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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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홉슨은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해군 장교로, 뉴질랜드 초대 부총독 및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해군에서 복무하며 카리브해 해적 소탕 작전에 참여했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를 측량하는 등 활동하다가, 1839년 뉴질랜드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홉슨은 1840년 마오리족과의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여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이후 뉴질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통치는 마오리족과의 갈등, 재정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842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와이탕이 조약 체결을 통해 뉴질랜드의 식민지 건설에 기여했으며, 뉴질랜드의 여러 지명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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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홉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대령 |
이름 | 윌리엄 홉슨 |
원어 이름 | William Hobson RN |
![]() | |
출생일 | 1792년 9월 26일 |
출생지 | 영국 아일랜드 워터포드 |
사망일 | 1842년 9월 10일 |
사망지 | 오클랜드 |
국적 | 영국, 뉴질랜드 |
교육 | 영국 해군 |
직업 | 탐험가, 해군, 뉴질랜드 총독 |
배우자 | 엘리자 엘리엇 |
자녀 | 5 |
안장지 | 시몬즈 스트리트 묘지 |
군사 정보 | |
복무 기간 | 1803년–1842년 |
계급 | 대령 |
지휘 | |
뉴질랜드 총독 | |
제1대 | 뉴질랜드 총독 |
임기 시작 | 1841년 5월 3일 |
임기 종료 | 1842년 9월 10일 |
군주 | 빅토리아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로버트 피츠로이 |
뉴질랜드 부총독 | |
제1대 | 뉴질랜드 부총독 |
임기 시작 | 1839년 7월 30일 |
임기 종료 | 1841년 5월 3일 |
군주 | 빅토리아 |
총독 | 조지 깁스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직책 폐지 |
2. 생애
윌리엄 홉슨은 1793년 아일랜드 워터포드에서 태어나 1803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 참전과 카리브해 해적 소탕 작전 등을 통해 경력을 쌓았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183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되어 포트 필립 지역(훗날의 멜버른) 탐사와 초기 정착지 건설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의 홉슨스 베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활동에 애정을 느껴 봄베이 해군 감독관직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해군 경력
윌리엄 홉슨은 1793년 아일랜드 워터포드에서 법률가 새뮤얼 홉슨(Samuel Hobson)과 마사 존스(Martha Jones)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앵글로-아일랜드계 성공회 가정에서 자랐다.[4]홉슨은 1803년 8월 25일 2등 자원병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1] 그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복무했으며, 이후 카리브해에서 활동하는 해적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1806년에는 소위가 되었고, 약 7년 후에는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4]
1822년 9월, 바하마의 나소 상인들은 해적 소탕을 위해 슬루프선 두 척을 마련하고, HMS 타인 호에서 장교와 선원들을 지원받았다. 소위가 지휘하는 한 척은 해적 범선과 펠루카를 만나 교전 끝에 범선을 격퇴하고 펠루카를 나포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했다.[5] 홉슨 중위가 지휘하던 다른 슬루프선 '윔' 호는 1822년 9월 29일 온두라스의 구아나하 섬 근처에서 해적 범선에 나포되었다. 홉슨과 선원들은 며칠간 포로로 잡혀 학대를 당했지만 모두 살아남았다.[6]
1823년 3월부터 1824년 5월까지 홉슨은 스쿠너 HMS 라이언 호를 지휘하며 여러 척의 해적선을 나포했고, 이로 인해 "라이온 홉슨(Lion Hobso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7] 그는 1824년 3월 18일 사령관으로 승진했다.[7] 이후 1826년부터 1828년까지 HMS 실라 호를 지휘했다.[4] 1834년 12월, 당시 해군성 장관이었던 조지 에든, 초대 오클랜드 백작은 홉슨에게 HMS 래틀스네이크 호를 타고 동인도로 가라는 임무를 부여했다.[4]
2. 2. 오스트레일리아
183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 명령을 받아 호바트에 1836년 8월 5일 도착했으며, 18일 뒤인 8월 23일에는 시드니에 도착했다. 1836년 9월 18일, 그가 지휘하던 래틀스네이크 호(HMS Rattlesnake)는 윌리엄 론스데일(William Lonsdale) 선장과 다른 관리들을 태우고 새로운 식민지인 포트 필립 지구(훗날의 멜버른)로 출항했다.이후 3개월 동안 홉슨과 그의 장교들은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리처드 버크(Richard Bourke)의 지시에 따라 포트 필립 지역을 철저히 측량했다. 이 과정에서 포트 필립의 북쪽 지역은 홉슨을 기념하여 홉슨스 베이로 명명되었다. 빅토리아주의 지방 자치구인 홉슨스 베이 시 역시 간접적으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의 배는 윌리엄스타운 항구 건설에도 관여했다.
홉슨은 연봉 2000GBP의 봄베이 해군 감독관직을 제안받았으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어 이를 거절하고 연봉 800GBP 미만으로 예상되는 포트 필립 주지사직에 지원하기도 했다.
3. 뉴질랜드
1837년 마오리족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뉴질랜드의 아일랜즈 만을 처음 방문하였다.[8] 1838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캐나다의 허드슨 만 회사 모델을 참고하여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확립할 것을 제안했다.[20][9]
1840년 부총독으로 다시 뉴질랜드에 부임한 홉슨은 영국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제임스 버스비와 협력하여 1840년 2월 6일 와이탕이에서 마오리족 추장들과 와이탕이 조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이 조약은 사실상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조약 체결 이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홉슨은 이후 초대 뉴질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842년 9월 사망하였다.
3. 1. 뉴질랜드 부임 배경
1837년 마오리족과의 전쟁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영국 거주민 제임스 부스비의 요청을 받고 뉴질랜드의 아일랜즈 만으로 항해를 떠났다. 1837년 5월 26일 뉴질랜드에 도착했으며, 현지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38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그는 뉴질랜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캐나다의 허드슨 만 회사와 유사한 회사를 설립하여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0]3. 2. 부총독 시절
당시 영국 정부는 1835년 10월 뉴질랜드 독립 선언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마오리족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윌리엄 홉슨은 1839년 7월 30일,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인 조지 깁스 경 휘하의 뉴질랜드 부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3], 같은 해 8월 13일에는 뉴질랜드 주재 영국 영사직에도 임명되었다.1839년 8월 14일, 노르망비 후작 콘스탄틴 헨리 핍스는 홉슨에게 상세한 지침을 전달했다. 이 지침에는 뉴질랜드 문제에 개입하는 영국 정부의 명분과 함께, "공정하고 평등한 계약"을 통해 토지를 확보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토지는 추후 유럽 출신 이주민들에게 이윤을 붙여 되팔아 식민지 운영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10] 이는 표면적으로 마오리족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식민 통치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보여준다.
홉슨은 1840년 1월 29일, 영국 해군 군함 헤럴드(HMS Herald)호를 타고 소수의 관리들과 함께 베이오브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그와 동행하여 행정 평의회를 구성한 주요 관리들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식민지 장관 | 윌로비 쇼틀랜드 |
식민지 재무부 장관 | 조지 쿠퍼 |
법무장관 | 프랜시스 피셔 |
또한, 입법 평의회는 위의 행정 평의회 구성원들과 세 명의 치안판사로 이루어졌다. 홉슨은 윌로비 쇼틀랜드, 존슨, 매슈를 치안판사로 임명했다.[11]
3. 3. 와이탕이 조약
1840년 영국 해군 장교였던 윌리엄 홉슨은 뉴질랜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뉴질랜드로 파견되었다. 그는 뉴질랜드에 도착한 후, 영국 정부를 대리하여 와이탕이에 거주하던 제임스 버스비와 만나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홉슨은 비서인 제임스 프리먼, 그리고 이전에 뉴질랜드 독립 선언 초안을 작성했던 버스비와 함께 즉시 와이탕이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1840년 2월 6일, 홉슨은 아일랜즈 만의 와이탕이에 있는 버스비의 집으로 각 지역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 조약은 사실상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국 측 서명자들을 이끈 홉슨 앞에서, 약 40명의 마오리 추장 중 응가푸히 부족의 호네 헤케가 가장 먼저 조약에 서명했다. 홉슨은 추장들이 서명할 때마다 He iwi tahi tātou|헤 이위 타히 타토우mao라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는 이제 하나의 민족입니다"라는 의미였다.[12]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1조 | 모든 마오리족은 영국 여왕의 신민이 되며, 뉴질랜드의 주권을 왕권에 양도한다. |
2조 | 마오리족의 토지 보유권은 보장되며, 토지 매매는 영국 정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
3조 | 마오리족은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
조약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8개의 추가 사본이 제작되어 뉴질랜드 전역으로 보내져 더 많은 추장들의 서명을 받았다. 이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에게 서명을 받아냈으나, 와이카토 지역의 추장 39명은 서명을 거부했다.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서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으며, 두 민족 국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홉슨은 와이탕이에서의 조약 서명 이후, 더 많은 서명을 받고 새로운 수도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와이테마타 항으로 이동했으며, 부측량국장 윌리엄 코르월리스 시몬즈를 다른 지역으로 파견하여 서명을 독려했다. 그러나 1840년 3월 1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그는 요양을 위해 바이오브아일랜드로 돌아가 회복하여 업무를 계속했다.[13]
3. 3. 1. 조약 이후의 갈등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에도 뉴질랜드 내의 긴장과 갈등은 계속되었다. 특히 뉴질랜드 회사와의 마찰이 두드러졌다.1840년 5월 21일, 뉴질랜드 회사 소속 정착민들이 포트 니콜슨에 뉴질랜드 연합 부족의 깃발 아래 독자적인 정착촌을 건설하며 사실상의 '공화국' 설립을 시도했다.[14] 이에 윌리엄 홉슨은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모든 서명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전역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선포하며 대응에 나섰다.[15] 그는 1840년 5월 25일, 윌로비 쇼트랜드와 일부 병력을 포트 니콜슨으로 보내 정착민들이 구성한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사건 이후 정착민들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웨이크필드는 바이오브아일랜드로 가서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홉슨은 웨이크필드가 포트 니콜슨을 수도로 삼자고 제안한 것을 거부하고, 대신 오클랜드 백작의 이름을 따 와이테마타 항 인근에 새로운 수도 오클랜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 시도에 대한 영국의 견제도 이루어졌다. 1840년 7월 11일, 프랑스 프리깃 함선 L'Aube|로브fra가 낭토-보르도 회사의 정착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뱅크스 반도로 향하던 중 바이오브아일랜드에 기항했다. 이 소식을 접한 홉슨은 즉시 두 명의 치안 판사를 아카로아로 파견하여 법정을 개설하게 함으로써 해당 지역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홉슨의 이러한 강경한 조치들은 포트 니콜슨 정착민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그들은 1840년 말 빅토리아 여왕에게 홉슨의 해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홉슨은 이 탄원에 대해 1841년 5월 26일 영국 외무장관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답변서를 보냈다.
3. 4. 총독 시절
1840년 11월, 영국 여왕은 뉴질랜드가 뉴사우스웨일스로부터 독립된 왕립 식민지가 되도록 하는 왕실 헌장에 서명했다.[2] 이에 따라 윌리엄 홉슨은 1841년 5월 3일, 뉴질랜드 대법원장에 의해 초대 뉴질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 같은 날, 홉슨이 직접 회원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입법평의회가 구성되었다.[16]총독 임기 동안 홉슨은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1841년 8월에는 웰링턴으로 가서 정착민들과 선출된 치안판사들의 불만을 직접 들었다. 이후 아카로아를 방문하여 프랑스의 뉴질랜드 남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오클랜드로 돌아온 후에는 마오리족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정부는 웰링턴과 오클랜드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홉슨은 ''뉴질랜드 헤럴드와 오클랜드 가제트'' 신문을 폐간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어, 1842년에는 정부 자금 부족으로 영국 재무부에 승인 없이 어음을 발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홉슨의 해임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낸 "상원파"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적 반대에도 부딪혔다. 홉슨의 마지막 공식 활동 중 하나는 오클랜드 기념일을 제정한 것인데, 이는 그가 베이오브아일랜즈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홉슨은 두 번째 뇌졸중을 겪은 후 1842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오클랜드의 시몬즈 스트리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유산
(내용 없음)
4. 1. 홉슨을 기리는 지명
뉴질랜드의 여러 곳이 홉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홉슨빌: 홉슨은 처음에 이곳을 뉴질랜드 정부의 잠재적인 위치로 고려했지만, 뉴질랜드 지리측량국장 펠턴 매슈의 조언을 받고 이 생각을 포기했다. 이 지역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홉슨 만
- 마운트 홉슨
- 홉슨 언덕(Hobson Hill): 와이탕이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18]
- 홉슨 스트리트[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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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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