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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한국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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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王)은 한국의 성씨로, 고려 왕족의 후예이거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공신들의 후손이 주를 이룬다. 주요 본관으로는 개성 왕씨, 강릉 왕씨, 해주 왕씨 등이 있다. 개성 왕씨는 고려 왕족의 본관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의 탄압으로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강릉 왕씨는 왕유, 왕예, 왕순식 등의 계통이 있으며, 해주 왕씨는 중국 산동성 출신 왕유를 시조로 한다. 이 외에도 제남 왕씨, 산동 왕씨, 화북 왕씨 등 중국계 왕씨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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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씨 - 왕규 (함규)
    왕규는 고려 초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건국에 기여하여 왕씨 성을 받았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반역 혐의로 숙청되어 그의 후손들은 함씨로 복성되었으며, 그의 대한 평가는 왕권 불안정과 호족 세력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엇갈린다.
왕 (한국 성씨)

2. 한국의 왕씨

한국의 왕씨는 주로 고려 왕족의 후예이거나,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 과정에서 공신들에게 하사한 성씨에서 유래한다.

대표적인 본관으로는 고려 왕족의 후예인 개성 왕씨가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개성 왕씨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 후기에 복권되었다.

고려 태조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은 본관으로는 강릉 왕씨해주 왕씨 등이 있다. 강릉 왕씨는 고려 태조의 아들, 김주원의 후손, 명주 호족 등 여러 계통이 있었으나, 조선 초기의 탄압으로 많은 수가 본래 성으로 돌아가거나 흩어졌다. 해주 왕씨는 중국 출신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왕유(王儒)를 시조로 한다.

이 외에도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이주한 제남 왕씨를 비롯하여 산동 왕씨, 송도 왕씨, 화북 왕씨 등 중국계 왕씨 본관이 존재한다.

2. 1. 개성 왕씨

개성 왕씨(開城 王氏)는 고려 왕족의 본관이다.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거의 멸족의 위기에 처했다. 이후 17세기 초 효종이 선양에서 왕이문과 교우를 맺은 것을 계기로 왕씨에 대한 탄압 정책이 완화되었으며, 18~19세기 정조 대에 이르러 전국에 흩어져 살던 왕씨 후손들을 찾아내 본관을 개성으로 정해주면서 공식적으로 복성(復姓)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18~19세기에 복성된 왕씨들이 실제로 왕건의 후손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근현대 인구 통계에서 나타나는, 특정 유명 본관으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과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한다.

2. 1. 1. 고려 왕조와의 관계

개성 왕씨 (開城 王氏)는 고려 왕족의 본관이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정사(正史)인 편년통록에는 고려 태조의 증조부 국조당나라 당 선종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국사(國史)에 자신을 당나라 당 숙종의 후손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원나라 시대에 논의된 바 있다. 원나라의 한 학자가 당시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고려 충선왕에게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가 당 숙종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숙종은 어린 시절 궁궐 밖을 나간 적이 없고, 안록산의 난 당시에는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떻게 조선(고려를 지칭)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충선왕의 신하 민지 (閔漬)가 대신 나서서 "그것은 고려 국사에 잘못 기록된 것이며, 고려 왕족은 당 숙종이 아니라 당 선종의 후손입니다"라고 해명했다. 이후 민지는 편년통록을 편찬하면서 고려 왕족의 선조를 당 숙종이 아닌 당 선종의 후손으로 바로잡아 기록했다.

2. 1. 2. 조선 왕조의 탄압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는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개성 왕씨는 거의 멸족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4월 15일부터 26일까지의 기록에는 왕씨 숙청 과정이 상세히 나타나 있다. 윤방경(尹邦慶)과 오몽을(吳蒙乙)은 왕씨(王氏)들을 강화도 나루에 던졌고, 정남진(鄭南晉)과 함부림(咸傅霖)은 강원도 삼척에서 공양왕 일족을 참수하였다. 또한 손흥종(孫興宗)과 심효생(沈孝生)은 왕씨(王氏)들을 거제 바다에 던졌다. 지방 관청에 명령하여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을 수색하여 참수하였다.

이와 더불어 고려 시대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래 성으로 복성하게 하였다. 중국 왕씨들은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다만, 왕우(王瑀, 공민왕의 동생)의 삼부자(三父子)는 특별히 용서하여 살려 주었다.

2. 2. 강릉 왕씨

강릉 왕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 '''왕유'''(王裕), 고려 태조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김주원의 7대손 '''왕예'''(王乂), 명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순식'''(王順式) 등 세 가지 계통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초기에 이성계가 왕씨를 탄압하면서 왕건의 후손들은 큰 피해를 입어 거의 멸족하였다. 이 과정에서 본래 성이 왕씨가 아니었던 강릉 왕씨 일부는 원래의 성으로 돌아갔다.

2. 3. 해주 왕씨

해주 왕씨의 시조 왕유(王儒)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다. 그는 고려 태조 때 고려로 들어와 왕건에게 왕(王)씨 성을 하사받았다. 왕유는 왕건을 도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 장순공(章順公)에 봉해졌다.[1] 고려 시대 인물로는 왕자지가 있다. 조선 초기에 왕족 탄압 정책으로 왕씨 사용이 금지되면서 해주 왕씨는 잠시 맥이 끊겼으나, 조선 정조 때 왕씨 복원 정책에 따라 다시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2. 4. 기타 왕씨

제남 왕씨(濟南王氏중국어)의 시조는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 출신인 '''왕이문'''(王以文중국어)으로, 초명은 '''왕봉강'''(王鳳崗중국어)이다. 고조부는 태학사를 지낸 왕훈(王訓중국어), 증조부는 병부상서 왕취화(王翠華중국어), 조부는 순무안찰사도어사 왕집(王楫중국어), 아버지는 이부시랑 왕충추(王忠推중국어)이다.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하고 선양에 체류하던 효종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 외에도 중국계 왕씨로는 다음과 같은 본관이 있다.

  • 산동 왕씨: 중국 산동성을 본관으로 한다.
  • 송도 왕씨: 인천 송도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화교귀화한 이들이 사용하는 본관이다.
  • 화북 왕씨: 중국 화북 지역을 본관으로 한다.

3. 중국의 왕씨

중국의 왕씨는 매우 다양한 계통과 본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이주하여 한국 왕씨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왕씨 중에는 중국의 산동성 제남이나 산동성 자체, 화북 지역 등에 뿌리를 둔 경우가 있으며, 각기 다른 연원을 가지고 있다.

3. 1. 제남 왕씨

제남 왕씨(濟南王氏)의 시조는 중국 산동성 제남(濟南) 출신 '''왕이문'''(王以文)이며, 초명은 '''왕봉강'''(王鳳崗)이다. 그의 고조부는 태학사를 지낸 '''왕훈'''(王訓), 증조부는 병부상서 '''왕취화'''(王翠華), 조부는 순무안찰사도어사 '''왕집'''(王楫), 아버지는 이부시랑 '''왕충추'''(王忠推)이다. 왕봉강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하고, 당시 선양에 머물던 효종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3. 2. 산동 왕씨, 화북 왕씨

산동 왕씨의 본관은 중국 산동성이다.

화북 왕씨의 본관은 중국 화북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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