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프리스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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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프리스치케는 조지아에 위치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정착지 중 하나로 확인되었다. 기원전 2천년 말에 인간의 흔적이 처음 나타났으며, 서기 1천년 초에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 건설되었다. 카르틀리 왕국의 주요 정치 및 종교 중심지로 부상했으나, 기독교화 이후 므츠헤타와 트빌리시에 중요성을 내주며 쇠퇴했다. 8~10세기 이슬람 정복 시대에 다시 조지아의 주요 거점으로 부활했지만, 14세기 몽골 침입으로 인해 버려졌다. 우프리스치케는 세 구역으로 나뉘며, 암석을 깎아 만든 다양한 구조물과 방어 시설, 기독교 바실리카 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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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지아는 12세기 조지아 남부에 조성되어 타마르 여왕 시대에 절정을 이룬 동굴 수도원으로, 지진 피해와 다양한 시설, 돔미션 교회 벽화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가 보류되었다.
우프리스치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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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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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위치 | 조지아 중동부, 므츠헤타므티아네티 주 |
좌표 | 41°58′31″N 44°12′37″E |
유형 | 고고학 유적지 |
지정 연도 | 1999년 |
지정 기준 | 문화 (i)(iii)(iv) |
UNESCO ID | 939 |
면적 | 0.04 km² |
완충 지역 | 0.36 km² |
지질학적 맥락 | |
위치 | 트빌리시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
강 | 므트크바리 강 북쪽 기슭 |
지형 | 바위 언덕 |
역사적 맥락 | |
시기 | 기원전 2세기 ~ 중세 |
설명 | 고대 카르틀리 왕국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 |
건축적 맥락 | |
특징 | 바위를 깎아 만든 도시, 다양한 구조물 (신전, 주거 공간, 도로 등) |
건축 양식 | 지역의 토착 건축 양식과 이란 건축 양식의 혼합 |
보존 상태 | |
상태 | 일부 구조물은 손상되었으나, 여전히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음 |
관리 | 조지아 문화재 보호청 |
기타 정보 | |
관련 링크 | UNESCO 세계 문화 유산 페이지 |
2. 역사
우프리스치케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정착지 중 하나로 확인되었다. 고대 카르틀리 왕국(또는 고전 시대 저술가들에게 알려진 이베리아)의 중심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이곳은 이 나라의 주요 정치 및 종교 중심지로 부상했다. 도시의 오랜 역사와 중요성으로 인해 중세 조지아의 기록은 그 기원을 므츠케토스의 아들이자 카르틀로스의 손자인 신화적인 우플로스에게 돌리고 있다.[1]
우프리스치케에서 인간의 흔적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천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조물은 서기 1천년 초에 지어졌다. 4세기 카르틀리의 기독교화와 더불어, 우프리스치케는 쇠퇴하고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므츠헤타와, 나중에는 트빌리시에게 그 입지가 넘어갔다. 8~9세기에 무슬림의 트빌리시 정복 기간 동안 우프리스치케는 조지아의 중요한 아성으로 재출현했다. 14세기에 몽골의 침입으로 그 도시의 궁극적인 빛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 전쟁의 결과로 도시는 사실상 유기되었고, 어쩌다 외국이 침입하면 임시 피난처로 사용될 뿐이었다.[1]
2. 1. 초기 정착과 발전
우프리스치케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형 정착지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1] 고대 카르틀리 왕국 (또는 고전 고대 작가들에 의해 이베리아라고도 알려진)의 중심부에 전략적으로 위치하여, 이 나라의 주요 정치 및 종교 중심지로 부상했다. 도시의 오랜 역사와 중요성으로 인해 중세 조지아의 기록은 그 기원을 므츠케토스의 아들이자 카르틀로스의 손자인 신화적인 우플로스에게 돌리고 있다.[1]
우프리스치케에서 인간의 흔적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천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조물은 서기 1천년 초에 지어졌다.[1] 4세기 초 카르틀리가 기독교화되면서 우프리스치케는 그 중요성이 쇠퇴하고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므츠헤타와 나중에는 트빌리시에 그 자리를 내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시로서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첫 번째 기독교 바실리카는 6세기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우프리스치케는 8~10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시대에 트빌리시를 상대로 조지아의 주요 거점으로 다시 부상했다. 또 다른 3개의 교회가 있는 바실리카가 그 당시에 건설되었다. 14세기의 몽골의 조지아 침략은 도시의 최후의 쇠퇴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사실상 버려졌고, 외국 침략 시기에 임시 피난처로만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1]
2. 2. 기독교화와 쇠퇴
4세기 카르틀리의 기독교화 이후, 우프리스치케는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므츠헤타와 트빌리시에 그 중요성을 넘겨주며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도시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6세기에 최초의 기독교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1] 8~10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시대에 우프리스치케는 트빌리시를 상대로 조지아의 주요 거점으로 다시 부상했다. 그 당시에 또 다른 3개의 교회가 있는 바실리카가 건설되었다. 14세기 몽골의 조지아 침략으로 도시는 사실상 버려졌고, 외국 침략 시기에 임시 피난처로만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1]2. 3. 이슬람 정복기와 재부상
8~10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 시대에 우프리스치케는 트빌리시에 대항하는 조지아의 주요 거점으로 다시 부상했다. 이 시기에 3개의 교회가 있는 바실리카가 추가로 건설되었다.[1]2. 4. 몽골 침입과 유기
4세기에 카르틀리가 기독교화되면서, 우프리스치케는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므츠헤타와 나중에는 트빌리시에 그 입지가 넘어가며 중요했던 지위가 쇠퇴했다. 그러나 8~9세기에 무슬림의 트빌리시 정복 기간 동안 우프리스치케는 조지아의 중요한 아성으로 다시 나타났다. 14세기에 몽골의 침입으로 그 도시의 궁극적인 빛은 상실하게 되었다.[1] 그 전쟁의 결과로 도시는 사실상 버려졌고, 외국이 침입했을 때 임시 피난처로만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1]3. 건축
우플리스치케는 므트크바리 강을 따라 평평하고 약간 경사진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도시이다. 이 도시는 서쪽 벽이 강까지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북쪽과 동쪽에는 두 개의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 시설로 활용했다. 므트크바리 강은 남쪽에서의 접근을 막는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지만, 3m 길이의 터널을 통해 도시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 터널은 금속 문으로 막아 침략에 대비했다.[2] 도시로 접근하는 세 개의 길 중 두 개는 방어 시설이 없었지만, 북쪽에서 오는 세 번째 길은 바위에 깎여 있었고 최대 10m 높이의 벽이 있었다.[2]
대부분의 동굴에는 장식이 없지만, 일부 큰 구조물에는 통나무 모양을 본떠 바위에 새겨 넣은 장식과 정간이 있는 터널식 둥근 천장이 있다. 몇몇 큰 구조물들의 후면과 측면에는 의식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틈새(니치)가 있다.
1920년 고리 지진으로 인해 가장 취약한 지역의 여러 부분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기념물의 안정성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으며, 2000년에 세계 은행과 조지아 정부가 합동으로 조지아의 문화 유산 기금 제한 보호 프로그램을 착수했다.[3] 우프리스치케 동굴 단지는 2007년부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잠정적으로 포함되었다.
3. 1. 구역 구분
우프리스치케는 크게 남부(하부), 중부(중앙), 북부(상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총 면적은 약 8헥타르에 달한다.[1] 중앙 부분이 가장 크며, 우프리스치케 암석 절단 구조물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고, 좁은 암석 절단 통로와 터널을 통해 남부 지역과 연결된다.[1] 좁은 골목길들과 계단들은 중앙 "도로"에서 다른 구조물로 뻗어 나간다.3. 2. 주요 구조물

우프리스치케 단지는 크게 남쪽(하부), 중부(중앙), 북쪽(상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8헥타르이다. 중앙 부분이 가장 넓고, 암석을 깎아 만든 구조물 대부분이 이 곳에 모여 있다. 남쪽 부분과는 좁은 바위 틈 통로와 터널로 연결된다. 좁은 골목길과 계단이 중앙 "도로"에서 뻗어 나가 다양한 구조물로 이어진다.[1]
대부분의 동굴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몇몇 큰 구조물에는 통나무 모양을 본떠 만든 코퍼드 터널 아치형 천장이 있다. 일부 큰 구조물에는 의식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틈새가 뒷면이나 측면에 있다. 남쪽 부분에 있는 큰 의식 홀 정면은 페디먼트가 있는 로마식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 중 하나는 두 개의 인접한 방이 있는 기둥이 있는 홀이다. 천장은 두 개의 기둥으로 지지되었고, 돌 벤치는 통치자가 앉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정상에는 9~10세기에 돌과 벽돌로 지어진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다. 6세기 바실리카는 남쪽 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위에 깎여 만들어졌으며, 이 벽은 돌로 지어졌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금, 은, 청동 보석류, 도자기 및 조각품 등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 중 상당수는 트빌리시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3. 방어 시설
이 도시는 평평하고 곧지만 약간 경사진 산에 깎여 만들어졌다. 거의 직선의 서쪽 벽이 강까지 뻗어 있었다. 도시 외부 방어는 북쪽과 동쪽에 두 개의 해자로 용이해졌으며, 해자에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므트크바리 강은 남쪽에서 도시로의 접근을 막는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했지만, 3m 길이의 터널을 통해 도시로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 터널은 침략에 대비하여 금속 문으로 막을 수 있었다.[2] 도시로 접근하는 세 개의 길 중 두 개는 보호되지 않았지만, 북쪽에서 오는 세 번째 길은 바위에 깎여 있었으며, 최대 10m 높이의 벽이 있었다.[2]3. 4. 기독교 건축물
6세기 바실리카는 남쪽 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위에 깎여 만들어졌으며, 이 벽은 돌로 지어졌다.[1] 단지 정상에는 9~10세기에 돌과 벽돌로 지어진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다.[1]4. 고고학적 발견
우프리스치케 단지 정상에 있는 10세기 기독교 바실리카에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을 통해 금, 은, 청동으로 만든 보석류, 도자기, 조각품 등 다양한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트빌리시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5]
참조
[1]
웹사이트
Online version
http://www.open.ge/a[...]
1999
[2]
서적
Monuments of the Eastern Georgia
Iskusstvo, Moskva
1983
[3]
웹사이트
Georgia
http://www.internati[...]
2007-11-23
[4]
웹사이트
Online version
http://www.open.ge/a[...]
1999
[5]
웹사이트
Georgia
http://www.internati[...]
200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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