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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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규경은 19세기 조선의 학자로, 평생 저술 활동에 힘썼으며, 특히 60권에 달하는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여 19세기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천문, 지리, 역사, 문학, 종교, 서화, 풍속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조부 이덕무, 부친 이광규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실학 사상을 계승했으며, 서양의 과학 기술에도 관심을 갖고 관련 저술을 남겼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통해 실학 발전에 기여했고, 초기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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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경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이규경 |
한자 이름 | 李圭景 |
호 | 오주 (五洲), 소운거사 (嘯雲居士) |
자 | 백규 (白珪) |
관련된 인물 | 이덕무(李德懋), 이광규(李光葵) |
저서 | |
주요 저서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2. 생애
이규경은 평생 저술에 힘썼으며 19세기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을 듣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출간하였다. 친조부 이덕무처럼 학자로서 활동적이던 이규경은 벼슬에는 전혀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한국과 중국의 많은 서적을 읽고 천문·지리·역사·문학·종교·서화·풍속 등 모든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서종박물고변》 등의 업적을 남겼다.[7]
이규경의 학문은 그의 가문 배경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 이덕무는 학식이 깊고 자유학파에 정통하였다. 그의 저술은 민심과 사회상을 상세히 묘사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자, 책의 편찬, 교정, 필사를 담당하는 겸서관(檢書官)으로 유명한 학자들을 등용하였는데, 이덕무는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4대 겸서로 불렸다. 이덕무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규장각에서 책을 편찬할 때마다 참여하였다. 그의 아들 이광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겸서관이 되어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봉직하였다. 이규경은 이러한 가풍과 당시 유행하던 청나라의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1]
2. 1. 가학 배경
이규경의 학문은 그의 가문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조부 이덕무는 학식이 깊고 자유학파에 정통하였으며, 민심과 사회상을 상세히 묘사하는 새로운 문체를 창조했다.[1]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자,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와 함께 4대 겸서관으로 불리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1] 이규경의 부친 이광규 역시 겸서관으로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봉직하였다.[1] 이러한 가풍과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청나라의 실학 사상이 이규경의 학문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2. 학문 활동
이규경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많은 서적을 읽고 천문, 지리, 역사, 문학, 종교, 서화, 풍속 등 다양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였다.[2] 특히 19세기 중엽, 주자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학문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발맞춰, 백과사전식 연구와 박물학적 학문 방법을 도입하여 실학 발전에 기여했다.[2]이규경은 당시 사회와 학계를 지배하던 유학의 인식론적 개념인 주자학의 학문 방법 “격물치지(格物致知)”로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였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주자학적 학문 방법은 구체적인 정보 획득과 다양한 현상 해석에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국가 주도의 광산 개발 사업이 민간 부문으로 확대되면서, 사회 주도적 산업 영역이 확장되었고, 사회 문제 인식 주체의 인식 기준 전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백과사전식 연구 추구와 실학자들의 박물학적 학문 방법 도입은 당시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을 주목하며 다양한 학문적 전환점을 제시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2]
이규경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박물학으로 정의하고 이를 지속하였다. 그의 박물학은 단순히 “방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과 문제를 정확하고 견고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하였다.[2]

이규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서적과 독서 필기를 바탕으로 폭넓은 학문 세계를 개척하였다. 1800년부터 1855년까지 꾸준히 저술 활동을 했으며, 특히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50년에 걸쳐 집필된 대작으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였으며, 19세기 전반과 중반의 서적들을 대표한다.
그의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시가점등』(詩家點燈): 조선과 중국의 시인과 시에 대한 기록 모음
- 『남교역고』(南交繹考): 조선과 안남(베트남) 간 무역 기록
- 『보제기서』(普濟奇書): 기근 구제 기록 모음
3. 업적
3. 1. 《오주연문장전산고》 편찬
이규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서적과 독서 필기를 바탕으로 폭넓은 학문 세계를 개척하였다. 1800년부터 1855년까지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5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이규경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대작으로, 19세기 전반과 중반의 서적들을 대표한다.이규경의 저서 목록을 보면 그의 관심 분야가 매우 넓었고, 실용적인 책 편찬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초기 유행했던 실학 서적들을 후대가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문 기술 서적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책들도 정리하여 정보의 집적과 과학적 분석 방법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3. 2. 실학 사상의 발전
이규경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학문 방법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한 실학자이다.[2] 할아버지 이덕무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여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탐구하는 데 힘썼다. 농업 생산성 증가와 상업 및 수공업 발전으로 인해,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 국가 주도의 광산 개발 사업이 민간 부문으로 확대되면서, 사회 주도적 산업 영역이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 문제를 인식하는 주체의 인식 기준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2]이규경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박물학으로 정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과 문제를 정확하고 견고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하였다.[2]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서적과 독서 필기를 바탕으로 폭넓은 학문 세계를 개척하였으며, 1800년부터 1855년까지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50년에 걸쳐 집필된 대작으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였으며, 19세기 전반과 중반의 서적들을 대표한다.
3. 3. 과학 기술 도입
이규경은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책들을 통해 지식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 기술 관련 저술을 남겼다.- 《심유방》(心遊方): 동서양의 선박에 관한 책이다.
- 《오주서종》(五洲書種): 화공(火攻) 및 수공(水攻) 전술을 다룬 책이다.
- 《이가도서약》(李家圖書約): 물레방아, 증기선, 수레, 도량형에 대한 삽화를 모은 책이다.
이러한 저술은 조선 사회에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소개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4. 저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오주서종박물고변》, 《오주서종신기화법(五注書種神機火法)》 등 약 20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였다.[3] 《오주연문장전산고》는 60권 분량의 백과사전으로, 전통적인 유교보다는 실용적인 서적 편찬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지식을 집대성하였다.[3]
5. 평가
이규경은 할아버지 이덕무가 이룩해 놓은 실학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실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4] 19세기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비롯한 다양한 전문 서적을 편찬하여 한국 학문의 지평을 넓혔다. 성리학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자유롭게 연구, 분류, 기술함으로써 고문헌 연구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4] 이규경이 제시한 새로운 지식과 혁신적인 사상은 초기 개화 사상가들에게 진지하고 절실하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1]
6. 가계
이덕무(1741년 ~ 1793년)의 손자이자 이광규(1765년 ~ 1818년)의 아들이다. 본처는 함안 조씨(1786년 ~ 1833년)로 조수진의 딸이며, 장자는 이종효(1813년 ~ 1877년)이고 며느리는 연일 정씨로 정긍환의 딸이다. 장녀는 전주 이씨이며 사위는 황제(黃稊)의 아들 창원 황씨이다.[8] 서자 이종영(1838년 ~ 1881년)은 이규락에게 양자로 갔다. 이종영의 처는 청송 심씨로 심계남의 딸이며, 손자는 김익한(1869년 ~ ?)이고 손자며느리는 밀양 박씨로 박홍근의 딸이다. 남동생으로는 이규정(1796년 ~ 1834년), 이규달(1801년 ~ 1860년)이 있다.
7. 이규경을 연기한 배우
7. 1. TV 시리즈
이낙훈은 문화방송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1990년)에서 이규경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이규경은 조연으로 등장한다.참조
[1]
간행물
‘Yi Gyugeong’
https://encykorea.ak[...]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7
[2]
논문
‘Characteristics of 『O-ju Seojong Bakmul Gobyun』 and Lee Kyu-Kyung"s perspective of Bakmul’
http://www.dbpia.co.[...]
2017
[3]
논문
『성호사설』과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술성향 비교검토
https://www.earticle[...]
2011-12-04
[4]
서적
Oju-Yeonmunjangjeon-Sango: All creation - Insect and Fish
Korea National Maritime Museum
2019
[5]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6]
웹사이트
http://www.donga.com[...]
[7]
웹사이트
http://www.donga.com[...]
[8]
문서
이름 미상이다. 족보에 성과 본관, 부친 이름만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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