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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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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만은 전국 시대 연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95년경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위만조선을 건국했다. 연나라 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할 때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귀화하여 준왕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는 박사로 임명받았다. 이후 세력을 키워 기원전 194년경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을 자처하며 주변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위만조선은 위만의 아들, 손자로 이어졌으며, 기원전 108년 한 무제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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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위만 관련 이미지 없음
관련 이미지 없음
통치 정보
왕조위만조선
즉위기원전 194년경
계승자불명
사망 장소위만조선 왕검성
인물 정보
이름위만 (衛滿)
한글위만
한자衛滿
로마자 표기Wi Man
가문위씨
배우자미상
자녀불멸
부왕미상
모후미상
기타
전임준왕 (단군조선)
후임(2대) 불명, (3대) 우거왕

2. 생애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95년경 전한의 연왕 노관흉노로 망명할 때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15] 고조선준왕에게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요청했고, 준왕은 그를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변방을 지키면서 연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94년경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건국했다.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병력과 재물을 지원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진번임둔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3]

기원전 108년 멸망 직전의 고조선


위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와 『한서』에 "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위만"이라는 표기는 『잠부론』에서 처음 나타나며, 『위략』, 『삼국지』, 『후한서』 등에도 "위만"으로 기록되어 있다.[7]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일본의 필씨는 위만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2. 1. 건국 이전

위만은 원래 연나라 사람이었다.[15] 기원전 195년경, 전한(前漢)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할 때,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2] 그는 준왕에게 서쪽 변경을 지키는 신하가 되기를 청했고, 준왕은 그를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변방을 지키면서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다.[9]

한 고조가 연나라 왕 장도의 반란을 진압한 후, 노관을 연나라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196년, 고조는 노관이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연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노관은 흉노로 도망쳤고, 그의 장군 위만은 1,0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동쪽으로 고조선으로 갔다.[2] 그는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으로부터 고조선의 북서쪽 국경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연나라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위만은 왕위를 찬탈했다(기원전 194~180년). 준왕은 진으로 도망쳐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만은 형식적으로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그 대가로 병력과 재물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번임둔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수천리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위만의 고조선 수도는 왕검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평양으로 비정된다.[3] 전한 왕조가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반도의 태수는 위만을 외신으로 임명했고, 그가 원주민들의 제국 출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임명은 기원전 191년 또는 192년에 이루어졌다.[4]

2. 2. 위만조선의 건국

위만은 연나라 지역에 살던 사람으로, 기원전 195년경 전한의 연왕 노관흉노로 망명할 때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15] 위만은 준왕에게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요청했고, 준왕은 그에게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변방을 지키면서 연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94년경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건국했다.[2] 준왕은 진으로 도망쳐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병력과 재물을 지원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진번임둔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4]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3]

2. 3. 통치와 멸망

위만은 연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195년경 전한의 연왕 노관흉노로 망명할 때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15] 준왕에게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준왕은 이를 허락하여 위만을 박사로 삼고 100리의 땅을 주었다. 위만은 변방을 지키면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94년 무렵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건국했다.[2]

위만은 형식상 전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병력과 재물을 지원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진번임둔 등 주변 소국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이후 위만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 고조가 연나라 왕 장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장군 노관을 연나라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196년, 고조는 노관이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연나라를 공격했고, 노관은 흉노로 도망쳤다. 이때 노관의 장군이었던 위만은 1,0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동쪽의 고조선으로 갔다.[2]

위만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에게 고조선의 북서쪽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연나라 출신 망명자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빼앗았다(기원전 194년~기원전 180년).[2] 준왕은 진으로 도망쳐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위만조선의 수도는 왕검성이었으며, 이곳은 일반적으로 평양으로 비정된다.[3] 전한 왕조가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 태수는 위만을 외신으로 임명하고, 원주민들이 한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변경을 지키게 했다. 이 임명은 기원전 191년 또는 기원전 192년에 이루어졌다.[4] 위만조선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진번군임둔군을 정복하여 국경을 크게 넓혔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고조선 우거왕 때인 기원전 108년 한 무제에 의해 멸망했다.

위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와 『한서』에 "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위만"이라는 표기는 『잠부론』에서 처음 나타나며, 『위략』, 『삼국지』, 『후한서』 등에도 "위만"으로 기록되어 있다.[7]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일본의 필씨는 위만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3. 국적 문제

현전하는 사료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을 식민 통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신채호는 위만이 찬탈한 지역이 고조선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이병도는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인 유민 출신이라고 추측했다.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으로 랴오둥반도를 빼앗겼을 때도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 지역에 남아 연나라 사람으로 흡수된 조선인이라고 본 것이다. 연나라가 있던 요동 지역은 원래 중국 영토가 아니고 나중에 진나라 때 중국에 편입된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나라는 원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굳이 요동 출신이 아니더라도 연나라 사람일 수 있다. 물론 요동 출신도 연나라 사람이다.

하지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채 망명한 것만으로 고조선계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망명할 때 옷차림을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는 그런 머리와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망명이라는 정치적 행위와 함께 머리와 복장을 바꾼 것은 망명지인 고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수용하여 호감을 사기 위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정확히는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외지인이 현지식 복색을 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남월조타처럼 아주 보기 드문 사례는 아니다.[16]

일제강점기 학자들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식민 정권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위만이 조선을 통치해도 국호나 정치 체제, 수도 등을 옮기지 않고 기존 고조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했으므로, 지배층이 중원 출신이라고 해도 국가의 정체성은 고조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연나라 지배층과 고조선 토착 지배층의 연합 정권적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위만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에 있지만, 단순히 "만"이라고만 표기하고 있으며, 『한서』도 "만"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잠부론』에서는 "위만"이라는 표기가 보이며, 『위략』, 『삼국지』, 『후한서』 등은 "위만"이라고 표기하고 있다.[7]

『사기』에 따르면 위만은 중국 연나라 사람이었으며[8], 연왕이었던 노관의 부하였다.

4. 가족

관계이름
아들불명, 위만조선의 2대 국왕
손자우거, 위만조선의 마지막 국왕
증손자위장


5. 위만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Brief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1] 서적 Asia: A Concise History https://books.google[...] Wiley
[1]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1] 서적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Routledge
[1] 서적 That glorious ancient history of our natio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2] 서적 "Walled-Town States and Confederated Kingdom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3] 문서
[4] 문서
[5] 뉴스 위만조선 衛滿朝鮮 https://www.doopedia[...]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서적 韓國歷史與現代韓國 https://books.google[...] 台湾商務印書館 2005-08-01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뉴스 위만 衛滿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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