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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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파(UFA, Universum Film AG)는 1917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독일의 대규모 영화 제작사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선전 영화 제작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후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중심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20년대 후반 재정 위기를 겪으며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인수되었고, 나치 시대에는 프로파간다 영화 제작에 동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연합군의 통제 하에 해체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UFA Film & TV Produktion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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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기업)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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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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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명칭 | 해당 없음 |
종류 | 자회사 |
장르 | 해당 없음 |
운명 | 해당 없음 |
전신 | 해당 없음 |
후신 | 해당 없음 |
설립일 | 1917년 12월 18일, 베를린, 독일 |
산업 | 영화 산업 |
제품 | 영화 TV 영화 TV 시리즈 |
제작 |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
소재지 | 바벨스베르크, 포츠담, 브란덴부르크 |
서비스 지역 | 전 세계 |
모기업 | 프리맨틀 |
공식 웹사이트 | http://ufa.de/ |
경영진 | |
최고 경영자 (CEO) | 니코 호프만 |
사업부 | |
사업부 목록 | 픽션 미테 시리얼 드라마 쇼 & 팩추얼 다큐멘터리 |
2. 역사
우파(UFA)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독일 정부의 주도로 베를린에서 설립되었다. 초기 설립 목적은 전쟁 선전 영화 및 공공 목적의 영화 제작이었으나, 자금은 도이체 은행의 전 중역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가 대표하는 컨소시엄이 출자하면서 상업적 성격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설립 이후 여러 영화사를 통합하며 규모를 키운 UFA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며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메트로폴리스》(1927) 등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들을 제작했다. 이 시기 UFA는 할리우드와 경쟁하는 주요 영화 제작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와 같은 대작 영화의 흥행 실패와 경영난으로 1920년대 중반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았다. 1925년에는 할리우드의 파라마운트 영화사 및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와 상호 영화 배급 및 시장 확보를 위한 파루파메트 협정을 맺었으나, 이는 오히려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927년, 우익 성향의 미디어 기업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인수되었다.
1933년 나치당 집권 이후 UFA는 점차 나치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활용되었고, 1937년 사실상 국유화되었다. 이 시기 많은 유대인 및 반나치 성향 영화인들이 해외로 망명했으며, UFA는 노골적인 선전 영화와 함께 오락 영화를 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1956년 서독에서 민영화되어 재건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영화 제작을 중단했다. 이후 베르텔스만 그룹에 인수되어 현재는 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미디어 기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2. 1. 설립 배경 (1917)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적들이 영화 선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독일 제국 육군 최고사령부는 1917년 1월 13일 심리전을 위한 영화 활용을 목적으로 빌트 운트 필름암트(Bufa)를 창설했다.그러나 독일 참모본부, 특히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단순히 선전 영화 제작을 넘어, 국익에 봉사할 대규모 국가 통제 영화 기업 설립을 구상했다. 이러한 구상 아래 '''Universum-Film AG (UFA)'''는 1917년 12월 18일, 여러 사립 영화사들을 통합하여 베를린에서 설립되었다. 초기 자본금은 독일 제국 마르크였으며, 주요 출자자로는 독일 정부, 전쟁부, 그리고 도이체 은행이 참여했다. 신설된 회사의 이사회 의장은 도이체 은행 이사였던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가 맡았다.
설립 이전, 참모본부는 1916년 설립된 Deutsche Lichtbild-Gesellschaft|도이체 리히트빌트-게젤샤프트de e. V. (DLG)의 인수를 고려하기도 했다. 이 기관은 알프레드 후겐베르크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그는 훗날 1927년 UFA를 인수하게 된다.
1917년 말부터 UFA의 핵심을 이룬 주요 영화사들은 다음과 같다.
- 메스터 필름: 독일의 주요 제작자 오스카 메스터 소유.
- PAGU(Projektions Union): 파울 데이비드슨이 설립했으며, 베를린-템펠호프와 바이스제에 스튜디오를, 약 50개의 영화관 체인을 소유.
- Nordisk Film의 독일 내 모든 사업: 제작사 Oliver-Film, 영화관, 배급 회사 등을 포함하며 1918년 UFA에 인수됨.
UFA 창립 당시 공식적인 임무는 장편 영화, 다큐멘터리, 문화 영화, 주간 뉴스 영화 등을 제작하여 해외에서 독일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립 멤버들 간의 긴장 속에서 도이체 은행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군사적 목적보다는 상업적 영화 제작 방식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독일 내 영화 수입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신생 UFA는 독일 시장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 2. UFA 설립과 초기 활동 (1917-1920년대 초)
우파(UFA) 설립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영화 선전 강화 필요성이 있었다. 1917년 1월 13일, 독일 최고 육군 사령부는 영화를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빌트 운트 필름암트(Bufa)를 창설했다.
독일 참모본부, 특히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단순한 선전 영화 제작을 넘어 국익에 봉사하는 대규모 국가 통제 영화 기업 설립을 구상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우니베르숨-필름 AG(Universum-Film AG, UFA)'''가 1917년 12월 18일 베를린에서 여러 사립 영화사들을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초기 자본금은 2,500만 독일 제국 마르크였으며, 독일 정부, 전쟁부, 도이체 은행 등이 출자했다. 도이체 은행 이사였던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가 신설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설립 초기부터 UFA는 주요 영화사들을 흡수하며 규모를 확장했다. 1917년 말부터 핵심이 된 회사는 다음과 같다.
- 메스터 필름: 독일의 주요 제작자 오스카 메스터 소유.
- PAGU(Projektions Union): 파울 데이비드슨이 설립했으며, 베를린-템펠호프와 바이스제에 스튜디오 및 약 50개의 영화관 체인(Union-Theater)을 보유.
- Nordisk Film의 독일 내 모든 사업: 1918년 UFA에 인수됨.
이후에도 여러 회사가 UFA에 합류했다.
- 조 메이의 May-Film 회사.
- 그린바움 필름: 1919년 합류.
- 데클라-바이오스코프: 1920년 에리히 포머의 데클라-필름과 합병 후, 1921년 10월 UFA에 인수됨.
또한 UFA는 Deulig, 체레피 필름(1922년 합병)[4], 글로리아-필름 AG, 하인리히 볼텐-베커스의 BB-필름, 렉스-필름 등 다양한 독립 제작사들과 제작 계약을 체결하며 영향력을 넓혀갔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외국 영화 수입이 중단된 상황은 신생 UFA가 독일 영화 시장을 장악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설립 초기 UFA의 공식 임무는 독일을 선전하기 위한 장편 영화, 다큐멘터리, 문화 영화, 뉴스 영화 제작이었으나, 점차 도이체 은행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군사적 목적보다는 상업적 영화 제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에 따라 선전 영화 대신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수무룬''(1920)과 같은 오락 영화 제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21년 UFA는 민영화되었으며, 이미 독일 장편 영화 제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2년부터는 노이바벨스베르크(오늘날의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와 베를린-템펠호프의 대형 스튜디오를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활용했다. 데클라-비오스코프 AG 인수 후에는 에리히 포머가 제작 총괄을 맡아 에밀 야닝스, 폴라 네그리, 콘라트 베이트, 리야 데 푸티 등 많은 스타를 발굴하고 육성했다. 이 시기 UFA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선도하며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도박사 마부제''(1922) 등의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와 경쟁하는 주요 영화사로 성장했다.[5]
2. 3.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황금기 (1920년대)
1921년 민영화 이후 UFA는 연간 600편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하며 독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사로 발돋움했고, 그 작품들은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는 특히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황금기로, UFA는 여러 걸작을 탄생시켰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마부제 박사》(1922), 《니벨룽겐》(1924), 《메트로폴리스》(1927)를 연출한 프리츠 랑, 《노스페라투》(1922), 《마지막 웃음》(1924), 《파우스트》(1926)를 만든 F. W. 무르나우 등이 있다. 또한 에밀 야닝스, 폴라 네그리, 콘라트 파이트, 마를렌 디트리히 등 많은 배우들이 무성 영화 시대를 풍미했다. UFA는 실험적인 작품 외에도 독일 특유의 장르인 산악 영화를 제작하여 아르놀트 팡크, 레니 리펜슈탈 등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UFA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1924년 11월 독일 통화 안정 이후 해외 판매가 부진해지고 미국 영화사들과의 경쟁이 심화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6] 특히 《니벨룽겐》과 《메트로폴리스》 같은 대작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예산 초과는 재정난을 가중시켰다.[7] 여기에 1925년 미국 파라마운트 픽쳐스,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와 체결한 불리한 배급 계약(파루파메트 협정)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1927년 3월, 파산 위기에 몰린 UFA는 미디어 기업가이자 우익 성향의 독일 국가 인민당 당수였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인수되었다. 후겐베르크는 감사회 의장을 맡았고,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가 그의 부관이 되었다.

후겐베르크 인수 초기에는 제작 정책에 큰 변화가 없었다. 1928년, 제작 책임자였던 에리히 포머가 물러나고 에른스트 휴고 코렐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유성 영화(토키)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UFA는 Tobis-Klangfilm과의 계약을 통해 유성 영화 제작 기술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UFA는 《메트로폴리스》(최초로 유네스코 세계 기억 유산에 등재된 영화), 《달의 여인》과 같은 예술적 성취가 높은 작품들을 계속 선보였다. 또한 《아스팔트》(1929), 《마음의 멜로디》 같은 작품과 더불어 《주유소 3인조》(1930), 《회의는 춤춘다》(1931), 《서푼짜리 오페라》(1931)와 같은 뮤지컬 영화(시네 오페레타)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30년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 마를렌 디트리히, 에밀 야닝스 주연의 《푸른 천사》는 세계적인 성공을 기록하며 UFA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하지만 후겐베르크의 인수는 이후 UFA가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2. 4. 후겐베르크 시대와 재정 위기 (1927-1933)
1927년, UFA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1924년 11월 독일 통화 안정화 이후 독일 영화 산업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UFA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은 이윤율과 해외 판매 부진, 그리고 미국 대형 영화사들의 독일 시장 공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6] 특히 1924년부터 1926년 사이 제작된 《니벨룽겐의 노래》와 프리츠 랑 감독의 대작 《메트로폴리스》(1927) 같은 영화에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었으나 흥행에 실패하면서 재정난은 더욱 심화되었다.[7] 여기에 1925년 미국 파라마운트 픽쳐스,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와 체결한 불리한 배급 계약(이른바 파루파메트 협정)은 UFA의 경영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1927년 3월,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보수 성향의 미디어 기업가이자 우익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DNVP) 당수였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자신의 미디어 그룹인 셰를-그루페(Scherl-Gruppe)를 통해 UFA를 인수했다. 후겐베르크는 영화를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총책임자로는 루트비히 클리취(Ludwig Klitzsch)가 임명되었고, 후겐베르크 자신은 감사회 의장을, 그의 측근인 은행가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가 부의장을 맡았다.
후겐베르크 인수 초기에는 UFA의 제작 정책에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1928년에는 기존 제작 책임자였던 에리히 포머가 물러나고 에른스트 휴고 코렐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유성 영화(토키, talkie)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UFA는 토비스-클랑필름(Tobis-Klangfilm)과의 계약을 통해 유성 영화 제작 기술 및 라이선스 확보에 있어 다른 소규모 회사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영상의 변화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UFA는 이 시기에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와 《달의 여인》 같은 작품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는다. 또한 《아스팔트》(1929), 《마음의 멜로디》 같은 사실주의 경향의 영화나, 《주유소 3인조》(1930)와 같은 대중적인 뮤지컬 영화도 제작되었다. 특히 1930년에 개봉한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에밀 야닝스 주연의 《푸른 천사》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UFA의 명성을 높였다.
2. 5. 나치 시대 (1933-1945)
1933년 선거에서 승리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국가인민당은 나치와 연립 정부를 구성했고, 당시 UFA의 소유주였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히틀러 내각의 경제상 겸 농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UFA는 점차 나치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파 팔라스트"(UFA 궁전)라고 불리는 호화로운 영화관들이 베를린의 우파 팔라스트 암 츠오를 비롯한 대도시에 건설되었다.1936년, 독일 최초의 영화 연구소인 UFA-Lehrschau가 한스 트라우브에 의해 바벨스베르크 영화 단지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UFA를 포함한 모든 미디어 회사를 자신의 선전부 통제 하에 두려는 계획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1937년 3월 18일, 후겐베르크 그룹은 UFA의 모든 주식을 2,125만 독일 제국 마르크에 Cautio Treuhand GmbH에 매각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회사는 표면상 준정부 소유였으나 실제로는 괴벨스에게 보고하는 위장 회사였다. 이 조치로 UFA는 사실상 국유화되었다. 에밀 게오르그 폰 슈타우스가 감독 위원회 의장으로, 루드비히 클리치가 총감독으로, 카를 오피츠가 홍보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영화감독 카를 프뢰리히가 이끄는 예술 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이 역시 실제로는 괴벨스의 통제 하에 있었다. 이 위원회는 UFA의 제작 계획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제작 책임자 에른스트 후고 코렐의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결국 코렐은 1939년 나치당 가입을 거부한 후 해고되었다.
국유화 당시 UFA는 27개의 영화 스튜디오(노이바벨스베르크 9개, 베를린-템펠호프 7개 등)를 비롯해 더빙 스튜디오, 믹싱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광고 및 만화 영화 제작 시설, 훈련 시설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프리츠 랑,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마를렌 디트리히 등 많은 유대계 또는 반나치 성향의 영화인들이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 UFA는 노골적인 선전 영화들을 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돌격대원 브란트》, 《히틀러 소년 퀘스》, 《유대인 쥐스》, 《로스차일드 가문》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맹세의 휴가》, 《호라 남작의 모험》과 같이 예술성을 인정받는 작품들도 나왔다. 에밀 야닝스, 베르너 클라우스, 차라 레안더와 같은 스타 배우들은 독일에 남아 활동했지만,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과 같은 창의적인 활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42년 1월 10일, 독일의 모든 영화 제작을 통합 관리하기 위해 UFA-Film GmbH(UFI)가 설립되었고, UFA는 이 UFI의 자회사가 되었다. 바이에른 필름(Bavaria Film), 베를린-필름(Berlin-Film), 테라 필름(Terra Film), 토비스 AG(Tobis AG) 등 다른 주요 영화사들도 해체되거나 UFA에 통합되어 제작 부서로 편입되었다. 독일이 점령한 국가들의 영화 제작 역시 UFI의 통제 하에 놓였다. UFA의 수익은 1942년 1억 5,500만 독일 제국 마르크, 1943년 1억 7,500만 독일 제국 마르크에 달했다. UFA의 조직은 나치의 지도자 원칙에 따라 재편되었으며, 새롭게 임명된 제국 영화 총감독이 UFI 산하 그룹들을 조정했다. 제작 책임자는 행정 총감독 아래에서 연간 프로그램 계획부터 촬영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고 라인 프로듀서와 감독에게 지시를 내렸다. UFA는 1944년 중반에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UFA는 영화 제작을 계속했으며, 주로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고 전의를 다지는 목적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의 포화가 베를린에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괴벨스의 주도로 마지막 대작 영화 《콜베르크》가 개봉되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 국내 상황은 영화를 관람할 여유조차 없었다. 같은 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콜베르크》의 상영은 금지되었다.
2. 6. 전후 해체와 재건 (1945-현재)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은 나치 독일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던 UFA를 해체했다. 1945년 4월 말 포츠담-바벨스베르크와 베를린-템펠호프의 UFA 공방은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고, 5월 독일 국방군 항복 후 군정법에 따라 모든 영화 제작이 금지되고 영화 자산은 압류되었다. 영화 산업 활동은 엄격한 면허와 검열 하에 놓였다.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소련 군정 주도로 영화 산업 재건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1946년 5월 17일, 바벨스베르크 공방을 기반으로 국영 영화사인 DEFA(Deutsche Film AG)가 설립되어 이후 동독의 대표 영화사가 되었다. DEFA는 1945년에서 1946년에 걸쳐 종전 후 첫 독일 장편 영화이자 이른바 "트뤼머필름"(Trümmerfilm, 폐허 영화)의 시초인 ''우리 가운데 살인자들''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볼프강 슈타우테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소련은 또한 바벨스베르크 금고에 있던 UFA 영화들을 자국으로 가져가 러시아어로 더빙해 개봉했으며, 반대로 소련 영화를 독일어로 더빙하여 독일 내 극장에 배급했다.
반면, 미국 등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는 영화 산업 재건이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는 향후 독일 영화 산업 내 권력 집중을 막고, 자국 영화 산업의 독일 시장 진출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UFA의 나치 협력 전력 또한 재개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이유로 1949년 '렉스 UFI' 법과 1953년 독일 연방 의회의 해산 법에도 불구하고 UFA의 재편은 지연되었다. 종전 후 10년간 서방 점령 지역의 영화는 다른 신생 회사들이 제작했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서독에서 UFA는 민영화되었다. 도이체 은행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의 지원으로 새로운 Universum-Film AG가 설립되었다. 재건된 UFA는 1955년 단편 다큐멘터리 ''Am Seidenen Faden''을 시작으로, 1958년에는 사비네 진젠 주연, 요제프 폰 바키 감독의 ''스테파니''를 첫 장편 영화로 내놓았다. 요제프 폰 바키는 1942년 UFA의 대규모 기념 영화 ''뮌히하우젠''을 감독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1969년, 총 11편의 장편 영화 제작을 끝으로 영화 제작을 중단했다.
동독의 DEFA는 독일 재통일 이후인 1990년에 도산했다. 한편, 서독의 UFA는 1991년 베르텔스만 그룹에 인수되어 현재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회사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3. 주요 작품
우파(UFA)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독일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21년 민영화 이후 연간 수백 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독일 최대의 영화사로 자리매김했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우파는 표현주의 영화의 걸작부터 대중적인 오락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보였다.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와 같은 세계적인 감독들이 우파를 통해 활동하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만들었다.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 니벨룽겐, 메트로폴리스, M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메트로폴리스는 SF 영화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F. W. 무르나우는 노스페라투, 마지막 웃음 등을 통해 혁신적인 카메라 기법(언체인드 카메라 기법)을 선보였고,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시킨 푸른 천사를 연출했다.
이 외에도 에밀 야닝스, 폴라 네그리, 콘라트 파이트, 릴리안 하비, 한스 알베르스 등 수많은 배우들이 우파의 스타 시스템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우파는 무성 영화 시대의 표현주의적 작품뿐만 아니라, 유성 영화 시대에 들어서는 주유소 세 친구, 콩그레스는 춤춘다와 같은 경쾌한 음악 영화(시네 오페레타) 장르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또한, 아르놀트 팡크 감독을 중심으로 한 독일 특유의 산악 영화 장르 역시 우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우파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소유 시기를 거쳐 점차 국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1937년 나치당이 대주주가 된 이후 1942년에는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는 우파를 체제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했으며,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나 파이트 하를란의 유대인 쥐스, 콜베르크와 같은 노골적인 선전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리츠 랑, 빌리 와일더 등 많은 유대계 및 반나치 성향 영화인들이 독일을 떠나 해외로 망명하면서 독일 영화계는 큰 손실을 입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도 우파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어가며 한스 알베르스, 자라 레안더와 같은 스타들을 통해 대중적인 오락 영화를 꾸준히 제작했다. 아그파컬러를 사용한 최초의 장편 영화 ''여자가 외교를 더 잘한다''(1941)나 창립 25주년 기념 대작 ''뮌히하우젠''(1943) 등 기술적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들도 나왔다. 하지만 전쟁 말기로 갈수록 영화 제작은 더욱 어려워졌고, 제3제국의 몰락과 함께 우파의 황금기도 막을 내렸다.
3. 1. 1920년대
우파(UFA)는 1920년대에 영화 제작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921년 민영화 이후 연간 약 600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독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사로 성장했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 시기 우파에서는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와 같은 뛰어난 감독들이 활동했다. 프리츠 랑은 마부제 박사(1922), 니벨룽겐(1924), 메트로폴리스(1927), 달의 여인(1929) 등을 연출했고, F. W. 무르나우는 노스페라투(1922), 마지막 웃음(1924) 등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특히 메트로폴리스는 최초의 장편 SF 영화로, 마지막 웃음에서는 '언체인드 카메라' 기법이, 달의 여인에서는 영화 속 카운트다운이 처음 사용되는 등 기술적으로도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무성 영화 시기부터 유성 영화 초기까지 에밀 야닝스, 폴라 네그리, 콘라트 파이트, 마를렌 디트리히, 베르너 클라우스, 릴리안 하비, 빌리 프리치, 한스 알버스, 얀 키에푸라, 마르타 에게르트 등 많은 배우들이 우파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우파는 실험적이거나 급진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독일 영화 특유의 장르인 산악 영화 제작에도 힘썼다. 아르놀트 팡크 감독의 『몽블랑의 폭풍』(1931)을 비롯하여 한네스 슈나이더나 레니 리펜슈탈 등이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재정난에 직면하면서 1927년 언론 재벌이자 우익 성향의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였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인수되었다. 후겐베르크는 이후 우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 특히 당 선전 활동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3. 2. 1930년대
1927년 우익 성향의 실업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인수된 이후, 우파는 점차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으며, 후겐베르크는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로서 당의 선전 목적으로 영화를 활용하기도 했다.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치당과 독일 국가인민당이 연립 정부를 구성하자, 후겐베르크는 히틀러 내각의 경제상·농상으로 입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파는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 제작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비록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의 압력으로 1933년 6월 해임되었지만, 우파는 이미 요제프 괴벨스가 이끄는 선전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선제적 복종의 일환으로, 우파 경영진은 1933년 3월 29일 다수의 유대인 직원들을 해고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나치 정권 주도로 제국 영화 협회가 설립되어 유대인 영화 제작자들을 독일 영화계에서 공식적으로 추방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로 인해 프리츠 랑, 빌리 와일더, 마를렌 디트리히와 같은 많은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나치즘을 피해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역설적으로 우파는 나치 시대에 새로운 상업적 호황기를 맞이했다. 이는 정부의 보호주의 조치로 국내외 경쟁에서 자유로워지고, 때로는 경쟁사의 생산 시설과 인력을 흡수 통합했으며(국가사회주의 영화 정책 참조), 나치 독일의 유럽 점령으로 새로운 판매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과 같은 '중립' 국가에도 배급망을 구축했다. 1938년까지 프랑스, 벨기에 등지의 외국 영화 제작 시설을 인수하면서 해외 매출 비중이 3분의 1에 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무성 영화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른바 '스타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나치 시대에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우파 스타로는 한스 알베르스와 자라 레안더가 있었고, 감독 중에서는 파이트 하를란이 대표적이었다. 또한 "우파 팔라스트"(Ufa-Palastde)라 불리는 호화로운 영화관들이 대도시에 건설되었다.
우파는 나치의 선전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의지의 승리''(1935)를 비롯하여, ''돌격대원 브란트''(S.A.-Mann Brandde, 1933), ''히틀러 소년 퀘스''(Hitlerjunge Quexde, 1933), ''유대인 쥐스''(1940), ''로스차일드 가문''(1940) 등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적인 오락 영화와 예술 영화 제작도 계속되었다. 유성 영화 초기에는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푸른 천사''(1930)와 같은 진지한 극영화와 더불어, ''주유소 세 친구''(1930), ''괴도''(1930), ''콩그레스는 춤춘다''(1931), ''살인자를 찾는 남자''(1931), ''몬테카를로의 폭탄''(1931), ''나의 아내는 사기꾼''(1931), ''상황은 이미 나아지고 있다''(1932), ''황후와 나''(1933), ''왈츠 전쟁''(1933)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음악 영화(시네 오페레타)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독일 특유의 산악 영화 장르도 이어져, 아르놀트 팡크 감독의 ''몽블랑의 폭풍''(1931)과 같은 작품이 나왔으며, 이 장르를 통해 레니 리펜슈탈과 같은 인물이 배우로서 경력을 쌓기도 했다. ''셜록 홈즈였던 남자''(1937), ''바랜 멜로디''(1938) 등도 이 시기에 제작된 주요 작품이다.
1937년, 나치당은 우파의 주식 72%를 취득하며 회사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강화했고, 1942년에는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주요 작품 (1930년대)
연도 | 제목 | 감독 | 비고 |
---|---|---|---|
1930 | 푸른 천사 (Der blaue Engelde) |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 |
1930 | 주유소 세 친구 (Die Drei von der Tankstellede) | 빌헬름 틸레 | |
1930 | 괴도 (Einbrecherde) | 한스 슈바르츠 | |
1931 | 콩그레스는 춤춘다 (Der Kongreß tanztde) | 에리히 샤렐 | |
1931 | 살인자를 찾는 남자 (Der Mann, der seinen Mörder suchtde) | 로베르트 시오드마크 | |
1931 | 몬테카를로의 폭탄 (Bomben auf Monte Carlode) | 한스 슈바르츠 | |
1931 | 나의 아내는 사기꾼 (Meine Frau, die Hochstaplerinde) | 쿠르트 게론 | |
1931 | 몽블랑의 폭풍 (Stürme über dem Mont Blancde) | 아르놀트 팡크 | 산악 영화 |
1932 | 상황은 이미 나아지고 있다 (Es wird schon wieder besserde) | 쿠르트 게론 | |
1933 | 황후와 나 (Ich und die Kaiserinde) | 프리드리히 홀렌더 | |
1933 | 돌격대원 브란트 (S.A.-Mann Brandde) | 프란츠 자이츠 | 프로파간다 영화 |
1933 | 히틀러 소년 퀘스 (Hitlerjunge Quexde) | 한스 슈타인호프 | 프로파간다 영화 |
1933 | 왈츠 전쟁 (Walzerkriegde) | 루트비히 베르거 | |
1935 |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de) | 레니 리펜슈탈 |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 |
1937 | 셜록 홈즈였던 남자 (Der Mann, der Sherlock Holmes warde) | 카를 하르틀 | |
1937 | 남쪽의 유혹 (La Habanerade) | 더글러스 서크 | |
1938 | 바랜 멜로디 (Verklungene Melodiede) | 빅토르 투르잔스키 | |
1938 | 맹세의 휴가 (Urlaub auf Ehrenwortde) | 카를 리터 |
3. 3. 1940년대
1937년 나치당이 우파 주식의 72%를 취득하면서 회사는 점차 국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영화를 선전 도구로 활용하고자 우파의 인사와 경영에 직접 개입했으며, 결국 1942년에 이르러 우파는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리츠 랑,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 많은 유대계 및 반나치 성향 영화인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우파는 이전의 창의적인 활력을 잃게 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도 영화 제작은 계속되었으며, 주로 체제 선전과 국민 사기 진작을 위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1941: ''여자가 외교를 더 잘한다'' (게오르크 야코비 감독) - 독일 최초의 아그파컬러 장편 영화
- 1943: ''뮌히하우젠'' (요제프 폰 바키 감독) - UFA 창립 25주년 기념 컬러 영화
- 1944: ''피어첸겐보울'' (헬무트 바이스 감독)
- 1945: ''콜베르크'' (파이트 하를란 감독) - 제3제국 말기의 대표적인 선전 영화
- 1945: ''다리 아래에서'' (헬무트 코이트너 감독)
특히 1945년 1월, 소련군의 포위 속에서 괴벨스의 지시로 제작된 대작 ''콜베르크''가 개봉되었으나, 전쟁 막바지 혼란 속에서 널리 상영되지는 못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 이 영화의 상영은 금지되었다.
4. 주요 영화인
UFA는 독일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며 수많은 감독과 배우를 배출했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표현주의 영화와 사실주의 영화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와 같은 거장 감독들과 에밀 야닝스, 마를렌 디트리히 등 국제적인 스타 배우들이 활동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UFA와 소속 영화인들의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이미 회사 내부에 존재했던 민족주의적 독일 정신은 UFA가 국가 사회주의 선전의 목표를 수행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히틀러 내각에 경제부 장관으로 참여하면서(비록 1933년 6월 해임되었지만), UFA는 요제프 괴벨스가 이끄는 선전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선제적 복종의 표시로, UFA 경영진은 1933년 3월 29일 여러 유대인 직원을 해고했다. 같은 해 여름 설립된 제국 영화 협회는 모든 독일 스튜디오에서 유대인 영화 제작자를 공식적으로 배제하는 규정을 채택했다. 이로 인해 프리츠 랑, 빌리 와일더 등 많은 재능 있는 유대인 및 반나치 성향의 영화인들이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반면, 나치 정권의 보호주의 정책과 점령지 확대로 인한 시장 확대(1938년까지 매출의 1/3이 해외에서 발생)에 힘입어 UFA는 상업적으로는 새로운 호황을 누렸다. 정부는 국내외 경쟁으로부터 UFA를 보호하고 때로는 경쟁사의 시설과 인력을 UFA에 통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UFA는 무성 영화 시대부터 발전시켜 온 이른바 "스타 시스템"을 더욱 강화했으며, 한스 알버스나 자라 레안더와 같은 배우들은 나치 시대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스타로 부상했다. 파이트 하를란은 이 시기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이처럼 나치 시대 UFA는 정권의 선전 도구로 기능하는 동시에 상업적 성공을 구가했으며, 일부 영화인들은 정권에 협력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4. 1. 감독
UFA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 독일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이 시기 많은 감독들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특히 무성 영화 시대와 초기 유성 영화 시대에 활약한 감독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사실주의 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프리츠 랑이 있다. 그는 마부제 박사, 메트로폴리스, 달의 여인 등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들을 통해 UFA의 명성을 높였다. F. W. 무르나우 역시 노스페라투, 마지막 웃음, 최후의 인간, 파우스트 등을 연출하며 독일 영화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렸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푸른 천사를 감독했다.
이 외에도 무성 영화 및 초기 유성 영화 시대에 UFA에서 활동한 주요 감독은 다음과 같다.
또한 UFA는 독일 특유의 장르인 산악 영화 제작에도 힘썼는데, 아르놀트 팡크는 몽블랑의 폭풍 등을 연출하며 이 장르를 개척했고, 레니 리펜슈탈과 같은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UFA의 환경은 크게 변화했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히틀러 내각에 참여하면서 UFA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 기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리츠 랑,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등 많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독일을 떠나 해외로 망명했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나치 시대 동안 UFA의 전속 감독이었거나 주로 활동했던 감독은 다음과 같다.
- 카를 뵈제
- 에두아르트 폰 보르소디
- 페터 파울 브라우어
- 카를 하르틀
- 게오르크 야코비
- 게르하르트 람프레히트
- 헤르베르트 마이슈
- 파울 마르틴
- 카를 리터
- 라인홀트 쉰첼 (1936년까지)
- 더글러스 서크 (1937년까지 활동, 남쪽의 유혹 등 연출)
- 한스 슈타인호프
- 로베르트 A. 슈템믈레
- 빅토르 투르얀스키
- 구스타프 우치키
- 에리히 바슈네크
이 시기 UFA는 S.A. Mann Brand|돌격대원 브란트de, Hitlerjunge Quex|히틀러 소년 퀘스de, 유대인 쥐스,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노골적인 선전 영화를 제작하는 한편, Urlaub auf Ehrenwort|맹세의 휴가de, 호라 남작의 모험과 같은 일반 오락 영화나 예술 영화도 계속 만들었다. 나치 시대에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감독은 파이트 하를란이었으며,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와 같은 선전 영화로 알려졌다.
4. 2. 배우
무성 영화 시대부터 유성 영화 초기에 걸쳐 우파(UFA)에서는 많은 유명 배우들이 활동했다. 대표적인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산악 영화 장르에서는 레니 리펜슈탈 등이 활동하기도 했다.
나치 시대에는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과 선전 활동 강화 속에서 이른바 "스타 시스템"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 시기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는 한스 알버스와 자라 레안더였다.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마를렌 디트리히를 비롯한 많은 유대계 및 반나치 성향의 영화인들이 독일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반면, 에밀 야닝스, 베르너 클라우스, 차라 레안더 등 일부 스타 배우들은 나치 정권 하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5. 한국과의 관계
우파(UFA)는 나치 시대에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 덕분에 새로운 상업적 호황을 누렸는데, 이는 경쟁사들을 배제하고 때로는 생산 시설과 인력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참조: 나치의 영화 정책). 나치 정권은 점령한 유럽 지역을 통해 UFA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은 중립국에도 유통망을 확장했다. 1938년까지 프랑스, 벨기에 등지의 외국 영화 제작 시설을 인수하며 해외 매출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무성 영화 시대부터 이어져 온 스타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나치 시대 UFA의 최고 수입 배우는 한스 알베르스와 자라 레안더였으며, 감독 중에서는 파이트 하를란이 가장 높은 수입을 올렸다.
UFA는 이미 회사 내에 존재하던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나치의 선전 목표를 수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UFA의 소유주였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1933년 1월 나치의 집권 직후 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비록 그가 같은 해 6월 히틀러의 압력으로 해임되었지만, UFA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다. UFA 경영진은 나치 정권에 대한 선제적인 협력의 표시로 1933년 3월 29일 다수의 유대인 직원들을 해고했다. 같은 해 여름, 나치 정권은 제국 영화 협회를 설립하여 모든 독일 스튜디오에서 유대인 영화 제작자를 공식적으로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UFA는 나치와의 연관성 때문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심지어 정치와 무관한 영화들조차 UFA 이름을 삭제하고 재개봉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동독 지역에 있던 스튜디오는 "Deutsche Film AG"(DEFA)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독일 재통일 후인 1990년에 파산했다. 서독에서도 UFA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UFA는 1991년부터 베르텔스만 그룹 산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회사로 남아 있다.
6. 평가 및 유산
UFA는 나치 시대에 정부의 보호주의 조치를 통해 국내외 경쟁에서 벗어나고 생산 시설과 인력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상업적 호황을 누렸다. 나치 정권이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UFA는 새로운 판매 시장을 확보했고, 미국과 같은 중립국에도 유통망을 두었다. 1938년까지 프랑스, 벨기에 등의 외국 영화 제작 시설을 인수하며 회사 매출의 3분의 1을 해외에서 벌어들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UFA는 무성 영화 시대부터 발전시켜 온 이른바 "스타 시스템"을 더욱 확장했다. 나치 시대에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UFA 스타로는 한스 알베르스와 자라 레안더가 있었고, 감독 중에서는 파이트 하를란이 가장 높은 수입을 기록했다.
회사를 지배하던 민족주의적 독일 정신은 UFA가 국가 사회주의(나치) 선전 목표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1933년 1월 나치의 정권 장악 직후 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비록 그가 같은 해 6월 히틀러의 압력으로 해임되었지만, UFA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 기구로 활용되었다. UFA 경영진은 나치 정권에 대한 선제적 복종의 표시로 1933년 3월 29일 여러 유대인 직원을 해고했다. 같은 해 여름, 나치 정권은 제국 영화 협회를 설립하여 모든 독일 스튜디오에서 유대인 영화 제작자를 공식적으로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UFA는 나치와의 연관성 때문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심지어 정치와 무관한 영화 작품들조차 UFA 이름을 삭제하고 재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독 지역에 있던 스튜디오는 "Deutsche Film AG"(DEFA)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독일 재통일 이후 1990년에 파산했다. 서독에서도 UFA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UFA는 1991년부터 베르텔스만 그룹 산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회사로 남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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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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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UFA Films Incorporated, plaintiff, against UFA Eastern Division Distribution Inc., National Surety Company and David Brill, defendants : memorandum in support of plaintiff's motion for a temporary injunction
https://search.libra[...]
New York : Pandick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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