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학성이씨근재공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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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학성이씨근재공고택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학성이씨 시조 이예의 11세손 이의창이 처음 지었으며, 고종 때 중수, 1934년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3.1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재락 의사가 거주했고, 울산 유림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랑채, 안채, 사당, 아래채, 중문간 및 곳간채, 외양간, 대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부농형 상류 주택의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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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학성이씨근재공고택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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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울산학성이씨근재공고택 |
한자 표기 | 蔚山鶴城李氏謹齋公古宅 |
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3 |
지정일 | 1997년 10월 9일 |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32-3 (석천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울주군 |
수량 | 13동 |
위치 | 울주 석천리 |
추가 정보 | |
참고 | 석천리이씨고가 (石川里李氏古家) 로 지정되었다가 명칭 변경됨 |
석천리이씨고가 지정 정보 | 지정 번호: 114 지정일: 1985년 1월 23일 해제일: 1997년 10월 9일 |
2. 역사
이 고택은 학성이씨 파종가집으로, 시조 이예의 11세손인 이의창이 처음 건립하였다. 이후 고종 때와 1934년경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재락 의사가 거주하였으며, 울산 지역 유림들의 독립운동 자금 모의 장소로도 사용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2. 1. 건립 및 변천
학성이씨 파종가집(서면파)으로 시조인 이예(李藝|이예한국어)의 11세손 이의창(李宜昌|이의창한국어)이 처음 지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으며,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2. 2.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이 고택은 일제강점기에 3.1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이재락 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또한, 울산 지역의 유림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모여 논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3. 구조
이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 생활 공간과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공간의 영역 분리가 명확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춘 점은 조선 시대 상류층 종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3. 1. 배치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집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간채는 대문에 딸린 건물이며, 사랑채는 작은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형태이다. 생활 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상류층 종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3. 2. 건물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다.- 문간채: 대문에 딸린 건물이다.
- 사랑채: 작은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 곳간채: (원문 자료에 구체적인 설명 없음)
- 별당채: (원문 자료에 구체적인 설명 없음)
- 안채: 다른 공간과 명확하게 분리된 생활 공간이다.
- 사당: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독립된 공간으로 갖추어져 있다.
이 고택은 생활공간의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이다.
4. 특징
조선 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집으로, 생활 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춘 점이 특징이다. 석천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사랑채는 작은 규모로 지어졌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형태이다.
5. 현지 안내문
(내용 없음)
5. 1. 한글 설명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고택이다.이 고택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겸익(李謙益)의 후손인 근재공 이의창(李宜昌, 1725~1781)이 1765년(영조 41년)에 웅촌면 대대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이다. 조선 고종 때 한 차례 수리되었고, 1934년에는 안채와 사랑채 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사랑채, 안채, 사당, 아래채, 중문간 및 곳간채, 외양간, 대문간채 등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중문(中門)과 담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행랑채와 행랑마당(작업마당)을 두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부유한 농가 형태의 상류 주택이 가진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채 뒤편에는 별도의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에서는 집의 기운을 받는 산인 조산(朝山), 즉 벼락띵이산(병풍산)이 보이도록 건물을 배치하였다.
5. 2. 영문 설명
Geunjaegong Historic House of the Hakseong Yi Clan, UlsanUlsan Cultural Heritage Material No. 3
This house was originally built in Daedae-ri, Ungchon-myeon.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765 (the 41st year of King Yeongjo’s reign) by Geunjaegong Yi Ui-chang (1725-1781), a descendant of Yi Gyeom-ik, who was designated as a meritorious retainer for his rol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house was repaired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1863-1907). In 1934, the men’s and women’s quarters were renovated.
At present, Yi Ui-chang’s Historic House is composed of many rooms including the men’s and women’s quarters, the quarters beside the courtyard, a barn, and a walled shrine. The middle gate and walls were built between the men’s quarters and the women’s quarters. The house is typical of rural upper-class residences of the late Joseon Period (1392-1910) since it has haengnangche (servants’ quarters) and its yard in front of the sarangchae. The house was designed to afford people in the women’s and men’s quarters a commanding view of Byeongpungsan Mountain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s of Feng S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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