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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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소앙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로, 1887년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그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외교 활동과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건국 강령을 제시했다.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사회당을 창당하여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통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화를 주장했으며, 육성교를 창시하는 등 종교적 활동도 했다. 그는 합리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평가를 받지만, 이승만 정권 시대에는 북한의 대남 공작과 암살 계획의 총책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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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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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소앙 |
한글 | 조소앙 |
한자 | 趙素昻 |
본명 | 조용은(趙鏞殷) → 조소앙(趙素昻) |
출생일 | 1887년 5월 2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 |
사망일 | 1958년 9월 10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배우자 | 오영선(본부인), 최경록(첩실) |
자녀 | 3남 1녀 |
부모 | 조정규(부), 박필양(모) |
형제 | 조용하(형), 조용주(아우), 조시원(아우) |
친인척 | 조성룡(친조부) |
정치 활동 | |
정당 | 한국독립당, 사회당 |
직책 |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사회당 총재 겸 상임고문, 한국독립당 국회의원, 무소속 국회의원 |
임기 | 1922년 9월 8일 ~ 1924년 12월 17일 |
대통령 | 이승만 임정 대통령 |
수상 | 신규식 임정 총리 임시 권한대행, 노백린 임정 총리, 김구 임정 총리 임시서리, 이동녕 임정 총리 |
차관 | 정인과 임정 외무부 차장, 박찬익 임정 외무부 차장 |
학력 | |
학력 |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학사 |
기타 | |
관련 인물 | 생육신 |
참고자료 | |
웹사이트 | 孫世一의 비교 評傳 (6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조소앙(趙素昻) 조소앙 - 디지털양주문화대전 조용하(趙鏞夏) 조용하 - 디지털양주문화대전 중국서 여성 독립운동 이끈 조용제 애국지사 조인제(趙仁濟) |
2. 생애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 파주군의 함안 조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이하영 등의 친일 행위에 항의하는 성토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1904년 성균관을 졸업한 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12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에는 유학생 단체인 공수학회, 대한흥학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정미의병 당시에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경신학교, 양정의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하여 임시정부 건국 강령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같은 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고 유럽을 순방하며 독립을 호소했고, 1921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한 후 베이징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만주리 선언”을 발표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설하고 삼균주의에 기반한 “태극기 민족 혁명론”을 제창했다. 1934년에는 삼균주의가 임시정부의 국시로 채택되도록 하였다. 1941년 김구와 함께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고, 1942년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충칭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가했으나 실패 후 김구와 결별하고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으나, 이후 스파이 혐의로 숙청되었다고 전해진다. 1958년 사망했으며, 1970년대 말 평양시 애국렬사릉에 이장되었다.
2. 1. 생애 초기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같은 해 신채호 등과 함께 이하영 등에 대한 항의로 성토문을 작성하였다. 1904년 성균관을 졸업한 후, 대한제국 황실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6년 도쿄에서 유학생 친목 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하여 회보의 발행인 겸 주필을 맡았고, 같은 해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09년 도쿄에 있는 조선인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를 창립하고, 회지 『대한흥학회보』의 주필이 되었다. 정미의병 당시에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긴급 대회를 소집하려 하였으나,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여 회장이 되었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2]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조소앙은 1887년 4월 10일(음력)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에서 함안 조씨 가문의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 사이에서 6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8] 어린 시절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이후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에서 성장하였다.[18]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조부 조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성균관 입학 전까지 사서오경, 제자백가서 등 한학을 공부하였다.
2. 1. 2. 성균관 수학
1902년 조소앙은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여 사서삼경, 중국사, 한국사, 한국지지, 세계사, 세계지지, 산술, 작문 등을 배웠다. 성균관 재학 시 신채호와 교류했으며, 정부가 산림과 천택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것에 반대하여 신채호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항의하였다.그의 맏형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으므로 조소앙은 자연히 국제 정세에 밝게 되었는데, 그의 맏형을 통해서 열강의 동향 등 국제 정세를 비교적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2]
2. 2. 청년기
조소앙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신채호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 등에게 항의하였다. 1904년 성균관을 졸업한 후, 대한제국 황실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이후 일본 유학, 귀국 후 교육활동,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등의 행적은 하위 목차에서 자세히 다룬다.
2. 2. 1. 일본 유학
1904년 11월, 조소앙은 황실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부립 제1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최린, 최남선과 함께 유학 생활을 했다.[19] 1906년에는 유학생 친목 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하여 회보의 발행인 겸 주필을 맡았고, 1909년에는 도쿄에 있는 조선인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를 창립하고 회지 『대한흥학회보』의 주필이 되는 등 일본 유학 시기 조소앙은 유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2]1909년 12월, 일진회 성토문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10년 8월에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합방'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의 윤치호, 함태영, 김규식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19] 1911년에는 조선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되기도 했는데,[2] 이러한 그의 행보는 '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12년 3월,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19]
2. 2. 2. 귀국 후 교육활동
1912년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와 양정의숙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대동법률전문학교와 조선법학전수학교(朝鮮法學專修學校)에도 출강하였다.1913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19]
2. 2. 3.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였다.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과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고,[19]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청년들을 교육했다. 진영사·황각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19]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 박용만 등과 대동단결 운동을 전개하면서 대동단결의 선언을 기초하였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같은 해 삼일운동 후,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한성정부 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2. 3. 독립운동
1913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였다. 신규식, 박은식 등과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청년들을 교육했다. 또, 진영사, 황각 등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19]1915년 민족의 사상적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창시하였다. 단군 왕검의 '독립사상', 불타의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의 '애인여기(愛人如己)', 무함마드의 '신행필용(信行必勇)'을 연결하여 육성 일체를 구상했다.[19] 조소앙은 여섯 종교를 아우르는 것만이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으나,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종교통합을 주장하지 않았다.[17]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선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삼일운동 후,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한성정부 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근대적인 법률 지식과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구축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초대 임시 의정원 의원(경기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19]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조, 창조, 해산, 법통 수호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될 때, 조소앙은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 수호론을 주장하였다.[19]
1930년대 김규식, 김원봉, 김두봉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면서 임시정부 해체 주장이 나왔으나,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2. 3. 1. 임시정부 조직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초대 임시 의정원 의원(경기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19]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회되고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19]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송금, 임시정부 선전, 독립사상 고취 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외 홍보업무를 담당하였다.2. 3. 2. 외교 활동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체(國體)와 정체(政體) 이론 정립 및 대외 홍보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다.[19] 1919년 5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유럽으로 갔으나, 이미 회의가 종료되었으므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1919년 8월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연이어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사회주의국제연맹 총회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석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19] 9월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노동당 인사와 교류하였다. 1920년 2월에는 파리에서 앙리 베르그송을 만났으며, 4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맥켄지를 만나고 노동당의 맥도날드 등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5월에는 덴마크,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방문하고 소련으로 가서 소련 공산당을 방문한 뒤, 소련 내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1921년 3월 모스크바 공산당대회를 참관하고 5월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돌아와 만주리선언을 발표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19] 1922년 국제연맹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좌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2. 3. 3. 임시정부 고수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론, 창조와 해산을 주장하는 창조론,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는 임정수호론이 제기될 때, 조소앙은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정 수호론을 주장하였다.[19]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임시정부로 돌아오지 않는 임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 여론이 일자, 조소앙은 조완구, 최창식 등과 함께 이승만 탄핵을 반대하였다.1925년 3월 이승만이 탄핵되어 면직되자, 조소앙은 1925년 5월 16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무력 쿠데타'를 권유하였다.[21] 그는 또 다른 방안으로 하와이에서 임시 의정원을 소집해 새 정부를 조직하자는 급진적인 '권력 만회 구상'을 펼쳤다.[21]
2. 3. 4. 국무위원 활동 및 무장단체 참여
1926년 이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학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 때,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조로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시하고 이를 당헌과 당강으로 기초하여 통과시켰다.[19]1930년대에도 김규식, 김원봉, 김두봉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면서 임시정부 해체 주장이 나왔으나,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2. 4. 일제 강점기 후반
1919년 2월 1일, 조소앙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같은 해 삼일운동 후,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한성정부의 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근대적인 법률 지식과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힘썼다.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정치·경제·교육에 있어서 기회균등을 주장하는 삼균주의한국어 이념을 바탕으로 초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하여 임시정부 건국 강령의 이론적 근거로 채택되었다.[2] 같은 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였고, 그 후 유럽을 순방하였다. 1921년 국제 사회당 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후, 5월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베이징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만주리 선언”을 발표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22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 의장, 세계한인동맹회 회장을 역임하고,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하였다.1930년, 이동녕, 이시영, 김구, 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설하고, “삼균주의”에 입각한 “태극기 민족 혁명론”을 제창하였다.[2] 이후 한국독립당의 대외 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 전개와 외교 문제를 거의 전담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강령”을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41년12월 10일 김구 주석과 연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2년 중화민국 외교부장 손과와 협력하여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고,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 충칭 임시정부 외무부장이 되었다. 또한 김구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다.[2]
2. 4. 1. 민족유일당 운동
1933년부터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운동에 가담하였다.[19] 1934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고,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19]2. 4. 2. 임시정부 재입각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재건파 3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을 재창립할 때 조소앙은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임시정부가 쓰촨성 충칭으로 옮긴 뒤, 9월 초 조소앙은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2]2. 4. 3. 광복군 창설과 외교 활동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하였고, 9월 17일 조소앙은 자신이 친히 작성한 한국 광복군 포고문을 발표하였다.[24] 1941년 12월 9일 '대일본선전포고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초안을 작성, 발표하였다.1942년 2월 12일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 대사 클라렌스 가우스(Clarence E. Gauss)를 방문하였다. 조소앙은 이 자리에서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쉽게 승인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패배한 뒤 한국을 다시 중국의 종주권 안으로 넣으려는 속셈으로 파악하였다고 밝혔다.[24] 11월 24일 조소앙은 가우스와의 대화에서 중국은 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강요한 준승안에 분개하여 정부를 워싱턴으로 옮길 것을 검토한다고 알려주었다. 동시에 인도에 사람을 파견하였고 이승만과도 연락을 취하였다.[25]
1944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으로 재선되었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명의로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2. 4. 4. 광복과 귀국
1945년 11월 23일 조소앙은 임시정부 환국요인 1진으로 귀국하였다.[26] 1945년 12월 30일 김구, 신익희 등과 함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1일 오전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을 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2. 5. 해방 후
1945년 해방 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여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어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되어 국민회의로 개편된 후,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반탁투쟁 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이후 김구 등과 함께 국제연합 신탁통치 반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외치며 1948년 4월 평양으로 가서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 1948년 12월, 방응모, 백홍균, 조시원 등과 함께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를 역임하였다.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인 3만 4천여 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 연행되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집행위원, 상무위원에 추천되었으나,[9] 이후 스파이 혐의로 숙청·투옥되었다고 한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하였고, 1970년대 말 평양시 애국렬사릉에 이장되었다.[2]
참고로, 이승만 정권 시대, 조소앙은 북한의 대남 스파이 공작과 이승만 등 요인에 대한 암살 계획의 총책임자로 여겨졌다.[10][11]
2. 5. 1. 광복 직후
1946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에 재선임되었다. 1월 이승만이 미국에 갈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27] 이승만의 단정 수립을 위한 미국 외교 설득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 성금 모금운동을 진두 지휘하여 이승만의 워싱턴 방문 여비를 마련하였다.'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27]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을 조선의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27]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조성환, 김성수와 함께 반탁국민회 공동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28] 그는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국민의회 상무위원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고,[29]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30]
2. 5. 2. 각정당협의회 조직
1947년 말,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내의 진보파와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중도파와 협력하여 각정당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남북대표 회담은 물론 유엔과의 협의도 중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김구 계열에 의해 좌절되었다.[26]1947년 한국독립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호응하기 위해 산하 각정당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각정당협의회는 사실상 조소앙이 지도하였다. 1947년 11월 18일, 한독당 각정당협의회는 유엔총회에서의 한국 문제 결의를 비판하고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병과 남북회담의 촉진을 주장하는 비교적 장문의 공동 담화를 발표하였다.[33] 그러나 11월 19일, 김구는 한독당 당무위원회에서 각정당협의회의 활동을 보류시키도록 지시함으로써 각정당협의회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였다.[33]
한독당에서는 김구의 보류 조치에 반발하는 인사들을 제명 처분하였다. 이때 한독당의 일부 인사는 테러를 당했고, "각 정당협의회를 추진하는 것은 조소앙 선생 지도하에 당을 분열하려는 것"이라는 증언을 강요받았다고 한다.[33] 이를 계기로 조소앙은 한독당 내에서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2. 6. 장덕수 암살과 정계 은퇴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암살되자, 한국독립당 당원 배희범과 박광옥이 체포되었다. 이들의 배후로 김석황, 조상항 등이 체포되었고, 12월 20일 조소앙은 군정청 경찰에 연행되었다.[34]허정은 조소앙에게 '왜 설산을 죽였소'라고 항의했으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으로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다.[34]
12월 20일 조소앙은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환되었고, 비판 여론이 조성되었다. 같은 날 조소앙은 정계 은퇴 성명을 냈다.[35] 서중석은 장덕수 암살 연루 의혹이 정계 은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33] 그러나 1948년 1월 남북협상 참가를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2. 7. 정부 수립 이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된 후,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여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어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2] 비상국민회의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되어 국민회의로 개편된 후,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반탁투쟁 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 이후 김구 등과 함께 국제연합 신탁통치 반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외치며 1948년 4월 평양으로 가서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1948년 12월, 방응모, 백홍균, 조시원 등과 함께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2]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 연행되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집행위원, 상무위원에 추천되었으나,[9] 이후 스파이 혐의로 숙청·투옥되었다고 한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하였고, 1970년대 말 평양시 애국렬사릉에 이장되었다.[2]
이승만 정권 시대, 조소앙은 북한의 대남 스파이 공작과 이승만 등 요인에 대한 암살 계획의 총책임자로 여겨졌다.[10][11]
2. 7. 1. 남북협상 참가
1948년 1월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2월부터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26]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 참가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인 신익희와 김성수, 그리고 이승만이 방북을 만류하였으나, 조소앙은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김규식과 함께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5월 조소앙은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며, 북한은 병영국가화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시하게 된다.[36] 38선을 넘어 여현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남북협상은 완전히 실패다. 이북에 가보니까 김일성이 군사세력을 가지고 완전히 자기 독재정권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조소앙은 김일성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김일성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단독정권을 세울 준비를 다 끝냈는데, 단독정부 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니, 우리가 완전히 이용당한 것이다."라고 하였다.[37]
남북협상 실패 직후 조소앙은 김구와 남북협상 실패 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분열하게 되었다.[37] 결국 조소앙은 김구와 결별하고 임정의 한국독립당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당을 창당하였다.[37]
2. 7. 2. 김구, 김규식과 결별, 사회당 창당
1948년 5월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한 조소앙은 자신의 주변에 심어졌던 조선공산당의 프락치들을 내쫓아버린다.[39] 1948년 5월 조소앙은 단독정부 지지 성명을 발표한다. 조소앙은 공산당의 프락치들을 축출하고 우익 정치인임을 스스로 주장하고, 반공주의적인 입장을 천명하였음에도 공산당원이 그의 주변에 있었던 것 때문에 공산당이라는 꼬리표가 1975년 무렵까지 그를 따라다녔다.박갑동은 당시 조소앙의 주변에 심어진 조선공산당 첩자의 존재를 증언하였다. 박갑동에 의하면 '조소앙 선생의 비서 중에 김흥곤(金興坤)이라는 전남 광산 사람이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다.'[39] 박갑동은 '내가 그분한테 빠져 삼선교 앞에 있는 조소앙 선생의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고[39] 회고하였는데, 공산당의 당원이었던 박갑동조차 김흥곤이 공산당에서 심은 프락치인 것을 모를 정도로 속았다고 한다.
1948년 12월, 방응모한국어, 백홍균, 조시원 등과 함께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2]
2. 7. 3. 정치 활동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총격을 받고 피살되자 김구를 추모하는 논평을 발표하였고, 김구의 국민장 장의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김구의 국민장 기간 10일간 오세창, 김규식 등과 함께 상을 주관하였다.[41]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였다. 상대는 민주국민당의 조병옥 후보였다. 조병옥은 경찰을 동원하여 조소앙 측 선거운동원 83명을 구금하는 등 압력과 테러를 가했다.[42] 선거 전날에는 조소앙이 월북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42] 이에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 확성기를 단 지프차로 지역구를 돌며 건재함을 알렸다.[42] 선거 결과, 조소앙은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42]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조소앙은 피신 연락을 받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2. 8. 생애 후반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그해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어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되어 국민회의로 개편된 후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반탁투쟁 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2]이후 김구 등과 함께 국제연합의 신탁통치 반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외치며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2월, 방응모, 백홍균, 조시원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를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납북되었다.[2]
2. 8. 1. 납북 이후
1955년 납북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을 추진하였고, 북한에서도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납북 인사들의 독자적 평화통일운동을 추진하려 노력하였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40]2. 8. 2. 최후
1958년 9월 북측이 '엄항섭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9월 10일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2] 그의 사망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며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설, 타살설, 질병에 의한 돌연사설 등이 전하고 있다.일각에서는 투신자살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2002년 조소앙의 비서로 지냈던 김흥곤이 '와전된 얘기'라면서 부인했다.[43] 19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44]
3. 사상·종교적 측면
조소앙은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 창시자였다.[2] 성균관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는, 근대적 법률 지식과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특히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하는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917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 사회당 대회에 조선의 의제를 제출하고, 육성교, 주권 불멸론, 민권 민유론 등을 제창하였다.[2]
1941년12월 10일에는 김구 주석과 연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 1. 삼균주의
조소앙은 1930년대 초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추구한다. 이는 보통선거를 통한 정치 권력의 균등 분배, 국유제를 통한 경제적 균등, 국비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 기회의 균등을 의미한다.[46] 조소앙은 각 아이에게 우유 한 병을 제공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박갑동은 삼균주의를 조소앙의 정치 철학[39]이라 평가했으며, 삼균주의는 '한독당과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39]'고 한다.1930년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국민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 민족, 국가 간의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 간의 평등은 자유롭고 평등한 선거를 통해, 민족 간의 평등은 동등한 경제 발전과 교육 기회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 발전을 위해 의회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 체제, 토지 병합, 시설/기관의 생산, 의무 교육 제도의 실행을 주장했다. 1941년,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가 재건의 기본 통치"로 채택되었다. 이 이론은 한국독립당을 이끄는 데 기여했으며, 해방 후 국가 입법의 주요 기초가 되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강령”을 채택하게 하였다.
3. 2. 종교 활동
조소앙은 육성교를 창시하여 종교, 사상적 활동을 하였다. 단군의 독립사상, 석가의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의 애인여기(愛人如己), 무함마드의 신행필용(信行必勇)을 두루 본받자는 것으로 여러 종교 사상의 융화, 융합을 추진하였다.[2]4. 평가
조소앙은 합리주의자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39]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작성, 기초하여 1919년 2월 1일에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다.[39]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월북자의 가족, 측근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차별과 냉대를 받아야 했다.[39] 광복군으로도 활동했던 셋째 아들 조인제는 월북인사의 아들이라는 낙인 때문에 번번이 취직에 실패하였다.[39] 셋째 며느리인 안종덕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39] 조소앙 주변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기생한 것 역시 그를 공산당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됐다.[39]
1970년대부터 복권 여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과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것이 자발적 월북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복권 시도가 추진되었다.[39] 이후 복권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 조소앙 주변에 있었던 박갑동 등의 증언에 의해 공산당이 그의 주변에 첩자를 심어두고 정보를 빼내고, 그를 기만했음이 알려지면서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되었다.[39] 박갑동은 '그 양반은 풍채도 좋을 뿐더러, 한독당의 이론가[39]'라고 하였다. 박갑동은 그가 '신·구 학문을 철저히 공부하여 국제문제와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임정에서 제일가는 분이었습니다.[39]'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정치인 이철승에 의하면 '조소앙은 그야말로 명분주의자였고,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분이었습니다.[47]'라는 평을 내렸다. 또한 이철승은 그가 '선생은 이론과 명분, 지조가 있는[47]' 인물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조성룡 | |
아버지 | 조정규 | |
어머니 | 박필양 | |
형 | 조용하 | 독립운동가 |
동생 | 조용주 | 독립운동가 |
동생 | 조용한 | 독립운동가 |
동생 | 조용원 | 독립운동가, 안춘생의 장인 |
동생 | 조용진 | 독립운동가 |
부인 | 오영선 | |
장남 | 조시제 | 독립운동가, 김창만에게 암살됨[48] |
차남 | ||
삼남 | 조인제 | 독립운동가, 광복군 총사령부 참령 역임[49] |
자부 | 안종덕 | |
손자 | 조성기(趙成基) | |
첩실 | 최경록(아명 최형록) | |
장녀 | 조계림(趙契林) |
조소앙의 가계는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형 조용하, 동생 조용주, 조용한, 조시원, 조용진 등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아들 조시제는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다 김창만에게 암살되었고,[48] 셋째 아들 조인제는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가 오광선은 조소앙의 부인 오영선의 사촌이었다.
6. 상훈
- 198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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