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레흐트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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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트레흐트 조약은 1713년 프랑스와 여러 국가 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통칭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은 영국이 지브롤터, 메노르카, 아시엔토 등 상업적 이권을 얻고, 프랑스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등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은 유럽 내 영토를 상실했지만, 본토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했다. 이 조약은 근대 국제 관계에서 세력 균형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식민지 쟁탈전을 심화시키고 노예 무역을 확대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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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레흐트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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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조약 내용 | |
영향 | 18세기 유럽 문명의 안정 및 발전 |
주요 결과 | 프랑스 왕국의 유럽 위협 종식 영국의 해양, 무역, 금융 패권 확립 |
위키문헌 링크 | 스페인과 영국 간의 우호 조약 프랑스와 영국 간의 우호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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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협상 과정
1710년, 영국의 토리당 정권은 휘그당이 주장하던 "스페인 없이는 강화 없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25][26] 이는 휘그당 정권이 몰락하고[25] 옥스퍼드 백작로버트 하틀리, 슈루즈베리 공작찰스 탈보트, 볼링브룩 남작헨리 신존 등이 이끄는 토리당 정권이 들어선 결과였다. 토리당은 영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평화를 추진했다.
토리당 정권은 프랑스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영국이 지브롤터, 메노르카섬, 아시엔토 등 상업적 이권을 얻는 데 합의했다. 1711년 9월 27일 체결된 영불 간 예비 조약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영국 여왕 앤의 왕위와 프로테스탄트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합병을 부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이러한 비밀 협상과 예비 조약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711년, 휘그당은 헨리 신존 등의 예비 조약안을 유출시키고, 토리당 내 반강화파까지 포섭하여 의회를 연기하는 등 저항했다. 토리당 정권은 1711년에 전쟁 영웅 말보로 공작존 처칠을 해임하고, 1712년에 강화에 반대한 로버트 월폴을 투옥하는 등 휘그당에 압력을 가했다.
1712년 1월 29일 위트레흐트에서 평화 회담이 열렸다.[83] 브리스톨의 주교 존 로빈슨과 스트래포드 경 토마스 웬트워스[83]가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4] 네덜란드는 마지못해 예비 조약을 수용하고 대표를 파견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예비 조약이 구속력이 없다는 보장을 받기 전까지는 대표 파견을 거부했다. 이러한 보장이 주어지면서 2월에 제국 대표들이 회담에 참여했다.[50] 펠리페 5세는 아직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권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사보이아 공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전권 대표를 보냈다.[5] 포르투갈 대표는 루이스 다 쿠냐(Luís da Cunha)였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월한 평화안을 제시하여 회담이 난항을 겪었다.[49] 프랑스 대표는 필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유지, 선의에 기반한 프랑스 왕관 통합 방지, 모든 면에서의 원상 회복(비밀 예비 조약에서 영국에 부여하는 특권은 보장) 등을 제시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다.[49]
주요 쟁점은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 문제와 스페인 영토 분할 문제였다.[5] 헨리 신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관 통일 저지가 보장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프랑스와의 비밀 협상을 진행했다.[49] 처음에는 펠리페 5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신권 왕위 계승설(王権神授説)에 따라 혈통으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는 프랑스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9] 이후 사보이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펠리페 5세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토를 지배하는 왕이 되어 장래 프랑스 왕에 즉위하여 그것들을 프랑스에 통합한다는 안도 나왔으나, 펠리페 5세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49]
1712년 7월 10일,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를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회담이 진전되었다.[5]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에 동의하자 평화 협상은 가속화되었다.[5] 1712년 8월 19일, 파리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스페인을 포함하는 "휴전"(armistice)에 합의했다.[6]
전황도 회담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의 철수와 프랑스군의 승리 등 전황 변화는 회담 진전에 영향을 주었다. 1710년 영국 의회에서 토리당이 하원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영국의 유럽 전쟁 참여 종식을 원했다.[26] 앤 여왕과 그녀의 고문들도 이에 동의했다.[26] 로버트 할리와 헨리 신존의 행정부는 협상에서 더 유연한 모습을 보였고, 휘그당은 이들을 "프랑스 친화적"으로 묘사했다.[27] 볼링브룩이 비밀리에 영국 사령관 오먼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에게 드냉 전투 전에 연합군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프랑스에는 알렸지만 연합국에는 알리지 않았음), 프랑스와 비밀리에 별도의 평화 협정을 맺었다.[29]
1713년 4월 11일,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프로이센, 포르투갈 왕국 사이에 5개의 개별 조약이 체결되면서 주된 협정이 맺어졌다.[6] 필리페 5세 치하 스페인은 7월 13일 위트레흐트에서 사보이아 공국과 영국과 별도의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6]
2. 1. 영-프 간 비밀 협상 (1710-1711)
1710년, 영국의 토리당 정권은 휘그당이 주장하던 "스페인 없이는 강화 없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25][26] 이는 휘그당 정권이 몰락하고[25] 옥스퍼드 백작로버트 하틀리, 슈루즈베리 공작찰스 탈보트, 볼링브룩 남작헨리 신존 등이 이끄는 토리당 정권이 들어선 결과였다. 토리당은 영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평화를 추진했다.토리당 정권은 프랑스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영국이 지브롤터, 메노르카섬, 아시엔토 등 상업적 이권을 얻는 데 합의했다. 1711년 9월 27일 체결된 영불 간 예비 조약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영국 여왕 앤의 왕위와 프로테스탄트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합병을 부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이러한 비밀 협상과 예비 조약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711년, 휘그당은 헨리 신존 등의 예비 조약안을 유출시키고, 토리당 내 반강화파까지 포섭하여 의회를 연기하는 등 저항했다. 토리당 정권은 1711년에 전쟁 영웅 말보로 공작존 처칠을 해임하고, 1712년에 강화에 반대한 로버트 월폴을 투옥하는 등 휘그당에 압력을 가했다.
2. 2. 위트레흐트 회의 (1712-1713)
1712년 1월 29일 위트레흐트에서 평화 회담이 열렸다.[83] 브리스톨의 주교 존 로빈슨과 스트래포드 경 토마스 웬트워스[83]가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4] 네덜란드는 마지못해 예비 조약을 수용하고 대표를 파견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예비 조약이 구속력이 없다는 보장을 받기 전까지는 대표 파견을 거부했다. 이러한 보장이 주어지면서 2월에 제국 대표들이 회담에 참여했다.[50] 펠리페 5세는 아직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권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사보이아 공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전권 대표를 보냈다.[5] 포르투갈 대표는 루이스 다 쿠냐(Luís da Cunha)였다.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월한 평화안을 제시하여 회담이 난항을 겪었다.[49] 프랑스 대표는 필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유지, 선의에 기반한 프랑스 왕관 통합 방지, 모든 면에서의 원상 회복(비밀 예비 조약에서 영국에 부여하는 특권은 보장) 등을 제시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다.[49]
주요 쟁점은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 문제와 스페인 영토 분할 문제였다.[5] 헨리 신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관 통일 저지가 보장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프랑스와의 비밀 협상을 진행했다.[49] 처음에는 펠리페 5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신권 왕위 계승설(王権神授説)에 따라 혈통으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는 프랑스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9] 이후 사보이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펠리페 5세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토를 지배하는 왕이 되어 장래 프랑스 왕에 즉위하여 그것들을 프랑스에 통합한다는 안도 나왔으나, 펠리페 5세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49]
1712년 7월 10일,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를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회담이 진전되었다.[5]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에 동의하자 평화 협상은 가속화되었다.[5] 1712년 8월 19일, 파리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스페인을 포함하는 "휴전"(armistice)에 합의했다.[6]
전황도 회담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의 철수와 프랑스군의 승리 등 전황 변화는 회담 진전에 영향을 주었다. 1710년 영국 의회에서 토리당이 하원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영국의 유럽 전쟁 참여 종식을 원했다.[26] 앤 여왕과 그녀의 고문들도 이에 동의했다.[26] 로버트 할리와 헨리 신존의 행정부는 협상에서 더 유연한 모습을 보였고, 휘그당은 이들을 "프랑스 친화적"으로 묘사했다.[27] 볼링브룩이 비밀리에 영국 사령관 오먼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에게 드냉 전투 전에 연합군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프랑스에는 알렸지만 연합국에는 알리지 않았음), 프랑스와 비밀리에 별도의 평화 협정을 맺었다.[29]
1713년 4월 11일,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프로이센, 포르투갈 왕국 사이에 5개의 개별 조약이 체결되면서 주된 협정이 맺어졌다.[6] 필리페 5세 치하 스페인은 7월 13일 위트레흐트에서 사보이아 공국과 영국과 별도의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6]
3. 주요 조약 내용
1713년 4월 11일, 프랑스는 영국, 네덜란드, 사보이, 프로이센, 포르투갈과 각각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1] 1713년 7월 13일, 스페인은 사보이와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1] 이후에도 협상은 계속되어, 1714년에는 스페인과 네덜란드,[51] 1715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51] 이 외에도, 위트레흐트에서는 여러 통상 및 항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1713년 4월 11일, 프랑스는 영국, 네덜란드와 개별적으로 통상·항해 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다.[51]
우트레히트 및 기타 지역의 평화 및 우호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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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그레고리력 / (율리우스력)) | 조약 명칭 | 반프랑스 진영 | 프랑스 진영 | 본문 |
1713년 4월 11일 (1713년 3월 31일) | 우트레히트 평화 및 우호 조약 | 영국 | 프랑스 | 영어 |
1713년 4월 11일 | 우트레히트 평화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프랑스 | 네덜란드어 |
1713년 4월 11일 | 우트레히트 평화 조약 | 포르투갈 | 프랑스 | |
1713년 4월 11일 | 우트레히트 평화 조약 | 프로이센 | 프랑스 | |
1713년 4월 11일 | 우트레히트 평화 조약 | 사보이아 | 프랑스 | |
1713년 7월 13일 (1713년 7월 2일) | 우트레히트 평화 및 우호 조약 | 영국 | 부르봉 스페인 | 영어 |
1713년 7월 13일 | 우트레히트 평화, 동맹 및 우호 조약 | 사보이아 | 부르봉 스페인 | |
1714년 6월 26일 | 수정된 우트레히트 평화 및 우호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부르봉 스페인 | 스페인어 |
1715년 2월 6일 | 수정된 우트레히트 평화 및 우호 조약 | 포르투갈 | 부르봉 스페인 | 포르투갈어 |
우트레히트 및 기타 지역의 항해, 상업 및 기타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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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그레고리력 / (율리우스력)) | 조약 명칭 | 진영 | 진영 | 본문 |
1713년 4월 11일 | 우트레히트 항해 및 상업 조약 | 네덜란드 공화국 | 프랑스 | |
1713년 4월 11일 (1713년 3월 31일) | 우트레히트 항해 및 상업 조약 | 프랑스 | 영국 | |
1713년 12월 9일 (1713년 11월 28일) | 수정된 우트레히트 상업 및 우호 조약 | 부르봉 스페인 | 영국 |
3. 1. 왕위 계승 문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5세와 그의 후손들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베리 공작(루이 14세의 가장 어린 손자)과 오를레앙 공작(루이 14세의 조카) 등 프랑스 왕족들 역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이는 1712년부터 1714년 사이에 루이 14세의 자손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5세의 루이 15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조항이었다.프랑스는 명예혁명 이후 자코바이트를 지원하며 잉글랜드 국왕제임스 2세의 계보를 지지해왔으나,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제임스 에드워드 등 자코바이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오랜 동맹 관계는 종식되고, 영국은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게 되었다.
3. 2. 영토 변화
스페인의 유럽 영토는 분할되었다. 사보이아는 시칠리아 섬[84]과 밀라노 공국의 일부를 받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카를 6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그리고 밀라노 공국의 대부분을 받았다. 프로이센은 상헬더란트를 획득했다.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있는 아마존강과 오야포크 강(Oyapock) 사이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21] 1715년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에 의해 빼앗겼던 우루과이의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를 탈환했다.[21]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양도하고,[11] 아시엔토 역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주었다.[12][13][14][15][16][17]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는 영국의 이로쿼이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했고,[22]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루퍼츠랜드를 영국에 할양했다.[54]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키츠 섬 또한 영국에 완전히 할양되었다.[22] 프랑스는 케이프브르턴 섬을 포함한 전쟁 전 북아메리카의 다른 영토들을 유지했으며, 루이즈부르 요새를 건설했다.[23]
3. 3. 통상 문제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유럽의 주요 상업 강국으로 발돋움했다.[10] 특히, 스페인으로부터 아시엔토(노예 무역 독점권)를 획득하여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12][13][14][15][16][17][58][59][60][61][62][63] 이는 스페인 제국이 대서양 노예 무역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외국 상인에게 위탁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원래 아시엔토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소유하고 있었으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이 된 후 프랑스가 이 계약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 정부는 30년간 아시엔토를 맺을 권리를 획득했다.[12][13][14][15][16][17]영국 협상가들은 프랑스 사략선의 주요 기지였던 덩케르크의 요새를 파괴하고 항구를 폐쇄하며 수문을 해체하여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18][56] 이는 덩케르크가 해류 하나로 북해로 나갈 수 있어 도버해협의 영국 해군 순찰을 피하기 쉬웠기 때문이다.[19][57] 하지만 이 요구는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 각국의 상황과 영향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경쟁국에 대한 해군 우월성,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상업적 접근권, 그리고 메노르카와 지브롤터의 통제권을 확립했다.[65] 특히 지브롤터는 현재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인정하여 1714년 8월 앤 여왕 사후 하노버 왕조로의 원활한 왕위 계승을 보장했고, 1716년 영불 조약에 따라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66][33]
전쟁으로 인해 모든 참전국이 전례 없는 수준의 부채를 떠안았지만, 영국만이 성공적으로 재정을 조달했다.[34]
1710년 토리당이 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이들은 영국이 유럽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끝내고자 했다.[26] 앤 여왕과 그녀의 조언자들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26] 로버트 할리와 볼링브룩 자작의 지도하에 토리당은 회담을 개최하는 데 유연함을 보였고, 휘그당을 프랑스 찬성자로 몰아갔다. 옥스퍼드와 볼링브룩은 여왕을 설득하여 상원에서 12명의 새로운 토리당 지지자를 만들어 조약을 비준하게 했다.[85]
폴리냐크는 네덜란드인들을 ''데 부 체 부 산부''(당신에 관한, 당신의 나라에서, 그러나 당신은 제외된이라는 뜻)라고 조롱하였다.[86] 볼링브록 자작이 오먼드 공작에게 드냉 전투 이전에 프랑스군에게는 알리고 동맹군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동맹군으로부터 이탈해 철수하라는 비밀스러운 명령을 내린 사실이 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단독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동맹군은 그 기세를 잃고 말았다.[87]
4. 1. 영국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경쟁국에 대한 해군 우월성,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상업적 접근권, 그리고 메노르카와 지브롤터의 통제권을 확립했다.[65] 특히 지브롤터는 현재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인정하여 1714년 8월 앤 여왕 사후 하노버 왕조로의 원활한 왕위 계승을 보장했고, 1716년 영불 조약에 따라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66][33]전쟁으로 인해 모든 참전국이 전례 없는 수준의 부채를 떠안았지만, 영국만이 성공적으로 재정을 조달했다.[34]
1710년 토리당이 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이들은 영국이 유럽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끝내고자 했다.[26] 앤 여왕과 그녀의 조언자들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26] 로버트 할리와 볼링브룩 자작의 지도하에 토리당은 회담을 개최하는 데 유연함을 보였고, 휘그당을 프랑스 찬성자로 몰아갔다. 옥스퍼드와 볼링브룩은 여왕을 설득하여 상원에서 12명의 새로운 토리당 지지자를 만들어 조약을 비준하게 했다.[85]
폴리냐크는 네덜란드인들을 ''데 부 체 부 산부''(당신에 관한, 당신의 나라에서, 그러나 당신은 제외된이라는 뜻)라고 조롱하였다.[86] 볼링브록 자작이 오먼드 공작에게 드냉 전투 이전에 프랑스군에게는 알리고 동맹군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동맹군으로부터 이탈해 철수하라는 비밀스러운 명령을 내린 사실이 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단독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동맹군은 그 기세를 잃고 말았다.[87]
4. 2. 프랑스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다른 참전국들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국가 부채를 떠안았지만, 강대국의 지위는 유지했다.[44] 1701년 2월에 이미 외교적으로 달성한 것과 비교하면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얻은 것은 미미했지만, 1709년 연합군이 제시했던 것보다는 프랑스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43]1710년 영국 의회에서 토리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 이들은 영국의 유럽 전쟁 참여 종식을 원했고, 앤 여왕과 그녀의 고문들도 이에 동의했다.[26] 로버트 할리(1711년 5월 23일 옥스퍼드와 모티머 백작 작위 수여)와 헨리 세인트 존의 행정부는 휘그당에게 "프랑스 친화적"으로 묘사되었지만, 협상에서 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여왕을 설득하여 조약의 상원 비준을 위해 12명의 새로운 "토리당 동료"를 창출하기도 했다.[27]
프랑스 협상가 멜키오르 드 폴리냐크는 협상이 네덜란드 영토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대해 "''de vous, chez vous, sans vous''" (당신들에 대해, 당신들 곁에서, 당신들 없이)라고 비난했다.[28]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자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루이 14세는 1711년 유일한 성년 왕세자였던 루이를 잃었고, 1712년에는 손자인 루이 일가를, 1714년에는 또 다른 손자인 샤를도 사고로 잃었다.[73]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면서 5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왕위를 계승했고,[73]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필리프 2세가 섭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친영국 정책으로 전환했다.[73]
4. 3. 스페인
스페인은 유럽 내 영토를 상당 부분 상실했지만, 본토와 아메리카 식민지는 유지했다.[74] 1718년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탈환하려 했을 때는 영국 해군에 막혔지만, 1734년에 다시 시도하여 성공했다.[74]스페인은 1707년, 1715년, 1716년에 신조직 왕령을 제정하여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의 지역 정치 구조를 폐지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35] 다만, 카탈루냐 공국과 아라곤은 1767년까지 일부 권리를 유지했다.[35][74] 이는 부르봉 왕조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4. 4.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스페인 왕위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던 남동유럽 지역으로의 확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77] 네덜란드 장벽과 관련된 비용을 지불한 후에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로부터 증가된 세수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당한 현대화를 지원했다.[36]그러나 찰스 6세가 그의 조카들을 제외하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상속권을 주면서 야기된 1713년 국사조약의 붕괴는 이러한 이득을 감소시켰다.[37]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전쟁에 휘말렸다.[78] 1733년~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해군 지원이 절실했지만, 전통적으로 의존해 왔던 네덜란드의 해군 능력은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다. 영국은 1718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상실을 막았지만 1734년에는 지원을 거부했다.[38]
이러한 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바이에른, 하노버, 프로이센, 작센은 점점 독립적인 세력으로 행동했고, 1742년 바이에른의 카를 7세는 300년 만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39]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78]

4. 5.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면서 사실상 파산 상태로 전쟁을 끝냈고, 이로 인해 상업적, 정치적 힘에 영구적인 타격을 입어 영국에게 최고의 유럽 상업 강국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40] 네덜란드는 방벽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공동 주권을 획득했지만,[69]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 실효성이 없음이 드러났다.[41][42][70]프랑스의 협상가 멜키오르 드 폴리냐크(Melchior de Polignac)는 네덜란드 인들을 ''데 부 체 부 산부''(당신에 관한, 당신의 나라에서, 그러나 당신은 제외된이라는 뜻)[86]라는 재치 있는 말로 조롱하였다.[67] 이는 볼링브룩 자작이 비밀리에 영국 사령관 오먼드 공작에게 드냉 전투 이전에 프랑스군에게는 알리고 동맹군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동맹군으로부터 이탈해 철수하라는 비밀스러운 명령을 내린 사실[87]과 영국과 프랑스가 단독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87] 원인이었다.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1709년 4월 9일 출판된 다니엘 디포의 프랑스의 국정에 대한 관찰은 내각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는 정기 간행물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영국 협상가들의 주된 생각들과, 이 생각들이 최종 조약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기록되어 있다.[31] 프랑스 혁명때까지 힘의 균형에 대한 생각은 유럽 정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여겨졌다. 그리고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19세기에 다시 대두된다.
이 조약은 "스페인과 프랑스 왕국이 너무 밀접하게 결합함으로써 유럽 전체의 자유와 안전에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 두 왕국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했다.[31]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현대 국가와 세력 균형 개념의 진화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라고 주장한다.[32]
1701년 찰스 데이브넌트가 그의 ''세력 균형에 대한 에세이''에서 처음 언급한 이 개념은 1709년 작가이자 토리 풍자 작가인 다니엘 디포가 그의 기사 ''프랑스 사정 검토''에서 영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이 아이디어는 조약의 어조에 반영되었고 19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1815년 유럽 연합에서 나폴레옹의 패배 후 다시 등장했다.
개별 조인국에 대해 영국은 경쟁국에 대한 해군 우월성, 스페인과 아메리카에 대한 상업적 접근, 미노르카와 지브롤터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영국은 오늘날까지도 지브롤터를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받아들여 1714년 8월 앤 여왕이 죽었을 때 원활한 권력 이양을 보장했고, 1716년 영불 조약에 따라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지원을 종식했다.[33] 전쟁으로 모든 참가국이 전례 없는 수준의 정부 부채를 떠안았지만, 영국만이 성공적으로 재정을 조달했다.[34]
스페인은 제국의 대부분을 유지했고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했다. 1718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재탈환은 영국 해군의 힘에 의해서만 막혔고, 1734년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1707년, 1715년, 1716년 누에바 플랜타 법령은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및 카탈루냐 공국의 왕국에서 지역 정치 구조를 폐지했지만, 카탈루냐와 아라곤은 1767년까지 일부 권리를 유지했다.[35]
스페인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의 지위를 확보하여 이전에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던 남동유럽 지역으로의 확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장벽과 관련된 비용을 지불한 후에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로부터 증가된 세수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당한 현대화를 지원했다.[36] 그러나 이러한 이득은 여러 요인, 특히 찰스가 그의 조카들을 제외하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상속권을 주면서 야기된 1713년 실용 조약의 붕괴로 인해 감소되었다.[37]
계승을 보장하려는 시도는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전쟁에 오스트리아를 휘말리게 했다. 1733년~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많은 전투가 이탈리아의 해안 지방에서 벌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네덜란드의 해군 지원에 의존해 왔는데, 네덜란드의 해군 능력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영국은 1718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상실을 막았지만 1734년에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38] 이 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느슨하게 했다. 바이에른, 하노버, 프로이센, 작센은 점점 독립적인 세력으로 행동했고, 1742년 바이에른의 카를은 300년 만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39]
네덜란드 공화국은 전쟁을 사실상 파산 상태로 끝냈고, 네덜란드 상선이 입은 피해는 그들의 상업적, 정치적 힘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은 최고의 유럽 상업 강국으로 네덜란드를 대체했다.[40] 그러나 장벽 요새의 획득은 네덜란드 외교 정책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고 그들의 영향권을 확장했다. 당대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나중에 장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시험대에 올랐을 때 대부분 환상으로 판명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1][42] 어쨌든 네덜란드는 남부 네덜란드에서의 지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그들의 군대는 1792년에 새로운 주기가 시작될 때까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저지한 동맹의 중심이었다.
위트레흐트에서의 최종 합의는 1709년 연합군의 제안보다 프랑스에 훨씬 더 유리했지만, 1701년 2월 외교를 통해 이미 달성한 것 이상을 얻지 못했다.[43] 프랑스는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영국과 비교했을 때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상대적 쇠퇴에 대한 우려는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44]
'''비판적 관점'''
위트레흐트 조약은 유럽 강대국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체결되었으며, 식민지 쟁탈전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45][46] 특히 영국의 해상 패권 강화와 아시엔토 획득은 노예 무역을 확대시키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G. M. 트레블리언은 18세기 문명의 안정적이고 특징적인 시대를 열었던 그 조약은 구 프랑스 왕정으로부터 유럽에 대한 위험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세계 전반에 있어서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 즉 대영제국의 해상, 상업 및 금융적 우위를 의미했다고 주장 하였다.[45]
브렌던 심스는 영국은 1713년 우트레흐트 조약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유럽을 형성했지만, 곧 영국이 과거의 위협, 주로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다루기 위한 시스템을 설계했을 뿐 미래의 위협에는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도전은 먼저 지중해 지역의 영토 상실에 대해 화해하지 않은 스페인으로부터 왔다고 한다.[46]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위트레흐트 조약이 제국주의 시대의 불평등한 국제 질서의 기원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국제 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조약에서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종교적, 세속적 양면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명시하며, 이후 조약에 의해 변경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효력이 전면적으로 적용됨을 확인하고 있다. 유사한 내용은 우트레흐트에서 체결된 다른 조약에서도 언급되고 있다.[67] 이러한 점에서 명석(明石)은 우트레흐트 조약이 베스트팔렌 조약 체제의 유지를 명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67]
거기에 더해, 베스트팔렌 조약에는 없던 새로운 요소로 세력 균형의 이념이 추가되었다.[68] 영국과 프랑스 간의 조약 제2조에서는 "전 유럽의 자유와 안전을 위협하는 스페인과 프랑스 양국의 과도한 밀접함으로 인해 발생한 중대한 위협 때문에……결코 동일 인물이 양국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되었다.[81] 이 균형 개념 자체는 이전부터 제창·언급되어 왔으며, 17세기 후반부터는 명확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69] 그러나 우트레흐트 조약은 그 균형 구축이 다국간 조약의 형태로 명확하게 규정된 최초의 사례였다.[74] 역사가들 중에는 이것을 근대 국민 국가 형성을 향한 매우 중요한 이정표였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82]
1716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체결한 조약에서는 우트레흐트 조약과 바덴 조약을 유럽 전역의 "공공의 안녕과 평화에 있어 가장 견고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당사국이 그것을 위반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76] 명석(明石)에 따르면, 우트레흐트 조약은 그때까지의 기독교에 기반한 유럽의 일체감 개념과, 병립하는 세속 국가들이 구성하는 국제 사회의 세력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일체감 개념이 공존하고, 서로 바뀌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71][72]
5. 1. 비판적 관점
위트레흐트 조약은 유럽 강대국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체결되었으며, 식민지 쟁탈전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45][46] 특히 영국의 해상 패권 강화와 아시엔토 획득은 노예 무역을 확대시키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G. M. 트레블리언은 18세기 문명의 안정적이고 특징적인 시대를 열었던 그 조약은 구 프랑스 왕정으로부터 유럽에 대한 위험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세계 전반에 있어서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 즉 대영제국의 해상, 상업 및 금융적 우위를 의미했다고 주장 하였다.[45]
브렌던 심스는 영국은 1713년 우트레흐트 조약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유럽을 형성했지만, 곧 영국이 과거의 위협, 주로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다루기 위한 시스템을 설계했을 뿐 미래의 위협에는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도전은 먼저 지중해 지역의 영토 상실에 대해 화해하지 않은 스페인으로부터 왔다고 한다.[46]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위트레흐트 조약이 제국주의 시대의 불평등한 국제 질서의 기원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국제 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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