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 (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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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흥은 동진(東晉) 안제(安帝) 시기에 사용된 연호로, 402년부터 405년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402년 1월 1일에 개원하여 환현(桓玄)의 난, 유유(劉裕)의 집권 등 동진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원흥 연호 사용 기간 동안, 환현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초(楚)를 건국하였으나, 유유의 반격으로 인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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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 (동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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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 (元興) | |
연호 | 원흥(元興) |
사용 기간 | 402년 ~ 404년 |
국가 | 동진(東晉) |
군주 | 동진 안제 사마덕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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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호 사용 배경 및 사건
원흥(元興) 연호는 동진 안제 재위 기간 중 402년 2월 18일 (원흥 원년 1월 1일)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1] 이 시기는 환현의 난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때였다. 개원 직후 환현 토벌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환현이 수도 건강을 장악하며 권력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연호는 잠시 융안(隆安)으로 되돌려졌다가 '대형'(大亨)으로 바뀌는 등 혼란상을 보였다.
403년 말, 환현은 안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초(楚)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어 연호를 '영시(永始)'로 정했다. 그러나 404년 유유 등이 환현을 몰아내고 안제를 복위시켰다. 안제 복위 후에도 노순의 난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으며, 405년 정월 16일에 연호는 의희(義熙)로 개원되었다.
2. 1. 환현의 난
원흥 원년(402년) 정월 초하루, 안제는 환현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사마원현을 정토대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3월 1일, 선봉으로 나섰던 유뢰지가 환현에게 항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3월 4일에는 잠시 연호를 융안으로 되돌렸으나, 같은 날 환현이 수도 건강에 입성하여 승상의 자리에 올라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다음 날인 3월 5일, 환현은 연호를 "대형"으로 바꾸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사마원현 등을 살해했다. 12월 26일에는 사마도자 역시 환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원흥 2년(403년) 8월, 환현은 스스로 초왕(楚王)을 칭했다. 이어 12월 3일, 환현은 안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는 나라 이름을 초(楚)로 정하고 처음에는 건시(建始)라는 연호를 사용하려 했으나, 과거 팔왕의 난 당시 사마륜이 사용했던 연호라는 점 때문에 곧 "영시(永始)"로 다시 바꾸었다.
원흥 3년(404년) 2월 27일, 유유가 경구(京口)에서 환현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유유의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3월 3일 건강을 점령했다. 궁지에 몰린 환현은 4월 3일 안제를 데리고 강릉(江陵)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5월 26일, 환현은 촉(蜀)으로 도망치던 중 익주(益州) 도호 풍천(馮遷)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환현이 일으킨 반란은 진압되었고, 안제는 다시 황제의 자리로 복위했다. 한편, 같은 해 10월에는 손은의 잔당을 이끌던 사위 노순이 광주(廣州)를 습격하여 점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환현의 난이 평정된 후, 원흥 4년(405년) 정월 16일에 연호는 "의희"로 개원되었다.
2. 2. 기타 사건
원흥 2년(403년) 8월, 환현이 초왕(楚王)이 되었다.원흥 3년(404년) 10월, 손은의 사위 노순이 광주를 습격하여 점령했다.
3. 연대 대조표
(六十干支)
(後燕)
2년
3년
4년
5년
(後秦)
4년
5년
6년
7년
(後凉)
2년
3년
(北凉)
2년
3년
4년
5년
(南凉)
3년
홍창(弘昌)
원년
2년
3년
4년
(南燕)
3년
4년
5년
6년
(西凉)
3년
4년
5년
6년
(北魏)
5년
6년
천사(天賜)
원년
2년
(高句麗)
12년
13년
14년
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