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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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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비(劉濞)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오(吳)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196년 영포의 반란 진압에 기여하여 오왕에 봉해졌으나, 고제는 그의 모반할 상을 경계했다. 유비는 구리와 소금 자원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며 민심을 얻었다. 경제 때 조조의 제후왕 세력 약화 시도에 반발하여 다른 제후들과 함께 반란(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아부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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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오왕)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 (한자)劉濞
이름 (로마자 표기)Ryu Ppi
가문유씨
아버지유희, 대나라 경왕
어머니정보 없음
작위 정보
작위오왕
재위 시작기원전 195년 11월 30일
재위 종료기원전 154년
이전없음
이후없음
패후 정보
작위패후
재위 시작기원전 196년
재위 종료기원전 196년 11월 30일
이전없음
이후없음
생애 정보
출생기원전 216년
사망기원전 154년 (61-62세)
자녀유현, 오나라 태자
유자화
유구

2. 생애

기원전 196년, 유비는 20세의 나이로 패의 후작으로 봉해졌다. 그는 영포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기병 장군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11월 30일,[2] 고황제는 오 지역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유비를 오왕으로 임명했다.[3]

문제 재위 시절, 유비의 아들 유현과 태자 유계(훗날 한 경제)는 육박 놀이를 하다가 다툼을 벌였다. 유계는 육박판으로 유현을 죽였고, 이 일로 유비는 황제에게 앙심을 품고 불신을 키웠다. 이후 유비는 자신의 영토에서 재산과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 문제는 자신의 아들이 유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 유비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다.[4]

태자 유계가 황위에 올라 한 경제가 되자, 조조의 건의에 따라 한 경제는 지방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려 했다. 기원전 154년, 유비는 다른 여섯 제후들을 설득하여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오초칠국의 난의 시작이었다. 황제는 주아부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유비의 군대를 격파했다. 유비는 전투 중에 사망했고, 그의 작위는 폐지되었다.[1]

2. 1. 오왕 책봉

기원전 196년, 영포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유비는 오왕에 책봉되었다.[2][3] 당시 20세였던 유비는 기병 장군으로서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제는 오나라 지역에 대한 걱정이 커, 유비를 오왕으로 임명하여 동양, , 3개 군과 53개 성을 다스리게 했다.

고제는 유비에게 모반의 상이 있다며 경계했지만, 이미 임명한 후였기에 50년 후에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유비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나라는 구리소금 생산으로 부유했다. 유비는 세금을 면제하고,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자들을 받아들이는 등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장군(鄣郡)에서 구리가 났고, 유비는 망명자들을 모아 돈을 만들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기에 세금을 거두지 않아도 나라 살림이 넉넉하였다.

2. 2. 문제와의 갈등

문제 때, 오나라 태자 유현(劉賢)이 황태자 유계육박을 두다가 다툼이 벌어졌다. 유현의 스승들은 초나라 출신으로 경박하고 사나웠으며, 유현 또한 교만했다. 수를 다투는 과정에서 유현이 오만하게 굴자, 유계는 육박판을 유현에게 던져 그를 죽이고 말았다.[4] 유비는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시신을 장안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했다. 이후 유비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으며 제후로서의 예를 소홀히 했다.

조정에서 조사한 결과 유비의 병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오나라 사자들은 벌을 받았다. 유비는 더욱 두려워하며 음모를 꾸몄다. 조정에서 사자를 문책하자, 사자는 "한나라에서 사신을 잡아 두고 문책하였기 때문에, 왕께서는 병이라 일컬은 것입니다."라고 변명하며, 유비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다.[2]

문제는 사자들을 풀어주고 유비에게 안석(安席)과 지팡이를 하사하며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유비는 죄를 용서받아 음모를 중단하는 듯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구리와 소금이 풍부하여 세금을 거두지 않았고, 병역 대신 돈을 받는 등 독자적인 정책을 펼쳤다. 유비는 인재를 우대하고 도망자들을 숨겨주는 등 40여 년간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며 세력을 키웠다.[3]

2. 3. 오초칠국의 난

조조는 한 문제 때부터 오나라의 봉지를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경제 즉위 후 어사대부로 승진한 조조는 다시 오나라 봉지 삭감을 주장했고, 결국 한나라 조정은 오나라의 봉지를 깎는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유비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1]

유비는 교서유앙을 포섭하기 위해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를 보냈고, 유앙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유비는 직접 교서로 가 유앙에게 약속을 받고, , 치천, 교동, 제남, 제북나라와도 맹약을 맺었다.

당시 봉지를 깎이는 벌을 받은 제후들은 조조를 원망하고 있었다. 오나라의 회계예장을 깎는다는 조서가 도착하자, 유비는 먼저 병사를 일으켰다. 교서나라, 교동, 치천, 제남, , 조나라도 한나라 관리들의 목을 베고 병사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제효왕은 반란에 협조하지 않았고, 나중에 교서, 교동, 치천나라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자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후회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북왕 유지는 성이 무너져 병사를 일으키지 못했다.[1]

유비는 스스로를 '동제(東帝)'라 칭하며 한나라에 맞섰다. 반란군의 총수는 70만 명이 넘었고, 오나라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초기에는 반란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조정은 조조를 처형하여 반란군의 결속에 균열을 일으켰고, 주아부를 대위로 임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주아부는 반란군의 보급로를 파괴하는 작전을 펼쳤고, 정면의 양(梁)을 지키는 경제의 친동생 양왕 유무에 의해 발이 묶인 반란군은 보급과 결속에 문제를 겪으며 기세를 잃었다.

결국 유비는 주아부의 거점에 직접 공격을 가했으나 대패했고, 오군은 괴멸했다. 유비는 동구왕에게 도주했지만, 동구왕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유비의 죽음으로 오초칠국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한 왕조는 중앙 집권화를 더욱 추진하게 되었다.[1]

3. 가계

유비 (오왕)의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유희
동생유광
아들유현
아들유자구
아들유자화


3. 1. 부모

유희 (고조 유방의 형)의 장남이다. 동생은 유광(덕애후)이다.

3. 2. 형제

유희(유방의 형)의 장남이다. 동생으로는 유광(덕애후)이 있다. 아버지 유희가 대를 침공한 흉노로부터 도망쳐 합양후로 강등된 후, 유비는 패후에 봉해졌다.[1]

3. 3. 자녀


  • 유현
  • 유자구
  • 유자화

4. 평가

유비는 오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오나라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구리와 소금의 판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나라 살림을 넉넉하게 유지했다.[4] 심지어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할 때 오히려 품삯을 지급할 정도였다.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받아들여 돈을 위조하게 하는 등, 조정에서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력을 자랑하게 되었다.[2]

그러나 유비는 지나친 자만심과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결국 반란을 일으켜 몰락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유현(劉賢)이 한나라 태자 유계(劉啓, 훗날 한 경제)와의 육박 놀이 중 살해당한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4] 한 문제는 자신의 아들이 유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 유비의 공격적인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지만, 유비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한 경제 즉위 후, 조조의 건의에 따라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이 추진되자 유비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기원전 154년, 다른 여섯 제후왕들을 설득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1] 유비는 스스로를 한(漢)의 동제(東帝)라 칭하며 한나라에 맞섰으나, 주아부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패배하고 동월로 도망쳤다가 살해당했다.

오초칠국의 난은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오초칠국의 난을 다룬 한국의 역사 소설, 드라마, 영화 등에서 유비는 대체로 야심만만하고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고 반란을 주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참조

[1] 서적 Book of Han http://zh.wikisource[...] 2011-06-16
[2] 문서
[3] 서적 Book of Han http://zh.wikisource[...] 2011-06-16
[4]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zh.wikisource[...] 2011-07-12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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