬란드 자료인 ''란다나보크''와 ''락스달라 사가''에 따르면, 올라프는 헤브리디스의 통치자였던 케틸 플랫노스의 딸 오드 딥마인디( Auðr|아우드non )와 결혼했다. 반면 아일랜드 자료에서는 올라프의 아내를 단순히 "아에드 왕"의 딸이라고만 언급한다.[2]
올라프와 오드 사이에는 아들 토르스테인 레드( Þorsteinn rauðr|토르스테인 라우드non )가 태어났다. 토르스테인은 870년대에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다. 어떤 시점에서 올라프는 처가인 케틸 가문과 불화를 겪었고, 아내 오드와 아들 토르스테인을 그녀의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냈다. ''란다나보크''에 따르면 올라프와 토르스테인 레드는 모두 영국 제도에서 사망했다.
토르스테인 레드는 투리드 에이빈다르도티르 아우스트만과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 자녀들은 그로아, 아로프, 토르게르드, 토르힐드, 빅디스, 오스크, 그리고 ''란다나보크''의 저자인 아리 프로디의 조상인 올라프 페일란이다.[3] 이 가계는 빈란드 탐험가 및 스투를룽 가문과도 연결된다.[4]
2. 2. 더블린 통치와 결혼
853년경 더블린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아일랜드 자료에 따르면, 올라프는 그의 친족 이마르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아이슬란드 전통 기록인 ''란다나보크''와 ''락스달라 사가''에 따르면, 올라프는 헤브리디스의 통치자 케틸 플랫노스의 딸 오드 딥마인디(Auðr|아우드non)와 결혼했다. 반면 아일랜드 자료에서는 올라프의 아내를 "아에드 왕"의 딸이라고만 언급한다.[2]올라프와 오드 사이에는 아들 토르스테인 레드(Þorsteinn rauðr|토르스테인 라우드non)가 있었는데, 그는 870년대에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다. 어느 시점에 올라프는 케틸 가문과 사이가 틀어져, 아내 오드와 아들 토르스테인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냈다.
2. 3. 스코틀랜드 원정과 죽음
올라프의 아들 토르스테인 레드Þorsteinn rauðr|토르스테인 라우드르non는 870년대에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자 시도했다. 어느 시점엔가 올라프는 아내 오드 딥마인디의 아버지인 케틸 플랫노스 가문과 불화를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내 오드와 아들 토르스테인을 케틸에게 돌려보냈다. 아이슬란드의 기록인 ''란다나보크''에 따르면, 올라프와 그의 아들 토르스테인 레드는 모두 영국 제도에서 사망했다.[3]3. 올라프의 정체와 역사적 추론
아일랜드 게일어 자료에 따르면, 올라프는 871년 또는 872년에 알바의 왕 코스타틴 1세에게 살해된 아믈라입 콘웅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그윈 존스와 피터 헌터 블레어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고대 노르드 자료에서는 9세기에 베스트폴 가문에 속하는 두 명의 올라프가 언급된다. 첫 번째 인물인 '백색의 올라프'는 더블린과의 관계 및 케틸 플랫노스와의 연관성 때문에 초기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연대기에 등장하는 더블린의 왕 올라프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헤임스크링글라에서는 베스트폴의 올라프 구스프리드손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그가 고크스타드 선박에 묻힌 왕일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초기에는 더블린에서 통치하며 스코틀랜드를 약탈하다가 871년에 베스트폴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돌아온 베스트폴의 올라프 구스프리드손이라는 단 한 명의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일랜드 연대기 세 조각은 이러한 이론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지만, 베스트폴의 올라프 구스프리드손이 더블린의 '백색의 올라프'이자 스코틀랜드 제도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연대기는 더블린의 올라프가 871년경 아버지 구스프리드가 왕국을 쟁탈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웨이로 돌아가면서 더블린에서의 통치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더블린의 올라프(란드나마보크의 '백색 올라프'라는 별칭을 가진)를 노르웨이의 올라프 구스프리드손과 동일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4. 가계
(토라/토라)
(아슬라우그/아슬랑가/크라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