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 (회남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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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장(劉長)은 전한 고제의 아들로, 회남왕으로 봉해졌다. 그는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생모가 일찍 죽고 여후의 손에서 자랐다. 영포의 반란 이후 회남왕이 되었지만, 교만하고 법을 어기는 행동을 보였다. 심이기 살해 사건과 반란 모의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망했다. 사후에는 아들들이 열후에 봉해지고, 회남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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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 (회남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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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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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장(長) |
시호 | 여(厲) |
작위 | 회남여왕(淮南厲王) |
생몰 기간 | 기원전 222년 ~ 기원전 174년 (향년 48세) |
출생지 | 패현(沛縣) |
사망지 | 옹(雍) |
부모 | 유방 & 조희 |
가족 관계 | |
형제 | 유비 유항 유회 유건 유여의 유홍 유교 |
자녀 | 유안 유발 유사 유량 |
생애 | |
주요 사건 | 회남왕 즉위 모반 혐의로 폐위 및 유배 |
2. 생애
유장은 유방의 서자이자 문제의 이복동생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기원전 199년, 유방이 조나라를 방문했을 때 조왕 장오가 바친 후궁 조씨에게서 태어났다.[1] 그러나 조씨는 장오의 신하 관고 등이 고제 암살을 모의한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유장을 낳은 후 자결했다.[1] 어머니를 잃은 유장은 여후의 손에서 자랐다.[1] 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장은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2]
유장은 성장하면서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여씨의 난을 거쳐 문제가 즉위하자, 자신이 문제와 가장 가까운 황족임을 내세워 교만하게 행동하고 법을 어기는 일이 잦았으나, 문제는 유장을 용서하였다.[2]
기원전 177년, 유장은 장안에 들어가 생모 조희를 구명하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심이기를 살해했다.[2] 유장은 심이기가 여후에게 조씨를 변호하지 않은 점, 조왕 유여의 모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때 방관한 점, 여후가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할 때 반대하지 않은 점을 들어 그를 비난했다. 그는 쇠망치로 심이기를 직접 때려 죽이고, 종자 위경에게 심이기의 목을 베게 했다. 문제는 유장의 심정을 이해하고 처벌하지 않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박태후, 황태자, 대신들은 유장을 꺼리게 되었다.
기원전 174년, 유장은 시기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문초를 받았다.[1] 승상 장창 등은 유장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상주했으나, 문제는 차마 유장을 죽이지 못하고 촉군으로 유배를 보냈다.[1] 원앙은 유장이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며, 문제는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라고 경고했다.[1] 그러나 문제는 유장을 잠시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면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답했다.[1] 하지만 유장은 "나는 자만심에 빠져 간언도 듣지 않고 이런 지경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굶어 죽었다.[1] 문제는 뒤늦게 후회하며 유장을 옹현에 장사 지내고 묘지기 30호를 두었다.[1]
기원전 172년, 문제는 유장의 아들 4명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4] 기원전 168년에는 유장에게 '여'(厲)라는 시호를 내리고,[4] 그의 아들들에게 회남 땅을 나누어주어 다시 나라를 세우게 했다.[4]
2. 1. 불우한 출생과 성장
기원전 199년, 유방이 조나라를 방문했을 때 조왕 장오가 바친 후궁 조씨에게서 유장이 태어났다.[1] 조씨는 고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장오의 신하 관고 등이 고제 암살을 모의한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1] 조씨는 유장을 낳은 후 자결했고,[1] 유장은 여후의 손에서 자랐다.[1]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장은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2] 유장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여후와 혜제와 가까이 지냈기에 여후 집권 시기에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2]
2. 2. 교만과 법률 위반
문제 즉위 후,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가장 가까운 황족임을 내세워 교만하게 행동하고 법을 어기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문제는 유장을 용서하였다.[2] 유장은 성장하면서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2. 3. 심이기 살해 사건
기원전 177년, 유장은 장안에 들어가 과거 자신의 생모 조희를 구명하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심이기를 살해했다.[2] 유장은 심이기가 여후에게 조씨를 변호하지 않은 점, 조왕 유여의 모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때 방관한 점, 여후가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할 때 반대하지 않은 점을 들어 그를 비난했다.유장은 쇠망치로 심이기를 직접 때려 죽이고, 종자 위경에게 심이기의 목을 베게 했다.
문제는 유장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박태후, 황태자, 대신들은 유장을 꺼리게 되었다.
2. 4. 반란 모의와 유배
기원전 174년, 유장은 시기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문초를 받았다.[1] 승상 장창 등은 유장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상주했으나, 문제는 차마 유장을 죽이지 못하고 촉군으로 유배를 보냈다.[1]원앙은 유장이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며, 문제는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라고 경고했다.[1] 그러나 문제는 유장을 잠시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면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답했다.[1]
하지만 유장은 "나는 자만심에 빠져 간언도 듣지 않고 이런 지경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굶어 죽었다.[1] 옹현(雍縣)에 이르러서야 현령이 수레의 문을 열어보고 문제에게 소식을 알렸다.[1]
문제가 원앙에게 자문을 구하니, 원앙은 승상과 어사대부를 죽여 천하에 사죄할 것을 권하였다.[1] 문제는 대신에 수레를 확인하지 않은 자, 음식을 보낸 자, 시중든 자를 모두 잡아들여 기시하도록 하였고, 유장을 옹현에 장사 지내고 묘지기 30호를 두었다.[1]
2. 5. 죽음과 사후
기원전 174년, 유장은 반란 모의가 발각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원앙은 유장이 유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문제는 유장이 반성하기를 기대했다.[2] 그러나 유장은 굶어 죽었고, 문제는 크게 후회했다.[3] 문제는 원앙의 조언에 따라 승상과 어사대부를 처벌하는 대신, 유장의 호송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을 기시하고 유장을 옹현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묘지기 30호를 두었다.[3]기원전 172년, 문제는 유장의 아들 4명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4] 기원전 168년에는 유장에게 '여'(厲)라는 시호를 내리고,[4] 그의 아들들에게 회남 땅을 나누어주어 다시 나라를 세우게 했다.[4]
3. 가계
유장은 고제 유방과 장오의 첩이었던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199년, 유방이 조나라를 방문했을 때 장오가 조씨를 바쳤고, 유장을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오의 신하들이 고제 암살을 시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유장을 낳은 후 자결하였다.[1]
3. 1. 자녀
4. 평가
유장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성장하면서 권력을 남용하고 교만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권력자의 오만함과 그로 인한 몰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어머니 조희(趙姬)는 아버지 유방에게 헌상되어 총애를 받았으나, 조왕의 신하들이 고조 암살 계획을 세운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유장은 이 때 태어났다. 조희는 유장을 낳은 후 자결하였고, 유장은 여후(呂雉|여치중국어) 손에 자랐다.
기원전 196년,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장은 후임 회남왕으로 선택되었다. 유장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여후와 혜제를 따랐기 때문에, 유방의 아들들이 살해된 여후 시대에도 재앙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돕지 못한 심이기를 원망하며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성장하여 여씨의 난을 거쳐 문제가 즉위하자, 문제의 가장 가까운 친족임을 내세우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며 법을 따르지 않았다. 기원전 177년에는 심이기의 집을 찾아가 쇠망치로 때려 죽이고, 종자에게 목을 베게 했다. 문제는 유장의 심정을 가엾게 여기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였기 때문에 용서하고 처벌하지 않았다.
귀국한 유장은 더욱 오만해져서 한나라 법률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만들었으며, 천자의 제도를 참칭하며 불손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기원전 174년에는 시기 등과 반란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어 심문을 받았다. 결국 유장은 왕위를 폐위당하고 촉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나는 자만심에 빠져 간언도 듣지 않고 이런 지경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촉으로 호송되는 수레 안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대로 사망했다.
5. 기타
유장은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모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심이기를 살해했다.[2]
참조
[1]
서적
史記列伝
史記
[2]
문서
유여의와 척씨를 뜻함
[3]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이 봉해진 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4]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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