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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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는 고려 명종 15년(1185년)에 현오국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탑비이다. 고려시대 방부규형 비석의 최초 사례로, 왕실 예법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에서 11세기경에 건립된 서봉사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자복사로 지정되어 천태종 사찰로 존속했다. 17~18세기에는 사역의 중심이 이동하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다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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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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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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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정보 | |
이름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Stele for State Preceptor Hyeono at Seobongsa Temple Site, Yongin) |
유형 | 보물 |
번호 | 9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0 |
시대 | 고려 명종 15년(1185년) |
소유자 | 국유 |
수량 | 1기 |
지도 | 대한민국 |
꼬리표 | 용인 서봉사지 |
문화재청 ID | 12,00090000,31 |
2. 역사
서봉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발굴 조사 결과 중심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또는 3칸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나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이를 따라 올라가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 비각 공사 중 서봉사명(瑞峰寺)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현재의 비부(碑趺)는 비의 격에 맞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17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경기 용인현 불사찰 서봉산 서봉사에 고려 이지명이 지은 현오국사비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799년 조선 정조 23년에 쓰여진 범우고(梵宇攷)에는 경기도 용인편에 현오국사비가 있으며, 이지명이 찬하고 유공권이 썼으며, 금 대정 25년(1185)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중엽 조선 철종 연간에 제작된 동여도(東與圖)에는 용인 서봉사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1900년대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서봉사지가 밭으로 변하고 초석 몇 개만 남아있다는 기록을 통해, 서봉사가 조선 후기 18세기까지 운영되다가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은 직사각형 유구 하부에 고려시대 폐기된 기와들을 모아 기와 시설을 만든 것으로, 고려 사찰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서봉사지는 선대 기단 위에 후대 건축물이 들어섰으며, 기단 확장은 없었던 것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불전지 기단은 모두 3단이고 최상단 기단은 초석과 직접 맞물려 있다. 3단 불전지의 경우 전면 기단 안쪽에 다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초석을 설치했는데, 다양한 석재가 혼용되어 있어 서봉사는 후대에도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보여준다.
2. 1. 고려시대
명종 15년(1185)에 현오국사(1125~1178)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현오국사탑비가 건립되었다. 현오국사는 15세에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1146년 수좌(首座)가 되어 귀신사(歸信寺), 국태사(國泰寺), 중광사(重光寺), 부석사(浮石寺) 등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승통이 되어 법문을 이끌었다.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비석은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비받침 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비 형태가 귀부이수형(龜趺螭首形)에서 방부규형(方趺圭形)으로 변모한 최초의 사례이다. 규형의 단순한 비신 형태는 왕실 예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의 성은 왕씨(王氏)였으며, 속명은 종린(宗璘)으로 대각국사의 여풍을 이어받아 고려 중기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명종은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본문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이지명(1127~1191), 필체 현오선사비문(玄悟禪師碑文)은 병부낭중(兵部郎中) 유공권(1132~1196)이 작성했다는 기록과 건립연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봉사지에는 10세기에서 11세기경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과 명문에 의해 1185년 2월에 건립된 탑비가 발굴되었고, 석탑과 탑비의 선후관계와 사찰 가람상의 석탑과 탑비의 건립 위치가 조사되었다.
2. 2.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7년(1407년)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많은 사찰들이 통폐합될 당시에도 서봉사(瑞峰寺)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어 천태종 사찰로 존속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경에는 성화 3년 명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새롭게 조성되었는데, 이는 왕실 사원과 동일한 가람배치 구조를 보였다.발굴 조사된 청기와 편들을 통해, 청기와는 국가 주도로 제작되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봉사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경복궁, 원각사지, 회암사지 등과 같이 청기와를 사용한 건축물 배치는 조선 세조 대를 중심으로 한 왕실 사원과 동일한 구조를 적용한 것이다.
17~18세기에는 자연재해 등의 영향으로 사역(寺域)의 중심이 이동하고,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다. 이후 18세기까지 사찰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다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3. 발굴 조사 및 유물
고려 명종 15년(1185)에 현오국사(1125~1178)의 행적을 알리고자 탑비가 건립되었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서봉사명(瑞峰寺) 기와 조각, 현오국사탑비 등이 발견되었다. 청기와 편(片)들이 발굴되어 서봉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0세기에서 11세기경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과 1185년 2월에 건립된 탑비가 발굴되었고, 석탑과 탑비의 선후 관계, 사찰 가람상의 석탑과 탑비 건립 위치가 조사되었다. 고려시대 기와를 활용한 시설 등 고려 사찰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불전지(佛殿址) 기단은 3단이고 최상단 기단은 초석과 직접 맞물려 있으며, 다양한 석재가 혼용되어 있어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4. 유적의 의의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는 고려와 조선 시대 불교 건축 및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현오국사탑비를 통해 고려 중기 불교계 동향과 현오국사의 생애를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 속에서도 왕실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한 사찰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청기와 사용, 가람 배치 등을 통해 당시 서봉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현오국사는 대각국사의 영향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부석사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 나이로 입적하였다. 명종은 그를 국사로 삼고 '현오'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에는 한림학사승지 이지명(1127~1191)이 글을 짓고, 병부낭중 유공권(1132~1196)이 글씨를 썼다는 기록과 건립 연대(1185년)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7세기)에는 '경기 용인현 불사찰 서봉산의 서봉사 절에는 고려 이지명이 지은 현오국사비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정조 23년(1799년)에 쓰여진 범우고(梵宇攷)에는 '현오국사비가 있다. 이지명이 찬하였고, 유공권이 서하였다. 금 대정 25년(1185)에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세기 중엽 조선 철종 때 제작된 동여도에는 용인 서봉사지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1900년대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서봉사지가 밭으로 변하고 초석 몇 개만 남아있다는 기록을 통해, 서봉사가 조선 후기 18세기까지 운영되다가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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