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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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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립은 전한 시대의 제후로, 양강왕 유정의 뒤를 이어 양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추은령에 따라 봉토를 나누어주고, 홍가 연간에는 행동에 제약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관리를 폭행하고 간통, 살인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유립은 여러 차례 주살될 위기에 놓였으나, 황제의 배려로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원시 3년, 평제의 외가와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봉국을 빼앗기고 한중으로 이송되던 중 자살했다. 그의 아들 유영은 신나라 말기에 황제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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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립

2. 생애

유립은 아버지 양강왕이 기원전 25년에 죽자 뒤를 이어 양왕이 되었다.[1][2]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여러 차례 실정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거듭 처벌을 받았다.

홍가 연간(기원전 20년 ~ 기원전 17년)에는 법을 자주 어기고 신하들의 간언을 막아 행동에 제약을 받았고, 관리를 때리고 멋대로 출궁하여 봉토가 삭감되었다.[2] 또한 고모와 간통하고 외가를 원망하는 등의 패륜적인 행위로 주살될 위기에 처했으나 곡영의 상소와 성제의 비호로 처벌을 면했다.[2]

원연 연간(기원전 12년 ~ 기원전 9년)에는 원한을 품고 살인을 사주하고 낭리들을 폭행하여 다시 주살될 뻔했으나, 성제가 양나라의 다섯 현을 깎는 것으로 마무리했다.[2]

애제 즉위 후 건평 연간(기원전 6년 ~ 기원전 3년)에는 또다시 사람을 죽여 정위 방상대홍려 필유의 신문을 받았다.[4] 유립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으나, 결국 처벌을 면하고 대사면으로 풀려났다.

원시 3년(3년), 평제의 외가인 중산 위씨와 모의한 것이 드러나 신도후 왕망에 의해 봉국을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었다.[1][2][5] 한중으로 옮겨가던 도중 자살했는데, 재위 27년 만이었다.[1][2][5] 신나라 말기에 황제를 칭한 양왕 유영은 유립의 아들이다.[6]

2. 1. 즉위와 초기 통치

유립은 아버지 양강왕 유정이 기원전 25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양왕이 되었다.[1][2]

기원전 15년, 추은령에 따라 작은아버지 유현에게 기향을 봉해주었고, 기원전 14년에는 동생 유봉에게 곡향을 봉해주어 총 2개의 후국이 양나라에서 분할되었다.[3]

2. 2. 실정과 거듭된 처벌

홍가 연간(기원전 20년 ~ 기원전 17년), 유립은 법을 자주 어기고 신하들의 간언을 막아 행동에 제약을 받는 처벌을 받았다. 관리를 때리고 멋대로 출궁하는 등 행실이 개선되지 않아 봉토가 삭감되는 처벌을 받았다.[2]

고모와 간통하고, 외가를 원망하며 악담을 한 사실이 드러나 주살될 위기에 처했으나, 곡영의 상소와 성제의 비호로 처벌을 면했다.[2]

원연 연간(기원전 12년 ~ 기원전 9년)에는 원한을 품고 살인을 사주하고, 낭리들을 폭행하여 다시 주살될 위기에 처했으나, 성제가 양나라의 다섯 현을 깎는 것으로 마무리했다.[2]

2. 3. 애제 시기의 조사와 사면

애제 즉위 후 건평 연간(기원전 6년 ~ 기원전 3년)에 유립은 또 사람을 죽였다. 애제는 정위 방상·대홍려 필유를 보내 유립을 신문하게 했다.[4] 방상 등은 양나라의 부(傅)··중위에게 가서 유립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조사에 불응하니, 승상을 시켜 양나라 왕의 인수를 거두고 인근 진류의 옥으로 보내 조사할 것이며, 양나라의 부와 상 이하도 양나라 왕을 올바로 지도하지 않았으니 법대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립은 두려워하며 관을 벗고 사죄하며 아뢰었다.

"立|입중국어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롭고 약하여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홀로 환관과 비첩들 사이에 거하며 점차 소국의 속됨에 물들었고, 성질이 어리석어 잘못에서 옮길 수 없었습니다. 오는 부와 상도 어짊으로 立|입중국어을 보필함에 순전하지 않았고, 대신들은 항상 가혹하게 탄핵했으며, 작고 은밀한 것까지 알렸습니다. 참소하는 신하가 그 가운데 있고 좌우에서는 농간하며 위아래에 불화를 쌓게 하며 거듭 보며 염탐해, 궁전의 깊은 속은 호리와 같은 과실이라도 드러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거듭 주살돼 해내에 보여져야 합니다만 거듭 성은을 입어 사함을 받아왔습니다. 이번에 立|입중국어이 중랑 조장(曹將)을 적살한 것은 스스로 잘 압니다만, 겨울이 끝나가 삶을 바라고 죽을 것을 두려워했으니 병을 핑계로 있던 것은 혹시나 요행으로 잠깐의 시간을 넘기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하게 됐으니, 엎드려 죽기를 바랍니다."

마침 겨울이 끝나고 봄의 대사면이 돌아와 처벌을 면했다.[2]

2. 4. 왕망에 의한 폐위와 죽음

원시 3년(3년), 유립은 평제의 외가인 중산 위씨(䘙氏)와 모의한 것이 드러나 신도후 왕망에 의해 봉국을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었다.[1][2][5] 한중으로 옮겨가던 도중 자살했는데, 재위 27년 만이었다.[1][2][5] 신나라 말기에 황제를 칭한 양왕 유영은 유립의 아들이다.[6]

참조

[1] 서적 한서 권14 제후왕표제2
[2] 서적 한서 권47 문삼왕전제17
[3] 서적 한서 권15 하 왕자후표제3 하
[4] 문서
[5] 서적 한서 권12 평제기제12
[6] 서적 후한서 권12 왕유장이팽노열전제2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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